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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1:34:00

헤이젤 참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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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SLB 1962 SLB 1963 ACM 1964 INT 1965 INT
1966 RMA 1967 CEL 1968 MUN 1969 ACM 1970 F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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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BAY 1977 LIV 1978 LIV 1979 NFO 1980 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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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헤이젤 참사.jpg

1. 개요2. 사건의 전개3. 경기 결과4. 사건 이후5. 관련 문서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Heysel Stadium Disaster

1985년 5월 29일 벨기에 브뤼셀 에이젤(영어로 헤이젤)에 위치한 스타드 루아 보두앵[1]에서 일어난 훌리건 난동으로 인한 혼란에 구조물이 무너져 39명이 숨지고 6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은 사건.

폭력 사건이기 때문에 '헤이젤 폭동'이라고도 불린다. 힐스버러 참사와 더불어 리버풀 구단과 팬들의 가장 큰 흑역사로 기억되는 사건이다.

2. 사건의 전개

당시 유럽 프로축구는 독일 분데스리가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잉글랜드의 풋볼 리그 디비전 1[2]이탈리아세리에 A가 세계 최고의 리그 자리를 놓고 다투던 상황이었다. 1984-85 시즌 유러피언컵[3] 결승에서 두 리그를 대표하는 양대 거두인 리버풀 FC유벤투스 FC가 만났다.

리버풀의 팬들은 당시 훌리건으로 유럽 대륙에 악명을 떨쳤고 유벤투스의 팬클럽 울트라스도 그에 못지않았다. 거기다 결승전이 벌어지는 보두앵 경기장은 1930년에 지은 낡은 구장이라 안전상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사건은 예견된 셈이었다. 특히 양 서포터들의 구역을 가로막는 벽도 없었고 출입구도 별로 없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eysel_plan.png

경기 전부터 이미 서포터 배치에 문제가 있었다. X 구역과 인접한 Z 구역에 중립 팬들이 자리잡을 예정이었지만 여기에 유벤투스 팬들이 뒤섞였다. 특히 X구역과 Z 구역 사이의 경계에는 격리벽이 없고 쇠로 된 자그마한 경계 울타리와 경찰들로 이루어진 경계선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양 서포터들은 서로를 야유하며 돌팔매질을 하였다.

경기가 시작되자 서포터들이 서로에게 돌팔매질을 더욱 심하게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흥분한 리버풀 팬들이 울타리와 경찰을 넘어 상대편을 향해 뛰어들어갔는데 그들이 공격한 대상 중에는 일반 관람객들도 있었다.[4] 이에 대응해 유벤투스 서포터들도 맞섰지만 결국 피해를 본 것은 유벤투스 서포터와 일반 팬들이었다. 리버풀 서포터의 공세에 밀리며 사람들이 출구 쪽으로 도망가다가 결국 사람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낡은 Z 구역의 외곽 콘크리트 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 벽에 기대던 사람들이 떨어지며 서로 깔리면서 39명이 사망하고[5] 6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훌리건 29명이 구속되었는데 구속된 리버풀 팬 14명 중 7명은 징역 3년, 나머지 7명은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5개월 간 추가로 재판하여 리버풀 팬 10명이 무죄를, 당시 사태를 방관했던 벨기에 공무원 두 명[6]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유럽 축구 연맹에서도 잉글랜드 클럽팀들에게 향후 5년간 국제대회 출전 금지, 사건을 일으킨 리버풀에게는 향후 6년간 국제대회 출전 금지[7]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경비를 소홀히 했다고 경찰에게도 피해자 가족들이 소송을 제기했지만 결국 문제의 원흉이 리버풀 서포터로 밝혀져 기각되었다. 구속된 훌리건들은 살인죄로 기소되기까지 했다.

자세한 사항은 영어 위키백과 문서에서 볼 수 있다.#

3. 경기 결과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로고 화이트.svg
1985 유러피언컵 결승
1985년 5월 29일 수요일 20:15 (CEST)
헤이젤 스타디움 (브뤼셀)
주심: 안드레 다이나 (스위스)
관중: 58,000명
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82~1989).svg
파일:trophy_front_full.png
파일:리버풀 FC 로고(1968~1987).svg
유벤투스 리버풀
1 0
<rowcolor=#000,#fff> 58' 미셸 플라티니 (PK)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엠블럼.svg
파일:득점 아이콘.svg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1985 유러피언컵 결승전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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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경기 전에 일어난 참사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그대로 진행되어 미셸 플라티니의 페널티 골로 유벤투스가 1-0으로 승리했다. 유벤투스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 우승. 사실 결승골이 된 패널티 킥을 줄만한 상황인가에 대해 평소라면 말이 나올 만 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경기 내용은 논란이 되지 않았다. 항간에 플라티니가 우승을 전혀 축하하지 못했다고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플라티니는 그 참사에도 불구하고 격하게 우승을 축하하여 비판받았다. 본인의 해명에 따르면 경기를 할 당시엔 사건이 그렇게나 심각했는지 몰랐다고 한다. 경기에 앞서 사건이 벌어졌지만 경기가 강행됐으니 심각성을 잘 몰랐을 만도 했다.

참고로 플라티니가 헤이젤 참사에 대한 악몽을 극복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하고 말았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전술했듯 우승을 격하게 축하하다가 비판받고 이에 대해 심각성을 뒤늦게 알았다고 해명한 것에서 현장에서 참사를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거나 한 것은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진짜 이유는 당연히 우승할 것이라고 여겨졌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실패한 후 큰 상실감을 겪은 것이며[8] 월드컵 이후 유벤투스에서 1시즌을 소화한 후 은퇴했다.

4. 사건 이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Stade_Roi_Baudouin.jpg

사건이 일어났던 보두앵 경기장은 1985년 이후 10년 동안은 육상 경기장으로만 활용되었다가 1995년 리모델링 후 재개장해서 다시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및 벨기에 컵의 결승전을 치르는 경기장으로 쓰이고 있다. 2006년 5월부터 11월까지는 안전 문제로 잠시 사용이 중단된 적도 있었다.

2016-17 시즌은 벨기에 브뤼셀의 몰락한 명문 풋볼 클럽인 로얄 위니옹 생질루아즈가 사용하고 있다. 생질루아즈는 위성구단 시스템을 최초로 고안한 클럽으로 2차 대전 전까지 벨기에 최고의 축구 클럽이었지만 2차 대전 이후에 최초의 우승을 얻은 같은 브뤼셀 연고의 RSC 안데를레흐트가 그 위상을 추월한 지 오래고 지금은 그저 벨기에 2-3부 리그를 오가는 퇴락한 클럽이 되었다. 그러나 새 구단주의 부임과 함께 자금이 확보되면서 2020-21 시즌에 다시 1부로 승격되고 심지어 2023-24 시즌에는 벨기에컵을 110년만에 우승하면서 명문구단으로 부활 중이다.

경기장 바깥에는 당시 사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와 사망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사건 이후 잉글랜드에서 과격한 서포터즈 문화를 자성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힐스버러 참사와 함께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발족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영국이 타 유럽 국가와 비교하면 경기장 주변에 엄청나게 CCTV를 깔고 경찰들이 훌리건을 엄격히 관리하는 계기가 되었다.[9]

리버풀과 지역 라이벌이었던 에버튼 FC는 1984-85 시즌에 풋볼 리그 디비전1[10]에서 우승했으나 국제적인 징계 때문에 유럽대항전 출전이 억울하게 막히자 리버풀에게 매우 악감정이 커졌다. 결국 2008년 구디슨 파크로 원정을 나온 리버풀 팬들에게 에버튼 팬들이 "살인자들에게 2-0(2-0 to the Murderers)"라고 조롱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도발하기도 했다.

파일:알렉스퍼거슨 프리미어리그 캐리.jpg

이 때문에 정상을 향해 달려가던 잉글랜드 축구 리그는 추락했고 1990년대 중반까지 은퇴할 때가 다 된 독일 선수나 이탈리아 선수가 관광하러 가는 곳이란 인식이 생기는 등 프리미어 리그 출범 전까지 암흑기를 겪게 되었다.

한편 케니 달글리시는 아래와 같은 물타기성 발언을 해 욕을 먹었다.
I can't condone the action of some Liverpool fans but it is difficult not to react when the opposing supporters are throwing missiles at you.
(리버풀 팬들의 행동을 용납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상대편이 계속 자신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을때 이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참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If they had foreseen the dreadful consequences, or thought what terrible things might unfold, I'm sure the stones would never have been thrown by the Italians and that the English retaliation would never have occurred. Every single one of them, both Italian and English, must have regretted it.
(만약 그들이 어떤 끔찍한 결과가 일어날 지 알았다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고, 잉글랜드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보복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곳에 있었던 이탈리아 사람들과 잉글랜드 사람들 모두 반드시 후회해야 합니다.)
회고록 전문

한 마디로 자기들도 피해자란 소리인데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외에도 뜬금없이 헤이젤 참사와 1년 전 AS 로마와의 유러피언컵 결승전을 연결지어 이탈리아인들이 그때 먼저 리버풀 팬들을 폭행했다고 하지를 않나 유벤투스 서포터들이 먼저 돌을 던지고 도발했다고 하지를 않나 경기장을 제공한 벨기에 측과 UEFA까지 걸고 넘어지는 등 이탈리아 축구팬(주로 유벤투스 팬)들에겐 적반하장으로 밖에 안 보일 내용으로 가득하다.
파일:external/i1.liverpoolecho.co.uk/WA904018.jpg
1985년 헤이젤 참사 추모식에 참석한 리버풀 FC의 관계자들의 모습.

헤이젤 참사 이후 리버풀과 유벤투스는 2004-05 시즌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만났다. 리버풀 팬들은 사과의 뜻을 전하고자 안필드에서 열린 첫 번째 경기 전에 "amicizia"(이탈리아어로 "우정")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형성하기 위해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제스처는 리버풀 팬들에게는 사과의 의미였더라도 피해자인 유벤투스 팬들 입장에서 볼 때 20년간 진정성 있는 사과를 전하지도 않았으면서 갑자기 우정으로 덮으려는 뜬금없는 제스처였던 만큼 그저 한 번 더 상처를 주는 것에 불과했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도 아닌 우정을 운운한다며 격분한 팬들이 대다수였다. 실제로 유벤투스 팬들은 이 플래카드에 가운뎃손가락으로 화답했다.# 2차전 때 유벤투스 팬들은 "알아듣기 쉽게 말하겠다. 우린 너희 살인자들을 용서하기 어렵다."라는 플래카드를 꺼내 들었다. 폭동 직전까지 갔으나 토리노 시장의 부탁으로 경기 자체는 평화롭게 끝났다. 참고로 1차전 결과는 리버풀의 2-1 승리로 끝났고 2차전 유벤투스 홈에서는 0-0 무승부로 마무리되면서 리버풀이 4강에 진출했다.

2010년 벨기에 헤이젤 스타디움에서 참사 25주년 추모행사가 열렸을 때 당시 선수로 뛰었던 플라티니 UEFA 회장은 다음과 같은 추모사를 남겼다.
||<tablealign=left><tablebordercolor=#c5a77c><tablebgcolor=#fff,#191919><bgcolor=#1D439B> ||
그 경기는 90분으로 끝난 게 아니다. 아직도 당시 경기는 계속되고 있다. 그날 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당시 사건은 우리 인생에 남아있으며, 지금도 또한 앞으로도 항상 우리 인생에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시 경기에 참가했던 선수들이든, 단순히 텔레비전으로 경기를 지켜봤던 사람들이든 그 참사를 목격한 사람들이라면 어느 누구도 기억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39명의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우리 머리와 가슴은 희생자들과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할 것이다.

2010년 헤이젤 참사 추모사에서
||

이 참사로부터 27년이 지난 2012년 2월 이집트에서도 비슷한 사건인 포트사이드 스타디움 폭동이 일어났다.

당시의 처참한 영상. 클릭 주의 요망.

2022년 10월 1일 인도네시아 리가 1 아레마 FC 대 페르세바야 수라바야 경기에서 이 참사를 뛰어넘는 사건이 발생했다.

5. 관련 문서

6. 둘러보기

역대 이탈리아의 대형 사고 및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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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202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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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colcolor=#000>사망사건명
2024년 9월 5일
21 2024년 9월 람페두사 난민선 침몰 사고
2023년 10월 3일
22 베네치아 버스 추락사고
2023년 7월 12일
46 2023 람페두사 난민선 침몰 사고
2023년 2월 26일
94 칼라브리아 난민선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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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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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6일
250 2019 람페두사 섬 난민선 침몰 사고
2018년 8월 14일
43 제노바 모란디 교량 붕괴 사고
2016년 7월 12일
23 안드리아-코라토 열차 충돌사고
2015년 4월 18일
525 2015 시실리 난민선 침몰사고
2014년 6월 30일
45 2014 시실리 난민선 침몰 사고
2013년 10월 11일
34 2013년 10월 람페두사 섬 난민선 침몰 사고
2013년 10월 3일
359+ 2013년 10월 람페두사 섬 난민선 침몰 사고
2013년 7월 28일
40 몬테포르테 이피노 버스 추락 사고
2012년 1월 13일
33 코스타 콩코르디아 호 좌초사고
2011년 4월 6일
150 2011년 지중해 난민선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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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비아레조 열차 탈선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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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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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1월 11일
67 포자 아파트 붕괴 사고
1999년 3월 24일
39 몽블랑 터널 화재
1998년 12월 16일
27 비아 디 비그나 빌딩 붕괴 사고
1998년 2월 3일
20 카발레세 케이블카 추락 사고
1997년 3월 28일
83 오트란토 알바니아 난민선 침몰 사고
1996년 1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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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바나트 에어 166편 추락 사고
1994년 7월 14일
27 로마 요양원 붕괴 사고
1991년 4월 10일
140 모비 프린스 참사
1990년 11월 14일
46 알리탈리아 404편 추락 사고
1990년 4월 10일
30 제노바 알레산드리아 버스 추락 사고
[ 198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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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사망사건명
1989년 9월 3일
150 113 쿠바나 항공 9046편 추락 사고
1989년 2월 8일
144 137 인디팬던트 에어 1851편 추락 사고
1988년 10월 17일
33 우간다 항공 775편 추락 사고
1987년 10월 15일
37 아에로 트랜스포티 이탈리아니 항공 460편 추락 사고
1985년 7월 19일
268 스타바 댐 붕괴사고
1985년 5월 29일
39 32 헤이젤 참사
1985년 2월 7일
21 1985년 아파트 붕괴 사고
1983년 12월 15일
35 네르비 고속도로 버스 추락 사고
1983년 2월 13일
64 스타튜토 극장 화재
1982년 4월 25일
35 팔라조 델 비그놀라 화재
1980년 8월 2일
85 볼로냐 폭탄 테러
1980년 11월 21일
28 쿠링가 열차 충돌 사고
1980년 6월 27일
81 이타비아 항공 870편 추락 사건
[ 197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79년 9월 14일
31 아에로 트랜스포티 이탈리아니 12편 추락 사고
1978년 12월 23일
108 알리타리아 4128편 추락 사고
1978년 4월 15일
48 무라제 디 바도 열차 탈선 사고
1977년 3월 3일
44 세라산 이탈리아 공군기 추락 사고
1976년 5월 2일
44 카발레세 케이블카 추락사고
1974년 1월 1일
38 이타비아 항공 897편 추락사고
1973년 12월 17일
34 1973년 로마 공항 습격·납치 사건
1972년 10월 30일
27 아에로 트랜스포티 이탈리아니 항공 327편 추락 사고
1972년 5월 5일
115 알리탈리아 항공 112편 추락 사고
1971년 11월 9일
52 영국 공군 허큘리스 추락사고
1971년 8월 28일
25 헬레아나호 화재
1970년 4월 9일
20 발러호 침몰 사고

[ 196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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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사망사건명
1964년 11월 23일
50 트랜스 월드 항공 800편 이륙 사고
1964년 3월 28일
45 알리탈리아 항공 045편 추락 사고
1963년 10월 9일
1900 + 바이온트댐 붕괴 사고
1962년 5월 31일
61 보게라 열차 충돌 사고
1961년 12월 23일
71 피우마렐라 열차 탈선 사고
[ 195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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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9월 16일
58 비아 카노사7 빌딩 붕괴사고
1959년 6월 26일
68 트랜스 월드 항공 891편 추락 사고
1958년 10월 22일
31 브리티시 유러피언 에어웨이즈 항공 142편 지상충돌 사고
1956년 12월 22일
21 기너 산 C-47-DL 추락 사고
1956년 11월 24일
34 LAI 항공 451편 추락 사고
1956년 8월 8일
262 136 마르시넬 광산 사고
1956년 7월 25일
51 안드레아 도리아호 침몰사고
1955년 3월 22일
24 모르가노 광산 참사
1955년 2월 13일
29 사베나 항공 503편 추락 사고
1954년 4월 8일
21 남아프리카 항공 201편 공중분해 사고
1954년 1월 10일
35 영국해외항공 781편 공중분해 사고
1952년 2월 17일
31 헌팅 에어 트랜스포트 빅커스 614 추락 사고
[ 194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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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23일
33 KLM 록히드 L-749 추락 사고
1949년 5월 4일
31 수페르가의 비극
1947년 11월 28일
20 알프스 미 공군 C-47B 추락 사고
1947년 11월 18일
21 산타마리아 딜 몬테 브리스톨 170 추락 사고
1947년 7월 16일
48 알벵가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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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명칭은 에이젤 경기장[2] 현재의 EFL 챔피언십으로, 당시엔 EFL 챔피언십이 1부리그였다. 현재의 체계가 잡힌 건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후.[3]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4] 닉 혼비의 '피버 피치'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까지 잉글랜드 훌리건들에게는 상대편 서포터석으로 넘어가 관중석에서 단체로 달리는 관습이 있었는데 특별한 것은 아니고 상대를 놀래키기 위함이었다고 한다.[5] 이탈리아인 32명, 벨기에인 4명, 프랑스인 2명, 북아일랜드인 1명[6] 1명은 Z 구역 담당 경찰관, 1명은 벨기에 왕립 축구 협회 쪽 관계자[7] 그나마도 처음에는 10년 금지였다가 조금 완화된 것이다.[8] UEFA 유로 1984에서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은 플라티니의 5경기 9골이라는 대활약 속에 전승 우승을 차지했으며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최강 전력을 자랑했지만 준결승에서 서독에게 패배하며 두 대회 연속으로 준결승에서 서독에게 패배해 결승 진출이 좌절되는 기록을 쓰게 된다.[9] 사실 CCTV는 경기장 주변이고 자시고 어딜 가나 영국의 도시라면 안 깔린 데가 없을 정도다. 영국이 괜히 '1984의 나라'라고 불리며 대한민국과 함께 CCTV 대국으로 거론되는 게 아니다.[10] 당시 잉글랜드 최상위 리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