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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22:21:33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역대 사망자별 항공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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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9.11 테러는 주요 공격 대상이 항공기가 아니었으며 항공기의 탑승자보다 건물과 지상의 사망자 수가 더 많았으므로 틀에서 제외함.
<rowcolor=#ffffff> 순위 이름 사고 항공기 기종 사망자 수 사고 원인 발생 위치 비고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1 테네리페 참사 보잉 747-121팬암
보잉 747-206BKLM
583명 지상 충돌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 로스 로데오 공항 항공기 사고 사망자 수 1위
2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보잉 747SR-46 520명 정비 불량 군마현 타노군 우에노무라 다카마가하라산 능선 단일 항공기 사고 사망자 수 1위
3 뉴델리 상공 공중 충돌 사고 보잉 747-168B사우디아
일류신 Il-76TD카자흐스탄
349명 공중 충돌 하리아나 차르키 다드리
4 터키항공 981편 추락 사고 맥도넬 더글라스 DC-10-10 346명 설계 결함 에르메농빌 숲
5 에어 인디아 182편 폭파 사건 보잉 747-237B 329명 폭탄 테러 코크 남쪽 190km 지점
6 사우디아 항공 163편 사고 록히드 L-1011-200 301명 화재 리야드 국제공항 불시착 후 항공기 전소
7 말레이시아 항공 17편 격추 사건 보잉 777-2H6/ER 298명 격추 도네츠크주 흐라보베
8 이란항공 655편 격추 사건 에어버스 A300B2-203 290명 격추 페르시아 만 호르무즈 해협 해상
9 이란 일류신 Il-76 추락 사고 일류신 Il-76MD 275명 불명 케르만 지역 산악지대 사고 원인이 규명되지 않음
10 아메리칸 항공 191편 추락 사고 맥도넬 더글라스 DC-10-10 271명탑승객
2명지상
정비 불량 일리노이주 디스 플레이네스
11 팬 아메리칸 항공 103편 폭파 사건 보잉 747-121 259명탑승객
11명지상
폭탄 테러 로커비
12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보잉 747-230B 269명 격추 사할린, 모네론 섬 부근 해상
13 아메리칸 항공 587편 추락 사고 에어버스 A300-605R 260명탑승객
5명지상
비행 규정 미비 뉴욕 퀸스 벨 하버 인근 주택가
14 중화항공 140편 추락 사고 에어버스 A300B4-622R 264명 조종사 과실 아이치현 나고야시 코마키 국제공항
15 나이지리아 항공 2120편 추락 사고 맥도넬 더글라스 DC-8-61 261명 정비 불량 제다
16 에어 뉴질랜드 901편 추락 사고 맥도넬 더글라스 DC-10-30 257명 CFIT, 조종사 과실 로스 섬 에레부스 화산 화이트아웃으로 인해 추락
17 애로우 항공 1285편 추락 사고 맥도넬 더글라스 DC-8-63 256명 결빙, 과적 뉴펀들랜드 섬 삼림
18 말레이시아 항공 370편 실종 사건 보잉 777-2H6/ER 239명 불명 인도양해상(추정) 항공기 실종으로 사고 원인이 규명되지 않음
19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 152편 추락 사고 에어버스 A300B4-220 234명 조종사 과실 메단 폴로니아 국제공항 북서48km 지점
20 트랜스 월드 항공 800편 추락 사고 보잉 747-131 230명 연료 확인 장치 합선으로 인한 폭발 뉴욕 롱아일랜드 동모리츠 남쪽 13km 지점
21 스위스에어 111편 추락 사고 맥도넬 더글라스 MD-11 229명 기내 화재 핼리팩스 인근 대서양
22(공동)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보잉 747-3B5 228명 CFIT, 악천후, 조종사 과실, 공항 시설 낙후 니미츠 힐
22(공동) 에어 프랑스 447편 추락 사고 에어버스 A330-203 228명 조종사 과실, 실속, 계기판 오류 인근 대서양 해상
23 중화항공 611편 공중분해 사고 보잉 747-209B 225명 공중분해, 정비 불량 펑후현 대만해협 상공
24 코갈림아비아 항공 9268편 테러 사건 에어버스 A321-231 224명 폭탄 테러 시나이 반도
25 라우다 항공 004편 추락 사고 보잉 767-3Z9(ER) 223명 기체 결함 수판부리 주 푸 토에이 국립공원 명령되지 않은 엔진 역분사 기능 작동으로 인한 기체 실속 및 양력 불균형
26 이집트 항공 990편 추락 사고 보잉 767-366/ER 217명 자살 비행 매사추세츠 낸터킷섬 남쪽 100km 지점 부기장의 고의 추락
27 에어 인디아 855편 추락 사고 보잉 747-237B 213명 기체 결함, 조종사 과실 뭄바이 앞바다
28 중화항공 676편 추락 사고 에어버스 A300B4-622R 196명탑승객
7명지상
CFIT, 조종사 과실 타이완성 타오위안시
29 아에로플로트 7425편 추락 사고 투폴레프 Tu-154B-2 200명 조종사 과실 우즈베크 SSR 우치쿠두크
30 TAM 3054편 활주로 이탈 사고 에어버스 A320-233 187명탑승객
12명지상
조종사 과실, 활주로 배수 문제 상파울루 상파울루 콘고냐스 공항 좌측으로 오버런하여 TAM 항공 물류센터에 정면으로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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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발생일 1985년 8월 12일 18시 56분 28초 경(UTC+9)
유형 정비 불량으로 인한 유압계통 손실
발생 위치
[[일본|]][[틀:국기|]][[틀:국기|]] 군마현 타노군 우에노무라 다카마가하라산 능선
탑승인원 승객: 509명[1][2]
승무원: 15명
사망자 승객: 505명
승무원: 15명 전원 사망
생존자 승객: 4명[3]
기종 Boeing 747SR-46
항공사 일본항공
기체 등록번호 JA8119
출발지
[[일본|]][[틀:국기|]][[틀:국기|]] 도쿄 국제공항[4]
도착지
[[일본|]][[틀:국기|]][[틀:국기|]] 오사카 국제공항[5]

1. 개요2. 사고기3. 승무원4. 사고 경과
4.1. 이륙4.2. 사고 발생4.3. CVR(Cockpit Voice Recorder) 조종실 음성 녹음4.4. 당시 기내의 상황4.5. 추락
5. 늦어진 구조작업6. 생존자7. 희생자
7.1. 연예인 희생자7.2. 한국인 / 한국계 외국인 희생자
8. 사고 원인9. 사고 후10. 예방?11. 관련 동영상12. 기타13.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もう(あー)だめだ![6]
이젠 틀렸어![7]
― 타카하마 마사미 기장의 마지막 외침
<colbgcolor=#ddd,#191919> 일본어 [ruby(日本航空, ruby=にほんこうくう)]123[ruby(便, ruby=びん)][ruby(墜落, ruby=ついらく)][ruby(事故, ruby=じこ)]
영어 Japan Air Lines Flight 123 crash

1985년 8월 12일[8] 오후 6시 57분경 도쿄 하네다 공항을 출발하여 오사카로 향하던 일본항공 소속 보잉 747(기체 등록번호 JA8119) 민항기가[9] 도쿄에서 100km 떨어진 군마현 부근의 타카마가하라 산 능선(오스타카노오네, 御巣鷹の尾根)에 추락하여 탑승인원 524명 가운데 520명이 숨진 참사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단일 항공기 사고,[10]9.11 테러가 최악의 사고이다.], 항공기 탑승객 총 사망 순위 세계 2위,[11]583명 사망)이다. 아까 말했듯이 복합적 경우로는 9.11 테러이다. 참고로 9.11 테러의 인명피해 기록도 스루가만 상공 니어미스 사고로 인해 깨질 뻔했다. 그것도 같은 항공사 비행기들로 인해. 물론 이 기록은 절대로, 그리고 영원히 깨지면 절대 안 되는 참혹한 기록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일본에서 발생한 비자연재해 인명피해 사건 1위[12]458명의 목숨을 앗아간 미이케 탄광 폭발사고, 3위는 264명의 목숨을 앗아간 중화항공 140편 추락 사고/ 참고로 일본 근현대사 최악의 비자연재해 인명피해 사건 1위는 1934년 3월 21일 발생해 2,166명의 목숨을 앗아간 하코다테 대화재다.]를 모두 기록한 사상 최악의 참사이다. 일본항공 자체가 여러 사고로 인해 전일본공수에 밀리던 상황이었는데 이 초대형 사고가 터지자 일본항공은 물론 일본 내 비행기에 대한 인식 자체가 매우 악화됐다.

사고 이후 123편은 당연히 영구 결번되었으며 현재 일본항공의 하네다-오사카 노선에서 121편 다음은 125편이다.[13][14]

2. 사고기

사고기의 기종은 보잉 747SR-46였다. 보잉 747SR은 보잉 747-100을 일본 국내선용으로 커스터마이징하여 제작된 버전으로, 일본항공과 전일본공수 두 항공사에 의해 운용된 기종이다.

일본 국내선의 막대한 수요를 만족시키고자 일본항공이 보잉에 발주하여 제작된 사양으로[15], 3시간 미만의 단거리 비행에 알맞게 연료 탑재량을 줄여 이륙 최대 중량을 줄이고 수송량을 극대화시키고 잦은 이착륙 환경에 맞게 일부 구조와 랜딩 기어를 보강한 기종이다. 사고기의 경우 정원이 총 528명이었는데, 원판인 보잉 747-100의 일반적인 3클래스 좌석 배열 정원이 366명인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탑승했는지 알 수 있다.

사고기(기체 등록번호 JA8119)는 1974년 1월에 생산되었는데 1978년 JL115로 운항하던 도중 테일 스트라이크로 기체 후미가 파손되었다. 하지만 이 사고 이후 수리를 부실하게 했는데 이것이 결국 참사의 원인이 되었다.

파일:external/file1.bobaedream.co.kr/CRc5069e2aa34b78.jpg

1985년 8월 12일 사고 발생 1시간 전 후쿠오카에서 돌아와서 하네다 공항에 착륙하는 JA8119.[16][17] 그뿐만 아니라 아래 다큐멘터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바로 사고가 일어난 그 비행을 위해 택싱하고 이륙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영상으로 남아 있다[18]. # # 사고 바로 직전 사고 당일의 비행기의 마지막 모습이 사진으로 남은 것은 20세기에는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19][20]
파일:JAL123with1985.8.12.jpg

사고 당일 하네다 국제공항에서 이륙을 시작하는 JA8119의 모습. 오른쪽 아래에 '''85 8 12'' 라고 쓰여 있다.

파일:마지막2.png

사고 당일, 사고 편명으로 이륙하는 JA8119의 영상 캡처본. 이 영상은 항공 사고 수사대에도 나온 적이 있다. 실제 이륙 영상[21]

파일:external/www.tailstrike.com/JAL123_2.jpg

테일 스트라이크 수리 후 추락 사고 전에 이타미 공항에서 찍힌 사진이다. 기체 뒤 끄트머리 부분이 지저분해 보이는 것이 테일 스트라이크의 흔적이다.

파일:external/pbs.twimg.com/BRbodRKCcAAcj7h.jpg

사고 당일 다른 노선으로 비행하던 중 탑승객[22]이 찍은 우측 주익 상단에 새겨진 기체번호.(JA8119)

3. 승무원

비행 승무원
파일:ZCGV9x1.png
기장: 타카하마 마사미 (교관으로 부기장석에 앉음.)(高濱 雅己[23], 49세, 운항부분 지도 교관, 총 비행시간 1만 2423시간 41분)
부기장: 사사키 유타카 (부기장으로 기장석에 앉음.)(佐々木 祐[24], 39세, 기장 승격 훈련생, 총 비행시간 3963시간 34분)
항공기관사: 후쿠다 히로시 (당시에 가장 침착했던 사람)(福田 博, 46세, 엔지니어 부분 교관, 총 비행시간 9831시간 3분)
수석 사무장
파일:external/www.goennet.ne.jp/n-jomu4.jpg
하타노 쥰 (비상 안내방송을 함.)(波多野 純, 39세, 총 비행시간 1만 225시간)
파일럿들은 조종이 불가능해진 기체를 포기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추락까지 약 30여 분을 더 버텼다. 당시 이 비행기는 부기장의 기장 승격 훈련을 겸하였기에 사사키 유타카(佐々木佑) 부기장은 기장석에서 비행기 조종과 승무원에게 지시하고 경험 많은 베테랑이었던 타카하마 마사미 기장은 부기장석에서 부기장의 기장 승격 훈련을 지도하며 관제탑과 교신을 주로 맡았다. 때문에 아래의 교신 내용을 들어 보면 기장이 교신을 담당하고 엔진 출력 조종 등 원래 기장의 역할은 기장이 직접 하지 않고 부기장을 독려하였다.
파일:JAL123전원승무원.jpg
비행 승무원들을 포함한 모든 승무원들의 사진.
사진 속에 있는 전원이 사망하였다.[25]
파일:external/blog-imgs-54.fc2.com/20120914123521800.jpg

당시 일본항공 123편 승무원 배치도. PUR은 사무장(Purser), AP는 부사무장(Assistant purser), STW는 스튜어디스(Stewardess)를 의미한다.

4. 사고 경과

4.1. 이륙

사고 당일은 일본의 추석에 해당하며 일본의 2대 명절로 불리는 오본(お盆) 전날로, 탑승객은 대부분 샐러리맨들과 귀향객, 여행객들이었다. 또 기체는 삿포로 1 왕복[26], 후쿠오카 1 왕복[27] 비행을 한 후 오사카(이타미)까지 왕복하여 하네다로 돌아온 다음[28] 그날의 비행을 마칠 예정이었다. 이런 까닭에 항공기관사는 오랜 시간 동안 조종실에 탑승하고 있었다(도쿄(하네다)~후쿠오카 왕복편으로 탑승). 부기장은 다른 비행기에서 기장 승격 시험을 마친 다음 123편을 타게 됐고 기장은 그 날 첫 비행이었다.

파일:external/www.geocities.co.jp/ticket2.jpg

사고 당시의 123편 비행기 티켓. 이 티켓은 생존자인 카와카미 케이코의 티켓이다.

사고기는 18시 정각에 하네다 국제공항을 이륙하여 56분의 비행을 거쳐 18시 56분, 즉 실제로 비행기가 추락한 시각에 오사카 국제공항에 착륙할 예정이었다. 출발 예정 시간보다 4분 늦은 18시 04분에 지상이동을 시작했으며 18시 12분에 활주로를 이륙했다. 이후 사고가 나기 직전까지 기체의 모든 계기는 정상 작동했다. 연료는 약 3시간을 비행할 수 있는 양이 탑재되었다.

4.2. 사고 발생

당일 JAL123편은 하네다를 출발한 후 예정대로 비행하고 있었으나 이륙한 지 12분이 지난 18시 24분에 고도 24,000ft(7,315.2m) 상공에 도달한 직후 큰 폭발음이 들리고 후쿠다 히로시(福田 博) 항공기관사(FE)의 계기판엔 R5(오른쪽 5번째)도어의 경고등이 점등되었다. FE는 이 도어가 떨어져 나갔다고 판단하고 조종사에게 알렸고 경고 50초 후에 조종사는 긴급 사태(EMERGENCY)인 '스쿽 7700'[29]을 발신했다.

사고 직후 비행기가 상하로 요동치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기장은 긴급 강하를 시도하면서 도쿄 국제공항으로 회항을 요청했다. 당시 도쿄 컨트롤에서는 나고야 공항까지[30] 직선방향으로 72마일(120km)정도 떨어져 나고야에 비상착륙이 가능한지 물어봤지만 기장은 하네다에 착륙해야 한다고 답했다. 아마도 하네다의 활주로가 나고야보다 더 길어서 그나마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때 날아간 것은 R5 도어가 아닌 벌크헤드와 수직 꼬리날개였고 설상가상으로 유압계통까지 같이 파괴되어 조종타면을 움직이는 유압액이 새 버려서[31]조종불능에 빠졌다. 물론 항공기의 유압계통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보통 다중 계통으로 구성하며 747의 유압계통 역시 4개 채널로 구성하지만[32] 123편은 불행하게도 4개가 전부 찢겨나가고 말았다. 보잉 747은 꼬리날개 바로 밑에 모든 유압장치 파이프가 지나가는 구조인데 꼬리날개가 파괴되면서 유압장치 파이프가 같이 날아갔기 때문이다.[33]

조종불능에 빠진 직후 위와 같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조종사들은 플랩과 엔진 4개의 출력을 조정하여 어떻게든 기체를 제어하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한 번 선회를 시도하여 9,000 ft(2,743.2m)를 내려와 13,500 ft(4,114.8m)로 강하한 직후 기체의 불안정성이 증폭되면서 조종사는 결국 관제소에 조종불능을 보고했다. 이후 기체는 약 30분 동안 불안정한 상태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다. 이는 더치 롤, 휴고이드 운동 때문이다. 휴고이드 운동은 조종이 불가능한 기체의 기수가 위로 들리면 고도는 상승하면서 속력은 감소하고 어느 정도 속력이 감소하면 기수는 아래로 떨어지면서 고도는 다시 하강하며, 속력이 붙으면 다시 기체의 기수가 위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심지어 상하로 휴고이드 운동을 반복하는 상태에서 좌우로 요동치기까지 했는데 수직미익 파괴+유압계통 상실로 비행 안정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몇몇 승객들이 남긴 유서에는 휘갈겨 쓴 글씨가 남았다. 더불어 엔진 출력차와 플랩을 이용한 조향마저 말을 듣지 않으면서 기체는 도쿄 방면 항로를 완전히 이탈하였다.

한편 다급한 상황을 듣고 있던 주일미군 요코타 기지는 123편이 비상착륙을 할 수 있도록 활주로를 비운채 구급차와 소방차들까지 비상대기시켜 놓고 도움을 주려고 하였다. 123편은 엔진 출력을 이용해 우선회를 계속하며 요코타 기지에 착륙하려 시도했으나 그때 불어온 남서풍에 의해 혼슈 내륙의 산악 지대 방향으로 좌선회를 해 버리고 말았다. 항공 기관사의 제안으로 고도를 낮추려 랜딩기어를 내렸으나[34], 기체는 한 바퀴를 선회하며 되려 필요 이상으로 고도가 낮아졌다. 실속 상태만 간신히 막으며 계속해서 기수가 오르내리는 가운데 방향 조절은 완전히 불가능해졌고 비행기는 항로를 이탈해 하네다와 요코타의 정반대인 북서쪽으로 날아갔다.

최초 이상 발생 약 30분 뒤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승무원들이 몸부림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기체는 양력을 완전히 잃고 보잉 747기의 뱅크각 한계를 한참 넘어서 오른쪽으로 쏠려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기체를 안정시키기 위해 예비수단인 전력을 이용해 플랩을 전개했는데 이때 좌측의 플랩은 끝까지 전개되어 양력이 크게 발생한 반면 우측의 플랩은 중간에 고착되어 움직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좌우 양력이 불균형해졌기 때문이었다. 조종사들도 이를 인지하고 급하게 다시 플랩을 넣으려 했지만[35] 때는 이미 늦었다. 6시 56분경, 뒤늦게 기체가 상승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오른쪽 주 날개가 지면과 충돌하고 동시에 기체의 일부분이 뜯겨나갔고[36] 그 다음 기체 후부가 분리됐다.[37] 그리고 가까스로 잠시 상승했으나 조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기체는 기수를 내리면서 우측으로 회전했다. 마지막으로 123편의 메인동체부는 타카마가하라산의 경사면에 반전하는 형태로 충돌한 후 그대로 폭발하였다. 이때 동체부의 탑승자들은 모두 사망했다.

추락 이후에도 요코타 기지는 계속해서 요코타의 활주로는 비어 있으며 123편에게 언제든 착륙할 수 있다며 무전을 시도했지만 응답은 없었고, 도쿄컨트롤도 레이더에서 123편이 사라지자 다급히 요코타 접근관제소와 교신하라며 무전을 시도했지만 응답이 없자 구조대와 자위대에 구조를 요청했고 요코타 기지도 긴급경보를 발령하고 기지에 주둔한 미 공군 C-130과 미 해병대 헬리콥터를 이용해 수색을 시도했다.

4.3. CVR(Cockpit Voice Recorder) 조종실 음성 녹음


일본 운수성은 비공개 자료였던 본 기체 조종실의 음성 녹음 자료를 1999년 11월에 모두 폐기 처분했다고 발표했는데[39] 이를 몰래 재녹음한 자료가 유출되어 2000년 8월 JNN 뉴스의 숲에 방송된 이후 큰 파장이 일었다.[40]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 주의할 것. 특히 재난 관련 PTSD가 있는 사람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이 음성 기록에 경고음과 충돌음이 나오는 데다 처절한 상황이 그대로 녹음되어 있어 상당히 섬뜩하다.

사고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항공 사고 수사대사상 최악의 참사의 해당 에피소드를 보는 것도 추천한다. 전자는 교신 과정과 기내 상황을 각종 기록을 참고로 하여 극화 형식으로 대단히 급박한 분위기로 표현했고 후자는 타임 테이블 형식으로 상황을 분석하는 데 집중한다.[41]
극화 버전(한국어)
사고 전부터 추락까지 전체 버전[42]
3인칭 버전
콕핏 버전
X-Plane 11로 구현한 비행재연과 위의 CVR 기록, FDR 기록을 모두 덧붙인 영상. 위쪽의 영상들과 달리 조금 더 앞부분의 녹음분을 포함했기 때문에[43] 1분여간 조종사들과 승무원들의 일상대화[44] 및 급감압 이후 객실 방송, R5 카고도어 인근 좌석들의 산소마스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대화[45] 도쿄컨트롤 주파수 안에서 멀쩡하게 비행을 하는 다른 비행기들[46], 그리고 123편이 추락하여 레이더에서 사라지자 요코타 주일미군기지와 도쿄컨트롤 관제사가 다급하게 123편을 호출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4.4. 당시 기내의 상황

파일:ena9E4Y.jpg

사고 당일, 그리고 사고 당시 산소 마스크가 내려온 모습을 찍은 아직까지는 멀쩡했던 일본항공 123편의 마지막 기내 사진이다. 아직까지는 기내의 분위기가 침착해 보인다. 카메라필름은 무사히 보존됐으나 촬영자[47]를 포함한 사진 속의 승객 전원이 사망했다.[48]

18시 24분경, 기내에선 "펑" 하는 충격음이 들린 직후 각 좌석에 산소 마스크가 내려왔으며 "현재 긴급 하강(비상 강하)중입니다. 마스크를 착용해주세요."라는 프리 레코디드 어나운스[49]일본어영어로 방송되었다. 승객들은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 산소 마스크와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담배를 끄는 등의[50] 비상대책을 행했고 일부 좌석에선 수면에 충돌함을 대비해 구명조끼도 착용하게 하였다. 생존자[51]의 증언에 따르면 사태가 심각함을 느끼긴 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인지할 수 없었고 이상 발생 직후부터 추락할 때까지도 혼란스러운 기색은 거의 없이 침착히 행동했다고 한다. 18시 30분경 승객들은 마지막임을 직감하고 불안정한 상태의 기체 내에서 필사적으로 종이에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낙하 사고에선 이상 발생에서 수 초~수 분의 여유도 없이 바로 추락하곤 하지만 본 사고에선 30분 동안 비행을 계속했기 때문에 다행히 유서를 남길 시간이 있었다.

그 후 충격에 대비하기 위한 '안전 자세[52]'를 취하였다. 기내 방송으로 유아를 동반한 부모와 유아 옆 승객에게 아이를 감싸는 방법, 신변물을 확인하고 예고 없이 착륙할 상황도 있음을 알리는 방송 등이 흘러나왔다.

조종실에선 도쿄 항공 교통 관리부를 통해 몇 번이나 "조종 불능" 신호를 전했다. 하네다 공항 관제에서 123편의 주파수 변경을 지시했으나 조종사들이 비행기의 위치를 파악할 때 사용하는 VOR 수신 안테나는 하필 수직미익 상단에 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수직미익과 함께 파괴된 후였고[53] 따라서 비행기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하네다 관제는 '사이타마현 쿠마가야(熊谷) 서쪽 25마일'임을 알렸다. 이때 기체는 사이타마현의 오타키촌 부근을 비행하고 있던 상태였다. 나가노현 카와가미촌에 진입할 때즈음 오른쪽으로 선회하여 오스타카 산 방면으로 향했는데 이 부근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사람이 머리 위를 천천히 선회하는 123편을 목격하였다. 목격자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고 비행 상황에 대해 증언하였다. 위에 있는 CVR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하네다로의 귀항을 요청했으나 조종 불능 때문에 하네다 공항과 반대 쪽으로 계속 멀어졌다.[54]

조종석에서는 승무원 사이에 산소 마스크를 착용할지 말지 토론하다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로 마지막까지 조종하기로 하였다. 마스크를 착용하면 서로의 목소리가 명확하게 들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기체는 속도와 동시에 엔진의 추진력도 크게 변동하였다. 이미 조종사에 의한 조작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북서쪽 570m 떨어진 계곡 너머 다카마가하라의 산등성이에 동체 후부가 꺾인 채 뒤집힌 상태로 돌격한 동체는 완파되었으나 4명의 생존자는 이 동체 후부의 좌석에 앉아 있었기에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낙하 시 속도는 265노트(시속 490km), 사고 시각은 18시 56분으로 Whoop Whoop Pull Up!과 함께 기장의 마지막 음성과 충격음이 들린 후 추락하고 CVR은 종료되었다.

4.5.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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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기 약 6분 전 아마추어 사진사가 도쿄도 오쿠타마마치에서 우연히 촬영한 일본항공 123편의 마지막 모습. 보다시피 수직꼬리날개가 통째로 사라졌다.[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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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30주기를 맞아 후지 TV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 최초로 공개된 초고화질 컬러 복원 사진[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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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추락한 현장

CVR과 FDR의 기록을 토대로 재현한 추락 순간.#

추락 직전 상승하기 위해 엔진 출력을 엄청나게 올린 상태로 지면에 곤두박질쳤기 때문에 추락 시 속도는 약 350kt(시속 650~700 km)였으며 그 충격은 수백 G(중력 가속도)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57] 충돌 과정에서 오른쪽 주날개가 지면에 닿으면서(나무에 부딪혔다는 설도 있다.) 기체 후부가 떨어져 나갔고[58] 여기서 떨어져나간 후부는 꼬리를 따라 떨어져 충격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생존자가 나올 수 있었다. 기체 후부에 탑승했던 사망자들도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본체는 그대로 산과 충돌하였고 당연히 생존자는 나오지 않았다. 또 본체에 탑승했던 사망자들은 신원 확인도 불가능할 정도로 참혹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충돌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일례로 타카하마 마사미(高濱 雅己) 기장의 시신은 완전히 불타 버려 유전자 감식이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었고 확인 가능한 치열 5개만 남은 아래턱뼈로 신원을 겨우 확인했으며, 사망자 520명 중 사람의 형체를 갖춘 시신은 177명에 불과했다. # 타카하마 마사미 기장의 장녀 요코(洋子)는 녹음본이 공개되기 전까지 15년간 "519명을[59] 희생시켜 놓고는 뻔뻔히도 잘도 살아있구나."라는 전화를 수없이 받는 등, 일본 전국적 단위로 이지메를 당했다.[60][61] 2000년에 녹음본이 공개되고 나서야 마지막까지 기장이 최선을 다했음을 인정받았다. 얄궂게도 이 녹음본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언론에 유출된 것이었다. 참고로 요코는 아버지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지킬 수 없었던 항공 안전에 헌신하겠다는 목표로 현재 아버지가 근무했던 일본항공객실 승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5. 늦어진 구조작업

구조작업이 늦어지고 생존자가 적어진 원인 중 하나는 추락 지점이 군마현[62]의 남서부 최고 해발고도 2017m[63]의 쿠모토리산 중턱이어서[64] 접근이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8.12 연락회 주도로 참사 장소에 등산로 등이 잘 마련되었지만 참사 당시에는 험준하고 넓은 산악지대 정중앙이어서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는 도로조차 근처에 없었고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조그마한 마을도 해발고도 2000m인 타카마가하라산 정상 넘어 5km 거리의 나가노현에 위치하며 같은 군마현 내 조그마한 마을이어도 적어도 7km는 벗어나야 나오기 시작하는 등 구조인력이 접근하거나 생존자를 후송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이유들을 들어 추락 후 무려 14시간이 지나서야 구조를 시작했다. 비행기가 조종불능이 된 후 30여 분 동안 하네다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느니 스로틀을 조종해 되도록 구조가 쉬운 평지 지역에서 선회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하는 의견도 있지만 기타 문단에 후술하였듯, 결국 구조하는 것도 착륙을 할 수 있어야 가능한데 당시 모든 조종면이 먹통이었으니 조종사들도 착륙을 못시키다 추락했고 평지 지역으로 못 간 것도 산악지대로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라 추락을 피하려다가 가게 된 것이기에 무의미한 가정일 따름이다.

추락 당시 비가 내리고 있어 다행히 추락한 기체가 2차 폭발을 일으키지 않았고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이 추락 현장에서 아직 살아 있었다. [65] 당시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잔해 속에서 죽어가던 희생자들의 비명 소리가 밤새 지속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구조 활동이 시작되는 다음 날 9시가 되기 전 승객 상당수는 추운 밤을 견디지 못하고 저체온증으로 숨을 거두었다.[66] 특히 사고 수습 이후의 부검 과정에서 기체 후미의 탑승객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추락 이후 사망했음이 드러났다.[67]

사고 현장에 처음 도착한 자위대 헬기 조종사가 생존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보고한 것이 일본 정부가 늑장 구조 작업을 결정한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추락 직후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많았고 헬기 소리가 들렸을 때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헬기는 생존자가 없다고 판단해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일본 정부가 사고 수습을 방해했다는 음모론부터 구조 활동 자체가 성실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음모론에 이르기까지 온갖 확인되지 않은 추측성 보도와 여기에 온갖 살을 붙여 재생산된 음모론들이 기승을 부렸다. 이러한 문제는 당시 제기되던 기장 개인에 대한 비난과 함께 이 사건이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던 대규모적인 항공사고였음을 짐작케 한다.[68] 사고 당시 보도 및 이후 제기된 무수한 음모론 중에서 특히 많은 주목을 받은 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추락 현장에서 방사능이 검출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중성자탄에 의한 테러라는 보도까지 나왔을 정도였다.[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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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 활동을 벌였을 당시 뉴스와 신문에 생존자가 7명이라고 보도되었다. 먼저 생존자로 보고된 4명 이외의 다른 3명을 더 구출하였다는 것인데 4인이 생존한 현장에서 200m 급경사를 오른 지점에서 아사히 신문의 사회부 기자가 "지금 막 3명의 생존자 구출! 1명은 들 것이 필요 없을 만큼 건강하며 구조대원에게 안겨 있다."고 무선으로 보고한 것이다. 후지 테레비의 뉴스 레포트(ニュースレポート)에서도 "현장은 참담한 상황입니다. 곧이어 들것에 실린 7, 8세 가량으로 보이는 소년이 실려오고 있습니다."라고 생중계되었다. 그러나 이 추가로 발표된 생존자 3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미디어에서 온데간데없이 언급이 사라졌다.
위에서 언급된 생존자 3명 중 들것이 필요없을 만큼 건강한 1명은 사진으로 보이는 소년인 듯하다. 뉴스에서 언급된 들것에 실린 7, 8세 소년과 동일인물은 아닌 것 같다. 즉 생존자는 8명이라는 얘기이며 의료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사진 상으로 근육이 접힌 방법으로 볼 때 자력으로 팔을 들고 있다고 하는데 이 시점에서 이 소년은 무사히 살아 있었던 듯하지만 이후의 소식은 불명이고 생존자 명단에도 없다. 공식 생존자 4명은 모두 여자이다. 음모론을 떠나서도 참으로 기묘한 일. 과거에 구출 8명, 생존 4명이라는 자료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71] 구조 후에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쇼크로 결국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 또한 8월 13일 오전 9시~10경 소방대원이 추락 현장에서 짐승들이 다니는 길을 올라가는 도중에 내려오는 중학생 정도 되는 남자를 포함한 남자 4명의 일행을 만났는데 충격적인 현장에서 내려왔음에도 인사해도 대답 없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수상한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이 남성들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이이즈카 사토시 [飯塚訓]저, '추락 현장, 남겨진 사람들' p119, 5행) 사실 워낙 끔찍한 사고로 수많은 시체들이 실종되었기에 밝혀지지 않은 생존자일 수도 있다. 혹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고 말이 없던 것일 수도 있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도 시체를 실제로 보면 기겁하며 큰 충격을 받기 마련이다. 특히 이 사고의 시체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불에 타거나 잔해 등에 훼손이 심한 시체들도 많았다.
* 영문 모를 서투른 사고 처리를 두고 자위대가 오인하여 격추했다느니, 무인기와 충돌했다느니, 또는 미국이 알면 좋지 않은 물건을 화물로 싣고 있었다느니 하는 음모론도 나돌았지만 그냥 관료주의로 인한 병폐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6.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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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편의 좌석표. 붉은색이 비행기의 앞부분이다. 핑크색이 생존자들의 좌석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출처)
(생존자 여성 4명의 구출 당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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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케이코 (좌석번호 60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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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부터 요시자키 미키코 (좌석번호 54D) , 요시자키 히로코 (좌석번호 54F), 오치아이 유미 (좌석번호 56C)
생존자는 JAL 승무원 오치아이 유미(落合由美, 당시 26세)[72], 요시자키 히로코(吉崎博子, 35세)와 장녀 미키코(美紀子, 8세), 카와카미 케이코(川上慶子, 12세). 기체 맨 끝 좌석에 있었기 때문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하게 발견된 다른 희생자들에 비해 큰 부상 없이 생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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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 사고에서 모녀가 모두 생존한 얼마 안되는 사고로, 둘은 모두 얼굴과 입 근처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당시 요시자키 가족은 아버지 요시자키 유조(향년 38세 吉崎 優三) 씨의 출장으로 도쿄에서 오사카행 비행기인 JAL123편을 타게 되었다고 한다. 또 미키코의 여동생인 요시자키 유카리(향년 6세 ゆかり) 양과 오빠인 요시자키 미치요시(향년 9세 充芳) 군 역시 같이 탑승했는데 안타깝게도 히로코는 장녀 미키코를 제외하고는 가족과 함께 돌아오지 못했다. 또한 이 사고로 미키코 양은 추락으로 인한 부상으로 사진으로 보다시피 치아나 얼굴에 상처가 심했다. 이 때문에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했으며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제외하면 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비행기를 단 한 번도 못 탔다고 한다. 미키코는 30년이 지난 후에도 취재를 일절 거부했고 어머니 히로코가 사고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취재진한테 안부만 묻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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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희생자

승무원들이 처절하게 노력하는 동안 승객들은 비행기 구석구석에 유언을 새기고 마지막 사진을 찍어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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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상단부터 순서대로)
마리코(マリコ), 츠요시(津慶), 치요코(知代子).
부디 사이좋게 열심히 엄마를 도와주렴.
아빠가 이렇게 된 건 유감이구나.
분명 살아남을 수 없을 거다.
원인조차 알 수 없어.
이제 5분 지났다.

(비행기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어디를 향해 가는 거며, 어떻게 되는 걸까.
츠요시, 굳건하게 살아가거라.

다시는 비행기를 타고 싶지 않아.
하나님, 제발 살려 주세요.
어제 함께한 식사가 마지막일 줄은…
기내에서 뭔가 폭발한 듯한 모습으로 연기가 나고 있어.

(아이들의) 엄마, 이렇게 되다니 유감이야.
잘 있어, 아이들을 잘 부탁해.
지금 6시 반이야.
비행기는 회전하면서 급속히 강하 중이야.
지금까지 정말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감사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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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해 주세요.
벨트를 풀어서 소지품을 확인해 주세요.
짐은 가져가실 수 없습니다.
하이힐은 벗어 주세요.
짐은 들지 말아 주세요.
주변의 몸이 불편한 사람을 도와주세요.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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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살려 줘.

죽고 싶지 않아.
토할 것 같아.
마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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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체가 크게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18:30 급히 하강 중. 수평 비행 중이다.
일본 항공 18:00 오사카행 사고.
죽을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료헤이.
모두 건강히 지내세요. 잘 있어.
스미코(須美子), 미키(みき), 쿄코(恭子), 켄타로(賢太郎).

18:45 기체는 수평으로 안정해 있다.
산소가 적어 불편하다.
기내에서 안간힘을 쓰는 목소리가 들린다.
기체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다.

18:46 착륙이 걱정이다.
스튜어디스는 냉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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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카미 이쿠오 당시 하우스식품 사장
한편 이 일로 자녀 셋을 한 번에 잃은 다부치 신고(田淵新吾) 씨와 그의 부인 테루코(田淵輝子) 씨의 사연이 2018년 33주기 다큐멘터리에 소개되었다. 다부치 요코(향년 24세 田淵 陽子), 미치루(향년 20세 田淵 満), 준코(향년 14세 田淵 純子) 세 자매는 여름방학을 맞아 여행을 가는 연년행사가 있었는데 늘 갔던 후쿠오카가 아닌 츠쿠바 엑스코로 휴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123편에 탑승했다가 모두 사망했다. 모친은 딸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술로 해소하며 살았고 남편은 그런 부인을 돌보며 심신이 황폐해지고 있었다.[90]그렇게 27년이 지난 후 2010년에 계속된 폭음으로 쓰러진 부인이 꿈 속에서 장녀인 요코를 만났는데 딸은 어머니에게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면서 강하게 질책하자 이에 마음을 고친 어머니는 이후 술을 끊고 뒤늦게 8.12연락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부부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전술한 33주기 다큐멘터리에서 부부 모두 80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험한 오쓰타카산에 올라 딸들의 묘를 찾는 장면이 방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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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카하라 나카아키라 당시 오사카대 기초공학부 교수
일본에서 대뇌 생리학에 한 획을 그은 대뇌 생리학의 권위자이자 오사카대학 기초공학부 전임교수였던 츠카하라 나카아키라(塚原 仲晃)도 1986년부터 문부성의 주도하에 시작 예정이었던 대뇌 가소성 연구를 대비해 사고 당일 협의를 하러 갔다가 이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던 중 향년 51세로 변을 당했다. 실제로 츠카하라 나카아키라는 당시 세계적인 뇌 신경학자여서 일본 뇌 생리학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 학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36세의 젊은 나이로 오사카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시냅스, 기억에 관한 연구에서 세계를 선도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고인 사후 1987년 뇌의 가소성과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가노쿠니야 서점에서 책이 발간되었으며 사고 발생 25년 후인 2010년 이와나미 복간 문고에서 복간되었다.

또 일본 브레인 과학 진흥재단에서는 츠카하라 교수의 사후 업적과 공헌을 기리기 위해 '츠카하라 나키아키라 기념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사고 당시 츠카하라 교수와 위에 상술한 미야지마 켄(美谷島 健) 군은 같은 좌석에 탔다. 미야지마군과 츠카하라 교수 사이에 탔던 여성은 당시 도쿠시마현에 거주했던 노닌 치에코(能仁 千延子, 당시 향년 22세) 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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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유카와 다이애나 희생자인 유카와 아키히사와 왼쪽이 다이애나의 친모

7.1. 연예인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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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큐 (본명: 오시마 히사시) 키타하라 요코 (본명: 요시다 유미코)

7.2. 한국인 / 한국계 외국인 희생자

파일:일본항공 123편 추락사고 희생자 故 전옥자, 故 크리스토퍼 김, 故 스코트 김.png
파일:일본항공 123편 추락사고 희생자 故 안시오.png파일:일본항공 123편 추락사고 희생자 故 정순덕.png파일:일본항공 123편 추락사고 희생자 故 이혜경.png
안시오는 일본에서 태어나 재일 한국인으로 살다가 사고 발생 10년 전부터 계속 한국을 오가며 송이버섯을 취급하는 식품 수출업을 하였다. 이후 사고 발생 5년 전인 1980년 부인 오공순(당시 나이 32세)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장녀 안희경(당시 4세), 차녀 안연정(당시 3세), 아들 안도영(1세)을 두고 있었으며 송이버섯 수출민 지문 날인 문제로 김포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출국하고 오봉을 지내기 위해 오사카의 친척집으로 가던 도중 변을 당했다.

정순덕은 당시 큰딸인 정화(당시 28세)와 일본 도쿄 아카사카에서 의류업을 했다. 실제로 정순덕은 전 영화배우 최지희의 친척인데 일본 도쿄 아카사카에 터를 잡은 최지희의 초청으로 큰 딸과 의류상을 했으며 작은딸 영화(당시 24세)는 한국에서 유치원 교사였다. 정순덕의 여동생 정영순(당시 38세)은 일본에 있던 조카 정화로부터 정순덕이 오사카에 수금하러 지인을 만나러 가는 도중 이같은 변을 당했다고 들으면서 울먹였다고 한다.

이혜경은 도쿄에서 연극을 전공하던 유학생으로 1984년 12월 유학길에 올라 생활하던 중 사고 당일 오사카에 있던 셋째 친언니를 만나러 가다가 변을 당했다. 1985년 9월 귀국 예정이었으나 귀국을 1개월 앞둔 시점이라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국제결혼영국인 킴블 매슈즈(キンベル・マッシューズ, Kimbell Matthews)와 니시구치 마사코(西口 昌子) 부부가 신혼여행을 마치고 이 비행기를 탔다가 변을 당해 주위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만석이었던 만큼 외국인 희생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중국인독일인 희생자가 각각 1명, 미국인 희생자는 6명. 엄밀히 따지자면 미국인 희생자 6명 중 3명은 한국계이다. 상기한 3명의 한국인과 합하면 한국 혈통의 사망자는 6명이다.[97]

8. 사고 원인

추락한 항공기는 사고 7년 전인 1978년 6월 2일 오사카 국제공항에 착륙하던 중 테일 스트라이크로 후미가 파손되어 제작사인 보잉정비를 의뢰한 기체였다. 비행기의 기압을 유지하는 벌크헤드가 파손되어 일본항공에서 수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규정대로 하자면 리벳 2줄이 박힌 이중 철판으로 동체와 고정해야 한다.[98] 그러나 보잉의 정비 총 담당자는 수리하면서 규정에는 적혀있지도 않은, 보강판을 두개로 절단하여 고정한다는 이상한 수리법으로 인해 리벳 2줄과 리벳 1줄이 박힌 이중 철판 두 개로 고정하는 꼴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실런트 한 줄만으로 압력을 지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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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수리(위)와 JAL123기에서 이루어진 수리(아래)의 차이를 설명한 사진이다.#

사실 이 수리가 끝나고나서도 사고를 막을 기회가 있었다. 그건 바로 1984년 11월 20일부터 12월 5일까지 사고기는 일본항공으로부터 C정비라고 부르는, 3000시간 이상 비행한 항공기를 대상으로 하는 대형 점검을 받았다. 이미 사고기는 잘못된 수리로 리벳에 균열이 점점 커지고있었는데, 문제는 일본항공 점검자들이 마지막까지 이 균열을 확인하지 못했다. 결국 점검 마지막날까지 이 문제를 찾지 못하고 항공기는 다시 투입되고야말았다. 점검 자체는 보잉사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문제를 확인하지 못한 일본항공 또한, 책임이 완전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안전불감증이 나중에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수리 이후 비행을 계속하면서 기압 변화에 따른 금속 피로가 누적되다가 이 벌크헤드가 터져나가자 비행기의 방향 안정성을 유지하는 수직 꼬리날개가 날아가 버렸다. 이때 승강타, 방향 타면을 움직이는 동력을 제공하는 유압 분배기인 토크 박스까지 터져 유압이 새어나갔고 결국 유압과 조종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여담으로 일본의 TBS 테레비에서 이 부실한 수리에 참여한 40여 명의 수리공 중 한 명을 인터뷰했는데 자신들의 수리가 원인이 아니며 그 근거로 사실 이중 철판은 자신들이 수리하기 이전에 애초에 두 장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설명을 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사실 1978년 테일 스트라이크 때문에 동체가 약간 변형됐는데 수리 후에도 사고 직전까지 캐빈 뒤쪽의 화장실 문이 잘 닫히지 않는다든지, 바람이 새어든다든지 휘파람 소리가 나는 등 결함이 있었다고 한다. 기체가 이미 뒤틀려 생긴 문제로 당연히 정상이 아니고 언젠가는 이 비행기로 사고가 날 것을 암시하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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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크헤드의 위치와 추락하기 전 아마추어 사진가가 찍은 사진에서 123편을 확대한 모습. 검은색 실선은 원래 있어야 하는 꼬리날개의 형상을 그린 것이다. 이걸 보면 수직꼬리날개 전체가 날아간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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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크헤드의 자세한 위치

다만 사고의 주 원인은 벌크헤드 파손이지만 이후 폭발적인 감압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폭발적인 감압이 없었다고 하는 측에서는 조종실 음성 기록을 근거로 산소 마스크를 착용할 여유가 있었음을 지적하지만 폭발적인 감압이 일어났다고 해도 무조건 그 직후 기내의 사람들이 의식을 잃지는 않는다. 보통 이 상태에는 순간적으로 수증기 응결이 일어나므로 감압을 알 수 있으며 자동(수동 가능)으로 산소 마스크가 좌석 근처에서 터져나온다. 이 때문에 아무리 감압이 일어나더라도 의식을 잃기 전 산소 마스크를 쓸 정도의 여유는 있다.

9. 사고 후

일본 측은 사고 원인 조사 후 보잉을 형사소송법에 따라 고발했으나 기각당했다. 일본항공은 피해자 측에게 총 7억 8천만 엔[99]을 조의금 명목으로 지급했으며 회장은 퇴임했다. 그리고 115편 테일스트라이크 사건 당시 기장과 일본항공 측의 정비 담당자인 토미나가 히로오와 엔지니어인 타지마 스스무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사실 이들은 보잉에서 수리해 온 기체를 검사해서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죄책감이 들었던 것이지만 위의 사고 원인 문단의 이미지를 보면 알겠지만 중앙의 보강판이 쪼개졌는지 앞에서 봐서는 바로 알 수 없다는 문제가 있어서 이들 입장에서는 약간 억울한 부분도 있다.

또 보잉 측의 정비가 올바르지 못했음이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일본항공은 보잉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소문에 한동안 시달려야 했다. 보잉이 주요 고객인 일본항공을 보호하기 위해 책임을 '뒤집어 썼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항공 사고 수사대에 따르면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항공에 책임을 전가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사족으로 이 사고로 인하여 일본항공은 물론이고 일본의 모든 항공업계가 큰 손실을 입었다. 일본 국내선 항공의 수요는 25%나 감소했으며 이마저도 많은 이들이 일본항공 대신 전일본공수로 갈아타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사고 이전에도 일본 항공은 경쟁사인 전일본공수보다 신뢰가 떨어졌고 국내외에서 추락 사고가 많았으며 당장 이 사고로 사망한 사카모토 큐도 원래 일본항공을 신뢰하지 않아 전일본공수의 항공기를 타고 다녔을 정도였다.

1986년 8월 사고 1주기 직전 오스타카산 능선의 추락 현장에는 승혼의 비(昇魂之碑)라는 위령비가 세워졌고구글 지도 동시에 북동쪽 10km 지점 우에노무라에 추모공원도 건립됐다.구글 지도 여기서 매년 유가족과 우에노무라 마을 사람들, 일본항공 사장 등이 참석하는 추모식을 열고 있다.2021년 추모식 기사 2019년 10월 태풍 하기비스로 인해 묘표가 소실되는 등의 피해를 입기도 했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영향으로 태풍 피해 재정비가 늦어지거나 추모식 규모가 축소되는 일도 있었으며 해가 갈수록 찾는 유가족의 수도 줄고 있지만 꺼지지 않는 주변의 관심 속에서 추모식의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이 사고의 충격이 워낙 컸던지라 일본항공은 이 사고 이후 현재까지 인명사고를 38년 동안 단 1건도 내지 않았다.[100] 다만 원가절감을 이유로 정비를 아웃소싱하는 상태며 이 사고 20주년 기념으로 위령제를 지낸 2005년 8월 12일 후쿠오카에서 호놀룰루로 가던 JALways(JAL 소속의 저가 항공사)의 DC-10이 이륙 직후 엔진 고장으로 화염을 내뿜으며 부품을 시가지에 떨어뜨리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2020년대에도 이 사건과 더불어 한 번 파산한 JAL을 신뢰할 수 없어 전일본공수(ANA)만을 이용하거나 가격이 비싸 ANA를 이용할 수 없을 경우에는 JAL이 아닌 저가 항공사를 사용하는 일본인도 여전히 많다. 그 정도로 일본인들의 기억 속에 큰 충격으로 남은 사건인지라 굳이 항공에 관심이 없는 사고 이후에 태어난 젊은 사람이라도 '123편' 이 사고 하나만은 대부분 안다.

2006년 본 사고기의 잔해를 주요 전시물로 일본항공이 안전계발센터#세이비조역 근교에 개설하였다. 2013년 12월에 도쿄모노레일 신세이비조역 인근으로 이전하였다. 평일 최대 20명씩 2팀, 1시간 30분씩 일반인 관람을 받는다. 기본적으로는 JAL의 직원연수 시설이다. 사전예약제.

2012년 10월 일본 WOWOW 방송에서 이 사고를 각색해 <능선의 저편에~아버지와 아들의 일본항공 사고>[101]라는 제목의 2부작 드라마로 방영했다. 이 드라마는 동명의 책을 원작으로 하여 내용을 구성하였는데 큰 줄기인 사건의 내용이나 중요한 에피소드들은 세세하게 사실로 배치하고 주 스토리가 되는 세 가족의 이야기는 가상의 가족으로써 행복한 모습을 극대화 시켰다가 사고 이후 슬픔을 보여줌으로써 내용을 좀 더 극적으로 구성하였다. 쿠니무라 준, 이시다 유리코, 하기와라 마사토, 히로스에 료코, 마츠자카 토리, 칸지야 시호리 등 연기파와 스타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화려한 라인업을 보여주었고 드라마 자체도 굉장히 잘 만들어졌다는 평. 2부작임에도 합동분향소와 유가족 대기실 세트장을 크고 그럴 듯하게 잘 만들고 엑스트라들도 아낌없이 투입하여 실제의 우울하고 슬픈 느낌을 잘 살렸다. 또 위에서 언급된 치비 VIP 시스템이나 13살 소년의 현장에서의 실신, 812 유가족 모임 등도 보여주면서 내용 자체에 자연스레 사실을 녹아내리게 하기 위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음을 느낄 수 있다.

2018년 8월 16일 사고 33주년을 맞아 후지 테레비에서 "8.12 일본 항공 점보기 추락 사고 33주년의 진상"을 방영했다. 1편, 2편, 3편, 4편

10. 예방?

이 사고 이후 일본항공은 조종사를 모아서 유압과 꼬리날개의 세로방향 안정 기능을 전부 상실한 비행기를 착륙시키는 상황을 훈련했는데 단 한 명도 비행기를 무사히 착륙시키긴커녕 타카하마 기장과 사사키 부기장이 버텼던 32분까지도 버티지 못했다.

참고로 모든 유압을 상실한 기체가 추락하지 않고 착륙이라도 한 경우는 1989년 7월유나이티드 항공 232편 사고2003년 11월 22일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하는 DHLA300 화물기가 이라크 반군의 지대공 미사일에 피격당해 왼편 날개 일부 손상으로 3계통의 유압을 모두 상실한 후 바그다드 국제 공항에 비상 착륙한 두 건뿐이다.[102] 이외에는 미국의 B-52 스트라토포트리스 폭격기도 비행 시험 중 수직 꼬리 날개가 통째로 뜯겨나간 일 정도다. 그나마 이쪽은 유압 계통이 무사해서 제어가 가능한 덕분에 무사히 착륙했다. 각각의 해당 문서 참조.
NASA 드라이든 연구소는 Propulsion Controlled Aircraft(PCA)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였는데 유압이 상실되었을 때 비행기가 엔진의 출력만을 통하여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하게 해 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였으나 항공기가 유압이 나갈 확률은 극히 드물다는 이유로 이의 채용은 항공사 자율에 맡겼다. 그리고 이 장비를 장착한 항공사는 한 곳도 없다. 다만 이는 항공업계의 안이함 때문만은 아니고 이 프로그램에 제약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로그램의 골자는 모든 유압이 나간 상태에서 좌우 엔진 출력으로 선회하고 상승과 하강을 조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모든 것이 다 정상인 상황에서 '유압회로만 전멸한 경우'에 쓸 수 있다.[103] 하지만 2003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DHL기 SA-7 피격 사고를 볼 때 어느 정도 항공기에 손실이 있어도 엔진 출력만으로 비상착륙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당시 DHL기는 날개가 손상되어 항력이 비대칭적으로 발생했고 연료가 새어 나가 화재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104]

JAL 123편이 유압 계통 완전 소실 후에도 30분이나 비행한 것이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이 때문이다. 만약 비행 균형 유지에 이상을 끼치는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사고 발생 직후 회복 불가능의 회전을 일으켜 즉시 추락했을 것이다. 만약에 이때 추락했으면 그대로 해상에 돌진하였을 것이다.

11. 관련 동영상

영상1
영상2
항공전문가 사고분석-플레인센스

후지TV에서 사고 30주기를 맞아 특별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생존자 요시자키 히로코의 발언을 토대로 드라마 형식으로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다. 나무위키에 게재되지 못한 세부적인 내용들도 나온다.

#1, #2[105]

12. 기타

특별수기 "오스타카 산" 48시간의 지옥

36년 전 8월 12일 일본 항공의 기체가 오스타카 산에 추락해 520명의 희생됐다. 당시 육상자위대 소대장으로 현장에 갔던 오카베 도시야씨가 48시간의 장렬한 구조 활동을 되돌아봤다.

주간 신초 2020 년 8월 13 · 20 일호

자위대는 8 월에 정기이동이 있어서 12일 주둔지의 대원클럽에서 전입대원의 환영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술도 마셨고 해서 주둔지 밖에 빌린 아파트에 가지 않고 부대 막사에서 자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 중대 당직간부를 선 사람은 사쿠마 유이치 중사(당시 36세)였습니다. 자기 전에 사쿠마 중사에게 항공기 추락 보고를 받았습니다. (당시)제12사단의 담당 지역에서 난 사고이기에 제1공정 단에 재해 파견 준비 명령이 발표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일단 잤습니다.

그동안 헬기에서 레펠 강하(로프를 사용한 수직 강하)에 의한 신속한 현장 진출의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제1공정단의 차례가 되어, 제12사단에 배속되어 재해 파견이 새벽에 결정되었습니다.

아침 5시 전에 "명령 수령 나팔"이 울리고 영내에 남아 있던 우리는 즉시 출동 준비를 갖추고 집합, 대형 헬기 V-107 여섯 대를 타고 7시 54분, 나라시노에서 출발했습니다. 준비라고 해도 장비는 항상 등에 매고 있었고, 출발 전에 지도와 건빵을 지급받은 정도입니다.

여섯 대의 헬기 중 1번기는 제1공정단 파견부대 지휘관인 보병대장 이하의 "구조부대본부"의 요원이 탔고, 2번기부터 6번기는 각 대원 12명이 탑승했습니다. 12명 중 1명은 의무병이었고, 나는 3번기의 소대장으로 부하 중 10명을 선발했습니다.

소대장인 내 서포트로 평상시 연습에서도 항상 함께 했던 사쿠마 중사를 가장 먼저 지명했습니다. 헬기 조종사들도 어느 때보 다 빠릿하고, 긴장된 공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현장 "오스타카 능선" 상공에 도착해 하강을 시작했을 때가 8시 48분이었습니다. 우선 1-3번기의 대원이 현장에 내렸고, 4-6번기는 소마가하라 산기슭에서 일단 대기하게 되었습니다. 공수 부대는 지휘관이 "먼저 하강"하는 전통이 있고, 3번기는 내가 리더이기 때문에 먼저 로프를 타고 산 중턱에 내려 섰습니다. 내 다음에 내린 것은 사쿠마 중사입니다.

공수대원에게 레펠 강하는 다반사이지만, 가파른 경사면에 착지한 순간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부츠의 뒷면에 척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있었습니다. "뭐지?"라고 생각 발밑을 봤더니 거기에 있던 건 사람의 "귀"였습니다. 사체를 건드린 것을 알고, 바로 "죄송합니다"라고 마음 속으로 사과했습니다.

강하 후 보병대장이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생존자 구출"과 "지형 정찰"이었습니다. 2번기의 소대와 함께 생존자를 수색하면서 능선을 올라갔습니다. 저와 2번기의 소대장을 중심으로 좌우 각자 5-10 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가로로 퍼져 경사면을 올라가기로 되어있었습니다.

"생존자 발견!"

숨막히는 광경이었습니다. 항공기 연료에 불이 붙어 특이한 냄새가 나고, 바위에는 사람의 내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면 또 머리칼이 달린 두피가 나무에 매달려있었습니다. 경사가 심해서 나무 줄기를 붙잡고 오르는데, 나무에 손댄 순간 소름이 끼쳤습니다. 자세히 보니 나무 전체가 피와 살점으로 새빨갛게 물들어있었습니다. 내 뒤를 걸으면서 그 "빨간 나무"를 만져 버린 대원도 "악"하고 소리질렀습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직업을 잘못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지옥과 같은 현장을 목격하고, 나는 "전장의 광경이란 아마 이런 것일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견딜 수 없었고, 나는 이런 일에 맞지 않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부하 앞에서는 티낼 수 없었지만, 그것이 본심이었습니다. 오스타카는 나에게 첫 재해 파견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익숙해졌지만, 그런 느낌은 불식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대원 모두가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생존자가 있을 리가 없다"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경사면을 오르면 오를수록 멀쩡한 시신도 적어졌습니다. 있는 것은 손과 발 같은 시체의 부분과 살점 피부뿐. 너무 처참한 곳이었습니다. 이런 사고로 도저히 인간이 살아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생존자를 찾지 못한 채 능선을 오르다, 이번에는 다른 방향을 향해 내려 가면서 수색을 계속하려고 했을 때입니다. 무전에서 놀라운 정보가 흘러 왔습니다. "생존자 발견!" 귀를 의심했고, "어?"라고 하며 다른 대원과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무선을 보내온 것은 4-6번기에서 내린 그룹이었습니다. 당초 소마가하라에서 대기를 명받은 3번기는 우리보다 1시간 뒤인 9시 45 분에 현장에 와서 하강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하강 지점에서 능선을 올라간 반면에, 그들은 대대장의 명령에 반대 방향으로 내려 가면서 수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게노사와"라는 산기슭 둘레에서 도보로 올라왔다가 현지 소방단과 마쓰모토 주둔지의 제13연대와 합류했고, 그래서 4명의 생존자를 발견한 것입니다.

능선에 있던 우리는 "강하 지점에 돌아가"라고 지시를 받았습니다. 가파른 산에서 그 지역이 거의 평탄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부근에서 생존자를 헬기에 매달게 되었습니다. 하강 지점으로 잠시 돌아가니, 아래에서 생존자가 들린 채 올라왔습니다. 분명 사고기의 화장실 문 등을 들것으로 써서 옮긴 것 같습니다.

생존자 4명은 그 비참한 현장에서 하룻밤동안 발견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상당히 쇠약해져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의 소녀(카와카미 케이코씨로 알려짐)에게 "힘내!"라고 말을 걸면 "응응"이라고 수긍 같은 반응을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괜찮아 살 수 있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시간이 길었습니다. 구출용 헬기가 좀처럼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 번 요청하고 있는데 전혀 오지 않았습니다. 보도진의 헬기를 포함하여 많은 항공기가 상공에 날고 있었기 때문에 2차 재해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결국 생존자가 리프팅 지점에 옮겨진 후 헬기에 수용이 완료될 때까지 1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헬기를 기다리는 동안 모두가 좌절하고 그중 현장에 도착한 적십자의 여성 간호사가 엄청난 서슬로 고함쳤습니다. 내 얼굴을 가리켜 지목하며 "만약에 사람들이 죽게 되면 너희들의 탓니까!"라고. 그것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는거야"라고 하는 기분이었지요.

헬기를 기다리며 현장에서는 호이스트(헬기에서 와이어에 의한 리프팅)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적십자의 의사로부터 "대원이 직접 안고 타는 것이 좋다"고 말해, 자위대의 갈색 담요를 생존자의 몸에 감싸고 있었습니다. 먼저 리프팅 것은 요시 미키코 씨(당시 8세)입니다. 담요로 감싼 채 공수대원이 안고 헬기에 태웠습니다.

다음은 당시 14세였던 카와카미 케이코 씨. 그녀를 옮긴 것이, 나의 친구인 사쿠마 중사였습니다. 1번째와 마찬가지로, 담요로 싸서 준비를 했는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구출된 생존자의 모습을 촬영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어느새 주위에 있던 보도진들이 손을 뻗어 담요를 벗겨 낸 거죠. "무슨 짓이야!"라고 화내는 사이 다른 헬기가 바로 위에 왔고 와이어가 내려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쿠마 중사는 담요 없이 카와카미 씨를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세번째 요시자키 히로코 씨 (미키코 씨의 어머니, 당시 34 세)와 4번째 오치아이 유미 씨(당시 26 세)는 들것에 실린 상태에서 리프팅했습니다. 왜냐하면 안고 올리기에 탈진한 성인은 상당히 무거워 중간에 떨어질 우려도있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세번째 요시자키 씨의 어머니를 태운 들것이 헬기에서 내려오는 바람을 받고 리프팅 순간에 빙글빙글 회전하고 말았습니다. 대단한 속도로 회전하고, 지금이라도 들것에서 몸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들었습니다. 나는 바로 밑에서 두 팔을 벌려 "만일 떨어져 버리면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으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만, 이것은 우리의 정말 초보적인 실수였습니다. 본래 들것의 손잡이에 로프를 붙여 들것이 회전하지 않도록 지상 대원이 로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기본적인 일이지만, 역시 괴상한 현장에서 평온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그 비상시에 아무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매달아 버렸습니다. 지금도 기억할 때마다 싸늘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오치아이 씨를 수용할 때는 제대로 보조 로프를 넣었습니다.

생존자 구출을 마친 것이 13일 13시 29분. 거기에서 다음의 임무를 명받았습니다. 헬기장의 구축입니다. 짐승이 다니는 길조차 없는 가파른 산에 인력과 구조 물자를 신속하게 지원하기 위해선 헬기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상공에서 로프 하강할 수 있었지만 이후의 작업은 헬기를 착륙시키는 것이 필수였습니다.

보병대장이 내게 대형 헬기(V-107)용 하나와 중형 헬기(HU-1H) 용 하나, 합쳐서 두 곳의 헬기장을 구축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우리는 훈련 · 연습 간이 헬기장을 만들지만, 그 때는 가급적 넓고 평탄한 곳을 찾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항공 기체의 날개가 떨어져 있던 근처에 주목했습니다. 그 근처는 비교적 넓고 평평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항공기 사고이기 때문에 사고 원인 규명을 위해 현장 검증도 필요합니다. 마음대로 현장의 상태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에 현장을 관할하는 군마 현경의 책임자를 찾았습니다.

주위에는 많은 경찰관이 있었지만, 거의 다 나가노 현경이거나 경시청 소속이었고 좀처럼 군마 현경의 책임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간신히 찾아 교섭했더니 시종일관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현장 검증이 필요한 곳의 아래 지점으로 결정하고 주변의 나무를 베고 경사면을 굴착하고 깎은 암석과 흙을 아래에 담는 방식으로 중형 헬기용 헬기장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

우리가 헬기장을 만들고 있는 동안에도 속속 사체가 옮겨졌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고, 13일 자정에는 헬리포트의 큰 틀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한밤 중에 세세한 마무리 작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날 그 자리에서 쪽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14일 아침 3시경부터 작업을 재개하고 7시경에 헬기장이 완성되었습니다.

"단풍잎"

하지만, 이 쪽잠이 힘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부터 헬기로 이송할 수 있도록, 헬기장 부근에는 시신이 모이고 있었습니다. 그 옆으로 누워 자려고 했지만, 한여름의 더위에 손상된 시신은 죽음의 냄새를 풍겼기에 몇 번이나 깼습니다.

14일에는 완성된 헬기장을 사용하여 아침부터 몇 번이나 헬기가 왕래했고 15시 정도까지 총 121구의 시신을 운반했습니다. 이 숫자에 관해서는 쓰라린 추억이 있습니다. 이날 상급 부대에서 연락 간부가 현장에 왔는데, 헬기장의 운영을 지휘하고 있던 저를 보자마자 "오늘은 몇 구나 날랐지?"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대답이 어려웠습니다.

사체라고 해도, 전신이 있는 것은 적고, 손과 다리만 있는 부분 사체도 많았습니다. 그것을 현장에서 가능한 빨리 옮기기 위해 개별적으로 포장한 부분 시신 등을 함께 담요에 싸서 "한 묶음"으로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21묶음"을 보낸 것이지, " 몇 구?"라고 물어도 모를 것입니다.

그런데 연락 간부는 즉답할 수 없는 나를 보고 "그래도 책임자냐!"라고 질타했습니다. 잠이 부족했던 탓도 있겠지만, 화가 나서 부하 한 명에게 "야, 거기 담요 좀 열어봐!"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사체가 몇 구인지 파악할 수 있어요!?"라고 반문하자, 상대방도 가만히 헬기를 타고 돌아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단풍나무"입니다. 사체의 반송 준비중 비닐 봉지에 들어간 무언가가 날라 왔습니다. 붉고 작아 처음에는 단풍나무잎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알고보니 피로 물든 아이들의 손바닥이었던 겁니다. 서서히 시신을 보는데 익숙해져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정말 불쌍하고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습니다.

14일 15시경부터 날씨가 악화되어 시신 이송 작업은 거기서 중단됐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그날 밤도 전날과 마찬가지로 시신 옆에서 쪽잠을 자고, 다음날 15일 아침, 우리 공수부대는 임무를 마치고 헬기로 나라시노에 귀환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오스타카 산에 있던 것은 13일 아침부터 15일 아침까지 48시간 정도입니다. 잠도 식사도 못한 채 극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꽤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경찰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자위대 헬기가 옮겨 오는 것은 곡괭이와 삽 등의 공사용 장비, 시신 보관용 담요 등 임무에 직결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경찰 헬기는 도시락이나 담배, 침낭을 많이 들고 왔습니다.

한 번은 펼쳐진 침낭이 헬기의 풍압에 떴습니다, 근처에 있던 내 부하가 황급히 뛰어 들어 눌렀습니다. 그러자 경찰관이 그를 향해 "이봐 자위대 양반, 침낭에 구멍난다고"라고 단언했습니다. 부하는 휴식 중이었기 때문에 담배를 들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그가 장난스럽게 침낭에 누워 뒹구는 것처럼 보았던 것입니다. 그 경찰관에게 "야 이 등신아! 침낭이 떠서 로터에 닿으면 헬기가 추락한단 말이야!"라고 호통쳤습니다.

매스컴에도 화가 났습니다. 카와카미 씨의 담요를 벗긴 것도 그렇습니다만, 시신 사진만 찍는 무리도 있다보니 무심코 "작작 해라!"라고 꾸짖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14일 낮 무렵에 한 신문 기자가 가지고 온 조간 신문을 봤을 때는 역시 기뻤습니다. 거기에는 카와카미 씨를 들고 헬기로 옮기는 사쿠마 중사 사진이 1면에 실렸습니다.

지금은 재해 때 자위대의 활동이 미디어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지만, 당시 자위대는 어떤 의미로 숨어 사는 쪽이었습니다. 언론이 현장에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의 활동이 대대적으로 피사체가 되다니 나 자신은 상상도 하지 않았고, 어쨌든 놀랐습니다. 동시에, 우리들은 옳은 일을하고 있구나라는 실감이 솟았습니다.

5년 전에, 사고 30주년으로 방송국의 취재를 받았을 때, 감독이 입을 열자마자 "왜 자위대의 도착이 늦었습니까"라는 질문을 한 것은 뜻밖이었습니다. 원래 당시의 재해 파견 요청을 받아야만 최초 출동 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마음대로 현장으로 향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밤중에 현장에 갈 수는 없었던 것인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낙하산 · 보병 부대는 심야의 현장에도 구조 활동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수송 명령 당시 자위대 헬기는 밤에 볼 수 있는 장치가 장착되어 있지 않고, 어두운 밤에 미지의 산지 · 숲의 비행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12사단 예하 부대는 밤새 바로 암중 모색으로 현장을 향해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자위대는 할 수 있는 일을 했다고 나는 지금도 확신합니다.

스트레스 장애

오스타카에서의 경험은 이후 자위대 삶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가장 큰 것은 "스트레스 장애"에 대해 몸소 배운 것입니다. 사실 나라시노에 돌아온 후 불면증으로 고생했습니다.

낮에 일을 하고 있을 때는 그럴 일이 없지만, 밤 아파트에 가서 어두운 장소에 있을 때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침실은 물론 화장실과 욕실 전기도 켜 둔 채로 두지 않으면 불안. 그리고 취침 중에 문득 창문에 시선을 돌리면 베란다에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나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의 전신의 사람도 있고, 상반신만 있는 사람, 타버린 사람 등 모든 사람, 오스타카의 현장에서 우리가 후송에 관련됐던 시신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환각이라고 스스로 납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타나면 두려움을 느끼는 반면, 그만큼 불편은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저 "왜 나타나는 거야"라는 기분이었습니다. 결국 위스키를 마시지 않으면 잠들 수 없는 상태가 1개월 정도 계속 되었습니다.

그동안 육류도 전혀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동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절의 자위대는 아직 스트레스 장애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공정단은 남자 중의 남자가 모인 맹자들의 정예 부대였습니다. 연상의 부하를 통솔하는 젊은 간부로, 약점은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미친건가? 병원에 갔다 와라"는 말만 들을 것 같아 상관에게도 누구에게도 상담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스타카에 출동한 자 중 외박을 신청해 나갔던 영내 거주 대원이 "섬뜩한 느낌"이라며 주둔지에 돌아와 모두 함께 자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이상하게도 안심했습니다. 그 대원을 향해 "한심한 놈"이라고 웃었습니다만, 내심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 동일하구나"라고 안심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훨씬 나중에 내가 대령으로 연대장이 되었던 2003년에 자위대가 이라크에 파견되었습니다. 나도 파견에 대비해 부대 지휘관으로서 스트레스 장애에 관한 교육을 받았고 (결국 나 자신은 이라크에 가지 않았습니다만) 더욱 그 후의 근무에서도 지휘관 · 참모에게 필요한 지식으로 배웠습니다 .

그래서 당시 26세의 내가 오스타카 산 이후 자택에서 체험 한 것이 바로 '급성 스트레스 장애 (ASD)'의 전형적인 예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 간신히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덧붙여서, ASD 상태가 1개월 이상 지속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고합니다.

전장과 대규모 재해 피해 지역 등의 열악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강한 인간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단 48시간의 임무에 내 마음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숨기고 혼자 괴로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자위대 해외 파견이나 재해 파견 때마다 정신 건강에 대한 관리를 체계적으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임무 종료 후 대원을 혼자 스트레스 장애를 대적하는 것 같은 상태로 방치하는 것은 안 되며, 만일 그랬다면 그 지휘관은 실격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귀중한 체험은 나 자신에게 지휘관으로서 많은 부하를 이끌고 임무를 완수하는 데 큰 양식이 되었습니다.

그 슬픈 사고에서 35년을 맞이하는 지금, 다시 피해자의 명복과 생존자와 유족 분들의 삶에 행복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오카베 토시야 (오카베 토시야) 전 육상막료장
1959년 후쿠오카 현 출생. 전 육상 자위관 (방대 25기). 제6사단장, 북부방면 총감 등을 거쳐 2016년 제35대 육상막료장에 취임. 2017년 8월에 퇴임.

「주간 신쵸 출판사」 2020년 8월 13·20일 호 게재}}}

13. 대중매체에서


[1] 이 중 6명은 한국인 승객이었으며 전원 사망했다.[2] 승객 중에는 비번 승무원 3명과 일본항공 직원 1명도 있었으나 이들은 승객의 신분으로 탑승하여 승무원 수가 아닌 승객 수에 포함된다.[3] 전원 여성. 이 중 1명은 당시 비번인 일본항공 승무원이었다.[4] 당시에는 하네다 공항이었다.[5] 흔히 이타미 공항이라고 불리는 곳. 지금의 오사카의 관문인 간사이 국제공항은 이 사고가 일어난 지 9년 뒤인 1994년에 개항했으므로 당시에는 이곳이 오사카의 유일한 민간공항이었다.[6] CVR 내용이 글로 공개되었을 당시에는 모~(もう)인지 아~(감탄사)인지 판독 불능으로 적혀 있었다. 49분에 기수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하자 "あーだめだ。Stall!(아~ 안된다. 실속!)"이라고 했던 말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데, 실속에 빠진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맥스 파워! 맥스 파워!(최대 출력)"라고 지시했으니 이때의 だめ는 틀렸다, 끝났다는 체념의 뜻이 아니라 '안된다'는 원뜻대로 조종이 안된다는 뜻일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 56분은 애매한데 만약 あー라면 이전 발언과 비슷하고 'もうだめだ'는 민중서림 엣센스 일한사전에 '이제는 다 틀리었다'는 뜻의 관용어구로 등록되어 통째로 한 단어처럼 쓰이는 표현이다. 그래서 "もうー"만 길게 말하고 뒷부분을 생략해도 한탄하는 느낌이 전달되나 특별히 일한사전에 등록된 용법은 아니다.[7] 흔히 '틀렸다'로 번역되는 표현이지만 'だめ(다메)'는 한국어의 '안 돼'에 대응하므로 직역하면 "이젠 안 돼!(NO!)"이다. "이젠 끝이야"로 의역하기도 하나 '終わり(오와리)'라는 대응되는 표현이 있기에 기장이 저 뜻으로 말하려고 했다면 "もう終わりだ"라고 했을 것이며 실제 "와따시와もう終わりだ(난 이제 끝났어)"처럼 쓰인다. 일본어 대사 중에 "終わり!(STOP!)"라고 하자 상대가 "だめだよ!(NO!)"라고 절규한 것을 보면 기장의 절박한 뉘앙스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8] 델타항공 191편 추락 사고가 일어난 지 열흘 째 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열흘 뒤 영국 항공 투어 28M편 화재사고가 터졌다.[9] 사고기는 1974년 1월에 첫 비행 후 일본항공에 인도되었다.[10] 복합적인 경우까지 세면[11] 1위는 테네리페 참사[12] 2위는[13] 홀수는 하네다 출발편, 짝수는 도착편이다.[14] 2023년 현재는 같은 출발 시간대에 133편으로 운항 중이다. 기종은 A350-941.[15] 일본은 1970년대에 항공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났는데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16] 위 사진은 JA8119 기체가 맞으나, INS용텀퍼가 존재한다. 이 기체는 사고당시 INS용텀퍼가 제거된 상태였다.[17] JL366편으로 운항 중이었으며 그해 일본시리즈 우승팀인 한신 타이거즈 선수단이 타고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일본인이 JL366편을 탄 이야기를 사고로부터 정확히 21년 후인 2006년 8월 12일 공개한 바가 있는데, 당시 비행기가 어쩐지 춥고 세세하게 흔들린다고 느꼈다고 한다. #[18] 심지어 후술하듯 수직미익 파괴 이후 기내의 분위기와 추락 직전 모습까지 사진으로 남았다.[19] 20세기에 일어난 항공 사고 중 사고 당일에 찍힌 기체의 마지막 사진이 남아 있는 경우는 사고가 일어난 비행을 위해 이륙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담긴 영국해외항공 911편 추락 사고도 있으며 팬 아메리칸 항공 6편 수상 불시착 사고, 샌디에이고 상공 공중충돌 사고, 아메리칸 항공 191편 추락 사고, 유나이티드 항공 232편 사고는 아예 추락하는 모습이 시각 자료에 담겼다. 비록 이착륙 장면은 아니지만 이 사고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내 최악의 항공사고라고 불리는 테네리페 참사도 충돌 30분 전 두 비행기가 주기되어 있는 모습을 현지 사진사가 찍은 사진이 있으며 사베나 항공 548편 추락 사고는 스포츠 팀이 대회에 참가하려다가 변을 당한 것이기에 사고기를 탑승할 때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 남아 있고 심지어 에어 뉴질랜드 901편 추락 사고는 사고가 난 비행이 관광비행이었기 때문에 승객이 캠코더로 기내를 촬영한 영상과 충돌 직후 객실 창문을 찍은 사진이 있다. 보면 그렇게 드문 것 같진 않아 보이지만 20세기에는 항공사고가 21세기보다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비율로 따지면 그 수는 더욱 줄어든다.[20] 다만 21세기에는 휴대전화와 SNS가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되어 있기 때문에 사고 당일 기체의 마지막 모습이 남는 일은 그렇게까지 드문 편은 아닌데 극단적으로 예티항공 691편 추락 사고처럼 사고기에 탑승했다가 사망한 사람이 인터넷 생방송을 하느라 참혹한 사고 순간까지 생중계되는 경우까지 있다.[21] 이외에 123편이 비상착륙에 성공했을 때를 대비해 공항소방대가 다급히 123편을 맞을 준비를 하는 모습, 당시 일본으로 급파된 NTSB 조사팀, 유가족들이 사고현장 상공에서 꽃다발을 던지는 모습도 짤막하게 나온다.[22] 하네다에서 삿포로 치토세 공항으로 향하던 그날 첫 비행(JL503편)에서 촬영된 것이다.# 삿포로에서 도쿄로 돌아오는 편에는 연예인 코이즈미 쿄코도 타고 있었다.[23] 바로 위 사진 파일에는 己(자기 기) 자가 巳(뱀 사) 자로 나왔지만 오타다. 일본 웹사이트에서도 더러 발견되는 오타인 듯.[24] 복 우(祐) 자를 일본어로는 '히로시'라고도 읽을 수 있기에 처음에는 '사사키 히로시'라고 공식 발표되었다가 후에 수정되었다.[25] 다카하마 마사미 기장 • 사사키 유타카 부기장 • 후쿠다 히로시 항공기관사 • 하타노 쥰 수석 사무장을 비롯하여 키하라 유키요(木原幸代), 아카다 마리코(赤田眞理子), 후지타 카오리(藤田 香), 미야미치 레이코(宮道令子), 후술하게 되는 츠시마 유미코, 요시다 마사요(吉田雅代), 에비나 미츠요(海老名光代), 시라뵤시 유미코(白拍子由美子), 오오노 미키코(大野美紀子), 오오노 세이코(大野聖子), 하타노 쿄코(波多野京子).[26] 503편, 504편[27] 363편, 366편[28] 123편, 130편[29] 트랜스폰더의 비상사태를 알리는 상태 번호. 이건 민항관제용 레이더에서 비행기를 구분할 수 있게 해 주는 코드를 발신하는 장비. 이륙하기 전 관제탑의 지시에 따라 4자리 번호를 장입한다. 항공기 식별 번호로 절대 주지 않는 코드 중 7500은 공중 납치(하이재킹), 7600은 무전기 고장, 7700은 기체의 고장이다.[30] 센트레아 나고야 중부국제공항은 이 사고로부터 20년이 지난 2005년에 개항했고 당시 나고야의 유일한 민간공항은 나고야 비행장 한 곳이었다.[31] 유압계통은 유체의 특성 덕에 작동한다. 유압에서 유압액이 사라지면 유압계통은 그냥 고철덩어리가 될 뿐이다. 더 이상 유압계통으로서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한다. 차가 고속도로에서 빠르게 달리는데 핸들과 브레이크가 고장난 것과 비슷하다. 그나마 자동차는 땅에 붙어 달리기에 어느 순간 속도가 줄어 안전하게 멈출 수 있지만, 비행기는 일단 하늘 높이 떠 있기에 조종이 안 되면 착륙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으며 다른 방향으로 바람이라도 불면 그대로 휩쓸려서 최악의 상황으로 몰린다. 실제로 요코다 공군 기지쪽 방향으로 가는데까지는 성공했으나 하필 남서풍이 부는 바람에 산으로 가버리고 만다. 5분의 여유만 있었어도 요코다 측의 구조를 받을 수 있었던 거리이기 때문에 더 비극적이다.[32] 통상용 3개, 비상용 1개로 구성된다.[33] 파손 직후에는 잠시 동안 항로이탈 없이 잘 날았으나 일본 시간으로 6시 25분 기준 항로를 이탈하면서 조종불능이 되었다. 사실 수직미익을 완전히 잃은 상태에서 미익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나선형으로 회전하며 추락하지 않은 것(아메리칸 항공 587편 추락 사고, DHL 611편이 대표적 예시) 자체가 기적에 가깝다. 만약 즉시 추락했다면 기체 내에서 생존자가 나오기란 불가능하고 기체는 이즈 반도오시마 인근 해상(사가미 만)에 추락했을 것이다.[34] 유압상실로 인해 자동으로 전개되지 않아 전동 잠금장치를 해체한 후 기어의 무게를 이용해 전개하였다.[35] 블랙박스에는 기장이 플랩을 확인하라고 외치고 부기장이 플랩을 올리고 있다고 답하는 음성이 녹음되었다.[36] 수직·수평꼬리, 오른쪽 주 날개 및 4번 엔진이 기체에서 분리됐다.[37] 분리된 객실 후부와 뒷날개는 산의 능선을 넘어 경사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객실 후부는 능선과의 충돌을 면하고 경사면에 평행에 가까운 각도로 착지해 수목을 쓰러뜨리면서 능선의 경사면과 접촉하여 천천히 감속했다. 이 때문에 다른 부위에 비해 충격을 덜 받았고 화재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덕분에 객실 후부의 좌석에 앉아 있던 여자 4명은 그야말로 천우신조로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추락하면서 즉사했거나 죽음이 눈 앞으로 다가와 멱살을 잡은 것이나 다름없는 지경이었다. 중상을 입은 생존자 중 상당수가 이튿날 아침에 수색대가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다.[38] 간략본 CVR 영상에는 안 나오지만 두 번째인 전체 버전 CVR 영상과 X-Plane 11을 이용한 CVR 영상에는 사내무전망으로 연락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39] 국제민간항공협약 부속서 13에 따라 사고조사자료는 관계자 이외에는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40] 아래가 해당 녹음 자료다.[41] 참고로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는 CVR 앞부분과 마지막 부분이 흘러나오고 일본 경찰과 자위대가 NTSB의 조사에 대단히 비협조적이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42] 교신 내용을 보고자 한다면 HD 영상으로 전환 후 전체 화면으로 바꾸어야 한다. 마지막 ATC의 경우 CC 버튼을 누르면 자막 확인이 가능하다.[43] 블랙박스에 남은 녹음 분량 전체를 들어볼 수 있다. 통상 항공기의 블랙박스는 사고 발생 직전 약 30분간의 녹음기록이 저장되는데 공교롭게도 이 사고는 수직미익 탈락 이후부터 추락까지 정확히 30분 가량의 시간이 걸렸기에 이를 모두 들어볼 수 있는 것.[44] 승객 한 명이 벨트사인이 꺼지기 전 화장실에 가고 싶다며 승무원에게 요청했고 승무원은 조종사에게 인터폰을 걸어 허락을 받았다.[45] 항공기관사의 패널에 R5 화물도어의 경고가 표시되었고 벌크헤드가 터져 미익이 떨어져 나갔다는걸 조종사들이 알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조종사들과 처음 123편에게 사고 소식을 보고받은 일본항공 본사 정비팀은 R5도어가 떨어져 나간 것으로 알고 애타게 조종사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했다. 물론 비행기는 이미 조종사들이 도저히 조치할 방법이 없었다.[46] ANA 592편과 에어프랑스 273편 등[47] 이름은 오가와 테츠(小川哲). 그가 기내에서 찍은 사진 중에는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 사진들도 있으며, 그가 찍은 사진들은 유족들의 결정으로 사고 5년 후인 1990년 10월 14일 아사히 신문 등의 미디어에 공개되었다.[48] 이 블로그에 따르면 이 사진은 기체 중간 부분에서 찍힌 사진으로 추정된다. (다만 링크된 블로그의 게시물은 '군사물자 수송'이라느니 'MIG-25 전투기'라느니 하는 내용을 볼 때 음모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판단되므로 기내 사진 외의 다른 내용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생존자 4명은 모두 기체 후미 부분에 탑승했기 때문에 촬영자도 사망했을 것이다.[49] Pre-Recorded announce. 긴급상황시 자동으로 흐르는 방송으로 좌석 벨트 착용과 산소마스크 착용을 지시한다. 링크된 영상은 일본항공 573편으로 운행하던 보잉 767기가 여압계통 이상으로 비상강하를 할 때 찍힌 것으로, 구버전의 방송이기에 123편이 비상강하를 할 때에도 나왔던 방송이라고 한다. 시대가 지날수록 명령체에서 경어체로 바뀌었다. 보잉 777의 경우 취역 당시 담배가 법률상 가능했기 때문에 포함되었다. 이는 STALL 상태에서 조금씩 바뀐다.[50] 당시는 기내 흡연이 가능했다. 이는 중화항공 611편 공중분해 사고에서 중화항공의 정비불량의 근거로 쓰이기도 했다.[51] 비번으로 귀가를 위해 당시 승객으로 탑승한 일본항공 승무원[52] Brace Position. 앞좌석에 양 손을 짚고 머리 부분을 끌어안듯 숙여 전신을 긴장시키는 자세.[53] 불운 중 다행이라면 교신에 사용되는 안테나는 양 주익 끝에 내장되어 있었다. 후기형 747 부터는 이것 역시 수직미익에 내장되는 설계이기에 사고기가 후기형 747 이었다면 수직미익 파괴 시 통신까지 먹통이 되는 설상가상의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54] 당연히 요코타와도 점점 멀어진다. 요코타와 하네다는 같은 방향에 있었기 때문.[55] 이 사진사는 참사 30주기 다큐멘터리에 나와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촬영 당시에도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56] 꼬리날개가 소실됐고 랜딩기어가 내려와 있다. 일본의 일부 사이트에서는 이 사진 속 기체 하부의 붉은 점과 날개 끝의 주황 점을 근거로 미사일 격추라느니 무인기와의 충돌 같은 음모론을 주장하지만 이는 각각 항공기의 충돌방지등 및 항법등으로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당연히 작동하는 장치들이다.[57] 대략 추측해 보면 앞 부분은 250~300G 정도고 뒷 부분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58] 위 영상 CVR에서 추락 직전 들린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오른날개가 부딪히는 소리다.[59] 기장 본인을 제외한 희생자 수[60] 당시에는 기장의 시신이 제대로 발견되지 않았다고 믿고 기장이 사고 현장에서 도망쳤다고 추측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단순히 생각해봐도 어두운 숲 속에서 불타는 기체 안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61] 게다가 3년 전에 같은 항공사에서 일어난 정신질환에 걸린 같은 항공사 소속 기장이 여객기 엔진에 역분사시켜 도쿄 하네다 앞바다에 추락하고 나서 기장 혼자만 도망친 사건 때문에(찌라시 뿌리기 좋아하는 일부 몰지각한 기자들과 세월(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겠지만 아직도 이 사건사고를 기억하는 몇몇 사람들이 선동해서) 이런 어이없는 만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 발생 후 직선거리로 가까웠던 나고야 공항으로 가지 않고 하네다 공항으로의 회항을 계속 시도했던 것도 기장과 그 가족을 괴롭힐 수 있는 구실이었다. 교신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문제가 발생한 걸 알고도 최선을 다하긴커녕 고집을 부리다 최악의 결말이 나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62] 군마현 자체는 일본 수도권의 일부이다. 하지만 간토 평야 북서부 끝에 위치한 군마현 특성상 일본 대도시의 3분류 중 2번째로 높은 중핵시마에바시시, 타카사키시가 서로 붙어 있는 현 남동부와 북관동지방의 대표적인 공업지대이자 현 동부인 오타시, 이세사키시 인근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면적이 고도가 1000m부터 백두산과 큰 차이가 없는 2600m에 달하며 아직까지도 활화산 다섯 곳이 존재하는 일본 열도에서 험한 대표적인 화산산맥이 있다. 이렇게 광활한 간토 평야와 험난한 산간지역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은 일본에서도 드물며 이러한 이유로 인구 구성 또한 극도로 평야지대에 편중되었다. 하필이면 일본항공 123편은 이런 사는 사람도 없는 군마현 서남부 산악지역에 추락한 것.[63] 단, 추락 지점 자체는 1500~1600m 정도이다. 물론 접근하기 힘든 것은 매한가지.[64] 추락 지점 위치를 보면 북쪽으로는 나가노현 나가노시, 남쪽으로는 야마나시현 코후시 동쪽으로는 사이타마현 치치부시, 동북쪽으로는 군마현 토미오카시, 남동쪽으로는 무려 도쿄도 오메시와 접하는 경기남부+서울시 면적에 해당하는 산악지대의 정중앙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서쪽으로 가면 일본 알프스 지대로, 해발고도 3000m가 넘는 산들이 수두룩한 곳이다.[65] 탑승객들의 시신은 굉장히 산 곳곳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었다.[66] 사고 피해자들이 더위가 심한 8월 초에 추위를 느껴 사망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 123편은 지상보다 온도가 낮은 높은 고도의 산에 추락했으므로 날씨는 생존자들이 버틸 정도로 따뜻하지 않았다. 더구나 상술했듯 사고 직후 추락 현장에 내린 비로 2차 폭발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비에 젖는다면 당연히 저체온증은 더욱 빨리 찾아온다. 저체온증뿐 아니라 사고 직후 생존했더라도 심각한 부상을 치료받지 못해 얼마 지나지 않아 쇼크사한 사례도 다수 있었다.[67]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밤 동안 생존자들의 신음소리가 점점 사라져갔다고...[68] 당연하지만 해외에서는 사고의 경위가 파악되고 시뮬레이션이 가능해지면서 '어떻게 유압을 다 잃고 30분을 버텼지?'라는 놀라움만이 남았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일본 사회에서 기장의 명예 회복은 상당히 더뎠고 사고기의 블랙박스 녹음 파일이 유출되면서 유가족은 겨우 명예를 되찾았다. 사실 녹음 파일은 일본 경찰이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이유로 삭제한 지 오래였다. 만약 제보자가 따로 녹음한 사본이 없었다면 최소한 일본 내부에서는 진실이 영원히 어둠 속으로 묻혔을 수도 있었다.[69] 추락 현장에서 방사능이 검출된 이유는 123편이 RRW(저급 방사성 물질) 화물과 RRY(고급 방사성 물질) 화물을 운반 중이었기 때문이다.사고 발생 전 지상 교신내역[70] 다만 미군의 제안이 어느 수준이었는지는 몰라도 다국적 구조대가 편성되면 명령의 주체가 흐려질 수 있으며 의사소통이 힘들어 사망자 파악이나 체계적인 구조가 힘들어진다는 반론도 있다. 실제로 긴급구난 메뉴얼에 따르면 이러한 구조대 활동은 국지적인 재난보단 광역적인 인재 및 자연재해와 같은 상황 재난에 효과를 더 발휘한다고 명시되었다. 같은 이유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당시 한국 또한 미국과 러시아의 구조대 파견 제안을 거부했다.[71] 사고 당시 한국 언론도 8명이 구출되었다고 보도했다.[72] 1958~1959년생[73] 1972~1973년생[74] 가족여행으로 홋카이도를 방문한 뒤 도쿄를 경유해 오사카로 돌아오다 사고를 당한 것이라고 한다. 같이 비행기에 탔던 가족들은 모두 사망하고 카와카미 케이코 홀로 살아남았다.[75] 1949~1950년생[76] 1977~8년생[77] 본 유서는 대한민국의 도서 중 아빠의 수첩에서 일부 내용이 각색되어 나온다. 참고로 아빠의 수첩에서 아빠가 당한 사고는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를 모티브로 하였다.[78] 니혼게이자이신문 2010-08-10 "아버지의 유언을 가슴 속에 간직한지 25년..."[79] 야마사키 토요코의 소설 '지지 않는 태양'이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였는데 픽션이기에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지만 이 유서는 그대로 나온다.[80] 본명: 타니구치 마치코(谷口 真知子). 유서에서는 긴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이름 일부가 한자 대신 히라가나로 적혔다. 당시 40세.[81]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포수로 활동했던 타케시타 모토아키도 고시엔에 참가한 아들을 응원하러 가다가 변을 당했다.[82] 사카모토 큐 항목에 언급된 '천국에 있는 내 아이에게'라는 드라마가 이 여성의 시점으로 전개되었다.[83] 그런데 이 우승 때 커널 샌더스의 저주 사건이 생겼고 그 이후 38년 동안이나 일본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했다.[84] 이 때문에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잠시 1위를 내주면서 우승 실패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상단에 적혔다시피 다시 의지를 불태워서 결국 우승에 성공했지만.일본어 위키백과의 나카노 하지무 항목에 따르면 한신 선수들이 후쿠오카에서 도쿄로 이동할 때 탔었던 비행기가 사고기였다고 한다. 당시 후쿠오카에서 한신과 주니치가 경기를 했기에 한신 선수들이 이용했던 것. 위에 서술된 대로 사고기는 당일 사고 몇 시간 전 하네다~후쿠오카 노선에서 비행했다. 만약에 선수단이 탔을 때 사고가 났다면...어쩌면 야구판 뮌헨 비행기 참사샤페코엔시의 비극이 일어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85] 사고 당시 한신 주전 포수였던 키도 카츠히코의 아내 또한 이 항공편을 탈 예정이었으나 직전에 취소해 화를 면했다고 한다.[86] 사고가 터진 지 얼마 안 있어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원정경기 이동시 항공기 탑승을 재검토하겠다는 취지의 언론발표를 했다. 당시만 해도 신칸센 속도가 느려서(210km가 최대 속도였고 도쿄-오사카 구간은 3시간 걸렸다. 노조미는 당시 있지도 않았고 제일 빠른 게 히카리였다.) 항공기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생각하면 이 사고로 인한 여파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노조미가 생긴 1992년 이후에야 센트럴리그 전 팀이 4시간의 벽 범위 내로 들어오게 되었다.[87]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경기에 해당되는데 이 두 도시를 비행기와 열차로 오간다면 이용시 각각 2시간, 8시간을 넘기게 되어 무조건 비행기 이용이 확정된다.[88] 당시엔 군이었다.[89] 일본항공은 이 엑스포의 스폰서 중 하나였다. 사고기에도 츠쿠바 엑스포 기념 문구가 적혀 있었다.#[90] 다큐멘터리에서 회고된 바로는 당시 사고 유가족들의 마음을 이용해 죽은 사람들을 볼수 있다며 돈을 뜯어내는 사이비 종교 단체가 있었으며 다부치 부인도 이에 넘어갔다고 한다. 다행히 아내의 이상한 행동을 눈치챈 남편이 달려가 아내를 말려서 범죄에 휘말리진 않았다고 한다.[91] 혼외자라고 한다. 유카와 아키히사는 영국에서 수잔느 베일리를 만날 당시 일본에 다른 부인이 있는 상태였는데 수잔느 베일리와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다가 언니인 유카와 캐시, 유카와 다이아나 자매를 출산했다고 한다.[92] 본명은 요시다 유미코(吉田由美子)[93] 1943년생. 全玉子 Ok Ja Jeon[94] 1969년생. Christopher Hangawi Kim[95] 1971년생. Scott Han Sol Kim[96] 전옥자 씨와 두 아들은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묘역 가장자리에서 비석을 확인할 수 있다.[97] 물론 귀화한 재일교포나 혼혈은 제외한 수치.[98] 더 정확히 설명하면 보잉의 수리 매뉴얼 상 두 면을 접합할 때 두 면 사이에 보강판을 덧대고 보강판에 평행한 리벳 3줄을 박아 위, 아래면 각각 리벳 두 줄이 박혀야 한다.[99] 산술적으로 사망자 520명으로 나누면 150만 엔이지만 법적인 배상과는 별도다.[100] 안타깝게도 2024년 1월 2일 도쿄 국제공항 지상 충돌 사고해상보안청 소속 DHC-8에 탑승한 승무원 5명이 목숨을 잃으며 38년 무사고 기록은 깨졌다. 일본항공 소속 A350 XWB에서는 사상자가 전무했지만 어쨌든 일본항공이 연루된 항공 사고에서 거의 40여 년 만에 사망자가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비극적인 참사이다. 다만 여기서 일본항공은 잘못이 없는 피해자의 입장으로, 해상보안청 기체 측에서 관제 내용을 잘못 해석한 점이 사고 원인으로 지목되었다.[101] 「尾根のかなたに~父と息子の日航機墜落事故~」[102] 다만 이 두 사례들은 모두 수직 꼬리날개가 멀쩡했기 때문에 고도가 지그재그로 요동치는 휴고이드 운동에는 빠지지 않았다. 물론 조종 불능의 기체를 착륙시킨 것 자체도 대단한 일이다.[103] 보통 조종 불능 상태에 빠질 정도면 유압계통이 박살나기 전에 다른 곳부터 망가지는 게 일반적이다. 즉, 전제조건 자체를 충족시킬 수 없으니 실전에서 써먹을 수가 없다는 뜻.[104] 그나마 A380의 경우 탑승인원 자체가 어마어마한 관계로 만약에라도 이러한 비극을 방지하기 위해 에어버스의 전통적인 플라이바이와이어 유압제어 말고도 비상용 전자제어장치를 따로 마련해 두긴 했다. 이로 인해서 콴타스 32편 엔진폭발 사고 당시 32편이 유압이 나갔지만 비상용 전자제어장치가 있어서 다행히 온전히 비상착륙했다.[105] 해당 채널에서 '일본항공' 키워드로 검색 요망[106] 다만 사고 당일 밤(!)에 다른 광고를 방송하기는 했다. 해당 영상의 10분 20초경. 14분 41초부터는 관련 뉴스도 나온다.[107] 이 사고의 원인이 다름 아닌 정비 불량이었으니 더욱 얄궂은 일이다.[108] 링크의 지면에서는 옆에서 애로우 항공 1285편 추락사고를 보도하고 있다.[109] 인도항공 182편 폭파 사건, 아에로플로트 7425편 추락사고,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애로우 항공 1285편 추락사고[110] 200명 이상 사망자 발생 사고를 기준으로 해서 저 중에는 빠졌지만 이베리아 항공 610편 추락사고, 델타항공 191편 추락 사고영국 항공 투어 28편 화재사고 또한 큰 사고였다.[111] 말레이시아 항공 370편 추락 사고, 말레이시아항공 17편 격추 사건, 에어 알제리 5017편 추락 사고, 에어아시아 8501편 추락 사고[112] 다만 2014년은 의외로 항공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가 최악 수준은 아니었고 2015년, 2016년, 2017년은 사망자 수가 역대 최저 수준이었다. 항공기 승객 수와 운항편이 꾸준히 증가하는 걸 생각하면 항공기 안전은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참고로 항공기 사고로 인한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해는 1972년이었고 2위인 1973년을 이어 1985년은 3번째로 사망자가 많았다.[113]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대한민국에선 반일 감정이 더 강해질 가능성도 있었다.[114] 해당 항공편 역시 하네다 18:00 출발, 오사카에 19시경 도착 예정이었다.[115] 잔잔한 강도 잘못 착륙하면 매우 위험한데 계속 출렁거리는 바다는 더 위험하다.[116] 바다로 추락할 경우 해수면은 그대로 충격을 반사하기 때문에 사실상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동체가 산산조각나는 것은 뻔한 결과다. 마치 다이빙 하다 착지를 잘못해 배로 떨어지면 아픈 것처럼 말이다.[117] 멀리갈 필요 없이 이 사고 두 달 전 있었던 도요타상사 사건의 주범이 살해당하는 모습과 1년 뒤 일어난 오카다 유키코 투신자살 사건 당시 추락사한 오카다 유키코의 시신도 모자이크 없이 보도해 논란이 일었다.[118] 불에 타고 찢긴 시신들이 정말로 많다. 더 이상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단적으로 한 사진에는 나뭇가지 위에 걸려 있는 희생자의 두 팔을 수습하는 자위대원들이 찍혀 있는데 대부분의 사진들의 수위가 이 정도이다.[119] 라이벌 방송국더 베스트 텐이 유명해지자 이에 질세라 만든 가요 프로그램. 1981년 4월 6일부터 1986년 3월 31일까지 매주 월요일 저녁 8시에 방영되었으며 후에는 가요 톱텐(歌のトップテン)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회자도 토쿠미츠 카츠오, 이시노 마코로 교체했다. 1990년 3월 26일에 종영했다.[120] 항공 관련 지식이 있다면 알겠지만 항공기는 기체 식별번호와 편명이 따로따로다. 같은 편명이라도 다른 기체를 사용할 수도 있고 왕복할 경우 같은 기체를 사용하더라도 편명이 바뀐다.[121] 123편의 마지막 이륙 영상이 나온다. 구조 작업이 조사 착오 및 추락 현장 접근의 어려움 등으로 추락 12시간 후에야 시작되어 추락 당시에 살아남은 생존자 대다수가 죽고 4명만 살아남았다는 걸 포인트로 잡은 것 같다.[122] 군마 지역의 신문사를 중심으로 해당 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을 줄거리로 한다.[123] 본명은 남경호이며 현재는 배우 박해진의 일본 활동 및 공연 기획을 담당하고 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