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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1 09:28:57

반역향

1. 개요2. 지정 사례(시대 순서)3. 조선 이전의 사례4. 외국의 사례

1. 개요

반역향()은 '반란을 일으킨 고을'을 뜻한다. 일종의 연좌제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혹은 유교적 이념을 거스르는 중대 범죄가 발생한 지역 전체를 일종의 공범으로 판단하고 반역향으로 지정한다. 반역향으로 찍힌 고을은 갖가지 차별을 받았는데, 작은 범죄의 경우 마을 단위로 차별하기도 했고, 반란 같은 큰 사건의 경우 단위에서 이름을 떼버리거나, 행정 구역을 낮은 등급으로 강등하거나[1], 해당 고장의 선비에게 과거 시험을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등 다양한 조치를 가했다. 관에서 차별을 하니 백성들에게도 차별 의식이 번져서 반역향으로 찍힌 고을 사람들을 이웃 고을 사람들이 괴롭히는 일도 적지 않게 생겼다.

2. 지정 사례(시대 순서)

이러다보니 거의 전국이 한 번씩은 반역향으로 찍힌 경험이 있게 되었다. 예외는 한성경기도인데, 물론 한성과 경기도에서도 흉악범죄와 반란은 자주 있었다(조선의 권력을 독점한 지방이란 특성상 오히려 반역은 타 지방보다 자주 있었다). 그러나 한성은 그 반역향 지정을 하는 왕과 고관들이 사는 수도 지역인 이상 반란이 있든 없든 당연히 스스로 차별할 수는 없으니 지정을 할 수가 없고 경기도 역시 이름도 특정 지역 이름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서울 주변 지역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었기 때문에 글자를 바꿀 수도 없고 경기도 전체를 반역향으로 찍으면 수도 한성이 반역향에 포위된 꼴이 되니 모양새가 굉장히 사나워진다. 그 대신 경기 지역에서는 인천·부평처럼 고을 단위로 반역향을 찍어 행정구역의 격을 낮추는 우회적인 처분만 내려졌다.

조선 중기에 지방 기반의 사림과 사색당파가 강성했던 것과는 달리 후기로 가면 서울과 경기도의 문벌 가문 중심의 세도정치가 강해지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이는 거의 모든 지방이 이런저런 핑계로 반역향이 돼버리면서 지방 기반 고관대작들이 사라진 것[5]과 연관성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이런 구도의 고착화가 대한민국의 서울 공화국 현상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3. 조선 이전의 사례

반역향은 이미 고려 왕조에서도 지정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경주는 동경(東京)이었으나, 동경민란을 진압하면서 1204년 경(京)에서 해제되었을 뿐 아니라 경상도라는 이름에서 경(慶)을 삭제해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15년 후 다시 복권되지만 1308년 원나라의 압력으로 3경 제도가 폐지되면서 최종적으로 경주가 된다.

4. 외국의 사례


[1] 예: 부평도호부→ 부평[2] 인천·부평처럼 고을 단위로 반역향을 찍어 행정구역의 격을 낮추는 처분만 내릴 수 있어 경기도 자체는 화를 면했다.[3] 영남을 평정했다는 뜻. 참고로 이 비는 경상감영에 세워져 있었으나, 왕조가 망함과 동시에 헐어져서 비문의 내용만 경북대에 남아있다.[4] 홍경래의 난 이미지가 강렬하여 조선 초기부터 소외받았다는 주장도 있으나 평양 출신 영의정 조준처럼 조정의 총애를 받은 사례도 있다. 다만 이 가문은 손자 대 이르러 거의 중앙 정치에 관여하지 못했다.[5] 반역향으로 지정됨→ 해당 지역 출신 권력자들이 몰락, 고관대작으로의 승진에 불이익→ 반역향이 해제된 이후에도 고관대작에 해당 지역 명문가 출신들이 없어 출세에 어려움→ 해당 지역 명문가는 중앙권력에 진출하지 못하고 향반으로 전락[6] 문은 질량 단위면서 화폐 단위로 시대 및 지역마다 다르지만 아주 작은 단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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