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Tragedia del Estadio Nacional del Perú
1964년 5월 24일 페루 리마의 리마국립경기장에서 일어난 축구 경기에서 벌어졌던 폭동이자 축구 역사상 최악의 사건.
2. 상세
당시 1964 도쿄 올림픽 축구 출전권을 두고 예선 경기가 열렸다. 축구가 인기인 남미인 만큼 경기에 대한 관심도는 뜨거웠고, 표 값이 평소의 2배로 올랐음에도 사람들이 표를 꺼리낌 없이 샀다. 페루와 아르헨티나의 경기가 펼쳐질 경기장엔 순식간에 53,000여명의 관중들이 모여 서로의 팀을 응원했는데 당시 리마 인구의 약 5%가 경기장에 모였다. 전반전은 골이 하나도 안나왔으나, 후반 15분에 아르헨티나가 먼저 골을 넣었다. 이어 후반 35분에 페루 측의 선수 빅토르 로바톤(Víctor Lobatón Gálvez)이 골을 넣었다. 이러면 당연히 점수는 1-1이 돼야 하지만 심판 앙헬 에두아르도 파소스(Ángel Eduardo Pazos)는 페루 측의 파울이 있었다며 빅토르의 골을 무효로 선언했다. 공을 차는데 발을 필요 이상으로 높게 들어 상대 선수를 위협했다는 이유였다. 이에 페루 선수들이 거세게 항의했지만 경기는 계속됐다.[1] 하지만 이런 결과에 불만을 품은 페루 측 팬이 심판에게 돌진했는데 해당 팬은 바운서로 일했던 마티아스 로하스(Matías Rojas)였다. 마티아스는 전에도 경기장에 이런 식으로 끼어들어 팬들 사이에서 폭탄(Bomba)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에딜베르토 쿠엔카(Edilberto Cuenca)도 심판의 판정에 항의하며 끼어들었다. 갑자기 끼어든 팬들을 본 경찰들이 출동해 모여들어 경찰봉으로 때리고 발로 차며 제압하자 이에 더 흥분한 팬들은 물병과 의자를 경기장에 던지기 시작했고, 이를 말리던 경찰을 폭행하기까지 했다. 놀란 주심은 경기 시간이 5분이나 남았지만 종료 휘슬을 불었다. 결국 팬들은 더더욱 분노하고 흥분해 4만여명의 관중이 심판을 향해 달려 들어 폭동을 벌였다.사람들은 담장을 부수고 곳곳에서 패싸움이 벌어졌으며 경찰들은 최루탄을 쏘고 경찰견을 풀었다. 이에 사람들은 겁에 질려 도망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출입구로 향했지만 경기장의 5개 출입구 중 3개가 닫혀있었다. 닫힌 출입구에 수많은 사람들이 가다 사람들끼리 엉키는 사태가 일어났다. 한곳에선 사람들이 엉킨 채 2시간 가까이 방치되기까지 했다. 결국 사람들이 그렇게 몰린 끝에야 사람의 무게를 못 이긴 문이 부서지면서 사람들이 도망갔다. 경기장을 벗어난 폭도들은 이 틈을 타 가게를 털었고 차량에 불을 질렀다. 경찰 2명은 폭도들에게 둘러싸인 채 폭행당해 사망했다. 인근 경기장의 차량들은 도둑맞거나 불이 붙는 등 무사히 남지 못했다. 당시 도둑맞은 차량만 해도 무려 100여대에 달했다.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을 뒤져 돈을 챙겨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정부청사로 몰려가 "과잉진압 내무장관은 사퇴하라!"고 외쳤다. 심지어 이 틈을 타 인근 교도소에서 21명의 죄수가 탈옥하기까지 했다. 폭동은 다음날까지 이어져 페루 체육회가 습격당했고 정부는 결국 계엄령을 선포했다.
결국 이 사고로 최소 328명이 사망했는데 사망 원인은 대부분 압사였다. 이 사고는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공식 사건으로 기록됐다.[2] 부상자는 500여명을 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경기장 안에서 패싸움을 벌인 사람들의 상당수는 살아남았다. 사망자의 대다수는 그러한 패싸움과 진압을 피해 도망가다가 압사한 사람들이었다. 목격자에 따르면 몇몇 사람들은 무장한 경찰들에게 살해당했고 시신은 유가족이 발견하기 전에 치워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실제 사망자는 더 많을 거라는 의혹도 아직까지 남아 있다.
3. 사건 이후
결국 경기는 1-0으로 아르헨티나가 승리했다.경기장에 최루탄을 쏘라고 명령한 경찰 조지 아줌부하(George Azaumbuja)는 징역 30개월에 처해졌다.
논란을 일으킨 심판은 이후에도 계속 일하다 10년 뒤 은퇴했다.
사건 이후 경기장은 42,000명의 사람들만 수용하기로 했다.
사망자를 기리기 위해 당시 페루에서 가장 유명했던 가톨릭 신부 Cardinal Juan Landázuri Ricketts는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모금을 계획했고 약 1백만 솔이 모였다.
리마국립경기장은 사건 이후에도 남아 있지만 해당 사건을 기리는 추모비나 추모명패는 존재하지 않는다.
4. 여담
휴먼버그대학교에도 등장하였다.#[1] 아직까지도 해당 심판이 옳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2] 왜 공식이 붙었냐면 소련에서 있었던 루즈니키 스타디움 참사 당시 340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지만 축소보고했다는 의혹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