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V-880의 롤아웃 현장[1] |
스위스에어 소속 CV-990의 조종석 |
1. 개요
Convair 880/990 Coronado[2]미국 컨베어 사에서 개발한 중,장거리용 협동체 4발 터보제트/터보팬엔진 여객기.
1968년에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인 Tu-144가 공개되기 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여객기라는 타이틀을 보유했지만, 이런저런 문제로 상업적으로는 대실패했다. 사실상 항공기 역사상 최악의 기종 중 하나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2. 개발사
1952년부터, 이미 CV-240과 CV-440처럼 레시프로기 업계에서 성공을 거둔 컨베어는 하워드 휴즈 TWA 회장의 제안으로 민항기 시장에서 새롭게 주목 받고 있는 제트 여객기 개발에 뛰어들겠다고 발표했다.[3] 그러나 실질적인 개발은 이미 1953년에 제너럴 다이내믹스에 인수되어 컨베어가 제너럴 다이내믹스의 항공기 사업 부문이 된 3년 후인 1956년 4월에야 시작되었고, 개발 와중에 이미 보잉 707과 더글러스 DC-8 등의 경쟁기종들이 개발되면서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될 상황이였다.이에 컨베어는 기존 707과 DC-8의 틈새시장을 파고들기로 결정하는데, 즉 707과 DC-8의 커버 구간 안쪽의 단거리 노선을 고속 기체로 단시간 내에 주파한다는 방침을 정하게 된다.[4]
이에 '중, 단거리 고속 여객기 개발'이라는 목표로 개발이 진행됐고 이는 기체 설계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컨베어는 단거리 노선용 기종이니 지방 소규모 공항에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비행기의 크기를 작게 했고[5] 거기에 속도를 최대화하기 위해 F-4 팬텀 II에서 쓰인 대출력의 J79 터보제트 엔진의 민수 버전을 장착했다.[6] 하지만 저런 컨베어의 컨셉은 항공기 경제성(대량수송/고효율)에 정반대되는 것이였다.
결국 707과 DC-8과의 개발차를 없애기 위해 프로토타입 생산까지 포기해가며[7] 치열하게 새 제트기 개발에 들어간 컨베어는 1959년에 제트 여객기의 운용 한계 속도로 알려진 마하 0.89의 속도를 가졌다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제트 여객기' CV-880을 완성했다. 참고로 CV-880을 처음으로 주문한 항공사는 트랜스 월드 항공이었다.
그리고 컨베어는 CV-880의 여객 수송량이 너무 적다는 아메리칸 항공의 요청에 따라 CV-880을 완성하기 전인 1958년 7월 30일부터 개량형인 CV-600(발매 직전에 CV-990으로 호칭이 바뀌었다.)의 개발에 들어가게 되는데[8], CV-990은 CV-880의 덩치를 키우고 주익의 공기역학적 특성을 개선했으며, 주익 상부에는 각각 2개의 충격 방지 구조물 겸 추가 연료 탱크를 설치했고, 엔진을 터보팬으로 바꾸어 '순항 속도 마하 0.91'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첫 상업 비행을 하는 CV-880 |
이후 CV-880은 1959년 1월 27일 초도 비행에 성공하고 다음 해인 1960년 5월 15일에 델타항공에 의해 휴스턴-뉴욕 노선을 비행하며 상업 운항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걸 써 본 델타항공은 아래와 같이 불만을 표했다.
1. 기체 폭이 좁아 2-3 배열로 좌석을 배치할 수 밖에 없으니 승객도 얼마 못 탄다.[9]
2. 애초 엔진이 연비가 나빴던 거 기반이라 연비가 좋은 것도 아니다.
3. 2 때문에 항속거리 길게 뽑는 것도 아닌데 이거 어디에 굴려야 수지 타산이 맞겠는가?
애초 중, 단거리 용으로 쓰더라도 상식적으로 이거 살 바에야 707이나 DC-8 더 사서 연료 대신 승객 더 태우고 다니면 될 일이었다. 당시에는 터보팬 추력이 아주 큰 편이 아니라 최대 이륙 중량일 때 연료나 페이로드 중 하나는 줄여야 했기 때문.
간단히 정리하자면 707과 DC-8에서 기체 크기와 항속거리는 줄였으면서 저질 연비는 그대로 둔 기체가 바로 이 CV-880라고 할 수 있었다. CV-880의 항속 거리는 보잉 737-200의 항속 거리(4300km)와도 유의미한 차이가 없을 정도로 짧은 4430km 정도였고, 이 때문에 CV-880/990은 대양 직항 노선에는 쓰이지 않았다.
사실 CV-880은 비효율성 외에도 이런저런 문제들이 많았다고 한다. 먼저 당시 기준으로도 엔진에서 나오는 소음과 매연이 심했고,[10] 잔고장이 잦아 긴급 착륙을 자주 해야 했으며, 실속 특성에 문제가 있었고, 조종까지 까다로웠으며,[11] 실제 운항 시 성능도 컨베어가 선전한 것만큼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12] 얼마나 기체의 완성도가 심각했는지 일본에서는 컨베어가 CV-880을 경쟁 기체와의 시간차를 메우기 위해 미완성인 채로 서둘러 출시한 게 아니냐는 악성 루머까지 나돌았을 정도였다고 하면 말 다한 셈.[13]
게다가 더 어이없는 것은, 컨베어는 항공사들이 '하늘에서 가장 빠른 항공기'에 거액을 지불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CV-880의 가격을 높게 책정했다고 한다. 당연히 저렇게 문제투성이인 비행기를 거액을 주고 살 항공사는 없었다. 이후 컨베어가 CV-880의 문제점들을 깨닫고 가격을 대폭 내려도 항공사들의 반응은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CV-990도 CV-880보다 기체의 안정성이 확실히 높아지긴 했어도 엔진의 진동이 예상보다 크거나 날개 위 구조물이 제 기능을 못한 데다가[14] 성능이 컨베어가 프로필상으로 제시한 것만큼 나오지 않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는데,[15] 이에 컨베어는 양산과 병행하여 CV-990A라는 개량형을 만들어 속도 이외의 프로필상 스펙을 겨우 충족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CV-990은 근본적으로 베이스가 작은 CV-880의 한계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항공사들의 반응은 나아지지 않아 CV-880을 구매한 항공사들 중 CV-990도 같이 구매한 항공사는 스위스에어 한 곳밖에 없었으며, 혼자서 20대의 CV-990을 인도받은 CV-990의 런치 커스터머 아메리칸 항공도 보잉 727을 인도받은 1965년부터 CV-990을 퇴역시키기 시작하여 1968년에 전량 퇴역시켰다.
이러다 보니 CV-880/990은 당연히 707, DC-8과 달리 판매 실적도 저조했다. CV-880은 1959년부터 생산되었는데 겨우 3년 만인 1962년에 총 65대로 생산이 종료되었으며, CV-990은 초도 비행을 1961년 1월 24일에 하고 1962년 3월 18일에 아메리칸 항공 소속 기체가 뉴욕-시카고 노선을 비행하는 것으로 운항을 시작했지만,[16] 운항을 시작하고 반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62년 여름에 수주를 마감한 후 1963년에 총 37대 생산으로 끝난다. 이렇게 CV-880/990은 총계 102대밖에 팔리지 못하고 4년 만에 쓸쓸히 사라졌다.
이 프로젝트의 대실패로 당시 가치로만 해도 약 1억 8500만 달러의 손실액을 입은 컨베어는 이후 여객기 개발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군의 미사일과 로켓 개발에 참여하는 군수 업체로 주로 활동하며[17] DC-10과 MD-11의 동체 제작에 참여하는 등 다른 여객기 제작사들의 하청을 맡는 회사로 전환했으며, 1992년에 미사일 부문을 매각한 것을 시작으로 회사 각 부문을 분할하여 매각한 끝에 1996년에 53년의 역사를 끝마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 때문에 CV-880/990은 컨베어의 몰락을 앞당긴 기체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합중국 해군, CV-880, 161572 마지막으로 운항한 CV-880 | NASA, CV-990, N810NA 마지막으로 운항한 CV-990 |
CV-880은 화물기로 쓰인 적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80년대 중반에 이미 민간 운항을 중단했으며, 완전한 퇴역은 1998년에 미군 소속 공중급유기로 개조된 CV-880 1대가 퇴역하는 것으로 성사되었다. 그리고 CV-990 역시 80년대 중반에 민간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며, NASA의 에임스 연구 센터에서 속력 시험과 우주왕복선의 랜딩 기어 연구용으로 3대를 쓰다가 마지막 남은 기체 1대가 1995년에 퇴역하면서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 시점에서 현역인 CV-880/990은 단 한 대도 없다.[18]
3. 제원
기본형인 CV-880과 덩치를 키우고[19] 엔진을 터보 팬으로 바꿔 속력을 키운 CV-990으로 구분된다.CV-880과 CV-990의 엔진 차이점. 위쪽이 CV-990의 엔진이고 아래쪽이 CV-880의 엔진이다.
파일:external/img.planespotters.net/n810na-nasa-convair-990-30a-5_PlanespottersNet_154023.jpg
좀 더 면밀히 보면 엔진카울과 내부 압축팬의 두께가 심히 괴리감이 느껴진다.[20]
보다시피 CV-880의 엔진 뒷편에 팬 하나 추가한 것이 CV-990의 엔진 대신 추력은 71.4kN으로 늘었다.
3.1. CV-880
일본항공, JA8025[21] |
운항 승무원 | 3명 |
탑승객 | 110명 |
패이로드 | 24,000파운드 (10,900kg) |
전장 | 129피트 4인치 (39.42m) |
전폭 | 120피트 (36.42m) |
높이 | 36피트 3¾인치 (11m) |
익면적 | 2,000제곱피트 (185.8제곱미터) |
공허중량 | 94,000파운드 (42,730kg) |
최대 이륙중량 | 193,000파운드 (87,730kg) |
엔진 | 4x GE CJ805-3 터보제트 엔진, 기당 11,650파운드(51.95kN) 추력 |
순항속도 | 615mph (535노트, 990km/h) |
실속속도 | 111mph (97노트, 179km/h) |
항속거리 | 3,385마일 (2,943nmi, 4,430km) |
실용 상승한도 | 41,000피트 (12,500m) |
생산대수 | 65대 |
3.2. CV-990 Coronado
아메리칸 항공, N5608[22] |
운항 승무원 | 4명 |
탑승객 | 96~121명 |
전장 | 139피트 5인치 (42.49m) |
전폭 | 120피트 (36.58m) |
높이 | 39피트 6인치 (11m) |
공허중량 | 120,560파운드 (54,690kg) |
만재중량 | 255,000파운드 (115,700kg) |
엔진 | 4x GE CJ805-23 터보팬 엔진, 기당 16,100파운드(71.6kN) 추력 |
최대속도 | 534노트 (615mph, 990km/h) |
순항속도 | 495노트 (570mph, 920km/h) |
항속거리 | 4,700nmi (5,400마일, 8,690km) |
실용 상승한도 | 41,000피트 (12,496m) |
생산대수 | 37대 |
4. 기타
- 일본항공은 DC-8을 투입할 정도의 수요는 없다고 여겨지고 있던 동남아시아 노선용으로 쓰기 위해 CV-880 9기(발주 8대+임대 1대)를 운용했다. 일본항공의 CV-880은 1961년 9월 25일에 도쿄-삿포로 노선을 취항하는 것으로 운항을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CV-880은 '최초로 일본 국내선을 운항한 제트기'라는 나름의 타이틀도 얻었다. 덤으로 CV-880은 1963년 11월 22일에 있던 영친왕의 귀국 때에도 쓰였고[23] 1964년 4월 15일에 일본항공이 김포국제공항에 취항하기 시작했을 때 쓴 기종이기도 했다.[24]
다만 전술한 문제점들 때문에 업계에서는 인식이 나빴고,[25] 이 여파로 일본항공은 CV-990의 발주를 하지 않았으며, 결국 1970년 10월 31일에 국내선 운항을 마치고 1971년 4월 28일에 마지막까지 일본항공 소속이었던 JA8021이 매각되면서 일본항공 소속의 모든 CV-880가 퇴역했다. 게다가 일본항공은 운용한 CV-880 9대 중 무려 3대를 사고로 잃었기에[26] CV-880의 퇴역 이후 'CV-880'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일본항공 내에서 금기로 여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 묘하게도 CV-880/990은 사고 면에서도 불운의 비행기였다. 실제로 CV-880은 첫 취항으로부터 8일밖에 안 지난 1960년 5월 23일에 조종 훈련 중이던 델타항공 소속의 CV-880이 이륙 중에 원인불명의 실속으로 추락해 탑승한 승무원 4명이 전원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27] 심지어 CV-990은 37대밖에 생산되지 않은 게 무려 8대나 사고로 소실되어, 무려 21.6%의 기체가 사고로 소실되었다는 불명예스러운 대기록을 장식했다. [28]
- 매우 적게 팔렸다는 것과 항속 거리 문제로 처참하게 실패한 것 때문에 다쏘 머큐리와도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29], 차이점이 있다면 머큐리는 나중에 A320, A320neo의 설계 모티브가 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비참한 결말로만 끝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 L-1011과 평행이론 수준으로 유사하다는 의견도 있는데, 다만 차이점이라면 L-1011은 오늘날 기준으로도 굉장히 높은 완성도를 가졌지만, 기체 외적 요소들 때문에 제대로 팔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5. 참고 링크
6. 관련 문서
[1] 1958년 12월 15일. 등록번호 N801TW, 델타항공의 박물관에 조종석이 보존되어 있다.[2] 스위스에어가 샌디에이고 해안에서 떨어진 섬과 첫 CV-990이 착륙한 곳의 이름을 따서 붙인 별칭이다.[3] 사실 휴즈는 원래 록히드에 제트 여객기 개발을 의뢰했지만, 록히드는 이미 L-188을 개발해야 해서 컨베어로 의뢰 대상을 바꾼 거라고 한다.[4] 당시에는 이게 말이 됐는데, DC-3을 운용하던 항공사들이 운항 사이클을 타이트하게 잡아 속도를 높여 경쟁하였다. 그래서 컨베어는 기왕 이렇게 된거 고속 기체로 주파하자는 개념이었다.[5] CV-880의 길이는 39.42m였는데, 이는 DC-8-10~50 시리즈(45.9m)와 보잉 707-120(44.04m)보다 훨씬 짧았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보잉 737-800(39.5m), 보잉 737 MAX 8(39.52m)과 동급 수준이었으며 보잉 727-100(40.59m)보다도 1m 이상 짧다.[6] 사실 민수 버전 이래봤자 원판에서 애프터버너만 삭제한 엔진이었는데, 이를 보고 항공 관계자들이 '애프터버너를 그대로 달아 뒀다면 이륙 거리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엔진 추력은 51.95 kN인데, 보잉 707의 프로토타입인 367-80이 마찬가지로 터보 제트였는데 44.5kN인 J57 민수형인걸 고려하면 상당히 고출력인 셈이었다.[7] 이렇게 처음부터 양산을 전제로 생산 라인을 가동하고 선행 양산기를 시험에 이용하는 양식을 '쿡-크레이기 플랜(Cook-Craigie plan)'이라고 한다.[8] 일설에 따르면 컨베어가 원래 정품으로 출시할 기체는 개량형으로 알려진 CV-600(=CV-990)이었고, CV-880은 상술한 것처럼 경쟁 기종과의 시간차를 메우기 위해 중간에 갑자기 프로토타입도 없이 미리 양산에 들어간 기체였다고 한다.[9] 델타 항공은 DC-8-11에 2클래스(1등석 2-2 배열/일반석 3-3 배열)로 119명을 태웠던 것과 달리 CV-880에는 단일 클래스(2-2 배열)로 84명만 태울 수 있었다. 좌석 폭은 넓어져 승객 입장에서는 아주 큰 이득이기는 했으나 항공사 입장에서는 승객을 많이 태우고 다니는 게 이득이다.[10] CV-880에 쓰인 J79 엔진은 극도의 소음과 매연으로 악명이 높았다. 또 엔진 정비도 복잡했다.[11] 지나치게 날카로운 후퇴각 때문에 이착륙이 사실상 위험한 수준이었으며, 특히 속도를 낮출 때의 조종감이 최악이었다고 한다.[12] CV-880의 날개는 공기저항이 과하게 영향을 받게 설계되어 실제 CV-880의 속도는 당대의 다른 제트 여객기와 비교해볼 때 그렇게 유의미한 차이는 없었다고 한다.[13] 당연히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당장에 초기형 DC-10이 악평을 받은 것도 설계 오류를 알면서도 그대로 출시해서였지, 미완성이여서는 결코 아니었으며, 정황상 쿡-크레이기 플랜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14] 날개 위 구조물에 추가 연료를 넣으면 기체가 무거워져 기체의 떨림을 유발하기 쉬웠기 때문에 이 구조물들은 추가 연료 탱크로는 쓰이지 못했다.[15] 당시 아메리칸 항공의 스케줄상 시간은 707과 CV-990 사이에 사실상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16] 초도 비행에서도 난기류와 선외 엔진 진동이 발생하여 이를 고치려고 예정보다 인도가 지연되었다.[17] 컨베어는 CV-880의 개발 이전인 1957년에 최초의 아틀라스 로켓을 개발한 바가 있다.[18] 1979년까지 생산된 보잉 707도 오메가 에어 소속 공중급유기 2대만이 현역이고, 1972년까지 생산된 DC-8은 3대가 현역이다. 사실 1963년 단종된 기체라 현 시점에서는 무려 한 갑자(60년)은 거뜬히 넘는 기체인 데다가 당대 기준으로도 완성도가 낮은 기체였던 만큼 현역인 기체가 있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19] 동체 길이가 39.4m에서 43.5m로 늘었는데, 그래봤자 707이나 DC-8의 최초형(각각 44/46m)보다도 작았다.[20] 사실 다른 터보팬 엔진도 맨 앞의 팬만 떼면 안쪽은 저렇게 되어있다. 단지 다른 터보팬 엔진들은 그 팬이 내부를 가려버리기에 보이지 않는 반면 CV-990의 것은 팬이 저 뒤에 달려서 엔진 카울 안쪽이 훤히 보이기에 더 부각될 뿐.[21] 1963년 9월 2일에 히스로 공항에서 촬영되었다.[22] 1962년 7월 28일에 웨인 카운티 국제공항에서 촬영되었다.[23] 당시 사용된 기체는 JA8023이었다.[24] 한국으로의 첫 정규 비행에 투입된 기체는 일본항공의 CV-880 1호기인 JA8021이었다고 한다.[25] 극악의 조종성 때문에 CV-880은 일본항공의 조종사들 사이에서 '난폭한 말(じゃじゃ馬)'이라고 불렸다고 한다.[26] 이 세 사고들은 모두 이착륙 훈련 중에 일어난 사고였다.[27] 아이러니하게도 컨베어는 CV-880 출시 당시에 CV-880이 '지금까지 출시된 항공기 중 가장 안전한 항공기'라고 선전했다고 한다.[28] 여담으로 CV-880은 전체 생산량의 15.3% 가량인 10대가 사고로 파괴되었는데, 전체 보잉 707의 17.2%, 전체 DC-8의 15.1%가 기체 전손 사고를 겪었단 것을 감안하면 CV-880의 기체 전손율은 초기 제트기 중에서는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29] 다쏘 머큐리는 총 판매량이 겨우 11대, 그것도 '에어 인터'라는 이름의 항공사 1곳만 운용했다.[30] 1960년 10월에 델타 항공에 N8809E로 인도된 것을 1975년 4월에 엘비스가 구매한 후 기체에 당시 7살이던 어린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의 이름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