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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21 04:28:32

반역향

1. 개요2. 지정 사례(시대 순서)3. 영향4. 조선 이전의 사례5. 외국의 사례

1. 개요

반역향()은 '반란을 일으킨 고을'을 뜻한다.

일종의 연좌제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유교적 이념을 거스르는 중대 범죄가 발생한 지역 전체를 일종의 공범으로 판단하고 반역향으로 지정한다. 반역향으로 찍힌 고을은 갖가지 차별을 받았는데, 작은 범죄는 마을 단위로 차별하기도 했고, 반란 같은 큰 사건은 단위에서 이름을 떼버리거나, 행정구역을 낮은 등급으로 강등하거나[1] 해당 고장의 선비에게 과거 시험을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등 다양한 조치를 가했다. 관에서 차별을 하니 백성들에게도 차별 의식이 번져서 반역향으로 찍힌 고을 사람들을 이웃 고을 사람들이 괴롭히는 일도 적지 않게 생겼다.

2. 지정 사례(시대 순서)

2.1. 경기도

온수역 문서에 서술되어 있는 것처럼 1438년에 부평 백성들과 그 지역 아전들이 임금이 오지 못하게 간헐천을 막아 버리고 님비를 시전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온천욕을 즐길 수 없게 된 세종은 대노하여 지역 아전들을 붙잡아 실력행사를 한 다음 부평도호부를 부평현으로 강등시켰다. 이들의 행동은 임금을 속이고 능멸한 '기군망상죄'에 해당하며, 조선시대에 기군망상죄는 '반역죄'와 동급으로 처벌되었으므로 세종의 처벌은 오히려 관대한 편이었다.[2]

2.2. 함경도

1467년의 이시애의 난이 계기가 되어 세조가 바꿨는데, 그 전에는 조사의의 난·이징옥의 난도 있었으며, 처음에는 영길도였다가 이시애의 난으로 영흥이 화주목으로 강등되고 함주가 함흥으로 승격하면서 함경도가 되었다. 1470년에 영흥 품관 김영로가 함흥이 반역향이라는 이유로 영안도로 개칭할 것을 청해 이를 따랐다가 1498년에 함흥을 다시 부로 승격해 함경도가 되었다.

2.3. 충청도

명종 때인 1547년의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바꾸었는데, 수십 명의 목이 잘리고 나머지 몇백 명이 대거 유배를 가는 대형 옥사였으며 문정왕후는 "내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반역의 땅 충주를 강등하여 유신현으로 삼고 충청도는 이제 홍도라고 불러라." 라는 서릿발 같은 명령을 내리게 된다.

다른 지역보다 자주 변경되는 지역으로 조선의 역사 516년에서 32회나 개명되었으며, 충공도, 청공도(3회 28년), 공충도(4회 27년), 충홍도(3회 5년 이하), 홍충도(1회, 1년), 공홍도(3회 30년) 등으로 변경된 저이 있으며, 충청도라는 이름을 보전한 적이 있는 시기는 인종, 선조, 경종, 헌종 정도로 충청도의 명칭은 충청도가 아니었던 기간이 충청도였던 기간보다 길다(…).

한양과 가깝다는 이유로 정치적 사건에 휘말리기 쉬운데다가 대체 불가능한 핵심 중심지가 부재했다고 할 수 있어서 이름이 자주 바뀐 것으로 보인다. 충청도의 주요 도시인 충주, 청주, 공주, 홍주는 경상도의 경주, 평안도의 평양, 함경도의 함흥 같은 도의 인구적/문화적 중심의 역할을 한 지역이 아니라 도시 네 개가 거의 비슷한 인구를 유지할 정도로 대체 불가능한 핵심 중심지가 없었다.

1735년 계수관 역모 사건에 충주, 청주가 모두 연루되어 로 바꿨다. 비슷한 식으로 공홍도·공충도로 불렸던 시기도 있었다.

2.4. 전라도

선조 때인 1589년의 정여립의 난이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실제로 본격 봉기하지도 않았는데 선조와 정철서인 측 인사들이 정략적 의도로 뒤집어씌우다시피 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관련 사건으로 야기된 인명 피해는 4대 사화를 합친 이상으로 많았다. 일시적인 피해가 컸으나 어차피 그쪽은 전주가 왕실의 본관이어서 딱히 반역향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1645년에 나주에서 향리가 나주목사에게 상해를 입히는 일이 일어나 나주목을 금성현으로 강등하면서 나주를 대신한 남원을 넣어 전남도로 바뀌었다가 1654년에 복칭되었으며, 1728년의 이인좌의 난으로 나주가 다시 강등되고 광주를 대신 넣어서 잠시 전광도가 되었고 나주는 1735년에 일어난 계수관 역모 사건에도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전라도에서 왕실의 본관이라는 이유로 전주를 의미하는 전(全)자가 갈려나간 적은 없었다.

2.5. 황해도

1395년에 서해도에서 풍해도로 바꾸었다가 1417년에 황해도가 되었으며, 광해군 때인 1616년의 해주 옥사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대북 세력이 소북 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정략적 의도로 뒤집어씌운 사건으로 해주목이 강등되어 연안도호부가 대신해 황연도라고 했다가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왕이 되면서 이름은 복귀되었다.

2.6. 강원도

현종 때인 1666년 강릉의 생매장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강릉에서 박귀남이 전염병에 걸려 부인이 딸·사위와 공모해 생매장하자 강릉대도호부를 강릉현으로 강등하며, 강원도를 강릉 대신 양양을 붙여 원양도로 했다.

1675년에 강원도로 복칭되었다가 1683년에 원주에서 남편을 죽인 죄인이 생겼다는 이유로 원주를 대신한 양양을 넣어 강양도라 했다가 1688년에 양양이 역적의 출생지라고 해서 양양을 대신해 춘천을 넣어 강춘도로 바뀌었다가 1693년에 강원도로 복칭했다.

1729년에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박필현의 출생지라고 해서 원주 대신 춘천을 붙여 강춘도로 변경했고 원주는 1735년에 계수관 역모 사건에 원주가 관련되었다. 1738년에 복칭되었다가 1782년에 대역 죄인으로 죽은 자가 강릉에 거주한 이유로 강릉을 빼고 춘천을 붙여 원춘도라고 했다가 1791년에 강원도로 복칭했다.

2.7. 경상도

영조 때인 1728년 이인좌의 난이 계기가 되었다. 반란은 삼남 전역에서 발생했지만 그중 영남이 가장 끈기 있게 저항했기 때문에 진압에 가장 큰 애를 먹었고 결국 대구에 평영남비(平嶺南碑)가 세워졌다.[3] 결국 100년 넘게 영남 유림의 대과 응시가 금지되었다. 참고로 영조 재위 시기에 말썽을 빚은 지역은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 전라도, 강원도, 충청도도 반역향으로 지정되었다.
특히 영조 11년의 계수관 역모 사건으로 전라도(나주를 반역향 지정), 강원도는 (원주를 반역향 지정), 충청도충주·청주 두 곳이 다 반역향(…)이라 로 바꿨다.

2.8. 평안도

효종 때인 1653년 영변부의 살인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평안도에 속한 영변부에서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일이 일어나 노비를 복주하고 부사 이영발을 파직시키면서 영변부를 영변현으로 강등시켰다. 이전 시기인 1588년에 선조 때 평양에서 최정보가 맹인 신고함과 작당해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지만, 평양은 다른 군현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해서 격하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평양의 중요성으로 인해 평양 자체가 이름이 바뀐 적은 없었다.

도의 이름이 변경되지 않았지만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으로 인해 반란 지도자들의 출신지인 안주, 정주, 가산, 곽산 등을 현으로 강등하고 개천, 용강 등의 읍호를 한 등급 낮추게 했다.

홍경래의 난은 세도정치기 거듭된 민란의 포문을 열었던 것으로 평가되어 그 대가는 실로 참혹했다고 하지만, 다른 말로는 홍경래의 난을 통해서 평안도에 대해서 유화적인 정책도 나왔다는 말도 있다.

3. 영향

이러다 보니 거의 전국이 한 번씩은 반역향으로 찍힌 경험이 있게 되었다. 예외는 한성경기도인데, 물론 한성과 경기도에서도 흉악범죄와 반란은 자주 있었으며 조선의 권력을 독점한 지방이란 특성상 오히려 반역은 타 지방보다 자주 있었다. 그러나 한성은 그 반역향 지정을 하는 왕과 고관들이 사는 수도 지역인 이상 반란이 있든 없든 당연히 스스로 차별할 수는 없으니 지정을 할 수가 없고 경기도 역시 이름도 특정 지역 이름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서울 주변 지역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었기 때문에 글자를 바꿀 수도 없고 경기도 전체를 반역향으로 찍으면 수도 한성이 반역향에 포위된 꼴이 되니 모양새가 굉장히 사나워진다. 그 대신 경기 지역에서는 인천·부평처럼 고을 단위로 반역향을 찍어 행정구역의 격을 낮추는 우회적인 처분만 내려졌다.

조선 중기에 지방 기반의 사림과 사색당파가 강성했던 것과는 달리 후기로 가면 서울과 경기도의 문벌 가문 중심의 세도정치가 강해지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이는 거의 모든 지방이 이런저런 핑계로 반역향이 돼버리면서 지방 기반 고관대작들이 사라진 것[4]과 연관성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의 이런 구도의 고착화가 대한민국의 서울 공화국 현상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4. 조선 이전의 사례

반역향은 이미 고려 왕조에서도 지정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경주는 동경(東京)이었으나, 동경민란을 진압하면서 1204년 경(京)에서 해제되었을 뿐 아니라 경상도라는 이름에서 경(慶)을 삭제해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15년 후 다시 복권되지만 1308년 원나라의 압력으로 3경 제도가 폐지되면서 최종적으로 경주가 된다.

5. 외국의 사례


[1] 예: 부평도호부→ 부평[2] 인천·부평처럼 고을 단위로 반역향을 찍어 행정구역의 격을 낮추는 처분만 내릴 수 있어 경기도 자체는 화를 면했다.[3] 영남을 평정했다는 뜻. 이 비는 경상감영에 세워져 있었으나 왕조가 망함과 동시에 헐어져서 비문의 내용만 경북대에 남아있다.[4] 반역향으로 지정됨→ 해당 지역 출신 권력자들이 몰락, 고관대작으로의 승진에 불이익→ 반역향이 해제된 이후에도 고관대작에 해당 지역 명문가 출신들이 없어 출세에 어려움→ 해당 지역 명문가는 중앙권력에 진출하지 못하고 향반으로 전락[5] 문은 질량 단위면서 화폐 단위로 시대 및 지역마다 다르지만 아주 작은 단위다.[6] 야스쿠니 신사/논란 문서를 읽으면 알겠지만 이건 일본의 전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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