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라키 고원철도 열차 충돌사고 信楽高原鐵道列車衝突事故 | ||
사고 모습 | ||
<colcolor=#000000> 발생일 | 1991년 (헤이세이 3년) 5월 14일 오전 10:35 (JST) 사고일로부터 [dday(1991-05-14)]일 | |
유형 | 열차 간 충돌 | |
사고원인 | 폐색장치의 부적절한 사용(무인가/무통보 개조) 및 오출발검지장치의 오작동 | |
발생 위치 | 일본 시가현 코카시 미나쿠치초 우시카이, 오노타니 신호장 (滋賀県甲賀市水口町牛飼, 小野谷信号場) | |
인명피해 | <colcolor=#000000> 사망 | 42명 |
부상 | 614명 | |
운영기관 | JR 서일본, 시가라키 고원철도 | |
사고열차A | 열차번호 | 키부카와행 보통 534D |
차량 | 시가라키 고원철도 SKR200형 동차 SKR202, SKR204편성 | |
노선 | 시가라키선 | |
사고열차B | 열차번호 | 시가라키행 임시쾌속 501D |
차량 | 키하 58계 동차 1023편성 | |
노선 | 시가라키선 |
※ 다소 유혈낭자한 장면이 있으므로 시청에 주의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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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1년 5월 14일에 JR 서일본의 열차와 시가라키 고원철도 열차가 오노타니 신호장에서 충돌한 사고이다. 이 사고로 인해 42명이 사망하고 614명이 부상을 입었다.2. 전개
1991년 당시에는 JR 서일본의 쿠사츠선과 SKR 시가라키선이 직통운행을 실시하고 있었다. 시가현은 동년에 시가라키에서 열리는 "세계도예제 세라믹 월드 시가라키'91"(世界陶芸祭セラミックワールドしがらき'91)을 대비하여 SKR에 시가라키선의 수송력 향상을 위해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SKR은 경영이 매우 열악한 소규모 회사라, 시가라키선이 연결된 쿠사츠선을 운영하는 거대 철도회사인 JR 서일본의 협조가 필요했다.이에 SKR은 시가현과 JR 서일본의 협조를 얻어 오노타니 신호장을 건설해 열차의 교행을 가능하게 하여 수송력을 향상했고, 쿠사츠선에서 운행되는 JR 서일본의 열차가 시가라키선을 이용해 시가라키까지 직통하기로 했다. 또한 SKR은 통표폐색에서 자동폐색으로 바꾸었다. 이 신호시스템은 키부카와역에 있는 JR 서일본의 지령소에서 작동되어야 했기에 이 작업은 JR 서일본과 시가라키 고원철도가 동시에 진행했다.
1991년 5월 14일, 아침에 JR 서일본 지령소(키부카와역)에서 보낸 신호가 양사의 무단개조의 영향으로 시가라키선 전체에 하행신호만을 보내는 오작동이 발생했다.[1] 따라서 상행열차는 모든 구간에서 정지신호를 받았기 때문에, SKR측에서는 이를 당연히 오작동으로 보고, SKR의 보통열차(이하 사고열차A라 한다)는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오노타니 신호장으로 진입시켰다. 이 발차는 시가라키 고원철도 업무과장의 고압적인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그 업무과장은 사고 차량이 타고 있다가 충돌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한편 JR 서일본의 임시쾌속열차 '세계도예제 시가라키호'(世界陶芸祭しがらき号)(이하 사고열차B라 한다)가 시간표대로 신호장에 들어섰을 때, 반대편에 정차하고 있어야 할 사고열차A는 보이지 않았다. 이 때 원래는 지령소에서 오출발 검지신호가 수신되어 열차가 진행하지 않고 신호장에 정차해야 하나, 지령소의 전기공사로 검지신호기가 먹통이 되어 통과신호가 계속 들어왔기 때문에 사고열차B는 신호장을 그대로 통과해버렸다. 이 점을 놓고 JR서일본과 시가라키 고원철도가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바람에 과실비율 최종 확정까지 오랜 기간이 걸렸다.[2]
결국 10시 35분 경, 신호장을 동시에 들어온 두 열차는 신호장 서쪽에서 정면으로 충돌했고, 타오름 현상이 일어나면서 42명이 사망하고 614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를 '시가라키 고원철도 열차 충돌사고'(信楽高原鐵道列車衝突事故)라고 부른다.
당시 사고열차A는 15명이 탑승한 상태였으며, 그 중 12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사고열차B는 정원이 252명이었지만, 약 2.8배인 716명이 탑승한 상태였고, 그 중 3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3. 사고 이후
5월 26일까지 열릴 예정이었던 세계도예제는 사고 다음날부터 개최를 중단하고 그대로 종료되었다. 시가라키선은 약 7개월 간 운행을 중단했으며, JR과의 직통운행도 중지되었다. 1991년 12월 8일에 운행이 재개되면서 폐색방식은 통표(스태프)폐색으로 변경하여 오노타니 신호장의 사용도 중지되었다. 유족들은 1993년에 철도안전추진회의(TASK)를 결성하였고, 2019년에 해산하였다.사고 이후 대처에서 양사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는데, 적색 신호임에도 무단으로 출발시켜서 과실이 분명히 있었던 시가라키 고원철도 측은 유족을 한명한명 다 찾아가며 사죄하고, 피해자 대책 모임에도 출석했지만, JR서일본은 자신들이 잘못한 것이 없다는 식으로 고압적인 태도로 나와서 유족을 화나게 했고 첫 피해자 대책 모임에도 불참했다. 이로 인해 재판에서 JR서일본의 태도가 유족에게 정신적 피해를 줬다는 것이 인정되어 재판에서 고액의 민사배상 금액이 책정되고 피해자측 변호사비용까지 모두 부담하는 판결로 이어졌다.
이 사고 유족에게 지급해야할 민사배상금액은 최종적으로는 55억엔으로 확정되었으며, 시가라키 고원철도와 JR서일본이 일단 절반씩 분담하여 배상한 후 재판까지 가는 끝에 과실 비율은 적색 신호임에도 무단으로 열차를 출발시킨 시가라키 고원철도가 70%, 신호를 무단으로 개조하고, 개조된 내용을 매뉴얼에 반영하지 않은 JR서일본이 30%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시가라키 고원철도는 세계도예제 전까지 연간 1억원을 겨우 벌 정도로 재정능력이 없어서[3] 잠정 분담때도 시가현과 시가라키쵸가 시가라키 고원철도가 부담해야할 배상액 중 20억엔을 대신 부담[4]하고, 재판으로 과실비율이 확정되어 JR서일본이 시가라키 고원철도에게 20%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었지만 JR서일본도 구상권 청구를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시가라키 고원철도에서 부담한 배상액 조차 시가라키 고원철도의 재정에 부담을 주었고, 통표 폐색 전환 이후 1일 26왕복 평균 27분간격에서 1일 15왕복 최소 운행 간격 1시간 이상으로 운행 편수가 줄고 연선 인구 감소까지 겹쳐서 운송 수입이 감소하여 악화된 재정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2013년에 시가라키 고원철도는 운영 방식을 상하분리로 전환했다.
사고열차A는 1987년~1988년 제조된 후지중공업 LE-DC계열 차량으로, 버스 부품과 차체를 활용하여 원가를 절감하고 기존 디젤동차 대비 무게와 크기를 줄인 레일 버스였다. 그러나 해당 차량이 사고 당시 원형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게 파손된 것에 충격을 주었고 레일 버스에 대한 위험성이 대두되면서[5] 1990년대 후반에는 레일 버스가 도태되기에 이른다.
사고열차B는 1967년 제조된 차량으로, 사고 당시에도 도입된지 24년이 지난 노후 차량이었다. 이 사고 이후 1994년에 폐차되었다.
이 사고가 영향을 준 것은 다음과 같다.
- JR과 제3섹터간 임시 직통운전 중 상당수가 중지되었다. 이전에는 세계도예제 처럼 제3섹터 연선에서 일시적으로 관광객이 급증하는 이벤트가 있을 경우 JR의 주요 거점역에서 제3섹터의 역까지 직통하는 임시열차가 있었지만, 시가라키 고원철도 정면충돌사고의 사례를 통해 만에 하나 사고가 발생할 경우 누가 책임이 있는지 분명히 하기 어렵고, 제3섹터에서 일시적인 직통에 대응하는 인력과 장비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서 임시 직통열차 운행의 리스크를 부담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환승역에서 환승이 쉽도록 연계하는 것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 레일버스가 퇴출되고 레일버스만 운행하던 노선에서는 JR 직통운전이 완전히 폐지되었다. 레일버스를 운행하던 아리다철도가 정식으로 JR과의 직통운전을 폐지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 또한, 직통운전시에는 운행하는 노선의 운전기사가 운전을 담당하도록 규정이 개정되었다. 시가라키 고원철도의 사례처럼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인력을 파견하고 JR의 운전기사가 그대로 제3섹터 구간까지 같이 운전하면 제3섹터 구간의 운전 미숙으로 사고에 대처하기 어렵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치 엑스포때 JR 추오선과 아이치 환상철도의 임시 직통운전이 이루어졌었는데, 두 회사간 경계역인 코조지역에서 승무교대를 진행했다.[6]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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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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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이런 신호 오작동은 사고 전부터 계속 발생해서 시가라키 고원철도 업무과장이 단단히 빡쳐있던 상태였다. 사고 전까지는 신호 사용을 중지하고 사람을 통표로 쓰는 대용폐색으로 대처했고 5월 13일까지는 사고가 나지 않았다.[2] 시가라키 고원철도는 신호장에 파란 신호임에도 맞은편 차량이 대기하고 있지 않다면 반드시 일단 정차하고 확인하는 약속이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JR서일본은 그런 약속이 없었다고 주장했다.[3] 가입된 손해보험 배상한도액도 3억엔에 불과했다.[4] 원래는 긴급대출이었지만 결국엔 두 지자체 모두 채권을 포기했다.[5] 가장 큰 문제는, 승용차와의 철도 건널목 사고 수준의 사고에만 대응이 되어있었고, 철도 차량끼리의 정면 충돌과 같은 대규모 사고까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설계되었다는 것이다.[6] 이 직통운행계통은 엑스포 이후로도 출퇴근 수요가 있다는 것이 드러나서 임시 직통에서 정식 직통운전으로 전환하여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