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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20 20:27:35

오카다 유키코 투신자살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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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 오카다 유키코 투신자살 사건
岡田有希子飛び降り自殺事件
발생일 1986년 4월 8일 오후 12시 15분
발생 위치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요츠야 4-28, 오키도빌딩[1]
(東京都新宿区四谷4-28, 大木戸ビル)
유형 투신자살
원인 미제사건
인명피해 사망 1명

1. 개요2. 사건의 전개
2.1. 4월 4일2.2. 4월 5일2.3. 4월 6일2.4. 4월 7일2.5. 4월 8일 (사건 당일)
2.5.1. 1차 자살 시도2.5.2. 2차 자살 시도2.5.3. 매스컴 노출과 언론의 만행
3. 방송·미디어4. 자살을 둘러싼 루머
4.1. 미네기시 토오루 관련 루머4.2. 칸다 마사키 관련 루머
5. 자살 원인에 대한 추측

[clearfix]

1. 개요

벚꽃이 만개했다. 그래, 그날도 희망을 상징하는 꽃은 활짝 피어 있었다.
桜の花が満開です。そう、あの日も、希望を象徴する花は咲きほこってました。
이제 막 혼자 살게 된지 얼마 안되어, 기쁨으로 가득했을 유키코.
ひとり暮らしを始めたばかりで、喜びいっぱいだったはずのユッコ。
그 이후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벚꽃은 '슬픔의 꽃'으로 변해버렸다.
あれ以来、彼女を愛する人々にとって桜は”悲しみの花”に変わってしまいました。
사계절 중 가장 좋아했던 계절은 봄이었다.
四季の中でいちばん好きだったのは春。
데뷔도, 첫 콘서트 투어의 시작도 봄이었다.
デビューも、初めてのコンサートツアーのスタートも春。
그런 계절에 왜 인생의 마침표를 찍었을까.
そんな季節にどうして人生のピリオドを打ったのでしょう。
하지만 시간은 멈추고, 하늘 위에서는,
でも時間は止まり、空の上では、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ずうっと好きな季節を過ごしているのかもしれませんね。

― 주간명성(週刊明星) 쇼와 62년 4월 16일호 中

(쇼와 61년) 1986년 4월 8일, 일본의 연예인이자 아이돌 오카다 유키코가 갑작스럽게 투신자살미제사건.

2. 사건의 전개

2.1. 4월 4일

어린이 : 오카다 유키코씨에게 질문합니다! 몸은 말라서 작은데 어째서 가슴은 그렇게 크신 건가요?

오카다 유키코 : 아, 아뇨...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는데 전혀 마르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렇게 크지 않아요.

야쿠마루 히로히데[2] : 커.

오카다 유키코 : 그렇지 않아요.

하야미 유 : 그래도 괜찮죠.

오카다 유키코 : 평범해요, 진짜로.

사회자 : 자신을 가지는 게 좋아.

출연자 : 맞아 맞아, 자신 있는 편이 좋지.

사회자 : 얼마?(=몇 사이즈)

오카다 유키코 : 에? 보통이에요. (손을 둥그렇게 말면서) 한 개.

スターどっきりインタビュー(스타 깜짝 인터뷰) 中

4월 4일 '스타 깜짝 인터뷰(スターどっきりインタビュー)'에 촬영 스케줄에 참여하였다.[3] 어린이의 질문에 응하고 있던 모습과 유키코가 무대에서 노래하고 있던 모습에서 눈에 힘이 없어 보이고 다크 서클이 짙어 보인다. 마지막 화면에는 유키코를 추모하는 자막[4]이 송출되었다. 이 날은 자신의 공간을 갖고 싶다고 말한 유키코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데뷔 전부터 소속사의 동료 아이돌들과 합숙하던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相澤 秀禎)의 자택에서 나와 미나토구 미나미 아오야마에 있는 맨션으로 자취를 시작한 날이다.

2.2. 4월 5일

파일:岡田有希子 渋谷公会堂-1986.4.5(土).jpg

4월 5일, 시부야 공회당[5]에서 낮과 밤 간격으로 두 번 'Heart Jack' 콘서트가 개최되었다. 유키코 자신의 17곡과 비틀즈의 Tell Me Why와 안리의 슬픔이 멈추지 않는다, 하야미 유의 Passion 3곡을 커버하였다.

콘서트가 끝난 뒤 저녁에 아이자와 사장 자택을 방문한 유키코는 아이자와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유키코가 "저는 이제 틀렸을지도 모르겠어요. 신인들이 잔뜩 나와서...[6]''라는 말을 하였고 이에 아이자와 사장 부부는 "무슨 소리냐. 너는 우리 회사의 기둥이니 힘을 내!"라고 격려하였지만 유키코는 "위에 있잖아요... 또 한 명(사카이 노리코[7])이..."라고 답하였다고 한다.[8] 이 날 남은 짐을 정리하면서 나온 본인의 포스터를 노리코가 갖고 싶어하였고 사인과 함께 선물로 주었다. 포스터는 사장인 아이자와 히데요시에게 양도되어 간직하고 있었지만 이후의 행방은 불분명하다.

유키코의 생전 마지막 음악 방송 출연이다. 4월 5일 무대이며 4월 6일에 방영되었다. 초반 인터뷰 부분에서 다음 싱글과 TV드라마를 언급하였다.

2.3. 4월 6일

파일:20150507_14g.jpg

오후 2시 30분, 나고야 시민회관에서의 콘서트 「Heart Jack」를 위해서 도쿄에서 나고야로 향하는 신칸센에 탑승하였다.[9] 콘서트 종료 후 '코쿠사이 호텔'의 로비에서 고교 시절의 친구들과 클럽의 선배들을 포함해 다섯 명과 회식을 하였다. 도쿄로 돌아가기 전 잠시 나고야에 있는 친가에 들렀고, 본가에서 가족과 모여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언니의 성인식 사진을 보며 기뻐했지만 유키코는 묘하게도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가 함께 찍은 가족 사진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고 한다. 평소의 유키코였다면 "왜 나만 없는 거야? 힝!"이라며 가볍게 장난 섞인 짜증을 내고 자신의 무대 비디오를 보면서 그것에 대해 웃으면서 이야기했겠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사진을 보며 장난 섞인 짜증도 내지 않고 자신의 무대도 보지 않았으며 아무 미소도 짓지 않아서 왠지 모를 낯섦이 느껴졌다고 이는 '사랑을 주세요'라는 책을 통해 유키코의 어머니께서 밝혔다. 유키코는 부모님의 차를 타고 나고야역에 도착하여 오후 8시 53분, 신칸센을 타고 도쿄로 돌아간다. 그때의 모습이 어머니가 본 딸 '사토 카요(유키코)'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빠나 엄마가 혼자 도쿄로 오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나는 좋아서 하는 거니까 괜찮지만, 역시 아빠나 엄마가 도쿄로 오는게 돈을 더 받을 수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유키코는 부모와 헤어지기 전에 위와 같이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미 수익 30억엔[10]을 올리는 톱 아이돌이었으나 일본의 아이돌은 과거에도 월급제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유키코도 돈을 많이 받진 못했을 것이며 갑작스럽게 돈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에 대해선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11]
1986년 4월 6일에 녹음한 레귤러 라디오 방송 '夜遊びしナイト!'의 마지막 방송.[12]

당일 심야에 도쿄에 도착한 유키코는 매주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의 마지막 회 녹음을 마쳤으며,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방송 스케줄이었다. 이 방송에서는 향후 스케줄 같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2.4. 4월 7일

파일:오카다 유키코 4월 7일 시부야구 판테온 1.png
파일:오카다 유키코 4월 7일 시부야구 판테온 2.png
파일:오카다 유키코 4월 7일 시부야구 판테온 3.jpg

이 날은 방송 스케줄이 없었다. 낮에는 동료 아이돌 가수[13]와 영화 <여배우 프란시스>를 같이 감상하였고 오후 7시, 시부야의 토큐 문화 회관내에 있던 시부야 판테온[14]에서 록키 4의 시사회에 금지된 마리코에 출연한 배우 이쿠타 토모코[15]와 함께 참석하였다. 이 시사회에서 찍혔던 매스컴상의 모습이 생전 마지막으로 찍힌 유키코의 사진으로 남게 되었다.[16] 이쿠타 토모코의 초상화를 잘 그려온 사람을 만나자 유키코가 "나도 하나 했으면 좋겠다."라고 부탁하였지만 "사진을 가져와 준다면 하나 해 드린다."라고 말했고 유키코가 사진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초상화는 그리지 못하였다.

오후 10시 자택 맨션에 귀가한 후 유키코는 가스 자살을 시도하기에 앞서 연습 비슷한 행동을 하였는데, 가스 냄새가 유출되어 맨션에서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금방 잠잠해졌다. 오후 10시 10분, 미조구치 치프 매니저로부터 다음날 부터 개시 예정이었던 주연 드라마 <가출 따님의 과외수업>(텔레비 아사히)이 국측의 사정으로 중지가 되었다고 알리자 유키코는 "어머, 아쉽네?"라고 말하였는데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밝았다고 한다. 이것으로 결국 다음날인 4월 8일도 스케줄이 없었다. 오후 11시에 배우 이쿠타 토모코가 유키코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는데 잠시 뒤 전화가 걸려와서 받았고 오후 11시 반, 아이돌 동료였던 이시노 요코가 유키코의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는 4번 정도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아 끊었다고 진술하였다.

2.5. 4월 8일 (사건 당일)

오전 5시 20분, 세이죠에서 택시를 잡아 도쿄역 건너편 도쿄도청[17] 옆의 공사 현장 앞에서 내렸다는 택시기사의 증언이 추후 밝혀졌다.

2.5.1. 1차 자살 시도

4월 8일 오전 9시경, 도쿄 미나토구의 미나미 아오야마 로터리 맨션에 거주하던 6층의 한 거주자가 짙은 가스 냄새를 맡았다. 이를 통보받은 관리인은 가스의 누출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찾아다녔고 402호실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당시 402호의 거주자는 사토 카요(오카다 유키코의 본명). 차주는 선 뮤직 프로덕션. 이곳은 평범한 맨션으로 외부인의 출입이 자유로웠지만 아이돌 오카다 유키코가 거주하고 있다는 것은 관리인만 알고 있었다. 관리인은 곧바로 402호실의 초인종을 여러 번 눌렀지만 안에서 반응이 없자 다급해졌고 보조키로 문을 열었다. 하지만 현관문에 체인락이 걸려있어 실내로 들어가지 못하고 "사토 씨 괜찮습니까?" 라고 여러 번 외쳤지만 반응은 없었다.

10시 9분, 관리인의 연락을 받은 경시청이 아카사카 소방대원을 대동한 채 출동하고 소방대원이 체인락을 절단한 후에야 현장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실내에는 강한 가스 냄새가 진동했고 한가운데 유키코는 왼손에서 피를 흘린 채 울고 있었다.[18] 왼손에는 커터 칼로 자른 듯한 5cm 자상이 두 개나 있었다.

이렇게 유키코의 자살 시도는 미수로 그치면서 관리인과 함께 구급차에 키타아오이야마 병원으로 급히 호송되었고 곧바로 왼손의 상처를 봉합수술로 치료하고 신경안정제를 투여했다. 의외로 침착하게 의사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한 유키코의 반응에 퇴원이 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당시 사무실에 있었던[19] 소속사의 후쿠다 전무에게 "유키코가 큰일이다. 키타아오야마 병원에 빨리 데리러 가달라."는 전화를 받고 후쿠다 토키오 전무와 여성 코디네이터 야마자키는 병원으로 급히 출발하여 두 사람은 11시가 넘어서야 병원에 도착했고 유키코와 대면하였으나 유키코는 자살 시도의 원인에 대해선 함구한 채 울기만 할 뿐이었다. 병실 커텐 안에서 손목에 붕대를 감싸고 울고 있던 유키코와 대면했을 때는 펑펑 울고 있기보다는 조용히 훌쩍훌쩍 울고 있는 느낌으로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깊은 상처가 아니었기 때문에 의사에게 입원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들은 후쿠다 전무는 유키코를 데리고 나와 택시에 올랐다.

"어디로 가고 싶니? 나고야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까? 자택 맨션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사무소로 갈까?"라고 물었다.

유키코는 "사무소가 좋아요."라고 대답하였고, 사무소가 위치한 신주쿠의 요츠야로 향하였다.

12시경 소속사 건물로 도착하였고, 6층의 사장실에 들어오자마자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유키코.

하지만 심상치 않은 유키코의 표정에 무언가를 눈치 챈 후쿠다 전무는 매니저인 야마구치와 사장 비서에게 철통 같은 감시를 지시하였다.

이때 "딸기 주스가 마시고 싶어요."라고 말한 유키코.

결국 후쿠다 전무는 사장 비서에게 이를 부탁하였고, 유키코를 감시하고 있었던 사람은 3명에서 2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때 사장 아이자와의 전화가 걸려오고, 당시 유키코의 자살 미수 사건이 기자들의 귀에 들어간 상황에서 향후 대처를 의논해야 했고 당연히 유키코의 앞에서 전화 할 상황은 아니였기 때문에 후쿠다 전무까지 자리를 비우게 되며 야마자키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둘만 남게 된 유키코와 야마자키. 순간 생수를 엎지른 유키코.

"가만 있어. 내가 티슈를 찾을 테니."

야마자키가 티슈를 찾는 순간의 틈에 유키코가 없어진다.

"유키코가 없어졌습니다."

패닉에 빠진 야마자키가 옆방에서 아이자와 사장과 전화 통화 중인 후쿠다 전무에게 달려가 외쳤고 다급해진 두 사람은 사내 건물을 돌아다니며 유키코를 찾고 있었다.

바로 그 시각, 휴가 중이던 유키코의 전담 매니저 미조구치가 선뮤직 사무소 앞에 도착하였다.

2.5.2. 2차 자살 시도

12시 15분, 유키코는 선뮤직 건물 옥상에서 투신자살하였다.[20]

당시 택시에서 내린 매니저 미조구치가 선 뮤직 사무소 건물로 들어가려던 그 순간 현장을 목격하였고 직감으로 "오카다 유키코가 떨어진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다가갔지만 이미 뇌수가 터져 사방에 흔재해 누구인지 식별할 수 없었다.

다만 언제나 유키코가 차고 다니던 손목시계가 유키코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때 유키코가 먹고 싶다던 딸기 주스를 배달하기 위해 온 웨이트리스는 현장을 보고 기겁하며 올라갔고, 매니저 미조구치는 "유키코, 유키코!"라고 외치며 눈물을 쏟았다.

선 뮤직 사무소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요츠야 4가의 교차로에 위치하여 있었기 때문에 현장을 수습하기도 전에 외부에 쉽게 노출되기 쉬웠다.

2.5.3. 매스컴 노출과 언론의 만행

곧바로 현장에서 생방송으로 이 사건이 보도되었다. 아이돌 오카다 유키코가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숨졌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사고도 아니고 사람의 통행량이 많은 대낮 신주쿠구 요츠야에 있는 자신도 소속된 선 뮤직 프로덕션 건물 7층에서 20m 아래로 스스로 몸을 던졌다는 사실까지 알려졌다. 유키코가 자살했을 당시 건물 1층에는 도시락 가게가 있었는데 점심 무렵이라 사람들로 가득했다. 더구나 가스 중독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친 사실이 당일 오전에 보도되어 기자들도 그 앞에서 몰려있었기 때문에 유키코의 투신자살 현장을 눈 앞에서 목격한 사람들이 많았다. 목격자들은 처음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엇인가가 사람인 줄 모르고 검은 쓰레기라고 생각했으나 눈 앞에 있는 것이 투신자살한 시체임을 깨닫고 구토하였으며 특종을 위해 잠복해 있던 한 기자는 유키코의 사진을 얻어갔다.

매니저 미조구치는 그녀의 참담한 마지막 모습을 매스컴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곧바로 회사로 올라가 모포를 가져와 사체를 수습하였다. 하지만 미조구치가 자리를 비운 그 짧은 시간에 하필 황색언론 기자들이 현장을 촬영하여 미디어에 기재하였다. 이 사진들은 유키코를 검색하면 현재에도 인터넷에 떠돌아다니고 있으니 주의.
오카다 유키코 양, 18살인데요. 데뷔한 지 이제 3년째입니다. (중략) 오늘 12시 15분 소속사 선뮤직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렸다는 소식입니다. 오카다 양은 자살하기 전에 한 번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맨션 사진) 여기는 유키코 양이 살던 맨션입니다. 여기서 가스를 틀고 손목을 긋고 병원에 옮겨졌습니다. 여기서 '별로 심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 소속사에 돌아와서 뛰어내렸습니다.

(현장) 지금 잘 모르겠습니다만, 매니저가 뛰어내린 걸까요? [자막: 이 때는 매니저가 떨어진 것 아닐까라고 생각했지만, 확인 결과 오카다 유키코 양이었습니다]
저기는 여성의 시체가 있습니다. [전화: 지금 누가 뛰어내렸나요? 매니저일지도 모른다?]
선뮤직에 가보겠습니다. 5층일까요?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몇 시였어? 아까? [20분쯤이었습니다]
20분? [그때 119가 왔습니다.]
여성이었죠? [네]

〈사무소로 간다〉

아 잠시만 실례합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됩니까? 누가 뛰어내렸나요? [오카다 유키코.]
죄송합니다, 오카다 유키코 본인이었습니다. 매니저라고 해버렸네요.

후쿠다 전무: 그때 저와 3명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전화가 와서 제가 전화를 받고 한 명이 사라졌습니다. 그 때 티슈를 찾다가 사라져서 찾다가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에 슬리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올라가보니까 뛰어내리는 걸 보았습니다...

1986년 4월 8일 투신자살 직후의 생방송 中

생방송에선 거적이 덮힌 유키코의 시체와 핏자국이 버젓이 나온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일본은 황색언론이 극에 달하며 특종을 위해서라면 취재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자극적인 보도를 하기 위해 안달났기 때문에 방송 리포터인 나시모토 마사루(梨元勝, 1944-2010)[21]가 무리하게 취재한 작태는 당시나 지금이나 일본인 사이에서 비판을 받는다.[22]

투신하기 전부터 황색언론이 극에 달했던 일본 언론 기자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수습이 아닌 투신한 유키코의 시신을 촬영하여 모자이크 처리 과정 없이 흑백으로 잡지에 싣는 행위와 아스팔트에 피와 뇌수[23]가 흥건한 광경을 적나라하게 생방송으로 내보내는 행위 등의 비도덕적인 미디어의 보도 태도[24]는 대중들에게 매우 지탄받았다. 이 뿐만 아니라 흩어진 뇌수를 담아갔다거나 몰래 가져가 살점을 먹었다는 등 흉흉한 소문까지 퍼졌다.
파일:yukiko1.jpg
파일:yukiko2.jpg
1986년 4월 8일에 사망 당시 신주쿠 요츠야의 현장 전경.

12시 40분경, 유키코의 시신은 오츠야서로 인계되었고, 소식을 들은 수 많은 팬들이 사건 현장으로 모여 묵념하듯 아무런 말 없이 그 자리에서 계속해서 추모하였다. 잠시 울부짖는 현장으로 변하기도 하였고, 당시 유키코의 사진들이 꽃다발 위로 쌓여있었다. 같은 날 황색언론 잡지사 프라이데이와 포커스는 모자이크 처리도 되지 않은 적나라한 시신의 사진을 무삭제로 잡지에 싣는 비도덕적인 행보를 저질렀다.

자살이 확실한 상황이라 증언을 토대로 검증만 했을 뿐, 부검은 따로 진행되지 않았다.

20시 20분, 나고야에서 유키코의 부모님이 올라오셨고, 이 날 모든 방송에서 오카다 유키코의 죽음에 대한 기사와 방송이 밤까지 이어졌으나, 단 한 곳 테레비 아사히의 간판 뉴스 채널 '뉴스 스테이션'에서는 아나운서 쿠메 히로시가 "연쇄 반응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자살 관련 보도를 절제하였습니다."라는 멘트를 하고 사건 보도를 일절 하지 않았다.[25]

당시 유서에서 언급되었던 배우 미네기시 토오루(峰岸 徹)[26]가 동일 밤 오후 10시 경 TBS 테레비의 별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심정은?
"솔직히, 엄청난 충격입니다."

어떤 교제였었나?
"같이 일하며 여러 가지로 귀여워했었고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귀여워한 존재였습니다."

유서에 당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같이 일하고 밥을 먹거나 그녀를 배웅한 것뿐이라..."

사랑의 파국 같은 것이 있었나?
"그녀는 의외로 섬세해서 밝은 면과 훅하고 깊게 생각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저는 오빠 같은 존재였지만 그녀에겐 동생이 아니라 플러스 마이너스 알파 같은 것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첫사랑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일 생각은 안 했나?
"나이도 다르고 그런 교제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호의를 드러내지 않게 주의하던 정도였습니다. 정말 저에 대한 일로 자살했는지 어떤지는 의문입니다."

좋아한다고 고백받았습니까?
"없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추상적으로라도 저는 뭐라고 할 수 없네요."

어떻게 했었으면 좋았다고 생각하는지?
"그녀에겐 로맨틱한 면이 있었으니 발라드 시라도 써주었다면 좋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는 것은?
"책임은 느낍니다. 비난은 받을 생각이니 제 딸이 크면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시켜주고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미네기시 토오루의 기자회견 中

이후 유키코를 화장했을 때, 유키코의 어머니는 남편으로부터 갈색 봉투를 건네받았는데, 그 안에는 유키코가 평소 사용했던 편지지 2장이 있었고 거기에는 언제나 쓰고 있던 좋아하던 시와 미네기시 씨가 좋았다라는 말이 쓰여져 있었다. 이것을 유서라 봐도 좋을지 판단하기 애매하지만 비슷한 것이라고 해석하셨고, 이것만으로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는 없는 것으로 미네기시 토오루에게 폐를 끼쳤다며 사죄하는 말을 남기셨다.

당시 유키코와 마지막까지 대면했던 후쿠다 전무는 "기자회견 당시엔 정말로 괴로웠다. 하지만 아이자와 사장과 기자의 질문엔 정직하고 전부 대답하자고 서로 이야기하였습니다. 배우와의 교제가 원인이 아닌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지만 자세한 진상은 알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유키코는 정말 멋진 아이였다는 것. 장례식 때 유키코의 아버지께서 "짧은 인생이었지만 인생을 응축한 것 같은 행복한 아이였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아이자와 사장도 저도 그 말에 얼마나 구원을 받았는지 모릅니다."라고 회상하였다.
당일, 제가 치과에 갔다가 돌아오니 사무실 빌딩 아래가 엄청나게 소란스러웠습니다.

유키코가 투신자살을 했다는 겁니다. 저를 기다리던 유키코가 아침에 있었던 자살 소동에 대하여 제게 무슨 말을 듣는 것이 싫어 옥상으로 올라가 뛰어내린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남긴 하나의 일기풍 노트가 발견되어 그것을 읽고 나니 자살의 진상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 노트에는 상대 남성의 이름(같은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 미네기시 토오루)은 물론 그녀가 그 남성을 떠올리면서 기뻐하는 모습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스스로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풀솜으로 목을 조르는 듯이 괴롭다고 극명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유키코는 미네기시 씨에게 연심을 품고 플라토닉한 사랑을 계속 이어오다 자살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연예사무소 선 뮤직 프로덕션의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의 인터뷰 中

사건 직후 선 뮤직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가 기자회견을 열었고 인터뷰에서 오카다 유키코의 자살 원인에 대해서 미네기시 토오루에게 품어 왔던 연심이었다고 주장하였다.[27]

3. 방송·미디어

4월 9일 닛폰 테레비를 시작으로 여러 방송사에서 오카다 유키코를 추모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오카다 유키코 고별식

1986년 5월 28일 나카모리 아키나밤의 히트 스튜디오 심야 라이브 무대에 유키코의 유령이 찍혔다는 소문과 유키코의 시신을 촬영한 사진기자가 얼마 뒤에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사진기자는 죽지 않았으며, 유령 찍혔다는 무대 영상을 확인해 본 결과 뒤에 앉아있던 다른 출연가수[28]가 어둡게 비춰져 유령처럼 보인 것 뿐이다. 2002년 12월 1일, 한국에서도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것을 진실이라고 판정해버리며 진짜로 믿는 사람들까지 생겼지만 위의 이야기들은 당연히 거짓이다. 다시 말해 유키코가 이러한 일들을 알게 되면 당연히 저승에서 분노할 소리다.

1997년 2월, 슈퍼 선데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오카다 유키코 특집으로 추모 다큐멘터리를 방영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일본 방송계에서 오카다 유키코에 관한 언급은 터부시되는 상태였다. 추억의 80년대 아이돌을 자주 다루는 일본 방송계에서 유키코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비슷하게 갑작스럽게 삶을 마감했고 그 여파도 컸음에도 끝없이 재조명되었던 오자키 유타카, ZARD, hide 등과는 대조적인데, 유키코의 경우엔 자살 직후의 모습이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면서 충격적인 사건으로 남게 되었고[29] 상기한 베르테르 효과로 인한 영향 때문에 언급 자체를 자제하였지만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사건 현장에서 매년 이루어지는 추모 행사를 취재하거나 과거 함께 활동했던 왕년의 아이돌들과 함께 추억을 회상하는 방송도 나오는 등 유키코를 재조명하는 이야기가 방송되고 있다.

3.1. 공황 오카다 유키코 현상

TV의 와이드쇼는 센세이셔널에서 이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며 시신, 현장, 거기에 모여 슬퍼하는 팬들의 모습을 꾸준히 비추었다. 결국 그 후 2주 동안 30명 가까이 자살자가 생겼으며, 대부분 미성년자로 고베에 사는 16살 소녀가 자살한 것을 시작으로 자살 직후 일주일 만에 소녀 7명이 "오카다 유키코가 되고 싶다."는 유서를 남긴 후 똑같은 방법으로 목숨을 끊었고, 동년 5월 5일 21세 재수생은 선 뮤직 프로덕션 건물 옥상에서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한 그 장소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투신자살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또 한 번 충격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1986년 2월에 발생한 나카노후지미중학교 이지메 자살 사건을 비롯하여 이미 유키코가 자살하기 전부터 1986년 청소년의 자살률은 눈에 띄고 있었음에도 유키코의 자살은 당시에 흔하지 않았던 유명 여자 연예인의 자살이라는 대목으로 대대적인 보도가 이루어졌고 이 현상을 윳코 신드롬[30]이라고 명명하였다.
파일:F-40-059-09-06-2_sp.png

자살을 기도한 청소년의 수는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한 4월 한 달에만 전년의 2배 이상인 114명이었고 1986년 한 해에만 799명이 자살하는 등 전년 대비 자살률 증가 44%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기록했다. 일본 언론들은 이를 일컬어 '공황 오카다 유키코 현상(윳코 신드롬)'이라고 불렸다. 이 문제는 연예계 외에 정치권으로도 영향을 미쳐 가이후 도시키 문부대신이 야당의 추궁을 받고 "10대 가수의 실태를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한국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동아일보에서도 이 사건이 일어나고 22일 뒤 그녀의 죽음 이후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는 상황을 보도했다.#

4. 자살을 둘러싼 루머

4.1. 미네기시 토오루 관련 루머

사건 직후 가장 많이 퍼졌던 루머로는 TBS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에 유키코와 함께 출연한 남자 배우 미네기시 토오루와 연인 관계로 발전하다 거절당하자 자살했다는 설이다. 아이자와 사장에 의해 일부 노출된 유서에는 연필로 유키코가 직접 "미네기시 씨와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었다. 제 멋대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쓴 내용[31]이 있었기 때문에 전술한 것처럼 미네기시 토오루가 사건 당일 밤에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미네기시와는 드라마 촬영 후 돌아가는 방향이 같아 바래다주기도 했다고 하는데 사망 전날 4월 7일 오후 11시 반 이후 택시를 타고 그가 살던 세이죠의 자택 앞으로 찾아가 새벽 5시까지 혼자 기다렸다 돌아왔다는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증언이 있었다. 실제로 유키코가 하숙하고 있었던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相澤 秀禎)의 자택과 미네기시의 자택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미네기시 토오루는 유키코와 20살 이상 차이나고 어린 딸이 있는 이혼남이었으며 기자회견에서도 유키코에 대해 "귀여운 동생 같은 느낌이나 이성적인 느낌이 아니라 마치 '형'(アニキ) 같은 느낌이었다."라고 하며,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었다고 극구 부인하였다. 유키코의 어머니는 <사랑을 주세요>에 "미네기시 씨에 대한 일은 여성 주간지, TV 등에서 이래저래 퍼뜨려져서 그때마다 저는 미네기시 씨에게 죄송했고, 또 딱하다는 마음만이 들었습니다."라고 언급했다. 훗날 미네기시 토오루는 "정작 다른 사람이 있는데 왜 나에게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 사건은 정말 귀찮은 일이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미네기시 토우루 본인은 그저 유키코에게 연예계 선배로서 후배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뿐인데, 어린 나이의 유키코가 미네기시의 호의에 반해 연심을 품었고, 당시 그에게 이미 내연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내연녀의 존재를 알게 되며 그에 대한 충격으로 망연자실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카요(유키코의 본명)의 유서 - 지금도 그것을 유서라고 해야 좋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 그 중 미네기시 토오루씨의 이름은 확실히 쓰여져 있었습니다. 미네기시 씨를 좋아했다고.
(중략)
저는 그 후 두 번 다시 그 "유서"를 보지 못했습니다.

유키코의 어머니는 유키코가 쓴 글 등을 모아 1988년 7월에 출판한 책 <사랑을 주세요(愛をください)>[32]에 이런 내용이 있다.

4.2. 칸다 마사키 관련 루머

인터넷이 발달한 후 이 사건에 배우 칸다 마사키가 개입되었다는 설도 퍼졌다. 칸다 마사키와 오카다 유키코는 연인 관계였고 유키코가 칸다의 아이를 임신까지 했는데 칸다 마사키와 마츠다 세이코가 결혼한다는 발표가 나오자 충격에 빠져 자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키코는 둘의 약혼식에 참석하여 소속사 후배로서 한껏 밝은 얼굴로 축하해주는 모습과 꽃다발을 건네주는 모습이 사진과 영상으로 남아있고 임신으로 휴업 중이던 마츠다 세이코가 오카다 유키코를 위해 직접 작사와 데모 레코딩까지 해 준 '입술 Network'를 듣고 유키코가 감격했다는 레코딩 관계자의 증언도 있으므로 칸다가 관련되었다는 설은 어디까지나 찌라시가 써내린 자극적인 루머일 뿐이다.

칸다 마사키가 연관되었다는 설은 유키코가 자살한 직후부터 퍼졌었다. <사랑을 주세요>에서도 유키코의 어머니가 해당 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분노하는 내용이 적혀 있을 정도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옛날의 소문이 다시 퍼진 것이다.

5. 자살 원인에 대한 추측

유키코에겐 밝은 면과, 갑자기 생각에 잠겨버리는 면이 있었다. 감성이 풍부한 열여덟살 소녀라면 누구나 있을 법한 부분이나, 유키코는 아이돌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며 빛나는 미래가 있음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된다. 반대로 자신의 쓸쓸함이나 고독, 어리광을 피우고 싶어하는 바램은 마음 깊은 곳에 담어두어야 했을 것이다. 적어도 당시의 아이돌들은 그러하였다.

유키코의 자살 직전까지 함께 있었던 선 뮤직 프로덕션의 후쿠다 전무는 방송에서 첫 번째 자살시도는 연심이나 기타 사적인 일 때문에 고민하던 것이 원인이었으나 두 번째 자살시도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이 언론에 알려져 사무소나 가족들에게 폐를 끼쳤다는 심적 부담이 커진 것이 원인이 아닐까 추측하였다.# 후쿠다 전무는 유키코가 사라졌을 때 무언가를 직감하여 사내 건물을 돌아다니면서 찾아다녔는데 옥상으로 향하는 비상 계단 쪽에서 유키코가 신고 있던 슬리퍼가 놓여진 모습을 발견했다.[33] 주변인들은 유키코가 생전 혼자서 고민을 끌어안는 성격이었고, 자살하기 전부터는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할 때가 잦았다고 말했다.

지금과 달리 1980년대만 하더라도 우울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무척 낮았고 정신적으로 힘들어 병원에 간다는거 자체를 이상하게 여겼다.[34] 당시 선 뮤직 프로덕션측의 대우가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에 이르게 하는데 직접적인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평소 스케줄이 과도하여 피로에 시달리다가 우울증이 발병하게 되었고 갑작스럽게 쉬는 날이 생기자 우발적으로 자살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데뷔 후 방송과 음반 비디오 등에 출연한 것을 보면 실로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정을 계속해서 소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소 스케줄이 하도 빠듯하게 짜여있어서 하루에 3-4시간밖에 잠을 자질 못했다고 하며 휴일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이에 대해 유키코는 불만을 표하기도 하였다. 한참 인기를 얻을 무렵 "요즘은 하루에 20시간 정도는 일하고 있어요."라고 밝힌 적도 있었고, 1985년 12월에는 과로로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오카다 유키코의 일본 현지 팬들은 대부분 선 뮤직 프로덕션의 행보가 유키코를 자살로 몰아갔다고 생각하고 있다.

호리코시 고등학교를 졸업한 유키코는 1986년 3월부터 적어도 1년이라는 기간 동안 수험 공부를 해서 대학교 입학을 원하였다고 한다. 아이돌이라는 직업은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일찍 느껴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학 진학 후에는 가수에서 배우로 전향할 생각이 확고했었다고 전해진다. 생전 유키코는 첫 단독 주연작인 금지된 마리코 때는 물론이고 신인 시절부터 별 대사가 없었던 단역으로 드라마에 출연했을 때에도 연기에 많은 열정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자신의 미래 계획과 배우로 전향 후에는 일을 조금씩 하고 싶다는 의견을 선 뮤직 측에 전달하자 당황한 선 뮤직 측은 "지금 한창 잘 나가는데 갑자기 노선을 바꾸면 상품성이 떨어질 것이다."라며 유키코의 의견은 묵살하였고 급한 마음에 되려 드라마, 비디오, 음반, 소설 집필 스케줄을 잇달아 많이 잡는 행보까지 보였다. 결국 자신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선 뮤직의 무책임한 태도를 보고 자신을 단지 상품으로만 취급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며 연예인으로서의 생활에 대한 환멸감을 느낀 끝에 휴일이 생기자 자신의 자택에서 우발적으로 자살시도를 하게 되는데, 되려 기자들에게 전해지며 사건이 너무 커지게 되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큰 민폐를 끼쳤다는 죄책감과 부담감[35]을 느낀 오카다 유키코가 투신자살을 감행했다고 볼 수도 있다.

유키코의 소속사 선 뮤직 프로덕션의 아이자와 히데요시 사장은 유키코가 생전에 쓴 일기와 분홍 종이에 쓰인 '유서'도 수중에 넣었다. 아이자와는 이를 두고 대중들을 상대로 계속 보여줄까 말까 밀당하였으나 결국 단 한 번도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키코의 유족들도 내용을 모른다고 한다.[36] 아이자와 사장은 끝까지 이 유서 내용을 세상에 밝히지 않았고, 2013년 췌장암으로 사망하였으므로 금고가 열리지 않는 한 유키코 자신이 설명한 자살 원인이 앞으로도 밝혀질 가능성은 없다.


[1] 오키도빌딩의 7층에 선 뮤직 프로덕션 사무소가 입주해 있었으나. 이후 2009년 8월경 요츠야산초메역 근처로 사무소를 이전하였다.[2] 후카와 토시카즈, 모토키 마사히로로 구성된 쟈니즈 사무소 소속의 남성 아이돌 그룹인 시부가키타이의 멤버. 현재 가수 겸 배우인 이시카와 히데미의 남편이기도 하다.[3] 해당 방송은 1986년 4월 20일에 방영되었다.[4] 삼가 故 오카다 유키코 님의 명복을 빕니다.[5] 당시의 건물은 2015년에 폐관되어 해체되어 재건축을 하였고, 2019년에 개관되었다.[6] 연초부터 오냥코 클럽이 차트 상위권을 도약하고 있었고, 3월 21일 발매된 4번째 오리지널 앨범 '비너스 탄생'의 첫 주 주간 매출은 17,940장으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였을까 추측된다.[7] 통칭 노리삐. 유키코와 같은 소속사인 선 뮤직 프로덕션의 소속으로 유키코의 직속 후배 아이돌이다.[8] 4월 8일은 유키코가 살던 방에는 곧 데뷔를 앞둔 사카이 노리코가 들어올 예정이었다.[9] 같은 열차에 당시는 무명이며 만담가 수행 시대의 이쥬우인 히카루가 스승의 매니저로서 타고 있어 모두 유키코와 만나고 있었다고 한다. 이쥬우인은 "유키코씨의 곡은 지금도 라디오에서는 가볍게 흘릴 수 없는 분위기가 있고, 용이하게 들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10] 수입의 액수는 사후 국회에서 열린 회의에서 다루어졌다.[11] 도쿄에서 혼자 살기 시작한 환경에서 유키코는 외로움을 많이 느꼈을 것이고 가족의 그리움도 커졌을 것이다. 아마 이렇게 얘기한다면 부모 중 한 명이라도 같이 살지 않을까 싶어서 꺼낸 이야기가 아닐까 추측된다.[12] 1986년 5월 14일 발매 예정이었다 발매 중지되어 13년 뒤인 1999년(헤이세이 11년) 3월 17일에야 메모리얼 박스에 수록되어 발매된 花のイマージュ라는 곡도 2분 55초부터 나온다.[13] 미나미노 요코로 알려져 있으나 언급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이시노 요코일 가능성이 높다.[14] 2004년 건물 자체를 해체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15] 금지된 마리코에서 마에다 미야코 역을 맡았다.[16] 이 복장은 4월 8일 사건 당시까지 그대로였다.[17] 현재는 도쿄 국제 포럼[18] 보도에 따르면 옷장 안에서 꿇어앉아 계속 울고 있었다고 한다.[19] 당시 유키코 담당 매니저 미조구치 노부로는 자녀의 입학식으로 휴가 중이였고 아이자와 마사요시 선뮤직 대표이사 사장은 기획사 부근의 치과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병원으로 올 수 있던 상황이 아니였다.[20] 생방송으로 보도되었을 때는 20분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15분-20분 사이로 추정된다.[21] 2010년 8월 21일 저택에서 65세의 나이로 폐암으로 사망했다. 1968년에 여성 전문잡지인 '영레이디'의 취재기자로 입사하여 연예보도를 맡은 이후 텔레비전의 리포터 쪽으로 영역을 넓혀서 당시에는 드문 연예전문 리포터로 폭넓은 활약을 했으며 경력만 해도 무려 40년에 달하는 그야말로 일본 연예계의 산 증인이었다. 사망 5년 전인 2005년부터는 휴대폰 연예뉴스 사이트인 '나시모토 연예! 뒷 채널(梨元 芸能!裏チャンネル)'를 개설하여 유료 채널임에도 불구하고 회원이 30만 명이나 되는 등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기도 했으며 TV를 거쳐 인터넷 사이트, 블로그, 트위터까지 연예뉴스로 새로운 미디어를 개척한 인물이기도 하다.[22] 당시 일본에서는 유명인 관련 사건이나 일반 사건사고가 일어났다면 이 정도로 취재하는 게 일상이긴 했다.[23] 뇌척수액[24] 전술했지만 특종에 매달려 시신의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는 기자의 자질은 둘째 치고 고인에 대한 예의조차 없는 추태를 그대로 보여줬다. 경찰과 병원으로 연락을 취했던 사람은 주변의 기자나 행인이 아닌 나중에 목격한 유키코의 매니저가 했을 지경이다.[25] 쿠메 히로시는 더 베스트 텐의 MC를 맡으며 유키코와 접점이 있었고 당시는 뉴스 스테이션의 MC를 맡기 위해 그만두었다.[26] 1943년 7월 17일생으로, 유키코와는 당시 24살 나이 차이로 결혼 평균 연령이 빠름을 감안해도 거의 아빠와 딸 정도였다. 1977년에 결혼했으나 1983년에 이혼했고 슬하 자녀로 딸이 두었으며, 이후 2008년 폐암으로 사망했다.[27] 그가 2013년에 별세하기 전까지도 여전히 그의 사무실 벽에는 유키코의 포스터가 걸려있었으며, 자신의 수첩 사이에는 유키코의 사진이 붙어져 있는 것을 보여주며 "선 뮤직이 있는 한 오카다 유키코는 영원하다."라는 말을 남겼다.[28] 출연자가 무대 뒤 쪽에 나란히 앉아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29] 게다가 이 셋의 죽음이 갑작스럽긴 하였으나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은 아니었다. 생전 오랜 기간 활동하며 일본 가요계에 미친 영향도 활동기간이 짧았던 유키코와 비교하면 훨씬 컸던 점도 크다.[30] ユッコ・シンドローム[31] 하지만 일부 노출된 유서는 현재로서 확인할 방법이 없다.[32] 유키코가 생전에 쓴 글을 모았기 때문에 오카다 유키코 명의로 출판되었다.[33] 이 현장도 사진으로 남아있다.[34] 일본 뿐만 아니라 전세계 대부분이 그랬다.[35] 당시 일본 사회는 매우 보수적인 분위기로 유키코 사후 3년 뒤인 1989년에 나카모리 아키나가 여러 이유로 삶의 회의감을 느껴 자살시도를 했다는 이유로 "연예 활동을 지속하면서도 불미스러운 일로 걱정을 끼친 것에 깊이 사죄드린다.”라고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대국민 사과를 했을 정도였다. 오카다 유키코가 투신한 당시 이미 선 뮤직 건물 아래에는 유키코의 자살 미수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기자들이 모여있었고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 기도를 했다는 것이 대서특필 된다면 아마 나카모리 아키나보다 더 심한 꼴을 겪어야 했을 것이 분명했다.[36] 유서는 소속사의 금고에 철저한 보안 아래 현재도 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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