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2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박철희(朴喆熙, 朴哲熙)·김삼수(金三洙) 홍일헌(洪一憲)·권일(權一)·김형신(金亨信) 권부덕(權富德)·권형신(權亨信) |
호 | 오서(五敍)·막난(莫難)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898년[2] 12월 18일 |
경상북도 안동군 풍서면 가일리 (現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3] 가일마을 422번지[4][5]) | |
사망 | 1930년 4월 17일 |
서대문형무소 | |
묘소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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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https://osos.or.kr/)첫째 남동생 권오기(權五夔, 1901 ~ ?)[6]는 8.15 광복 후 안동군 풍산면의 노동조합장을 지내다가 곧 월북하였다고 하며[7], 둘째 남동생인 권오직(權五稷) 또한 형의 영향으로 조선공산당에 관계하여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다가 8.15 광복 후 월북했으며 주중 북한 대사 등을 지내다가 1958년에 숙청되었다.
2. 출생과 청소년기
1898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군 풍서면 가일리(現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 422번지)의 몰락한 양반가에서 아버지 권술조(權述朝, 1868 ~ ?. 5. 12)[8]와 어머니 풍산 류씨(豊山 柳氏) 류영(柳榮, 1867 ~ 1953. 7. 17)[9]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통적인 양반가이기는 했으나 10대조 권박(權搏, 1607 ~ 1661. 6. 4)이 인조 8년(1630) 식년 진사시에 3등 63위로 입격하고 인조 11년(1633) 식년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여 군수(종4품) 관직을 지낸 이후로는 이렇다할 현달한 선조가 없었으며, 그 때문에 가세는 매우 빈한했다고 한다.그는 어려서 아버지 권술조가 운영하는 한학서숙, 집안 가숙(家塾)인 남명학교(南明學校) 등지에서 수학하다가 하회마을 내 사립 동화학교(東華學校)를 1914년 3월에 졸업하였으며, 권술조의 노력으로 경주군 지역 대부호인 최준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1915년 협성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최준의 지원은 1916년에 끊겼는데, 이에 권술조는 대구고등보통학교장이었던 다카하시 토오루를 찾아가 지원을 청했다. 다카하시와 여러 선생들이 권오설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 그를 지원해주었고, 여기에 더해 다카하시는 대구의 자산가이자 친일인사였던 서병주를 권오설에게 소개시켜주어 지원을 받도록 했다. 그런데 권오설은 1917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돌연 상경하여 경성부 견지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장사동(현 종로구 장사동) 52번지[10] 등지에 거주하면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학업을 지속치 못하고 곧 중퇴하였다. 대신 그는 지인의 권유를 받아 같이 돈을 벌기로 하고 1918년 전라남도 광주군으로 내려갔다. 그는 지인의 배신으로 또다시 곤란한 상황에 처했지만, 그 곳에서 권오설의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대구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있었던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전남도청의 고용원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9년 광주의 3.1 운동을 목격하고, 얼마간 일을 계속 하다가 11월에 그만두고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왔다.
3. 사회주의의 수용과 노농운동 참여
안동으로 돌아온 그는 교육운동에 관심을 가져 원흥학술강습소(元興學術講習所)·일직서숙(一直書塾)·풍산학술강습소(豐山學術講習所) 등의 학교를 창설하여 교장 겸 교사로 활동하며 교육운동에 매진했다. 동시에 안동청년회(安東靑年會), 일직금주회(一直禁酒會)를 조직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1922년경에는 김남수(金南洙), 박일병(朴一秉)과 교유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 그는 1923년 풍산소작인회(豊山小作人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에 취임하면서 농민운동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풍산소작인회는 곧 회원 5천명에 달하는 소작인단체로 성장하였으며, 의결기관인 총회와 집행기관인 집행위원회 체계를 갖추고 각 면 단위에 출장소를 설치하고 각 동에는 다시 통대를 두어 마을을 반 단위로 조직하는 등 견고한 조직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창립총회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조선노농총동맹 참여는 노농대중운동 확산을 주도하려했던 무산자동맹회의 영향력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무산자동맹회는 공산주의 비밀결사로서도 활동하면서 코민테른과 연결되었다. 1922년 말 코민테른은 제3차 조선문제결정서를 발표해 한인 공산주의그룹들을 중재한 다음 고려총국(高麗總局)을 결성하도록 했다. 고려총국은 한인 공산주의그룹의 역량을 결집하고 식민지 조선에서 노동대중 중심의 공산주의운동을 진전시키는 임무를 맡았고, 1923년 3월 블라디보스톡에 세워진 코민테른 원동비서부 소속으로 코민테른의 지시 아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계열(이하 이르쿠츠크파)와 상해 고려공산당 계열(이하 상해파), 중립파가 연대해 만들어졌다. 이들은 연해주 및 만주, 조선 내의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방침을 결정하고 그대로 실행하기 위한 제반작업들을 진행했다. 하지만 1924년 민족혁명운동을 위한 통일전선전술 적용을 놓고 심각한 내부 분열이 생겼고, 결국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해체되었다. 고려총국이 해체된 후 재노령 당준비회, 약칭 오르그뷰로가 식민지 조선 내 공산당조직 완성을 목표로 결성되었다.
무산자동맹회는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사이의 중립파로서 코민테른과 접촉해 식민지 조선 내 공산주의운동을 진전시키려 했다. 이때 소작운동에 앞장선 빈농 출신 현장운동가이면서 비교적 높은 교육 수준을 가졌던 권오설은 김남수를 통해 조선노동연맹회와 관계가 있었고, 따라서 무산자동맹회와 내지부 계열에게 포섭될 수 있었다.
조선노농총동맹의 상무집행위원으로써, 권오설은 1924년 6월 일제의 언론·집회에 대한 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언론집회압박탄핵회(言論集會壓迫彈劾會)에서 방침을 결정하는 위원으로 선임되어 결의문을 작성하는 등 언론투쟁에 참여하였다. 그 후 지방에서 일어나는 소작쟁의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아 6월 18일 경상도로 내려갔고, 마산을 거점으로 진해와 창원군 내서면에서 일어난 소작문제에 대한 지역 소작단체 활동을 지원했다.
황해도 봉산군 사인면 소작쟁의와 재령군 북률면 소작쟁의도 지원했는데, 두 소작쟁의 모두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와 관련이 있었다. 권오설은 12월 초에 먼저 조선청년총동맹의 임봉순(林鳳淳)과 함께 사인면으로 파견되어 소작조합의 여러 가지 일을 지원해주었고, 이어 12월 9일 북률면소작회 창립총회에 출석해 임봉순과 함께 축사를 맡았다. 그는 12월 14일 이후에도 얼마간 남아 황해도에서 일어난 소작쟁의를 지원했다. 그가 황해도에서 조사한 소작운동의 실태는 공산주의자들의 운동 방향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고려공산청년회중앙총국 책임비서 박헌영은 1925년 1월 공산주의청년인터내셔널에 보내는 보고서에 당의 계획을 적으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폐지운동을 언급했다.
1925년 1월에는 안동군 안동면(현 안동시) 율세동에서 이준태·권태석(權泰錫)·김남수 등과 함께 화요회의 안동 지부격인 화성회(火星會)를 창설하여 친목단체 성격의 안동 지역의 청년회를 혁신 및 통일시키고 노동·농민운동 지원과 새로운 청년단체의 조직 등에 힘썼다.#
1925년 3월 이후 조선노농총동맹은 고려공산동맹 계열이 축출되면서 화요회(火曜會) 및 북풍회(北風會) 계열 단체로 거듭났고, 이에 따라 권오설의 영향력도 증대되었다. 그는 6월 10일에 인천노농총동맹회(仁川勞動總同盟會)에 파견되어 규칙수정작업에 참여했고, 7월 5일에는 경성양말직공조합(京城洋襪職工組合) 창립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축사를 맡았다. 20일에는 조선기근구제회(朝鮮飢饉救濟會)의 구호활동에 참여했다. 8월 11일에는 다시 파업에 돌입한 대동인쇄회사(大東印刷會士) 문선공들과 여러 부서의 직공 및 소년공들에게 조선노농총동맹 사무실을 빌려주고 회사 측과 교섭을 벌이기도 했다. 8월 19일에는 치안유지법 발포에 따라 경찰당국이 여러 사상단체들에게 관련 내용을 주의시키기 위해 호출한 모임에 조선노농총동맹 대표로 참석했다. 그리고 같은 날 예천에서 일어난 형평분사 습격사건에 대한 조사위원으로 선임되어 예천으로 파견되었고, 9월 5일 복귀한 다음 조사보고회에서 조사내용을 보고했다.
4.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창립 참여 및 활동
1925년 2월 김찬(金燦)·김재봉·김단야·박헌영 등과 조선공산당 창당을 결의하였으며, 4월 17일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 창당되자 이튿날인 18일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에 참여하여 고려공산청년회 7인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및 조직부와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이때 책임비서는 박헌영이었고, 그는 조직부로써 강령 작성이라는 권한을 통해 청년단체 조직과 고려공청 인사 및 규율 선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고려공산청년회는 1925년 8월부터 전국 단위 청년연맹 조직을 계획했다. 각 군연맹 조직을 완성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도연맹을 만들고 종국에는 전조선총연맹을 조직해 조선청년총동맹을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이 계획은 ‘표현운동의 당면정책’이었다. 고려공산청년회의 청년연맹 조직사업은 경성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렇게 세워진 청년단체가 한양청년연맹(漢陽靑年聯盟)이었다. 권오설은 한양청년연맹 창립에 앞장섰고, 그 활동을 보조해주기도 했다.
고려공청은 9월 말부터 10월 말 까지 신규 회원을 선정하고 가입시켰는데, 권오설도 이 과정에 참여했다. 코민테른에 파견된 조봉암은 조동호와 함께 코민테른의 조선공산당 잠정지지 선언을 받아냈다. 그 후 조봉암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청에 이 사실을 편지로 알리면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公産大學)에 입교시킬 학생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고려공청은 권오설의 주도 아래 소련에 보낼 인원들을 선정했고, 총 21명을 선정했다. 유학생 명단에는 권오설의 동생인 권오직과 풍산학술강습소 학생이었던 이영조도 있었다.
1925년 11월 신의주사건이 일어나면서 경찰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검거를 검거하기 시작했고, 권오설은 이를 피해 잠적했다. 그후 12월 중순 검거를 피한 소수의 고려공산청년회원과 접촉해 고려공산청년회의 재건을 결의했다. 권오설의 주도로 고려공산청년회는 1926년 2월 조직의 기능을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었고, 강달영과 이준태를 중심으로 재건된 제2차 조선공산당과도 연결되었다. 이때 권오설은 조선공산당의 자금을 관리하는 한편 고려공산청년회 차원의 조직 확충 작업을 계속 진행했다.
5. 6.10 만세 운동 준비와 좌절
순종황제 승하 직후인 1926년 4월 말경부터 상해의 조선공산당 상해특별연락부의 김단야와 함께 6.10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으며, 만세 운동의 투쟁지도부인 '6.10 투쟁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책임을 맡았다. 그는 학생운동계의 중심적 조직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도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포섭하는 한편 만세운동을 3.1 운동 때와 같이 전민족적 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사회주의·민족주의·종교계·청년계·학생계의 혁명적 인사들을 망라한 통일전선체로서 '대한독립당' 조직을 구상하였다. 그리하여 6.10 만세 운동은 고려공산청년회를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상해특별연락부의 보조를 받아 천도교 구파·조선노농총동맹, 그리고 학생계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과 연대할 수 있었다. 또한, 만세시위 때 사용하기 위한 '격고문'과 그 밖의 전단 등을 직접 작성하고, 관계자들과 함께 격문의 지방 배포 및 지방조직과의 연락을 위해, 격문을 조선일보 지사·『개벽』지사·소비자조합·천도교 교구·기타 청년단체 등 전국 각처에 발송하고, 『개벽』·『신민』·『신여성』 등의 잡지에 격문 약간 매를 끼워 보내도록 하고, 또한 각 지역의 만세운동을 추동하기 위해 책임자를 선정하여 파견하는 등의 방침을 세웠다.전국을 철도선의 구획을 따라 호남선·경부선·경의선·경원선 등 4개 방면으로 나누고, 박내원(朴來源)을 호남선 방면과 경부선 방면의 중심지인 충청남도 대전군(현 대전광역시)에, 민창식(閔昌植)을 경의선 방면의 중심지인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현 황해북도 사리원시) 또는 경원선 방면의 중심지인 함경남도 원산부(현 원산시)에 파견하여 만세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다는 구체적 계획도 세워 놓았다. 그리고 서울 시가지에는 6월 8일 밤을 기해 격문을 배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곧 사건의 전모가 발각되어 6월 7일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었다.
1927년 3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의 예심에서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180일 통산)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0년 4월 17일 옥사하였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6. 여담
- 가난에 시달리면서 교육을 포기했던 과거 때문에 주변의 가난한 청년들을 돕는데 적극적이었다. 안동에서 교육활동을 전개할때 가난한 학생들에게 자비로 학용품을 나눠주기도 했고, 진로고민을 가진 학생과 자신의 동생들에게도 진로상담을 종종 해줄만큼 열정적이었다. 다만 때로 교육사업과 사회활동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고, 가족과 가정에 소홀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이 때문에 아버지인 권술조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 사회주의를 수용하면서 투철한 계급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1924년 부모님에게 보낸 엽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아버지시여 어머니시여 얼마나 생활난을 견디는데 고통이 많습니까? … 물론 고하지 아니하고 나온 것이 저도 그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할 도리야 있겠습니까? 뵈옵고서 여쭐 말씀이 없어서 그만 그리 되었습니다. … 우리 돈 없는 사람은 무슨 까닭으로 몇 천 년 몇 백 년 그대로 고해(苦海)에서 신음하게 됩니까? 또 보십시오 날이 맑도록 땀을 흘리며 일하는 사람일수록 죽을 지경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 이것이 근본으로 사유재산제도가 있음으로 그러한 것이올시다. … 그런즉 그러한 제도 밑에서의 법률이라든지 도덕이라든지 모두 유산자를 옹호하는데 지나지 않은 것이올시다. 그런즉 우리 무산자에게 대하여는 하등의 득익도 없으며 도리어 우리를 방해하는 것이올시다. 그런즉 우리는 부득불 이렇지 아니하고 이상적 신사회를 건설하야 우리의 새로운 복되는 생활을 영위치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목하 각자의 자신을 위하여 또는 대중을 위하여서의 근본문제올시다. … 그러므로 저는 가정에 득죄하나 이 길로 아니 나아갈 수 없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시여 용서하여주소서. 이만.
<권오설 2>, 107쪽
<권오설 2>, 107쪽
- 고려공청의 중앙집행위원 후보였던 이지탁(李智鐸)의 회고와 조선공산당 2대 책임비서 강달영의 진술에 따르면, 권오설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청의 회계를 전담하고 있었고, 고려공청 내부에 아무 파벌이 없는 상태에서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 강달영은 권오설의 약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당내에서는 권오설을 두고 매사에 경거망동이 많았고, 따라서 대사를 맡길 사람이 아니기에 제외하든가 다른 방법을 취해야만 한다는 불평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중 노골적으로 권오설을 기피한 사람이 무산자동맹회 출신이자 김남수와 가까웠던 비서부의 이준태였다. 강달영은 이를 무마하느라 애썼다고 진술했다.
- 권오설은 다리에 각목을 끼우는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권오설은 자세히 말하진 않았지만 다른 피해자들의 증언을 참고하면 무릎 뒤에 각목을 대고 무릎꿇린 뒤 누르는 압슬 비슷한 원리의 일제강점기에 자주 행해진 고문이다.
경찰에서 취조를 받은 것은 때마침 여름이었다. 일주일 정도 지난 후 모든 것을 숨김없이 말하라며 둥근 의자를 넘어뜨려 그 위에 나를 앉혔다. 그때 요시노 경부보가 나의 무릎 끝을 발로 차는 바람에 나는 앞으로 쓰러져 앞니를 부딪쳤다. 그 이후에는 앞니가 덜그럭거리며 움직여 바람이 스치면 고통스럽다. (...) 요시노 경부보가 양손을 목 뒤로 접고 끈으로 동여매었다. 그리고서 5, 6명의 경관이 죽도록 나를 마구 때렸다. 이어서 앉아 있는 다리의 안쪽에 각목 2개를 끼우고 하루 밤낮을 계속 고문했다. 다음날 각목 1개는 빼냈지만, 그것으로 인해 상반신이 붓고, 다리가 마비됐고, 머리가 휘청거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권오설 1>, 552쪽
<권오설 1>, 552쪽
7. 가계
그가 태어난 경상북도 안동군 풍서면(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은 안동 권씨 복야공파(僕射公派) 집성촌으로, 전통적인 양반마을이다. 이 마을은 본디 풍산 류씨의 집성촌이었는데, 1420년경에 권오설의 직계조상이기도 한 참의공 권항(權恒, 1403 ~ 1461. 6. 18)이 이 마을에 살던 사직(司直, 정5품)을 지낸 풍산 류씨(豊山 柳氏) 류서(柳湑)라는 사람에게 장가들게 되었고 이 때부터 안동 권씨 일족 또한 세거하게 된 것이다. 이 마을은 권오설을 비롯하여 여러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 운동가를 배출하여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의 거점으로도 크게 두드러졌는데, 이 때문에 한때 '안동의 모스크바'라는 별칭이 붙기도 하였다.이 마을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11]
- 권각(權慤, 1923~1943) - 조선문화학원(朝鮮文化學院)[12] 중등과에 재학중이던 1940년 서울 사직공원에 '대한 독립 만세' 라고 쓴 벽보를 붙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음.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됨.
- 권영달(權寧達, 1901~1945) - 경성고등상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6년에 6.10 만세 운동에 관련되어 일본 경찰에 쫓기자 자퇴하였다. 이후 예천군의 대창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는데, 이때 최현배를 비롯한 한글학자들과 교유하면서 한글 연구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했음.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경의 감시를 피해다니며 잠적하였음.
- 권영식(權寧植, 1894~1930) - 대한광복회 단원으로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던 중 1918년 검거되어 공주감옥에서 수개월 간 옥고를 치렀고, 1920년에 안동청년회와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설립에 참여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음.
- 권오상(權五尙, 일명 권오돈(權五敦), 1900~1928) - 1924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청년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1925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 그 해 고려공산청년회 및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후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하였다. 1926년 6.10 만세 운동 당시 태극기와 격문을 제작하는 등 주도 역할을 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그후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얼마 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음.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됨.
- 권오운(權五雲, 1904~1927) -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6년 6.10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귀향하여 신간회 안동지회에 참여, 활동하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음.
- 권오직(權五稷, 1906~?) - 권오설의 동생으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이다.[13]
- 권오헌(權五憲, 1905~1950) - 1928년 신간회 안동지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고 이후 안동청년동맹 풍산지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1929년 일제에 결사항쟁할 것을 독려한 축문(祝文)을 썼다고 하여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으나 집행유예로 풀려났음.
- 권재수(權在壽, 1882~?) - 1920년 신흥무관학교 생도를 모집하다가 체포되었음.
- 권준표(權準杓, 1894~1953) - 1919년 족손 권오설이 세운 원흥의숙(元興義塾)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이후 1923년 풍산소작인회(豊山小作人會)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소작운동을 전개하였음.
- 권준희(權準羲, 1849~1936) - 대한광복회 고문으로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던 중 1918년 검거되어 공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고령으로 풀려났음. 201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됨.
- 권준흥(權準興, 1881~1939) - 대한광복회 단원으로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던 중 1918년 검거되었다. 이후 1919년 족손 권오설이 세운 원흥의숙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음.
- 권혁수(權赫壽, 일명 권재탁(權在倬), 1926~1965) - 안동농림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4년 조선회복연구단(朝鮮回復硏究團)을 조직, 안동 시내의 경찰서 및 헌병파견대 등을 습격한 후 의성군으로 진출하여 일본군과 교전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드러나 1945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광복으로 풀려났음. 2006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됨.
이상 12명의 독립운동가가 기록상으로 확인되며, 이 중 권오설을 포함한 5명이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다. 그만큼 권오설의 이후 생애에 주변 사람들의 영향이 크게 있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8. 참고문헌
- 김준엽, 김창순, 1986,『한국공산주의운동사』1ㆍ2, 청계연구소- 안동독립운동기념관, 2010, 『권오설』1ㆍ2, 푸른역사
- 박철하, 1999, "1920년대 전반기 ‘중립당’과 무산자동맹회에 관한 연구"『숭실사학』13, 숭실대학교 사학회
- 이희을, 2021, "권오설의 사회주의 수용과 조선공산당 운동" 계명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장석흥, 1994,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초기조직과 6.10 만세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8집
[1] 복야공파 박(搏)계 35세 오(五) 오(悟) 숙(肅) 오(梧) 항렬.[2] 1928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898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인근의 갈전리·구호리와 함께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권각·권오돈·권준희·권혁수도 이 마을 출신이다.[4] 현재 이 지번에는 1996년 12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남천고택(南川古宅)이 위치해 있다. 남천고택은 권오설의 고조부 권기(權璣, 1798 ~ 1849. 10. 6)의 8촌 삼종제(三從弟) 야유당(野遺堂) 권장(權璋, 1802 ~ 1874. 7. 28)이 1850년(철종 1) 넷째 아들 남천(南川) 권수(權鏽, 1832 ~ 1901. 12. 21)를 위해 살림집으로 지어 준 집이다. 1914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4년 당시 이 지번의 필지는 권수의 손자 권동호(權東浩, 초명 권영호(權寧浩), 1882 ~ 1965. 6. 4)의 소유였고, 1980년 7월 14일 권동호의 장손자 권장(족보명 권용대(權容大), 1943. 11. 17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현재에 이른다.[5] 이 남천고택 서쪽에 있는 콩밭에 권오설의 생가가 있었다고 하며, 8.15 광복 후에도 권오설의 어머니 풍산 류씨(豊山 柳氏) 류영(柳榮, 1867 ~ 1953. 7. 17)과 권오설의 부인 부림 홍씨(缶林 洪氏, 1893 ~ ?. 1. 22), 첫째 남동생 권오기(權五夔, 1901 ~ ?)의 부인 안동 김씨(1902 ~ ?), 둘째 남동생 권오직의 부인 광주 노씨(1904 ~ ?), 권오설의 양자 권대용(權大用, 1944 ~ ), 권오설의 조카 권대평(權大平, 1948 ~ ) 등이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대에 불에 타 전소되어 사라졌다고 한다.[6] 權五箕라고도 표기한다.[7] 경향신문 기사[8] 초명 권영수(權寧壽).[9] 류도긍(柳道兢)의 딸이다.[10] 현재 이 지번에 권오설아지트터(6.10만세운동추진거점)라는 이름으로 사적이 보존되어 있다.[11] 김희곤, 「안동 가일마을 사람들의 항일투쟁」,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5권 제1호, 2012.5, 467-496 (30 pages) 참조 /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홈페이지[12] 기독교계열의 민족교육기관으로 보이는데, 확실한 정보는 없고 다만 1939년 동아일보 기사에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인 연지정(蓮池町)에 있던 학교 건물을 서대문정에 있는 피어선성경학원으로 옮긴다는 정보가 있다. 여기서 피어선성경학원은 현재 평택대학교의 전신이다. 또 대한민국인물연감에 의하면, 한양대학교 설립자 김연준이 조선문화학원을 설립했다고 한다.[13] 199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은 권오직(權五稷, 1927~1981)과는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