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반역향(反逆鄕)은 '반란을 일으킨 고을'을 뜻한다.일종의 연좌제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혹은 유교적 이념을 거스르는 중대 범죄가 발생한 지역 전체를 일종의 공범으로 판단하고 반역향으로 지정한다. 반역향으로 찍힌 고을은 갖가지 차별을 받았는데, 작은 범죄의 경우 마을 단위로 차별하기도 했고, 반란 같은 큰 사건의 경우 도 단위에서 이름을 떼버리거나, 행정 구역을 낮은 등급으로 강등하거나[1] 해당 고장의 선비에게 과거 시험을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등 다양한 조치를 가했다. 관에서 차별을 하니 백성들에게도 차별 의식이 번져서 반역향으로 찍힌 고을 사람들을 이웃 고을 사람들이 괴롭히는 일도 적지 않게 생겼다.
2. 지정 사례(시대 순서)
- 경기도(세종): 온수역 문서에서 나와 있는 부평 백성들과 그 지역 아전들이 임금이 오지 못하게 간헐천을 막아버리며 님비를 시전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온천욕을 즐길 수 없게 된 세종은 대노하여 지역 아전들을 붙잡아 실력행사를 한 다음 부평도호부를 부평현으로 강등시켰다. 이들의 행동은 임금을 속이고 능멸한 '기군망상죄'에 해당하며, 조선시대 기군망상죄는 '반역죄'와 동급으로 처벌되었으므로 세종의 처벌은 오히려 관대한 편이었다.[2]
- 함경도(세조): 이시애의 난이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그 전에 조사의의 난·이징옥의 난도 있었으며, 1470년에 영흥 품관 김영로가 함흥이 반역향이라는 이유로 영안도로 개칭할 것을 청해 이를 따랐다가 1498년에 함흥을 다시 부로 승격해 함경도가 되었다.
- 충청도(명종): 명종 때의 이약빙의 옥사가 결정타가 되었다. 수십 명의 목이 잘리고 나머지 몇백 명이 대거 유배를 가는 대형 옥사였으며 문정왕후는 "내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반역의 땅 충주를 강등하여 유신현으로 삼고 충청도는 이제 청홍도라고 불러라." 라는 서릿발 같은 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외에도 비슷한 식으로 공홍도·공충도로 불렸던 시기도 있었다. 이렇게 충청도의 명칭은 충청도가 아니었던 기간이 충청도였던 기간보다 길다(…).
- 전라도(선조): 정여립의 난이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실제로 본격 봉기하지도 않았는데 선조와 정철 등 서인 측 인사들이 정략적 의도로 뒤집어씌우다시피 한 사건이라는 점. 관련 사건으로 야기된 인명 피해는 4대 사화를 합친 이상으로 많았다. 일시적인 피해가 컸으나 어차피 그쪽은 전주가 왕실의 본관이어서 딱히 반역향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잠시 전광도 등으로 바뀐 예가 있긴 하나 전주를 의미하는 전(全)자가 갈려나간 적은 없었다.
- 황해도(광해군): 해주 옥사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대북 세력이 소북 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정략적 의도로 뒤집어씌운 사건으로 해주목이 강등되어 연안도호부를 대신 따와 황연도라고 했다가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왕이 되면서 이름은 복귀되었다.
- 강원도(현종): 강릉의 생매장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1666년에 강릉에서 박귀남이 전염병에 걸리자 부인이 딸·사위와 공모해 생매장하자 강릉대도호부를 강릉현으로 강등하며, 강원도를 강릉 대신 양양을 붙여 원양도로 했다. 1675년에 강원도로 복칭되었다가 1729년에 원주에서 일어난 역모로 원주 대신 춘천을 붙여 강춘도로 했다가 1732년에 복칭되었으며, 1782년에 대역 죄인으로 죽은 자가 강릉에 거주한 이유로 강릉을 빼고 춘천을 붙여 원춘도라고 했다가 1791년에 강원도로 복칭했다.
- 경상도(영조): 이인좌의 난이 계기가 되었다. 반란은 삼남 전역에서 발생했지만 그중 영남이 가장 끈기 있게 저항했기 때문에 진압에 가장 큰 애를 먹었고 결국 대구에 평영남비(平嶺南碑)가 세워졌다.[3] 그리고 결국 100년 넘게 영남 유림의 대과 응시가 금지되었다. 참고로 이 영조 재위 시기에 말썽을 빚은 지역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특히 영조 11년의 계수관 역모 사건으로 전라도는 전광도(나주를 반역향 지정), 강원도는 강춘도(원주를 반역향 지정), 충청도는 충주·청주 두 곳이 다 반역향(…)이라 공홍도로 바꿨다.
- 평안도[4](효종): 영변부의 살인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1653년에 평안도에 속한 영변부에서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일이 일어나 노비를 복주하고 부사 이영발을 파직시키면서 영변부를 현으로 강등시켰다. 도의 이름은 바뀌지 않았지만 홍경래의 난으로 인해 반란 지도자들의 출신지인 안주, 정주, 가산, 곽산 등을 현으로 강등하고 개천, 용강 등의 읍호를 한 등급 낮추게 했다. 이 사건은 세도정치기 거듭된 민란의 포문을 열었던 것으로 평가되지만, 그 대가는 실로 참혹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말로는 홍경래의 난을 통해서 평안도에 대해서 유화적인 정책도 나왔다는 말도 있다. 이전에는 1588년에 선조 때 평양에서 최정보가 맹인 신고함과 작당해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지만, 평양은 다른 군현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해서 격하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평양의 중요성으로 인해 이후로도 이름이 바뀌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에 지방 기반의 사림과 사색당파가 강성했던 것과는 달리 후기로 가면 서울과 경기도의 문벌 가문 중심의 세도정치가 강해지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이는 거의 모든 지방이 이런저런 핑계로 반역향이 돼버리면서 지방 기반 고관대작들이 사라진 것[5]과 연관성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이런 구도의 고착화가 대한민국의 서울 공화국 현상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3. 조선 이전의 사례
반역향은 이미 고려 왕조에서도 지정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경주는 동경(東京)이었으나, 동경민란을 진압하면서 1204년 경(京)에서 해제되었을 뿐 아니라 경상도라는 이름에서 경(慶)을 삭제해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15년 후 다시 복권되지만 1308년 원나라의 압력으로 3경 제도가 폐지되면서 최종적으로 경주가 된다.4. 외국의 사례
- 로마 제국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절, 외세와 협력해 내전을 벌인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지지한 비잔티움과 최후까지 세베루스 황제와 제위 경쟁을 벌인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의 사령부 역할을 한 루그두눔(오늘날의 프랑스 리옹)이 반역향으로 찍혀 세베루스 재위 기간 내내 큰 고생을 했다. 두 도시는 적국 도시처럼 함락 후 약탈되고 도시 지역 유지들과 주민들이 반역죄로 처벌받은 데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로마 시민권자임에도 엄청난 세금 등을 납부하도록 명령받고 차별을 받는 등 고생했다. 이때 두 도시에 대한 처벌은 지나칠 정도로 혹독해, 반강제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의 병참기지로 이용된 루그두눔 주민이나 니게르에게 협력했어도 항복해도 똑같은 처벌을 받을 운명이었던 비잔티움 주민들은 다른 지역 로마인들에게도 동정을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되기 전 이 당시의 비잔티움은 소도시였다. 한편 어떻게 보면 이 비잔티움이 후대에는 반역향이나 천대받기는커녕 새로운 수도가 되어 본거지인 이탈리아에서는 망한 로마를 1000년이나 더 끌고 가게 된 것은 얄궃다고 할 수 있다.
- 삼국시대 말기 위나라의 수춘삼반. 단 위나라 기준으로는 왕가가 아닌 실권자(권신) 가문이었던 사마씨에 대항한 것이다.
- 일본 보신 전쟁에서 에도 막부에 끝까지 충성하며 왕사와 싸운 아이즈 번 등 오우에츠열번동맹(奧羽越列藩同盟)이 다스렸던 고신에쓰-도호쿠 지역의 마을들이 반역향으로 찍혀서 "시라카와 노녘은 뫼 하나가 온 문"(白河以北 一山百文)[6] 밖에 안 한다는 과장된 말이 나돌았고, 야스쿠니 신사는 보신 전쟁에서 막부에 충성하는 번을 진압하다 죽은 이를 신으로 모시기 위해 지어져서 패배자는 역적이라며 배제하고[7]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도 오우에츠열번동맹에 가담했던 소마나카무라번(相馬中村藩)이 다스렸던 땅에 세워졌다. # # 막부파가 아니라 근왕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사가 현 (당시 사가 번) 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사가 번 인사들이 메이지 6년 정변에서 패배하여 중앙 정계에서 축출된 이후, 사가의 난 을 일으켜 진압당했다. 이후 1886년부터 7년간 반란의 주역이었던 사가현은 이웃한 나가사키현에 흡수된다.
- 미국의 경우 남북 전쟁에서 패배한 남부맹방 가맹 주들은 연방의 군정을 겪으며 연방 가맹주의 자격이 정지되었다. 이는 19대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 대에 가서야 해제되었다.
[1] 예: 부평도호부→ 부평현[2] 인천·부평처럼 고을 단위로 반역향을 찍어 행정구역의 격을 낮추는 처분만 내릴 수 있어 경기도 자체는 화를 면했다.[3] 영남을 평정했다는 뜻. 참고로 이 비는 경상감영에 세워져 있었으나, 왕조가 망함과 동시에 헐어져서 비문의 내용만 경북대에 남아있다.[4] 홍경래의 난 이미지가 강렬하여 조선 초기부터 소외받았다는 주장도 있으나 평양 출신 영의정 조준처럼 조정의 총애를 받은 사례도 있다. 다만 이 가문은 손자 대 이르러 거의 중앙 정치에 관여하지 못했다.[5] 반역향으로 지정됨→ 해당 지역 출신 권력자들이 몰락, 고관대작으로의 승진에 불이익→ 반역향이 해제된 이후에도 고관대작에 해당 지역 명문가 출신들이 없어 출세에 어려움→ 해당 지역 명문가는 중앙권력에 진출하지 못하고 향반으로 전락[6] 문은 질량 단위면서 화폐 단위로 시대 및 지역마다 다르지만 아주 작은 단위다.[7] 이걸 읽으면 알겠지만 이건 일본의 전통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