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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19 17:55:23

머지사이드 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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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사이드 더비 (Merseyside Der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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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튼 FC
Everton F.C.
리버풀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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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튼 FC의 레전드 팀 케이힐
리버풀 FC의 레전드 제이미 캐러거
종합 전적
총 경기 수 - 244경기
(2024년 4월 25일 기준)
에버튼 FC
Everton F.C.
무승부 리버풀 FC
Liverpool F.C.
68 78 99
271 총 득점 345
최근 5경기 전적
일시 장소 결과 대회
2022년 9월 3일 구디슨 파크 에버튼 0 - 0 리버풀 프리미어 리그
2023년 2월 13일 안필드 리버풀 2 - 0 에버튼 프리미어 리그
2023년 10월 21일 안필드 리버풀 2 - 0 에버튼 프리미어 리그
2024년 4월 25일 구디슨 파크 에버튼 2 - 0 리버풀 프리미어 리그
2025년 2월 13일 구디슨 파크 에버튼 2 - 2 리버풀 프리미어 리그

1. 개요2. 배경3. 역사4. 역대 전적5. 역대 시즌
5.1. 2010-11 시즌5.2. 2011-12 시즌5.3. 2012-13 시즌5.4. 2013-14 시즌5.5. 2014-15 시즌5.6. 2015-16 시즌5.7. 2016-17 시즌5.8. 2017-18 시즌5.9. 2018-19 시즌5.10. 2019-20 시즌5.11. 2020-21 시즌5.12. 2021-22 시즌5.13. 2022-23 시즌5.14. 2023-24 시즌5.15. 2024-25 시즌
6. 기록
6.1. 최다 점수 차 경기6.2. 출장 순위6.3. 득점 순위6.4. 기타 기록
7. 여담
7.1. 양 팀에서 모두 뛰었던 선수7.2. 양 팀을 모두 지휘했던 감독7.3. 서포트한 팀과 반대로 뛰었던 선수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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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머지사이드.jpg파일:Anfield And Goodison Park.jpg

영국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에 연고지를 두고 있는 프로축구 명문 클럽인 에버튼 FC리버풀 FC 간의 로컬 더비 매치이다.

잉글랜드 축구사를 대표하는 로컬 더비 중 하나로, 현존 잉글랜드 1부 리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깊은 더비 매치이며[1], 위 사진에서 보다시피 두 팀의 홈구장이 공원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을 정도로 매우 가까운 것이 특징이다.[2][3]

2. 배경

머지사이드 더비는 거칠기로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프렌들리 더비(The Friendly Derby)라고도 불린다. 이는 후술할 초기 역사에 의해 갈등이 시작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두 구단이 같은 도시의 같은 동네, 같은 배경과 뿌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4] 일반적인 더비 관계나 라이벌리들은 지리적,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인 배경에 의해 갈등 관계를 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머지사이드 더비는 과거 리버풀의 창단 과정에서 다소 종파적 갈등이 이사회 내에서만 있었을 뿐이지[5], 실제론 가족 안에서도 에버튼 서포터와 리버풀 서포터가 나뉠 정도고[6], 사실상 응원하는 팀만 다를 뿐 서포터들이 서로 이웃 혹은 친구이기 때문에 지지 기반 자체가 완전히 동일하다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로컬 더비라고 해도 최소 도시 일대를 공유하지 아예 같은 동네나 같은 대로를 공유하지는 않기 때문에 맨체스터 더비북런던 더비 처럼 각 동네의 연고 혹은 출신에 따라 지지하는 구단이 다른 것이 보통이나[7], 실제로 머지사이드 더비의 양 팀은 완전히 같은 동네 안에 서로 1마일도 떨어져 있지 않은 홈 구장을 두고 130년 넘게 함께 있어왔다.[8] 이에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양 팀의 서포터들은 더비 매치에서도 홈과 원정의 구분 없이 모든 좌석에 함께 앉아 경기를 관람했고[9], 도시 특성상 서포터들 사이에선 상호간의 적개심보다 머지사이드와 리버풀이라는 연고의 유대감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10] 이에 머지사이드 더비는 훌리건으로 대표되는 잉글랜드 특유의 강성 서포팅 문화와는 이질적이게도 서포터 간의 폭력 사태가 드물었고 서로를 존중해주는 모습을 보여주는 몇 안되는 더비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프렌들리'했던 서포터 간 관계는 1985년 헤이젤 참사의 후폭풍으로 에버튼이 제대로 직격탄[11]을 맞으면서 1980년대 후반부터는 많이 흐려졌고, 몇 년 후 에버튼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서포터들의 기대를 받던 닉 밤비가 리버풀로 이적한 사건으로 양 구단 서포터들의 적대심은 과거보다 훨씬 강해진 상태다. 또한 서포터들 간의 관계와는 별개로 경기 내용 자체는 매우 거친 것으로 유명했기에 프리미어 리그 시대 개막 이후엔 옐로카드와 레드카드가 가장 많이 나오는 더비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12][13] 이에 프렌들리 더비라는 별칭만 듣고 이 더비 매치가 진짜 프렌들리하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며, 머지사이드 더비는 명실상부 현재 프리미어 리그 내에서도 가장 거칠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수준의 치열한 더비 매치다.

하지만 리버풀이라는 도시와 관련된 비극적 사건들에 관해선 한 목소리를 내는 등 여전히 서포터들의 기반은 같은 도시, 같은 지역에 있기 때문에 상호 존중의 모습도 여전히 많이 잔존해 있다. 특히 1989년 힐스보로 참사에 있어서는 양 구단과 서포터즈들이 추모를 비롯해 진실을 밝히기 위한 대응을 늘 함께 진행해 왔으며, 당시 악의적인 날조 기사를 실어 리버풀 시민들에게 고통을 줬던 황색언론 The Sun의 경우 리버풀 뿐 아니라 에버튼 시설에도 출입도 금지되어 있다. 이외에도 에버튼 팬이었던 11세의 리스 존스가 2007년 8월 리버풀 도심 내에서 비극적인 묻지마 살인 사건을 당했을 때에도 양 구단에서 모두 추모에 나섰고, 2023년 8월 15일 에버튼 스타디움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을 때에도 리버풀이 함께 추모 행사를 펼쳤다.

이에 머지사이드 더비는 매우 가깝게 얽히고 섥힌 특수한 역사적 배경에 의해 상호 애증양가감정이 다양하게 드러나는 매우 특이한 성격을 지닌 더비 매치라고 볼 수 있다. 경기장 내에서는 서로를 죽일듯이 달려들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역설적인 프렌들리'함이 가장 큰 특징이다.

3. 역사


스탠리 공원을 사이에 두고 있는 두 클럽의 더비 역사는 18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머지사이드 리버풀 지역에 가장 먼저 창단된 구단은 에버튼이었다. 1878년, '세인트 도밍고 교회'의 신자들이 창설하여 '세인트 도밍고(St. Domingo's)'라는 이름의 크리켓 팀으로 먼저 시작했던 에버튼은, 영국에 축구라는 스포츠가 퍼져나가기 시작하며 본격적인 축구 팀으로서의 태동을 시작했다. 이후 초창기 스탠리 파크의 공터 부지를 홈 구장으로 사용하던 에버튼은 소음 유발 문제로 새로운 경기장을 찾게 되었고, 당시 새로운 홈 구장으로 찾은 곳이 바로 안필드였다. 안필드는 1884년 에버튼이 축구 경기장으로 개장했을 당시 지역 양조업자 존 오렐의 소유였는데, 그는 에버튼의 공동 창립자 중 하나이자 초대 회장이었던 존 하울딩의 양조업 동료였고 이에 적은 임대료로 에버튼은 구장을 임대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건은 1885년, 존 하울딩이 안필드 부지를 직접 매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에버튼의 회장이자 안필드 소유주가 된 하울딩은 에버튼의 이사회와 다양한 방면에서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가장 큰 갈등 요소는 안필드의 임대료 인상이었다. 1889년에 에버튼은 하울딩에게 안필드 임대를 위해 연 100파운드의 임대료를 지불했으나, 하울딩은 경기 수입이 늘어남에 따라 임대료를 계속해서 인상하는 방식을 취하여 1889-90 시즌부터는 250파운드, 이후 370파운드까지 임대료를 인상했다. 또한 에버튼은 경기장의 시설 보수 및 증축 비용을 별도로 부담해야 했다. 이에 에버튼 이사회는 하울딩에게 불만을 표하며 임대료 고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하울딩은 초기 자본이 부족했던 구단 대신 자신이 직접 안필드 부지를 매입하였고 구단이 수익을 만들기 이전까지 무상으로 경기장을 임대해줬던 것을 지적하며, 구단을 위해 자신이 투자 위험을 감수했던 바 응당한 금액을 받아야겠다며 요구를 거부했다. 또한 하울딩은 안필드에 자신이 운영하는 양조장의 맥주를 독점적으로 들여왔고, 에버튼 선수들이 그의 소유인 샌든(The Sandon) 호텔을 경기 전후에 사용하도록 만들면서[14] 에버튼 이사회와 계속해서 충돌을 야기했다. 하울딩은 보수당 소속의 자본가였던 반면, 에버튼 이사회에는 자유당 정치인들이 많았으며, 성공회 교인들도 다수 있어 양조업자였던 하울딩과는 부딪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갈등이 심화되던 와중에, 인접한 토지 소유주이자 안필드의 전 주인 존 오렐과의 토지 분쟁까지 얽히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 1891년, 에버튼 이사회는 안필드 경기장 내 새로운 스탠드를 건설했다. 그러나 이 스탠드는 오렐이 소유한 옆 토지를 침범하며 지어졌고,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스탠드가 도로로 사용될 예정이었던 오렐의 땅을 가로막아버렸던 것이었다. 당시 안필드 경기장과 맞닿아 있던 오렐의 부지는 안필드의 일부 구역을 도로로 사용하지 않고는 접근이 불가능한 땅이었다. 즉, 반드시 안필드 경기장 부지를 지나야만 하는 도로가 필요했다. 오렐과 하울딩 사이에는 이와 관련한 토지 이용 조항이 안필드 부지 매매 계약 당시부터 존재했으며, 이 조항에 따르면 안필드 부지의 특정 구역이 도로로 사용되어야만 했다. 에버튼 이사회는 해당 부지가 온전히 구단의 것이라 믿고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스탠드를 세운 것이었다고 주장했으나 오렐은 에버튼 측이 토지 계약 내용을 모르고 있었을 리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스탠드 철거를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울딩은 오렐과의 계약 내용을 구단 이사회에게도 알려줬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사건은 단순한 토지 문제를 넘어 하울딩과 에버튼 이사회 사이의 불신이 증폭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하울딩과 에버튼 이사들 간의 관계가 완전히 파국으로 치닿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결국 1891년 9월 15일, 하울딩은 급히 경기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단을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오렐의 부지를 완전히 매입할 자금을 모으자는 안건을 이사회에 올렸다.[15] 이러한 제안은 구단의 초대 감독이자 하울딩의 절친한 친구였던 윌리엄 바클레이를 비롯한 회장 측근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자유당 정치인 조지 마흔[16]을 필두로 한 다수의 이사들은 주식회사로 전환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하울딩이 제안한 방식에 강하게 반대의사를 밝혔다. 하울딩이 제안한 안건은 12,000주의 주식을 발행하여 이사회 멤버들이 1주씩을 나눠 가지고 나머지 주식은 일반 대중 및 이사회 멤버들에게 판매하자는 내용이었는데, 이는 자본가인 하울딩과 측근들이 지분을 모으기 유리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마흔은 총 500주의 주식만 발행하고 어떤 개인도 10주 이상 소유할 수 없도록 제한을 두며,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주식을 보유해야 한다는 원칙을 주장했다.[17]

이후 합의를 위해 하울딩측과 마흔측은 많은 협상을 벌였지만 1892년이 밝을 때 까지 합의는 도출되지 못했다. 결국 마흔은 부지 문제가 엮인 하울딩의 안필드를 떠나기 위해 새로운 경기장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1892년 1월 25일, 쇼 스트리트(Shaw Street)에 위치한 옛 리버풀 칼리지(Liverpool College) 건물에서 특별 총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하울딩의 제안은 다시 한 번 부결되었고, 마혼은 미어 그린(Mere Green)[18]의 임대 계약서를 제출하며 에버튼이 새로운 경기장으로 떠나자는 안건을 올렸다.[19] 결국 다수 의결에 의해 에버튼은 안필드를 떠나게 되었고 하울딩은 에버튼 이사회로부터 축출되어 오랜 갈등이 끝나게 되었다.[20]

이에 하울딩은 자신의 편에 남은 측근들과 안필드에 보란듯이 직접 팀을 창단하는데 그 팀이 바로 현재의 리버풀 FC이다. 창단 당시 리버풀 FC의 이름은 '에버튼 풋볼 클럽 & 애슬레틱 그라운즈'였으나 축구협회에서 에버튼과 비슷하게 이름을 가지고 창단할 수 없음을 통보하였고, 결국 당시 하울딩쪽에 남아 함께 새 구단을 창단한 전 에버튼 초대 감독 윌리엄 바클레이가 제안한 '리버풀 풋볼 클럽'이라는 이름이 채택되었다.

그렇게 가까운 위치에 두 구단이 자리잡게 되었고, 갈등을 겪으며 창단된 역사에 의해 즉각 새로운 더비 매치가 탄생하게 되었다. 리버풀이 풋볼 리그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1894년 10월 13일에 첫 더비 매치가 있었다. 그 경기에선 에버튼이 리버풀을 3-0으로 꺾었다. 이후 두 팀은 풋볼 리그에서 명문으로 성장해나가면서 치열하게 지역을 양분했다. 에버튼이 일찍이 풋볼 리그의 강자로 자리잡고 있었으나, 리버풀 또한 1900년대 초반에 곧장 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상승 가도를 달렸고, 1920년대에 진입하면서는 양 팀이 서로 볼만한 전력을 갖추며 라이벌리는 뜨거워졌다. 특히 1920~30년대에 에버튼에는 딕시 딘이라는 걸출한 로컬 스트라이커가 등장했고, 리버풀에서는 엘리샤 스콧이라는 북아일랜드 출신의 뛰어난 골키퍼가 등장해 머지사이드 지역의 축구 열기는 날로 유명세를 탔다.

두 차례의 세계 전쟁이 지나간 이후, 1950년대 초반에는 에버튼이 강등을 당한 후 승격했고, 에버튼이 승격한 해에는 리버풀이 2부 리그로 강등되어 침체기를 겪으며 라이벌리는 한동안 이뤄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빌 샹클리가 리버풀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팀을 승격시킨 후, 리버풀은 잉글랜드 축구의 최강자로 단번에 올라섰고, 머지사이드 더비는 다시 한번 영국 최고의 더비 매치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에버튼 또한 1960년대 상당한 전력을 갖추며 전성기를 맞았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양 팀은 리그 우승을 두고 굉장히 치열하게 맞붙었으며, 이 시기는 머지사이드 역사상 가장 뜨거운 더비 열기가 이어졌던 때로 알려졌다. 하지만 1970년대로 들어서며 에버튼은 전력을 급격하게 상실했고 강등권으로 처지게 된 반면, 리버풀은 밥 페이즐리 감독을 필두로 유럽 전역을 호령하는 압도적인 전성기를 달리게 되어 두 팀의 격차는 벌어지기 시작했다.

허나 1980년대에 들어서자 다시 더비가 뜨거워졌다. 에버튼이 이 시기 전력을 되찾으며 리그의 강자로 떠올라 유럽 무대에서까지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던 것. 리버풀 또한 유럽의 정상을 지키던 시기였기에 머지사이드 더비는 다시금 전성기를 맞았다. 1984년 EFL컵에선 두 팀이 나란히 결승에 오르며 머지사이드 더비는 연일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사고는 1984-85 시즌 에버튼이 리버풀을 제치고 리그 우승을 차지한 시즌에 발생했다. 에버튼이 다시 전성기를 되찾은 시기, 하필 리버풀 팬들이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대형 사고를 저지르는 바람에 모든 잉글랜드 구단의 유럽대항전 출전이 다년간 금지되었고, 에버튼은 유러피언 컵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어이없게 박탈당했다. 러버풀 때문에 에버튼은 전성기를 누릴 기회를 날렸고 그후 재정 문제도 겹쳐 한동안 강등권 근처에서 잔류에 만족하는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야 했으며 리버풀에 대한 에버튼 팬들의 감정은 더 나빠지게 되었다. 리버풀 또한 이후 힐스보로 참사를 당하며 침체기에 들어섰고 이에 머지사이드 더비는 과거의 수준 높은 리그 우승 경쟁에선 멀어졌으나, 두 팀의 서로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다.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로 진입하면서도 두 팀은 계속해서 치열하게 맞붙었다. 그러던 2004-05 시즌에는 두 팀의 악연이 다시 한번 조명받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에버튼은 프리미어 리그에서 4위를 수성해 리그 4위까지 주어지는UEFA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따냈는데, 프리미어 리그에서 5위로 밀려나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놓친 리버풀이 하필이면 그 해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여 에버튼의 앞길을 막았던 것. 이스탄불의 기적을 이루며 빅 이어를 들어올린 리버풀에 의해 "전 대회 우승팀을 탈락시킬 수는 없다"는 여론이 일었고 리버풀이 출전하게 되면 4위를 한 에버튼은 리버풀에 밀려 출전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에버튼은 또 다시 리버풀 때문에 유럽 대항전 출전권을 놓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양 팀에게 모두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부여한 유럽 축구 연맹의 배려[21]로 에버튼은 어렵사리 꿈에 그리던 챔피언스 리그 무대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럽 축구 연맹은 챔피언스 리그의 '전 대회 우승팀 자동 출전'이라는 규정을 새롭게 만들었다.

2000년대와 2010년대로 진입하면서는 리버풀이 대부분 리그 4위권을 사수하고 몇몇 굵직한 트로피를 들어올렸으나, 에버튼은 계속해서 중상위권과 중위권에 머물러 팀간의 격차가 유지되었고, 머지사이드 더비에서는 리버풀이 지속적으로 압도적인 우세를 가져가기 시작했다. 2010년대 초반 리버풀이 최대의 암흑기를 겪으면서 에버튼이 리버풀에 리그 순위가 앞선 때도 있었으나, 2010년대 후반 리버풀에 위르겐 클롭 감독이 부임하면서는 리버풀이 완전히 전성기를 다시 찾아 격차가 더 커졌다. 에버튼은 계속해서 사령탑 교체에 실패하며 2020년대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전력을 계속 잃었고, 결국 최근 강등 위기를 겪는 등 리버풀과의 전력차를 어느 때보다도 크게 실감하면서 굴욕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 와중에 이스탄불의 기적을 만든 라파엘 베니테즈 리버풀 전 감독이 에버튼의 감독으로 부임하는 사건도 벌어져 양 팀의 팬들이 떠들썩해지는 해프닝도 벌어졌다.[22]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지사이드 더비는 현재까지 거친 몸싸움과 다수의 경고 및 퇴장자를 발생시키는 잉글랜드 특유의 치열하고 터프한 더비 매치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첫 더비 매치 이후 머지사이드 더비는 무려 13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으며, 이는 현존하는 잉글랜드 1부 리그 내 라이벌리 및 더비 매치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23] 또한 에버튼과 리버풀은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1부 리그 누적 참가 및 연속 참가 횟수에서 모두 TOP3안에 들어가는 유이한 구단이며, 역사상 두 팀이 동시에 1부 리그에 없었던 시즌이 단 한 시즌도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머지사이드 더비는 잉글랜드 1부 리그에서만 유일하게, 가장 많이, 가장 오래 치러진 역사적인 더비 매치라고도 볼 수 있다.

4. 역대 전적

대회 경기 승리 무승부 득점
에버튼 리버풀 에버튼 리버풀
리그[24] 211 59 82 70 238 294
FA컵 25 7 12 6 28 40
EFL컵 4 1 2 1 1 2
커뮤니티 실드 3 1 1 1 2 2
풋볼 리그 슈퍼컵 2 0 2 0 2 7
합계 245 68 99 78 271 345

5. 역대 시즌

2010년대에는 리버풀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2010년부터 2019년까지 리버풀은 에버튼을 상대로 10승 10무 1패[25]로 월등히 앞서있으며, 에버튼은 2021년 2월에서야 오랜만에 리버풀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5.1. 2010-11 시즌

한국시각으로 2010년 10월 17일에 구디슨 파크에서 벌어진 214번째 더비 매치는 홈 팀 에버튼이 팀 케이힐과 미켈 아르테타의 골로 2-0 완승을 거두며 1년 8개월만의 머지사이드 더비 승리와 함께 순위가 급상승,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고 리버풀은 새 구단주가 보는 앞에서 19위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2011년 1월 16일 벌어진 더비 매치 2차전에서 리버풀은 로이 호지슨 감독을 경질하고 팀의 레전드인 '킹' 케니 달글리시를 임시 감독으로 임명하며 홈인 안필드에서 설욕을 노렸지만, 결과는 2-2 무승부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5.2. 2011-12 시즌

2011년 10월 1일에 구디슨 파크에서 벌어진 경기에서는 오심에 의한 잭 로드웰의 다이렉트 퇴장[26] 이후 수적 열세에 빠진 에버턴이 어려운 경기를 펼친 끝에 리버풀이 2-0으로 승리, 지난 시즌 구디슨 파크에서 당한 0-2 패배를 설욕하는데 성공했다.

2012년 3월 13일, 안필드에선 스티븐 제라드의 해트트릭으로 리버풀이 승리하였다. 그리고 11-12 시즌 FA 컵 4강에서 에버튼과 리버풀이 또 만나게 되었다. 05-06 시즌 FA 컵 우승을 이후로 우승이 없다가 연초에 칼링컵을 우승하며 오랜만에 무관을 벗어난 리버풀과 대조적으로 1994-95 시즌 FA 컵 우승을 마지막으로 무관인 에버튼의 맞대결이다. 그리고 2-1로 리버풀이 역전승을 거두며 FA컵 결승에 올라갔다.

5.3. 2012-13 시즌

2012년 10월 28일, 구디슨 파크에서의 대결은 리온 오스만스티븐 네이스미스가 두 골을 만들었지만 레이턴 베인스의 자책골과 수아레스의 골이 터지며 2-2로 비겼다.

2013년 5월 5일에 열린 안필드에서의 대결은 0-0으로 비기며 끝났다. 에버튼은 6위, 리버풀은 7위로 마감했는데 에버튼이 리버풀보다 순위가 더 높았던 마지막 시즌이다. 그러나 이해 7위 밖의 스완지시티와 심지어 18위로 2부리그로 강등된 위건이 리그컵과 FA컵 우승을 가져가면서 양팀 모두 유럽대항전 진출에 실패하였다.

5.4. 2013-14 시즌

2013년 11월 23일 구디슨 파크에서의 대결에서 올 시즌 상반기 EPL 최고의 경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명경기를 보여주며 3-3 무승부를 기록했다. 1-2로 뒤지고 있던 경기를 에버튼에 임대온 로멜루 루카쿠가 멀티골을 터뜨리며 역전시키고, 교체투입된 다니엘 스터리지후반 80분 동점골을 터뜨리고 양 팀 골키퍼의 미친 활약까지 더해져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쫄깃쫄깃했던 경기. 다만 경기 중 미랄라스의 누가 봐도 엄연한 살인 태클에 심판이 퇴장을 주지 않아 논란이 있었는데, 이후 미랄라스가 직접 사과함으로써 해결되었다.

2014년 1월 28일 안필드에서의 더비 매치는 리버풀의 4-0 대승으로 끝났다. 제라드의 헤딩 선제골로 분위기를 완전히 탄 리버풀은 SAS라인의 주력을 활용한 역습 전술로 에버튼을 압도했다. 3-0으로 밀리는 상황이 되자 에버튼은 어떻게든 흐름을 반전시키려 노력했으나, 수아레스의 단독 역습 골로 자기엘카마저 무너지는 처참한 패배를 기록했다.

5.5. 2014-15 시즌

2014년 9월 27일 안필드에서 1-1 무승부를 거뒀다. 마리오 발로텔리가 적극적인 수비 가담으로 공을 뺏은 뒤 다시 공을 받아 드리블을 하는 과정에서 프리킥을 얻었고, 리버풀의 주장 스티븐 제라드가 기가 막히게 득점에 성공했다. 이후 흐름을 탄 리버풀의 공격이 이어졌으나 발로텔리가 골대를 맞추는 등 추가득점에 실패했다. 추가시간이 3분이 주어진 가운데 92분 필 자기엘카가 하프발리슛으로 인생골을 기록하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고, 1분 뒤 경기는 무승부로 종료됐다.

2015년 2월 8일 구디슨 파크에서의 더비 매치는 0-0 무승부를 거뒀다. 이 경기는 스티븐 제라드의 마지막 머지사이드 더비여서 많은 팬들의 기대를 모았으나... 두 팀 다 수비적인 전술을 들고나와 상당히 조심스럽고 느린 템포의 경기운영이 지속되었고, 리버풀에서는 조던 아이브와 제라드의 슈팅외에는 인상깊은 공격적인 장면이 없었으며 에버튼은 선수 개인의 속공으로 리버풀의 수비진을 뚫으려고 했으나 딱히 득점찬스를 만들지 못했다.

5.6. 2015-16 시즌

2015년 10월 4일 구디슨 파크에서 열린 더비 매치 또한 1-1 무승부로 끝났다. 이로서 더비 3연속 무. 대니 잉스가 41분 골을 넣으면서 앞서갔으나, 전반 추가시간에 루카쿠가 골을 넣고 전반을 마쳤다. 후반에도 치고 받는 흐름은 있었으나 양 팀은 모두 골을 성공시키지 못하며 경기가 그대로 끝났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브랜든 로저스의 경질이 발표되었다. 로저스를 경질한 지 한 주가 지난 후 후임으로 발표된 감독은 바로...

2016년 4월 21일, 리버풀로 위르겐 클롭 감독이 부임하고 난 뒤 안필드에서 열린 첫 더비 매치는 리버풀이 4-0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로베르토 마르티네스 에버튼 감독 역시 로저스의 길을 걷게 되었다.

5.7. 2016-17 시즌

2016년 12월 20일 구디슨 파크에서 열린 더비 매치는 추가시간에 사디오 마네의 극적인 골로 1-0으로 승리했다.

2017년 4월 1일 안필드에서 열린 더비 매치는 3-1로 리버풀이 승리했다.

5.8. 2017-18 시즌

현지 시각으로 12월 4일 오후에 열린 FA컵 3라운드 대진 추첨에서 리버풀과 에버튼이 상대로 추첨되며[27] 6시즌 만에 세 번의 더비 매치가 열리게 되었다. 경기는 안필드에서 두 번, 구디슨 파크에서 한 번 열렸다.

2017년 12월 10일, 안필드에서 열린 프리미어리그 16 라운드 경기에선 양 팀이 한 골씩 주고 받으며 1-1로 비겼다.

2018년 1월 6일, 안필드에서 열린 FA컵 3 라운드 경기에선 리버풀이 밀너의 페널티킥과 판데이크의 헤딩 결승골로 시귀르드손이 동점골을 넣으며 분전한 에버튼을 꺾고 2-1 승리를 거뒀다.

2018년 4월 7일 구디슨 파크에서 열린 프리미어 리그 33 라운드 경기에서는 두 팀 모두 득점없이 0-0으로 비겼다.

5.9. 2018-19 시즌

2018년 12월 2일 안필드에서 시즌 첫 더비가 열렸는데, 0-0으로 끝날 분위기에 조던 픽포드의 환상적인 예능으로 디보크 오리기가 결승골을 넣으며 리버풀이 1-0 승리를 낚았다.

2019년 3월 3일 구디슨 파크에서는 양 팀이 0-0으로 비겼는데, 이후 리버풀이 승점 97점을 기록하고도 맨시티의 승점이 98점에 밀려 리그 준우승을 기록했다.

5.10. 2019-20 시즌

2019년 12월 2일, FA컵 3R 대진 추첨에서 리버풀의 상대로 에버튼이 엮였다! 2년 전과 마찬가지로 홈 팀은 리버풀.

2019년 12월 4일, 안필드에서의 리그 1차전이 열렸다. 리버풀이 챔피언스 리그의 잘츠부르크 원정과 FIFA 클럽월드컵 경기 등을 대비하는 차원에서 살라와 피르미누를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하고 오리기, 샤키리, 랄라나 등을 출전시켜 로테이션을 돌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버풀이 5-2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에버튼은 이 경기의 패배로 인해 리그 강등권인 18위로 추락하였고, 결국 다음 날 마르코 실바 감독을 경질하고 카를로 안첼로티를 선임하였다.

2020년 1월 5일, FA컵 3R 경기에서는 12월부터 계속된 강행군으로 주전 선수들의 휴식이 필요한 리버풀이 사실상 에버튼을 상대로 홈 20경기 무패 기록이 깨질 것을 감수하고, 리저브 팀을 주축으로 선발진을 내보냈다. 그러나 주전 라인업을 들고 온 에버튼에 맞서 대등한 경기를 선보였고 결국 유망주 커티스 존스의 환상적인 중거리 골에 힘입어 리버풀이 1-0으로 또 승리를 거뒀다.[28] 이날 경기 결과로, 리버풀은 계속해서 기록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고 리버풀의 전설적인 감독인 빌 샹클리의 "머지사이드에는 위대한 두 개의 팀이 있다. 리버풀과 리버풀 2군"이라는 어록이 재조명 되기도 하였다.

2020년 6월 22일 구디슨 파크에서의 리그 2차전은 팽팽한 접전을 보이며 0-0 무승부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이후 리버풀은 승점 99점을 기록하면서 마침내 프리미어 리그 출범 후 최초이자, 30년 만에 1부 리그 통산 19번째 우승을 달성하여 클럽의 오랜 염원을 풀어내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에버튼의 경우, 1986-87시즌 이후 리그 무관이 계속되는 중이다.

5.11. 2020-21 시즌

2020년 10월 17일, 구디슨 파크에서 펼쳐진 프리미어 리그 5R 경기에서 치열한 접전 끝에 2-2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그동안 클롭 감독의 리버풀에게 단 한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에버튼은 지난 해 안첼로티 감독 선임 이후 꾸준한 선수 보강을 통해 스쿼드의 질을 높여왔다. 그리하여 리버풀을 상대로 정확히 10년 만에 승리를 노렸으나 결국 이번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경기 내적으로는 VAR 오프사이드 판정 이슈, 조던 픽퍼드의 가위치기 태클로 인한 버질 판데이크의 전방 십자인대 파열 및 시즌 아웃 등의 여러 사건이 발생하여 팬들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감정의 골이 깊어지게 되었다.

2021년 2월 21일, 안필드에서 펼쳐진 프리미어리그 24R 경기에서 에버튼이 2-0 승리를 거두었다. 전반 3분에 히샬리송이 득점하고, 후반 83분에 칼버트르윈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시구르드손이 마무리하며 승리를 가져왔다. 에버튼의 머지사이드 더비 승리는 2010-11 시즌 이후 약 10년 만이며, 안필드에서의 승리는 무려 22년 만이다.[29] 이날 전반전에 센터백 자리를 메우고 있던 캡틴 헨더슨까지 부상당하면서 리버풀은 지독한 센터백 부상의 저주에 시달리게 되었다. 한편 이후 리버풀은 3위까지 올라 반등에 성공했고, 에버튼은 최악의 홈 경기 승률을 기록하면서 10위까지 추락하며 시즌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이 이후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은 보드진의 지원 의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단으로 계약 해지를 요구한 뒤 레알 마드리드 CF로 떠나면서 에버튼 팬들의 뒤통수를 제대로 때리고 말았다.

5.12. 2021-22 시즌

시즌이 시작도 하기 전인 6월부터 새 시즌 더비에 대한 기대감이 용솟음치고 있다. 바로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의 에버튼 부임 때문. 리버풀 팬들은 아쉽지만 그간 라파엘 베니테스가 여러 나라에서 여러 감독직을 전전하면서도 힐스보로 참사 유가족들에 대한 존중을 이어온데다 리버풀 감독직 사임 후에도 머지사이드에 말뚝을 박고 자식들마저 스카우스로 키워낸 동네 아저씨(...)라는 점에서 본가에서 출퇴근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한다며 동정어린 응원을 보내는등 여론이 예상보다 호의적[30]이다.

반면 에버튼 팬들은 '리버풀에서 잘린 감독을 임명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구디슨 파크 앞에서 시위를 벌이면서 매우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심지어는 위럴에 소재한 베니테스의 본가에 찾아가 협박 배너를 걸어놓는 등 반발 여론의 수위도 높아져 머지사이드 주 경찰이 출동하기에 이르렀다.[31]

2021년 12월 2일, 구디슨 파크에서 프리미어 리그 14R 더비가 열렸다. 그리고 리버풀은 이 경기에서 1-4 대승을 거두면서 16-17시즌 이후 무려 5년만에 구디슨 파크에서 승리를 챙겼다.

2022년 4월 25일, 안필드에서 펼쳐진 프리미어리그 34R 더비가 열렸다. 리버풀이 점유율 85%, 패스 횟수 787회(701회 성공) 등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패스 횟수 173회(95회 성공)의 에버튼을 말 그대로 찍어 눌렀고, 2-0의 스코어로 승리를 가져갔다. 덤으로 에버튼의 잔류에도 빨간불이 켜지게 되었다.

그러나 에버튼이 극적으로 잔류에 성공하면서 다음 시즌에도 본 더비를 볼 수 있게 됐다.

5.13. 2022-23 시즌

8월 9일 리버풀 유스 출신의 코너 코디가 울버햄튼에서 에버튼으로 임대 이적했다.[32]

2022년 9월 3일, 구디슨 파크에서 프리미어 리그 6R 더비가 열렸다. 무려 코너 코디가 득점을 기록했으나 오프사이드로 취소되며 경기는 0-0으로 종료되었다.

2023년 2월 14일, 안필드에서의 프리미어 리그 23R, 직전 경기에서 두 팀은 상반된 경기[33]를 보여주며 기대를 모았고, 그 결과 리버풀이 신입생 코디 각포의 득점과 함께 2-0으로 경기를 승리로 가져갔다.

직전 시즌처럼 이 시즌 역시 에버튼이 강등 위기를 겪었으나, 또다시 17위로 가까스로 잔류에 성공했다.

5.14. 2023-24 시즌

첫 머지사이드 더비 경기에서는 안필드에서 리버풀이 2-0 승리를 가져갔다.

그러나 에버튼의 홈인 구디슨 파크에서는 에버튼이 2-0으로 승리하며 구디슨 파크에서는 14년만의, 전체로는 3년만의 머지사이드 더비 승리를 거두었다. 위르겐 클롭의 마지막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승리를 거두며 에버튼으로서는 그동안의 열세를 되갚아주는 기념비적인 경기가 되기도 했다.

에버튼은 지난 시즌과는 다르게 승점 삭감만 안 당했으면 중위권에 위치했을 성적을 내었고 시즌 종료 3경기 전 미리 잔류를 확정지었다.

5.15. 2024-25 시즌

이번 시즌을 끝으로 에버튼의 홈구장이 이전되므로 구디슨 파크에서의 마지막 머지사이드 더비가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폭풍으로 인해 15라운드 경기가 순연되었다.

2025년 2월 12일, 순연된 15라운드 경기가 열렸고 구디슨 파크에서의 마지막 머지사이드 더비는 2-2로 끝이났다. 전반전 1골씩 주고받아 1-1의 치열한 접전이 어어지다가 후반전 모하메드 살라가 역전골을 집어넣으며 경기가 끝나는듯 했으나, 추가시간의 추가시간이 주어진 97분에 제임스 타코우스키의 극장골이 터지며 에버튼이 집념으로 동점을 만들었다. 구디슨 파크에서의 마지막 더비 매치라는 상징성이 있는 경기였기에 동점골이 들어가자 에버튼의 관중들이 그라운드로 뛰쳐나오며 분위기가 뜨겁게 달궈지기도 했다. 또한 경기가 끝난 후 압둘라예 두쿠레가 리버풀 원정팬들 앞에서 자극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것을 커티스 존스가 달려가 밀치며 단체 충돌까지 일어났다. 이에 두쿠레와 존스는 경기 이후에 레드 카드를 받았고, 리버풀의 아르네 슬롯 감독과 시프케 헐쇼프 수석 코치 또한 경기 후 마이클 올리버 주심에게 항의하다가 퇴장을 당하는 등 머지사이드 더비의 명성답게 경기 이후까지도 다양한 사건이 일어났다.

6. 기록

6.1. 최다 점수 차 경기

순위 결과 일시 대회
1 리버풀 6:0 에버튼 1935년 9월 7일 퍼스트 디비전
2 에버튼 5:0 리버풀 1909년 4월 9일 퍼스트 디비전
3 리버풀 0:5 에버튼 1914년 10월 3일 퍼스트 디비전
4 리버풀 5:0 리버풀 1965년 9월 25일 퍼스트 디비전
5 에버튼 0:5 리버풀 1982년 11월 6일 프리미어 리그
8 에버튼 4:0 리버풀 1902년 1월 11일 퍼스트 디비전
9 리버풀 0:4 에버튼 1964년 9월 19일 퍼스트 디비전
6 리버풀 5:1 에버튼 1922년 10월 7일 퍼스트 디비전
7 리버풀 5:1 에버튼 1925년 9월 26일 퍼스트 디비전
10 에버튼 5:2 리버풀 1904년 4월 1일 퍼스트 디비전

6.2. 출장 순위

순위 국적 이름 클럽 출장 수
1 웨일스 네빌 사우스올 에버튼 41
2 웨일스 이안 러쉬 리버풀 36
3 짐바브웨 브루스 그로벨라 리버풀 34
4 스코틀랜드 앨런 한센 리버풀 33
잉글랜드 스티븐 제라드 리버풀

6.3. 득점 순위

순위 국적 이름 클럽 득점
1 웨일스 이안 러쉬 리버풀 25
2 잉글랜드 딕시 딘 에버튼 19
3 스코틀랜드 샌디 영 에버튼 12
4 잉글랜드 스티븐 제라드 리버풀 10
5 잉글랜드 해리 체임버스 리버풀 8
잉글랜드 지미 새틀 에버튼
잉글랜드 잭 파킨슨 리버풀
이집트 모하메드 살라 리버풀

6.4. 기타 기록

7. 여담

7.1. 양 팀에서 모두 뛰었던 선수

양 팀 간의 직접적인 선수 이동은 현지에서 전통적으로 공원 횡단(Crossing the park)이라는 표현으로 불리곤 했다. 양 팀의 홈구장이 스탠리 파크를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2년 아벨 자비에르 이후로는 20년 넘게 공원을 횡단한 선수가 없어 왔으며, 구디슨 파크가 사라지고 에버튼 스타디움으로 에버튼이 홈 구장을 옮김에 따라 공원 횡단이라는 표현도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7.2. 양 팀을 모두 지휘했던 감독

7.3. 서포트한 팀과 반대로 뛰었던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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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술할 역사에 의해 1892년 리버풀 FC의 탄생 시점부터 서로 감정이 좋지 않았기에, 1894년 10월 13일에 첫 더비 매치를 치른 이후 무려 130년 넘게 앙숙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2] 빨간색 경기장이 안필드, 그리고 좀 더 멀리 보이는 파란색 구장이 구디슨 파크다. 양 경기장의 직선거리는 약 1.9km. 참고로 양 구장 사이에 있는 공원이 바로 스탠리 파크다. 두 구단이 공동으로 새 경기장을 짓자는 의견이 나왔던 그 부지이다.[3] 다만 2025-26 시즌부터 에버튼 스타디움이 개장하면 거리가 조금 멀어질 예정이다. 그래도 신 구장인 에버튼 스타디움 역시 안필드에서 걸어서도 충분히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4] 사실상 리버풀이라는 구단 자체가 에버튼과 갈라서고 나온 인사들에 의해, 에버튼이 사용하던 경기장에서 창단된 형제 구단이며, 초대 회장, 초대 감독, 초대 주장이 모두 에버튼의 회장, 감독, 주장 출신이다.[5] 리버풀을 창단한 존 하울딩보수당 소속의 양조사업가, 자본가였고, 에버튼 이사회 내 하울딩 반대파는 자유당 소속과 성공회 종교인들이 많았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하울딩측이 에버튼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리버풀이 창단되었다.[6] 리버풀의 레전드 로비 파울러, 제이미 캐러거는 어린 시절 에버튼 팬이었고, 스티븐 제라드의 사촌인 앤서니 제라드는 에버튼에서 뛴 적이 있다. 마이클 오언 같은 경우 아버지가 에버튼 선수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에버튼의 팬이였다.[7] 영국의 경우 한 도시 내에서도 동네에 따라 방언이 각자 다를 정도로 구역별로 특성이 뚜렷하고, 계급이나 경제 수준, 종교도 서로 달라 상호 배타성이 뚜렷하게 나타난다.[8] 한국으로 치면 행정구역 상으로 까지 연고지가 같은 수준이다.[9] 실제로 1984년 양 팀이 웸블리에서 격돌한 풋볼 리그 컵 결승전에선 모든 경기장 좌석에 양 팀 서포터들이 뒤섞여 있고 다 함께 "머지사이드"를 연호하는 사건이 있었고, 실제 해당 경기가 "프렌들리 파이널"이라고 불렸다.[10] 기본적으로 리버풀이라는 도시 자체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기에 도시 내 지역적인 유대감이 강한 지역이다. 실제로 이러한 서포터들의 특성에 의해 양 팀은 20세기 초반까지 더비 매치가 열리면 서포터들을 위한 경기 안내를 팀 구분 없이 함께 배포하기도 했다.[11] 에버튼은 1984-85 시즌 UEFA 컵위너스컵 우승과 리그 우승 더블을 통해 유러피언 컵에 진출할 수 있어야 했지만, 1985년에 헤이젤 참사가 벌어지고 이후 UEFA에서 징계 차원으로 리버풀엔 6년, 잉글랜드 전 클럽들에게는 5년동안 유럽 대항전 출전 금지를 가하는 바람에 에버튼은 전성기를 보내는 동안 유럽 대항전에 진출할 수 없었다.[12] 프렌들리 더비라는 이름 자체가 어디까지나 양 팀의 서포터들에 관한 얘기고, 구단 사이의 관계는 처음부터 전혀 프렌들리하지 않았다. 양 구단 간의 갈등은 잉글랜드 내에서도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13] 얼마나 거친 파울이 많이 나오는지 경기 결과보다 부상 걱정을 하는 팬들이 많을 정도다.[14] 당시 경기장엔 제대로된 라커룸이 없었기에 사실상 라커룸 혹은 드레싱룸의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었다.[15] 당시에는 구단이 주식회사 형식으로 운영되는 것이 드물었기에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축구단은 보통 회원들이 연회비를 지불하는 '스포츠 클럽'의 형식으로 대부부 운영되었다.[16] 이사회 내에서 하울딩과 계속해서 부딪혀왔던 인물이다. 리버풀 지역 지방 선거에서 정치적으로도 충돌한 적이 있었다.[17] 당시 에버튼은 수많은 주주들의 결의에 의해 의사 결정을 해왔는데, 회장이던 하울딩은 그런 다수 의결 방식이 발전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안필드의 소유권을 가진 후 갈등을 벌여온 것도 권력을 잡아 운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였다. 사실상 내부 운영 방식의 관점을 보인 두 집단의 정치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다.[18] 구디슨 파크의 이전 이름[19] 당시 마흔이 경기장 이전 안건을 올리자 한 이사회 멤버가 "구장을 못찾을 것이다"라며 비아냥거렸고, 마혼은 주머니에서 미어 그린의 임대 계약서를 꺼내 보이며 "내 주머니에 경기장이 있다!"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있다.[20] 당시 이 사건은 리버풀 지역 내에서도 정치적으로 큰 사건이었다. 자유당 성향의 리버풀 데일리 포스트(Liverpool Daily Post)는 하울딩을 축출한 사건을 두고 "암적인 존재를 제거한 것"이라며 에버튼의 결정을 긍정적으로 보도했고, 보수당 성향의 리버풀 이브닝 익스프레스(Liverpool Evening Express) 등은 익명의 기고문을 통해 마혼을 공격하는 기사를 다수 내보내는 등, 하울딩을 지지하며 에버튼 이사회를 강하게 비판했다.[21] 당시 웨일스 리그 우승팀이 리버풀 FC에게 1차 예선 도전권을 걸고 경기를 신청한 것이 연맹에 의해 받아들여졌다.[22] 에버튼 팬들은 안그래도 리버풀에 비해 좋지 못한 사정인데 리버풀 레전드 출신의 감독이 오는 것을 매우 싫어했고, 리버풀 팬들 또한 라이벌 팀으로 가는 것을 비난했다. 그러나 이후 베니테즈 감독이 부임하여 에버튼의 성적이 매우 나빠지자 리버풀 팬들은 기뻐하며 베니테즈에게 다시 호감을 갖기도 했다.[23] 가장 유명한 노스웨스트 더비는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았고,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된 로즈 라이벌리도 첫 더비 매치는 1906년에 처음 있었다. 꽤나 오래되었다고 알려진 북런던 더비도 1910년대에 시작되었다. 1899년에 시작된 도커스 더비사우스 코스트 더비, 1901년에 처음으로 마찰이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타인위어 더비 정도가 그나마 머지사이드 더비의 역사에 근접하며, 머지사이드 더비보다 오래된 더비들은 스틸 시티 더비, 세컨드 시티 더비, 이스트 랭커셔 더비, 티스위어 더비 정도가 있으나 이들은 역사적으로 1부 리그에서 그리 많이 성사되지는 못했던 더비들이다.[24] 프리미어 리그, 퍼스트 디비전[25] 리그는 8승 8무 1패[26] 경기 종료 이후 며칠 뒤에 FA가 로드웰의 퇴장 징계를 철회했다.[27] 잉글랜드 FA컵은 시드 개념이 없이 해당 라운드에 진출한 팀을 대상으로 완전 무작위로 대진 추첨을 하는데, 무려 63개의 상대 중 하필 걸린 게 리버풀/에버튼이다. 4:07부터 보면 사람들이 괜히 놀라는 게 아니다. 과장 좀 보태서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급. 게다가 그 직후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FC크리스탈 팰리스 FC가 걸리며 두 번 연속으로 더비 매치가 걸렸다.[28] 그의 나이는 18세 340일로, 역대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골을 기록한 두 번째로 어린 리버풀 선수라는 기록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후 이 골은 19-20시즌 FA컵 최고의 골로 선정되었다.[29] 여담으로 10년 전의 승리도 2-0으로 끝났었다. 에버튼은 이날 경기의 승리가 얼마나 기뻤는지, 구단 차원에서 유니폼을 포함한 구단 샵의 모든 물품을 대상으로 최대 50% 할인 판매 행사까지 개시했을 정도였다.[30] 리버풀의 레전드 선수이자 지도자로서도 라파엘 베니테스 시절 리버풀에서 수석코치로 근무한 이력이 있는 새미 리가 단짝 샘 알라다이스 감독을 따라 에버튼에 부임하는등 비슷한 전례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31] 참고로 2012-13 시즌 첼시 FC에 임시 감독으로 부임했을 당시에도 베니테스 부임에 대한 첼시 팬들의 민심 또한 이러한 행적 때문에 썩 좋지 못한 편이었다. 그 때문에 UEFA 유로파 리그 우승을 안겨줬음에도 정식 감독으로 부임하는 데에는 실패했고, 후에 프랭크 램파드에게도 소통이 없다면서 까인 적이 있다.[48][32] 에버튼에도 코디처럼 리버풀 경력이 있는 앤디 로너건도 있었으나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한 3순위 골키퍼에 1시즌만 있다가 나간 입장이었던지라 코디처럼 주목은 받지 못했다. 코디는 리버풀 1군에서 2경기를 출전했었다.[33] 에버튼이 리그 선두 아스날을 잡으며 강등권 탈출의 희망을 보였고, 리버풀은 반대로 강등권을 맴도는 울버햄튼을 상대로 완패를 당하며 유럽 대항전 티켓 경쟁에서 멀어져 갔다.[34] 1894-95 시즌 ~[35] 2024-25 시즌 기준 통산 212경기이며, 역사상 두 팀이 모두 2부 리그에 있던 시즌이 전무하기 때문에 모든 리그 경기는 1부 리그에서 펼쳐졌다.[36] 참고로 이 부문의 2위 기록조차도 에버튼 FC가 가지고 있다. 이 2위 기록의 상대는 첼시 FC.[37] 에버튼 주장 출신이며, 리버풀 최초의 주장이다.[38] 양 팀에서 모두 리그 우승을 경험한 유일한 선수다.[39] 유스.[40] 유스.[41] 양 팀의 주장직을 모두 역임한 유이한 선수다.[42] 양팀에서 FA컵 우승을 경험한 유일한 선수다.[43] 유스.[44] 현재까지 양 팀 사이에서 직접 이적한 마지막 선수이며, 한 시즌에 각 팀 소속으로 모두 더비 매치에 나선 역사상 유일한 선수다.[45] 양 팀의 초대 감독이자 초대 사무총장이기도 하다.[46] 리버풀 유스 출신[47] 리버풀 유스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