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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3:40:13

더비셔호 침몰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더비셔호.jpg

1. 개요2. 더비셔3. 마지막 항해4. 조사 과정
4.1. 허무했던 1차 조사4.2. 희망이 보였던 2차 조사4.3. 진짜 결과가 나온 3차 조사
5. 사고 이후6. 둘러보기

1. 개요

MV Derbyshire Sinking

1980년 9월 9일 일본 오키나와현 남동해상에서 일어난 영국 국적 화물선 침몰 사고.

2. 더비셔

길이 294.2m에 , 높이 44m, 너비 18m의 짐칸 9칸개 짜리 대형 화물선으로, 160,000톤의 화물을 실을 수 있었다. 화물선이 하도 커서 선장실에서 선장이 망원경으로 배를 살펴야 했을 정도였다. 지을 때 도 너무 커서 한번에 짓지 못해 구역별로 지은 뒤 조립해야 했다. 하도 커서 멈추는데만 최소 3.2km를 가야했고, 한바퀴 도는데도 최소 1.6km가 필요했다. 배를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2개의 강철 빔이 배를 가로 질러 지나갔다. 하지만 65번 프레임과 만나는 부분이 매우 취약했다.

배의 첫 항해는 1975년, 첫 임무는 1976년에 있었다. 원래 이름은 리버풀 브릿지(Liverpool Bridge)였으나 1978년에 더비셔로 바뀌었다.

3. 마지막 항해

선장 제프리 언더힐(47세) 승무원 선장 포함 42명 + 승무원의 아내 2명 탑승한채, 더비셔호는 캐나다 퀘벡주에서 철광석 157,000톤을 실고 아프리카 대륙을 빙 돌아[1] 일본 카와사키로 갈 예정이었다. 철광석이 너무 무거워 화물선의 7칸 만 채운 채 더비셔호는 목적지로 향했다.

출항하고 2달간은 별일 없이 안전했다. 그런데 일본 영해에 들어갔는데 태풍 오키드#가 생겨나면서 날씨가 점점 나빠졌다. 선장은 태풍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로 했다. 하지만 도쿄홍콩, 그리고 에서 받은 일기예보 정보가 전부 오키드의 경로 예측을 다르게 했다. 선장은 3개 중 하나 골라야 했다.

혹시 모를 비상 상황을 대비해 선원들은 해치를 점검했다. 선장은 경로를 하나 정했으나 예상과 달리 날씨가 더 험해졌다. 선장은 오토 파일럿을 해제, 직접 키를 잡고 배 몰기 시작했다. 바람 속도 시속 80km에서 시속 102km 까지, 파고는 7.62m에서 10.6m 까지 올라갔다.

1980년 9월 9일, 더비셔호는 육지와, 인근 지나는 화물선과 통신했다. 오키나와 남동해상에서 악천후와 2일 간 싸우는 가운데, 갑자기 배를 덮는 엄청 거대한 파도가 쳤다. 파도가 끌고 온 바닷물의 무게는 대략 400톤에 달했다. 배 내에 물이 차오르고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너무 빨리 가라앉아 메이데이 신호를 보낼 틈 조차 없었다.

결국 더비셔호는 44명의 탑승객과 함께 심해로 가라앉았다.

15일, 오키드는 소멸됐다. 하지만 더비셔호의 연락이 오지 않자 일본 해상 자위대를 비롯해 곳곳에서 더비셔호를 찾아보려 했으나 더비셔호가 침몰하면서 생긴 기름띠만 발견했을 뿐, 더비셔호를 찾지 못했다. 더비셔호는 그렇게 실종처리, 탑승객은 전부 사망처리 됐다

4. 조사 과정

4.1. 허무했던 1차 조사

1989년 초에 첫 정부조사가 시작됐다. 조사는 커미셔너(wreck commissioner) W.C.달링이 이끌었다. 조사 과정에서 관련 전문가들과 변호사 비용을 사비로 지불해야 했던 유족과 해운노조는 당시 사법 절차에 참여하니 못했다. 더비셔호의 선사 '비비 라인'(Bibby Line), 선박을 건조한 '스완 헌터'(Swan Hunter)사, 등급을 매긴 '로이즈'(Lloyds)사도 법률지원팀을 선임해 조사 참여했다.

이들은 30번이 넘는 세션 끝에 '사실상 피할 수 없었던 자연재해로 침몰했다.' 고 결론내렸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커미셔너 1인에게 전권이 위임된 채로 결정이 나 결정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 못하는 등 조사가 차별적으로 이뤄졌다. 거기다 더비셔호의 자매선 카우룬 브리지호(Kowloon Bridge)가 1986년 엔진문제로 아일랜드해에서 침몰했으나 탑승객이 전부 구조된 사건#이 있었는데, 자매선이라 같은 식으로 더비셔호와 같은 구조로 만들어졌는디, 프레임 65에 문제가 생겨 3등분 나면서 가라앉았다. 이는 조사과정에서 증거자료로 채택되지 않았다. 더비셔호 침몰로 19세 아들 잃은 피터 리드야드는 해난구조협회 선박 조사원으로써, 화물창과 엔진룸 구분하는 두꺼운 벽으로 구조적 결함이 생기는 것을 지적했다.

노동당을 포함해 이 조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넘쳐 흘렀다. 그럼에도 W.C는 런던 로이즈에게서 조사를 한 대가로 은메달을 받는 등, 정부에선 이 조사를 끝으로 다시는 할 생각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1990년엔 정부의 공식 조사 보고서가 발행됐다. 우가족들은 사고 원인을 제대로 알아내기 위해 조사를 새로 재개하고, 선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캠페인을 열기로 했다.

우선 유족들은 비슷한 화물선 침몰 사례들을 조사, 해운노조를 통해 국제운수노동연합과 만나게 되고, 침몰한 더비셔호를 찾는데 필요한 비용 80만 파운드[2]을 지원받게 된다.

4.2. 희망이 보였던 2차 조사

유족들은 미국에게서 잠수 로봇[3]을 지원받아 더비셔호가 침몰된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로봇을 내려보내기로 했다. 전에 더비셔호 실종 이후 기름띠가 목격됐던 곡으로 가 로봇을 내리고 살피다가 마침내 더비셔호를 발견한다. 하지만 더비셔호는 멀쩡하지 못했다. 가라앉으면서 바닥과 부딪혀서 그런것도 있지만, 물이 차올라 빠르게 침몰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수압이 배를 누르면서 안에 있던 공기가 폭발하듯이 뿜어져 나와 수천개의 파편이 흩어졌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도 다른 이들의 주목을 다시 받기엔 충분했다. 우선 조사원들은 더비셔호 사진을 최대한 찍고 이를 영국 정부에 전달했다.

영국 정부는 처음엔 사고 원인을 파악하기엔 정보가 충분하지 못하다 했으나 이윽고 마음을 바꿔 조사를 위한 판사를 새로 임명, 증거 확보 비용 200만 파운드[4]를 새로 지원한다.

조사원들은 우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파편이 2km에 걸쳐서 떨어졌는데, 이를 전부? 137,000장이나 찍고 전부 이어 하나의 거대한 침몰선 지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기존 설계도를 바탕으로 대조해가며 어떤 점이 문제였는지 조사해나갔다.

예상과 달리 프레임 65는 문제 없었다. 철광석을 실으면서 무게중심을 잘못 계산했다는 설도 나왔으나 이 역시 조사 과정에서 전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조사하면서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왔다. 배 맨 앞의 갑판장 입구 해치가 열린 것을 발견한다. 이에 선원들이 갑판장 입구를 제대로 관리 안하는 실수로 침몰한게 아니냐는 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2차 조사는 여기서 종결, 선원들의 실수로 침몰한 것으로 결론났다.

4.3. 진짜 결과가 나온 3차 조사

하지만 갑판장을 닫는데 쓰던 부품들이 그대로 붙어 있는 등, 갑판장 입구를 제대로 관리했다는 증거가 나오면서 조사를 다시 하게 된다. 이전 더비셔호 치프 오피서인 나이젤 맬패스(Nigel Malpass)[5]가 조사에 참여, 더비셔호 모형을 만들고 모형 바다에서 당시 악천후를 재현해봤다.

당시 일기예보와 더비셔호 잔해의 파손 정도를 토대로 침몰할 때의 날씨를 재현했다. 아무리 파도가 몰아쳐도 더비셔호 모형의 갑판장 입구는 멀쩡했다. 단순 악천후로는 갑판장 입구가 망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조사하면서 새로운 부분이 주목받았다. 통풍구였다. 더비셔호의 잔해에서 통풍구들은 망가지고 덮개가 날아가 활짝 열린 상태였다. 더 조사한 결과, 통풍구가 망가지면 이곳으로 물이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통풍구가 직경 30cm 정도로 작다보니 들어오는 물의 양도 적긴 하나, 당시 더비셔호는 2일간 악천후와 싸우는 중이었고, 2일간 몰아치는 비와 파도 양을 계산하면 엄청난 양의 물이 들어온 상태였다. 계속해서 통풍구로 물이 들어오면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점차 약해지고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다 거대한 파도가 치면서 바다 속으로 내려간 사이 파도가 덮치면서 입구가 깨지고 물이 들어와 침몰한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진짜 문제는 통풍구였다.

5. 사고 이후

유가족과 전문가들은 침몰 등 사고 방지를 위한 추천 개선 사항 25개를 정리해 판사에게 제시, 이중 22개가 채택되고, 20개가 법제화됐다. 이후 전세계의 화물선 설계가 바뀌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국내에선 스텔라 데이지호 침몰 사고 이후 주목받기도 했다.

2018년 9월 15일 더비셔호 추모비 세워졌다.# 세워질 때 더비셔호가족협의회 (MV Derbyshire Families Association)도 참여했다.

오랜 조사가 걸린 사고인 만큼 이 방면으론 유명한 사건이라 디스커버리 채널의 재앙의 청사진(Blueprint for disaster), 항공 사고 수사대 제작진이 만든 Disasters at Sea 같은 다큐에서 다루기도 했다.

6. 둘러보기

역대 일본의 대형 사고 및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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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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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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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69년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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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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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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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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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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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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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미카와시마 사고
1962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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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58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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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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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1955년 4월 16~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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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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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4월 9일
37 일본항공 301편 추락 사고
1951년 11월 3일
32 오즈행 버스 화재
1951년 7월 15일
28 텐류가와 버스 추락 사고
1951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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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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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26일
23 미 해병대 C-54D 추락 사고
1950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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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4월 21일
35 카타가와현 미군 C-54기 추락 사고
1950년 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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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49년 4월 30일
63 나타치 기뢰 폭발 사고
1948년 3월 31일
49 킨테츠 나라선 열차 추돌 사고
1948년 1월 28일
188 죠오마루 조난 사고
1948년 1월 5일
36 메이테츠 세토선 열차 탈선 사고
1947년 5월 29일
41 미 공군 C-54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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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가 너무 커서 파나마 운하를 통과 못하기에 이렇게 가야 했다.[2] 한화로 약 12억원.[3] RMS 타이타닉호를 발견한 로봇으로 유명했다.[4] 한화로 약 31억원.[5] 사고 당시 더비셔호에 탈 뻔했는데 선원들 끼리 계획이 변경되면서 안탔던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