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16:20:08

박재옥

박재옥
朴在玉 | Park Jae-ok
파일:0002504233_001_20200708162805400.jpg
<colbgcolor=#000><colcolor=#ffffff> 출생 1937년 11월 24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現 경상북도 구미시)
사망 2020년 7월 7일 (향년 82세)
서울특별시
본관 고령 박씨[1]
부모 아버지 박정희, 어머니 김호남, 의붓어머니 육영수
형제자매 이복 여동생 박근혜, 박근령
이복 남동생 박지만
배우자 한병기
자녀 아들 한태준, 한태현
한유진
학력 동덕여자고등학교 (졸업)
동덕여자대학교 (가정학 / 학사)

1. 개요2. 생애3. 기타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박정희가 첫번째 부인 김호남과의 사이에서 얻은 첫딸.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에게는 이복언니/이복누나가 되고, 육영수에게는 의붓딸이 된다.

2. 생애

파일:external/i2.media.daumcdn.net/20110516192105469.jpg
아버지 박정희의 초상화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박재옥과 남편 한병기
파일:external/i3.ruliweb.com/15b0892581f46a26.jpg
박지만결혼식에서의 사진으로, 왼쪽에서 2번째 인물이다.[2]

박정희와 김호남이 결혼한 이듬해인 1937년 11월 24일(음력 10월 22일)에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둘 다 살아 있었는데도 박재옥은 친척집을 전전했다. 아버지인 박정희는 육영수와 재혼했고, 어머니인 김호남도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박재옥의 증언에 의하면 어머니도 재혼을 해서 아들을 1명 두었으나 곧 다시 이혼했기 때문이다. 중학생 무렵에는 사촌오빠인 박재석에게 얹혀 살았고, 고등학생 때에는 사촌언니 박영옥김종필 부부의 신혼집에 얹혀살면서 동덕여자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다가 이 무렵 육영수가 김종필의 집을 찾아와 박재옥을 노량진의 집으로 데려갔는데, 박재옥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매를 맞더라도 아버지와 함께 살겠다"며 선뜻 계모를 따라나섰다고 한다. 사실 말이 계모지 두 사람은 겨우 12살 차다. 이 때문에 "어머니라고 부르기 쉽지 않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참조. 그래서 박재옥은 육영수 여사를 '어머니'보다는 주로 '육 여사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박정희도 육영수도 박재옥이 장녀라고 공공연히 밝히지는 않았고, 박재옥 본인도 일반인마냥 조용히 살았다.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박재옥은 조용히 2층 방으로 올라가곤 했고, 주변 사람들도 나이 차가 박근혜보다(15세 연하) 육영수와(12세 연상) 더 적은 박재옥을 육영수의 친척동생인 줄 알았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육영수와 외모가 닮아서 그랬기도 했다. 육영수는 미혼인 남자 장교들이 집을 방문하면, 박재옥에 대해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괜찮은 아가씨"라고 소개하며 넌지시 반응을 살폈다고 한다. 가난[3]남존여비 풍토 때문에 여자가 공부하는 것을 나쁘게 보는 분위기가 강해서[4], 여성은 고등학교는커녕 중학교 진학률도 매우 낮았던 시절이라, 당시 박재옥은 굉장한 고학력의 신여성이었다.

이후 동덕여자대학교 가정학과까지 진학했고, 대학교 재학 중에 아버지 박정희의 전속부관이었던 한병기와 1958년에 결혼했다. 박정희가 예비사위를 집에 데려오는 날이면, 육영수가 직접 돼지족발을 삶아 대접하였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한병기ㆍ박재옥 내외는 육영수의 친정을 방문하여 함께 가족사진을 찍는 등, 사생활에서는 가족 대우를 받았다.

파일:2949993309_iQE8Gfne_08.jpg
아버지 박정희와 여동생 박근령, 박재옥 본인, 의붓외조모 이경령, 의붓외사촌동생 홍소자, 남편 한병기, 계모 육영수, 여동생 박근혜, 의붓이모 육예수.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기 이전에 맏딸 박재옥은 이미 결혼하여 유부녀가 된 상태여서,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청와대에서 살지 않았다. 때문에 청와대 내 박정희의 가족들에 대해 많은 취재를 하던 시절에도 주목받은 적이 없었다. 당시 청와대 측에서도 영부인인 육영수가 낳지 않은 자식이 주목받는 일을 막기 위해 박재옥의 존재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대권주자, 국회의원 후보자 및 지방자치단체장/교육감 후보자는 이혼 경력이 단 한 번만이라도 있으면 사생활에 대한 부정적 보도로 대중 이미지에서 마이너스 되는 일이 많고, 혼외자 논란 같은 일들과 별개로 공식적인 이혼 경력이 있는 대통령마저 박정희와 이승만[5] 외에는 없는 곳이 한국 정계다. (윤보선김대중은 이혼이나 불륜(간통)이 아니라 사별 이후에 재혼한 케이스이므로 논외.)

물론 박재옥의 친모 김호남은 이혼했더라도 엄연히 박정희와 정식으로 결혼했던 아내였고, 박재옥도 사생아가 아니라 엄연히 박정희의 적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당시는 21세기 현대와는 비교도 안 되게 훨씬 더 보수적이어서 대통령이 이미 한참 전에 이혼했다는[6] 사실이 주목되는 것을 꺼렸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시 대중들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챘다고 한다. 20대 중반에 결혼 안 하면 노총각/노처녀 소리 듣던 당시 기준으로, 부모 - 자식의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났기 때문이다.

어쨋든 박재옥은 이복동생들보다 훨씬 덜 알려졌기 때문에, 박근혜박정희장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실례로 탄핵 직후 박근혜의 인생을 재조명한 조선일보, 뉴데일리 등의 기사에서도 박정희의 첫딸이라고 했다. 당연히 이는 명백한 오보로, 박재옥은 절대로 혼외자식이 아니라 공식적인 결혼 관계에서 출생한 적녀다. 즉, 법적으로든 실제로든 박재옥이 진짜 장녀이고, 박근혜는 차녀이다.

박재옥은 이복동생들보다 넘사벽으로 많은 시간을 살아왔음에도[7] 불구하고 큰 말썽 없이 무난하게 살아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유년 시절부터 '남다른 대우'를 받은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등 이복동생들과 달리, 박재옥은 남편 한병기와 결혼하기 전 아버지 박정희와 어머니 김호남의 이혼으로 인해 가정해체를 겪고 유년 시절부터 여러 친척집들을 전전하며 불안정한 가정생활을 거쳐오며 성장했던 인물이라, 이복동생들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된다.

※ 박재옥이 언론사 기자에게 구술한 내용 및 주변 사람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기사

2020년 7월 7일,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날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사망 사건이 발생하고 그 다음날에는 백선엽 장군이 사망하는 등 정계 유명 인사들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일어났다.

3. 기타

남편 한병기(1931 ~ 2017)는 대한민국 육군영어 통역장교제5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가, 당시 사단장이던 박정희 장군전속부관이 됐다. 5.16 군사정변 후 전역해 제8대 국회의원(민주공화당)과 캐나다 대사, UN대사대리로 근무했다. 이 외에도 박재옥의 사촌언니 박영옥의 남편인 김종필 곁에서 정치 활동을 하기도 했다. 한병기와 박재옥의 자녀들로는 아들 한태준(전 중앙대학교 교수)·한태현(설악케이블카 회장), 딸 한유진(대유몽베르CC 고문)이 있으며 사위는 박영우(대유위니아그룹 회장)씨다.

박정희는 1936년에 김호남결혼했는데, 이게 스스로 원해서 한 결혼이 아니라 아버지의 명령으로 억지로 한 결혼이었던 탓에 아내에게 정을 붙이지 못했다. 그래서 1940년대 후반에는 이현란과 불륜관계로 동거하기도 했다. 이후 박정희가 김호남과 이혼하면서 박재옥은 한병기와 결혼하기 전까지 여러 친적집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한다. 친/외가는 물론이고 사촌오빠 박재석[8], 사촌언니 박영옥[9]과 사촌형부 김종필 등. 계모육영수와도 같이 지낸 적이 있다고 한다.

대중들에게는 후처인 육영수, 그리고 육영수 소생들인 박근혜&박근령&박지만 3남매만 알려져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김호남과 박재옥 모녀는 남의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살았다. 그리고 박재옥 본인은 어떤 감투나 일체의 공직에도 나서지도 않았다. 아버지 사후 정계에 입문하고 대한민국 대통령까지 역임했던 이복여동생 박근혜와 달리 정치와도 거리를 뒀다.

다만, 어쨌거나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의 자녀라서 그런지 박재옥도 나름대로 경제적으로 편안한 삶을 살았다. 박정희가 1969년, 사위 한병기 전 의원에게 케이블카에 대한 국가 사업권을 준 뒤, 1971년 이후부터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을 계속 운영하고 있다. 일명 '권금성 케이블카'가 이 것이다. 덕분에 경제적인 면에서는 불편함 없이 살았다고. 설악케이블카는 박재옥 - 한병기 부부의 차남 한태현이 물려받아 현재까지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다만 이렇게 보면 뭔가 대단한 특권을 누리고 산 것 같지만 정황상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해줄테니 조용히 살아라."라는 의미에 가까웠고, 박재옥은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회창 후보를 지지한 박근혜, 박근령과 달리 이복동생 박지만, 사촌동생 박준홍 등과 함께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다.

드라마 제3공화국에는 증인으로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한병기 - 박재옥 부부도 굳이 위에 언급한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 등에 대한 특혜 의혹이 있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구설수는 특별히 없다. 언론에서도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박재옥에 대해선 박근혜 친인척들의 행적을 파헤치면서 위의 케이블카 사업 특혜의 의혹 등에 대해 몇 차례 가볍게 다룬 것 외에는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다. 그 외에 박재옥의 사위인 박영우 회장의 대유그룹의 성장세가 굉장히 빨라서 김어준이명박다스 논란비교한 사례가 있었으나, 다스 논란과는 달리 이 역시 흐지부지 묻혔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에도 박재옥의 발언이나 행적이 언론에 포착된 적은 없었으며, 2017년 4월에 남편 한병기가 사망했을 때도 대부분의 언론에서 단신으로 '전직 관료 겸 사업가인 한병기 씨가 지병으로 사망했다.'라고 간단하게 언급한 게 전부였다. 박근혜와의 연관성도 언론에선 '한병기 씨는 박근혜의 이복형부이자 박정희의 맏사위이다'라고 간단한 이력만을 설명했을 뿐이다. 이복동생 박근혜가 구속 수감되고 재판을 받을 때도 박재옥은 이렇다 할 발언을 하지 않았다.

한편 박재옥은 다른 공식 행사는 물론이고 박정희 일가와 직접 관련된 대외 행사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그저 이복남동생인 박지만결혼식에 참석한 게 전부다. 다만, 박정희/육영수의 추모 행사에는 가끔 참석하던 모습을 감안하면 생전의 박재옥은 이복남매들과 교류는 활발히 하지는 않은 대신 조금씩이나마 인연의 끈 정도는 유지하는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령의 회고에 따르면, 박재옥이 평생 가장 가깝게 지낸 친척은 사촌언니이자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아내인 박영옥이다. 아무래도 박근혜 등 이복동생과 비교했을 때 나이 차이가 훨씬 덜 나고[10], 부모의 이혼 이후 김종필-박영옥 부부의 집에서 같이 살기도 했으니 이복동생들보다 훨씬 돈독한 관계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남편인 한병기 전 캐나다 대사도 김종필과 같이 정치활동을 하고, 국민의 정부에서 김종필이 다시 국무총리가 되자 국무총리실 자문위원장을 맡았다.

박재옥의 장례식을 치를 때 문재인 정부가 먼저 박근혜에게 조문 사유로 형 집행정지를 권유했으나, 박근혜가 거절했다. 대신 이복 남동생 박지만이 가족들과 함께 조문 후 빈소도 지킴으로써 장례에 참석했다.관련 기사

4. 둘러보기

박정희 가문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박정희의 배우자, 동생 및 직계 가족 일람
고조부
박영환
증조부
박이찬
조부
박영규
부친
박성빈
(모친 백남의)
박정희
(처 김호남육영수)

박상희
장녀
박재옥
(사위 한병기)
차녀
박근혜
3녀
박근령
독자
박지만
질독자
박준홍
질장녀
박영옥
(질장서 김종필)
상위 문서: 틀:박정희
}}}}}}}}} ||



[1] 직강공파 30세손 재(在)◯ 항렬.(족보)[2] 왼쪽부터 한병기(당시 74세), 박재옥(당시 68세), 박근혜(당시 53세), 박지만(당시 47세), 서향희(당시 31세), 박근령(당시 51세)이다. 이복 올케인 서향희와는 모녀지간 이상으로 나이가 차이 나고, 실제로 박재옥의 친자식보다 서향희가 훨씬 어리다.[3] 다들 알다시피 국가 경제가 워낙 어려워서, 집안에서 가장 똑똑한 아들 또는 장남 1명만 땅과 소를 팔아 대학에 보내고, 나머지 자녀들은 집안일을 거들거나 일찍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일이 많았다.[4] 그리 형편이 어렵지 않은 집에서도 에게는 공부를 많이 시키지 않았다. 당장 육영수부터가 엄청난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 육종관이 "여자가 대학 갈 필요 뭐 있겠느냐? 고등학교까지만 나와도 충분히 많이 배운 거다."라고 해서 배화고등여학교(현 배화여자고등학교)까지만 졸업한 사람이다.[5] 이승만의 경우에는 1949년에 "전처가 동의 없이 이승만 슬하로 입적시킨 호적상 아들과 이승만 사이에 친족관계가 부존재함을 확인한다."라는 기묘한 판결을 받아냄으로써 조선시대에 혼인하였던 아내 박승선을 이혼소송도 없이 "전처"로 규정, 일방적으로 소박맞힌 바 있다(다만 박승선이 남편과의 동의도 없이 양아들을 들인 것은 사실이다.). 이승만은 박승선과의 사이에 1남을 두었으나, 이 아이는 10살 되던 해에 부친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그 해 병으로 어린 나이에 요절했고, 조선에 남은 박승선은 홀로 된 적적함에 양아들을 들여 장성할 때까지 키웠다고 한다.[6] 이혼 시점이 1950년 겨울. 즉, 전쟁이었다.[7] 육영수의 장녀이자 바로 밑의 동생인 박근혜보다도 15세나 연상이다.[8]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아들.[9] 아버지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의 큰딸. 이 여인 역시 박재옥과 더불어 박정희의 일가족들 중 비판을 덜 받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10] 박재옥은 박근혜보다 15살 많고, 박영옥보다는 8살 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