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6년 정변 (1873) 明治六年政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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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73년, 정한론을 빌미로 일어난 메이지 시대 초기의 정변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등 당시 정부 수뇌였던 참의의 반 이상과 군인, 관료 약 600명이 사퇴하며 정권이 교체되었다.상기한 바와 같이 정한론이 발단이 된 탓에 정한론 정변(征韓論政変)이라고도 불린다.
2. 배경
정변의 발단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조선 사절 파견 문제였다. 왕정복고 후 전면 개국을 시작한 신정부는 1868년부터 이미 조선에 여러차례 국교 수립을 위한 사절단을 파견했지만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아직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으로 성리학의 화이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채택하고 있었다.거기에 더해 일본 신정부에서 가져온 국서에 조선 입장에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문제[1]가 있어 국서 수납 및 국교 정상화를 지속적으로 거부했다.
사이고의 사절 파견에 찬성한 참의(參議)는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 에토 신페이, 소에지마 다네오미 등[2]이며 반대 측은 오쿠보 도시미치, 오쿠마 시게노부, 기도 다카요시, 오키 타카토였다.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는 양측을 중재해보려는 입장이었지만 중간에 병으로 쓰러졌고,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가 태정대신 대행이 되어 사이고와 정한파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반대 이유 중 첫번째로 이와쿠라 사절단의 파견중에 중대한 국사 결정의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는 합의를 한 것이며, 두번째로 일본 국내가 급격한 개화로 혼란스럽고 구미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철폐, 사할린 문제 등 여러가지 문제가 산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절단이 귀국하기 이전인 8월 17일, 각의로 사이고를 대(對)조선 전권대사로 파견하기로 결정되었으나, 다음 날 이 안을 제출받은 메이지 덴노는 상기한 합의를 바탕으로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국할 때까지 최종 결재를 연기, 1달 뒤인 9월 13일에 이와쿠라와 논의 끝에 다시 제출되었지만 최종적으로 각하한다.
3. 결과
사이고 다카모리 및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 에토 신페이 등은 사직서를 제출, 사이고 다카모리를 따르는 육군 준장 키리노 도시아키 포함 100명 이상의 사쓰마 번 출신 군경들이 일제히 사직한다. 그리고 이들은 점차 중앙정부에 불만을 가진 끝에 사가의 난, 세이난 전쟁으로 반기를 들고 무력으로 진압당했다. 도사 번 출신의 사족들은 자유민권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평화적으로 반정부 세력을 구축하기도 했다.결국 핵심이었던 조선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채 이듬해 1874년 미야코 섬 조난 사건을 구실로 타이완 출병을 강행했다. 하지만 별소득 없이 물러나야했고 결국 실각한 정한론자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이듬해인 1875년에는 서구의 함포 외교를 따라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맺는다.
[1] 조선이 준 도서가 아닌 신정부 자체 도장을 사용한데다가, 황제, 황조, 황상 등 중화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해당 국서를 조선의 화이론적 세계관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2] 사이고 다카모리 포함 사쓰마(薩摩), 도사(土佐), 히젠(肥前)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