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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 ||
<nopad> | ||
<colbgcolor=#bc002d> 발생일 | 1987년 3월 22일 | |
발생 위치 | 부산직할시 북구 주례동 산18[1] | |
유형 | 납치, 강제 수용소, 강제노동, 유괴, 인신매매(유아 해외입양) 등 | |
원인 | • 원장 박인근 개인의 금전적 이득 (지원금 절취 및 포탈), 비리와 부정부패가 도운 사건 은폐와 확장 • 대한민국 군사정권의 부랑아 단속 정책 (내무부 훈령 제410호) | |
인명피해 | <colbgcolor=#bc002d><colcolor=#fff> 사망 | 531명 이상 (원장 박인근의 주장) 657명 이상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 |
실종 | 불명 | |
부상 | 불명 | |
구조 | 알 수 없음 |
1. 개요2. 상세3. 실체4. 사법처리5. 사건 이후6. 원장 박인근7. 검찰의 비상상고8. 법원의 국가 손해배상 책임 인정9. 미디어 자료
9.1. 영화 '종점 손님들'9.2. 뉴스타파M 1회9.3. MBC 시사매거진 2580 876회9.4. 한겨레 《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9.5. SBS 그것이 알고싶다 932, 977회9.6.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184회9.7.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 74회9.8. 부산일보 《살아남은 형제들》9.9. tvN 알아두면 쓸데있는 범죄 잡학사전 1회9.10.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회9.11. MBC PD수첩 1348회9.12. JTBC 아무도 몰랐던, 비하인드 4회9.13. Netflix 나는 생존자다 1,2화
10. 관련 자료11. 외신 언론보도12. 대중 매체에서13. 해외 사례14. 여담15. 외부 링크16. 관련 문서17. 둘러보기1. 개요
|
형제복지원 시설 입구 |
이 사건은, 정부가 부랑인 정책 및 제도에 따라 경찰 등 공권력의 적극적 개입에 의하여 또는 이들의 허가.지원.묵인 하에 부랑인으로 지목한 불특정 민간인을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단속하여, 1960. 7. 20.부터 ~ 1992. 8. 20.까지 운영되었던 부산 소재 형제복지원에 장기간 자의적 구금을 했고, 그 과정에서 강제노동, 가혹행위, 성폭력, 사망, 실종, 등이 자행 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2국,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보고서(2023. 3. 16.)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2국,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보고서(2023. 3. 16.)
형제복지원 사건은 당시 내무부 훈령 제410호에 근거해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랑인 단속이라는 명분으로 3천 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을 강제로 감금하고 강제노역, 폭행·살인 등을 저지른 인권유린 사건이다. 복지원 기록에 따라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만 551명이다.
부산광역시 부산시보
1960년 7월[2]부터 1992년까지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부산광역시, 더 나아가 박정희 정부, 전두환 정부의 후원 아래 민간인 박인근의 지휘로 일어난 인권 유린, 국가 폭력, 학살 사건이다.부산광역시 부산시보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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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한종선이 당시를 증언하며 그린 그림에 1980년대 걸개그림으로 잘 알려진 전승일 작가가 채색하고 동아일보 기사와 합성한 이미지# |
언론에서 1975년 박정희 정부가 시행한 내무부 훈령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인지, 1975년부터 1987년까지만 피해가 일어난 줄 아는 경우가 많으나 민간인 집단 학살 및 인권 유린 행위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시기부터 벌어지는 등 훨씬 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3] 박정희 정부는 형제복지원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지만, 인권 의식 자체가 후진적일 뿐더러 사회의 쓰레기들을 치운다는 명목으로 이러한 강제 수용소들을 설립하는 것을 오히려 장려했다. 그 결과 경찰과 공무원들이 승진을 위해 아무 사람이나 잡아 가두는 일이 빈번했으며, 이미 1960년대부터 덕성원, 희망원, 서울시립갱생원, 선감학원,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등 국가에서 세운 여러 강제 수용소들과 국가 권력과 강하게 유착한 장항 수심원, 부산 덕성원, 양지원 등 일부 수용 시설에서 비슷한 피해가 벌어졌으며, 일부는 2010년대에도 잔존해 있었다. 국가 권력이 나서서 국민의 아이들을 유괴한 것이다. # 형제복지원은 이들 중에서도 너무 크고 너무 많이 죽어나갔기에 가장 유명해졌을 뿐이다.
4.3 사건, 6.25 전쟁 이후 대한민국 최악의 학살 사건 중 하나로 꼽히며, 1987년 말까지 수용자 학대가 자행되었다. 특히 1980년대 전두환 정부 당시에는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개최를 전후로 길거리에서 장애인 및 부랑자, 달동네를 외국인들이 보는 것은 나라 망신이라 치워야 된다는 다분히 전시행정적인 이유로 장애인 및 부랑자 단속 및 달동네 강제 철거가 횡행하였다.[4][5] 이 때문에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5공화국 시기 최악의 국가 폭력 중 하나로 꼽힌다.
약 12년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피해자의 수는 최소 513명(박인근의 주장)으로 알려졌지만, 시체는 암매장 또는 근처 의과대학에 해부용으로 돈을 받고 팔았기 때문에 정확히 몇 명이 죽었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다. 2022년 8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 결과에 따라 공식 사망자만 657명으로 늘었다.
피해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대다수는 자신의 집 앞에서 놀다가, 또는 자기 집에서 자다가, 명절을 맞아 고향으로 가기 위해 부산역을 경유하다가 경찰 등에 붙잡혀 형제복지원으로 넘겨졌다.
1986년 기준으로 전체 수용자 3천975명 중 경찰에 의해 입소한 인원은 3천117명이나 됐고, 구청을 통해 입소한 인원은 253명에 달했다. 원생 대다수가 경찰이나 행정관계자에 의해 형제복지원으로 넘겨진 것이다.
살아남은 형제들, 형제복지원 생존자 33인의 기록
수천 명의 원생들 중 70%가 일반인이었으며, 형제복지원 직원들에 의해 납치, 구금되었다. 당시 납치에 부산시청과 부산 경찰이 적극 협조하였기 때문에 원생들은 탈출해도 공권력에 의해 다시 잡혀들어갔다. 게다가 2022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전두환도 뒷배를 든든히 책임졌으므로 피해자들은 한 번 붙잡힌 이상 외부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웠다.1986년 기준으로 전체 수용자 3천975명 중 경찰에 의해 입소한 인원은 3천117명이나 됐고, 구청을 통해 입소한 인원은 253명에 달했다. 원생 대다수가 경찰이나 행정관계자에 의해 형제복지원으로 넘겨진 것이다.
살아남은 형제들, 형제복지원 생존자 33인의 기록
원장 및 관리자급 직원 4명이 체포되어 특수감금죄 등의 혐의로 기소됐으나 윗선의 지시로 살인죄로는 기소되지 않았으며, 반정부 시위로 번질 것을 두려워한 전두환의 지시로 2년 만에 석방되었고 박인근은 2011년 사임을 전후하여 치매를 앓다가 2016년 사망했다.
대한민국 내부에서 같은 한민족이 한민족, 그 중에서도 특정 계층을 감금하고 인권을 유린했다는 점은 사실상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나 소련의 굴라크 등의 강제수용소와 결이 같아 일각에서는 한국형 아우슈비츠라고 불린다. # 절대 다수의 학살은 정부나 무장 집단[6]에서 주도한 경우가 많지만, 이 사건과 같이 정부에서 일한 적도 없는[7] 일개 비무장 민간인이 정부와 유착한 채 그 정부의 지원과 조력을 바탕으로 사실상의 살인 공장을 만들어 수백 명의 자국민을 학살한 경우는 외국에서도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문자 그대로 정부가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정부가 조력해준 학살, 사실상 대리 학살인 셈이다.[8][9]
3.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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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옹성, 형제복지원 |
1. 서로 서로 도우고 사랑하자.
2. 열심히 배우고 연구하자.
3. 정직하고 충실한 일꾼이 되자.
형제복지원의 원훈
형제복지원은 육군 부사관이던 박인근이 1962년에 장인으로부터 인수한 감만동 형제육아원(1960년 개원)을 모태로 한 개신교계 부랑인/부랑아 보호시설로[10], 인수 후 용당동으로 이전했다. 1965년에 사회복지법인화하고 부산시로부터 아동복지시설 인가를 받았다. 1971년에는 기존 목적이던 유아보호시설에서 부랑아 보호시설로 변경했고, 박정희 정부가 대대적인 부랑아 단속을 위해 발표한 1975년 내무부훈령 제410호에 근거하여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주례동 산18번지[11]의 토지를 사서 이듬해에 준공했다. 1979년에 형제원에서 '형제복지원'으로 명칭을 바꿨으며, 1983년부터 부랑아/부랑인 직업보도 업무를 개시했고 이듬해에는 정신요양원을 열었다. 기관지로는 월간 <새마음>이 있었다.2. 열심히 배우고 연구하자.
3. 정직하고 충실한 일꾼이 되자.
형제복지원의 원훈
1975년 이후 12년 동안 국고 횡령, 아동 강제 노동 등의 천인공노할 범죄 행위를 자행해 오다가 1987년 3월 22일에 시설 직원들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35명이 집단 탈출하면서 그 실체가 세상에 알려졌다. 부랑아 선도를 명목으로 길거리나 역에서 노숙자, 행려병자들, 고아들은 물론 통금 이후에 돌아다니는 사람부터 심지어는 그냥 길을 잃은 어린아이까지 무차별적으로 끌고 가서 불법적으로 감금 및 강제 노역을 시켰다.[12] 원생들을 중대나 소대별로 나누어 관리하고 원장-부원장-총무-중대장-소대장-조장-조원 순으로 수직적으로 통제하는 군대식 구조를 지녔다. 시설 측은 탈출을 막기 위해 경비원 13명과 경비견 13마리를 풀어 24시간 감시했으며 축사 주위에 철조망 및 초소 2개도 설치했다.
시설 측은 미성년자 유인 약취, 납치, 폭행을 동반한 납치 등 갖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모은 후 저항할 수 없게 하기 위해 다시 폭행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저항을 꺾을 수 없으면 살해, 유기하였고 순종적으로 만들어 길들이고 자신의 명령=옳다를 증명하기 위해 세뇌시켜 일을 시키는 도중에도 갖가지 이유를 만들어 매일 구타를 가했다. 잡혀온 피해자가 10세 이하의 아동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1984년 개금국민학교가 시설 내에 분교(통칭 개금분교)를 차리기는 했으나 일부 아동들만 뽑혀 통학했으며 정상적인 교과 과정은 커녕 시설과 박인근 원장을 찬양하는 교육만 받은데다 주의가 산만하면 교사와 총무계장이 가차없이 폭행을 가했다. 같은 시기에 야간중학교가 차려지긴 했으나 1985년경에 폐교됐고 개금분교와는 달리 미인가 교육기관이라 원생 명단이 없다.
1987년 기준으로 수용되었던 3,164명 중 남성은 2,811명, 여성은 353명이었고 어린이와 만 60세 이상 노인도 무려 543명으로 전체의 1/6*.[13]에 달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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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의 강제 노동 |
젊거나 나이 어린 여성, 그리고 일부 남성[14]에게는 구타 이외에도 성폭행이 더해졌으며 거의 모든 피해자들에게는 제대로 된 식사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복지원 내부에 식료품 공장도 있었으나 대부분 외부로 판매되었고 모두의 국가보조금과 작업 수당까지 원장에게 뺏겨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으며 신민당 실태조사단 1차 보고서에 따르면 일반 수용자들의 수당은 1일 3~5백원, 장애인들은 2백원, 요양원 입원자는 3일에 버스 토큰 1개씩이었다.
외부에 선전하기 위해 몇몇 적금통장이 만들어졌지만 복지원에서 나가려면 도망치거나 시체가 되는 방법밖에 없다시피했으니 피해자들이 그 돈을 받는 일은 없었으며 설령 탈출을 시도하려고 해도 경비원들에게 잡혀 두들겨맞았다.
정신요양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는데 원칙적으로 의사 2명의 진단과 경찰 입회 하에 입원해야 했으나 이들 중 70%가 변칙 입원된 일반인들이었다. 복지원에서도 악명높은 부랑인을 실장 또는 소대장으로 뽑아 통제하고 입원자 가족들에게 월 10~15만원을 받으면서도 치료라곤 1일 3~4회씩 신경안정제만 놔줘서 중독 상태에 놓인 피해자가 흔했다. #
피해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곤 몸을 뉘일 허술한 공동 숙소와 빈곤한 식사뿐이었는데 당연히 숙소 건설과 식사 준비 역시 모두 피해자들이 스스로 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질병 치료는 엄두도 낼 수 없었으며 지속되는 구타와 고된 작업으로 수많은 피해자들이 병으로 사망하였다.
이런 일이 무려 12년 동안 지속되면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원생의 수만 513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15] 여기다 일부 원생들의 시신은 인근 의과대학에 해부실습용으로 3백~5백만원에 팔려나갔다. 수천명의 원생 중 약 70%가 억울한 케이스였다. 가족이 있고 멀쩡한 직장이 있는 건강한 성인 남성이 밤늦게 퇴근하는 길에 잡혀가서 4일만에 '폐렴 및 합병증'으로 몸에는 수많은 타박상을 남긴 채 사망해서 나오는 식이었다.
1977년, 박형대 씨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 부산역에서 경찰을 만났습니다. 12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박형대/형제복지원 피해자 : "꼬마야 너 이리 와봐라. 예, 왜요? 그러니깐. 너 왜 부모는 어디 가고 혼자 오냐?"]
다니는 학교, 부모님 존재도 알렸는데 경찰은 그를 막무가내로 끌고 갔습니다. 도착한 곳이, 형제복지원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갇힌 그곳에서, 폭행, 강제 노역, 심지어 성폭력까지 이어졌습니다.
1986년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 1년 만에 탈출한 서상열 씨.
실상을 외부에 알리려 하자, 부산시 공무원들이 찾아와 진술서를 강요했습니다.
'사회에서 충실하게 생활한 사람은 형제복지원에 들어오지 않는다', 강제 입소를 부정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서상열/형제복지원 피해자 : "진짜 많이 맞았죠. 인간이,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 KBS 뉴스, "형제복지원, 최악의 인권유린"…35년 만의 진실 규명, '사과·보상' 어떻게?#
[박형대/형제복지원 피해자 : "꼬마야 너 이리 와봐라. 예, 왜요? 그러니깐. 너 왜 부모는 어디 가고 혼자 오냐?"]
다니는 학교, 부모님 존재도 알렸는데 경찰은 그를 막무가내로 끌고 갔습니다. 도착한 곳이, 형제복지원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갇힌 그곳에서, 폭행, 강제 노역, 심지어 성폭력까지 이어졌습니다.
1986년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 1년 만에 탈출한 서상열 씨.
실상을 외부에 알리려 하자, 부산시 공무원들이 찾아와 진술서를 강요했습니다.
'사회에서 충실하게 생활한 사람은 형제복지원에 들어오지 않는다', 강제 입소를 부정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서상열/형제복지원 피해자 : "진짜 많이 맞았죠. 인간이,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 KBS 뉴스, "형제복지원, 최악의 인권유린"…35년 만의 진실 규명, '사과·보상' 어떻게?#
가장 주목할 점은 이 사건이 한 개인의 부도덕 문제에 한정지을 것이 아니라 부산시 공직 사회가 공조했다는 것이다. 소위 소대장이라고 불리는 감독관 중 대장격인 왕소대장이라고 불렸던 이의 증언에 의하면 부산시, 부산시 사회복지과, 부산경찰 모두의 합작품이었다. 시설 관리를 전문지식이 없는 부산 북구청 주사보 1명이 맡았으며 암묵적으로 돈을 주고 받으면서 폭력, 비리에 방조하였고 납치도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원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이 원래 사는 곳을 알려주어도 "찾아 줄 테니 경찰차에 타라"고 하고 복지원으로 데려다 주었다고 한다. 후에 수사가 이루어지자 당시 김주호 당시 부산직할시장은 담당 검사에게 청탁 전화를 하고 보건사회부장관에게 원장이 바로 석방되도록 건의하는가 하면 문민정부 시절 법제처장을 지낸 송종의 부산지검 차장검사는 수사 철수를 지시하는 등[16] 부산시 공직사회가 전체적으로 공모한 문제였다.
여기에 더해 당시 부산시 의료 관계자들도 부검서류를 날조하거나 사망 원인을 고의로 날조하는 등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병리과 의사[17]가 아닌 산부인과 의사가 부검을 맡는 등 의료행정도 개판이었다. 내무부 훈령상 관할 지서/파출소장이 1주에 1회 순찰토록 했음에도 이행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현실에 나타난 지옥도로, 피해자들이 같은 부산시민인데도 사회의 그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4. 사법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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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형제복지원 강제노동 현장을 발견한 부산지검 울산지청 김용원 검사 |
1986년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의 김용원[18] 주임검사가 포수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현장을 발견하고 이를 사진으로 찍은 뒤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 형제복지원의 참상과 비리를 목격했다.
1987년 1월 17일에 원장 박인근을 비롯해 총무 김돈영, 사무장 주영운, 목장파견대장 성태은, 목장파견대 소대장 임채흠 등 5명이 각각 횡령, 특수감금죄와 외화관리법[19], 초지법[20], 건축법위반[21] 혐의로 울산남부경찰서에[22] 구속되었다. 구속 당시에도 박인근은 복지원 운영에 관여하는 한편 경찰관의 집이나 여관에서 수갑을 푼 채 목욕을 하거나 송 모 경사의 도움으로 병원에 가는 등 4월 10일부터 5월 16일까지 32회나 외출이 허락됐다.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자 송 경사는 해직됐다. 전국부랑인시설연합회도 1987년 2월에 구속 상태인 박인근을 회장으로 뽑았지만 여론의 반발로 이를 철회했다.
정작 전두환 정부에서는 이 사건을 빨리 덮어 버리고 싶어했는데 일단 전두환 본인이 강제수용 지시를 했던 터라 세부 사항을 알았건 몰랐건 명백히 책임 소재가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 이 사건이 일어난 1987년 3월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였고 시민단체의 활동이 싹트려고 했던 만큼 이러한 사건이 계속 일어날수록 반정부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 자명하고 정권에 득이 될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외압을 넣어 검찰은 박인근에 대해 고작 징역 15년과 벌금 6억 8,178만원을, 김돈영 등 공범들에게는 각각 3~7년밖에 구형하지 못하였고 이조차 줄어들어 1987년 6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원은 1심[23]에서 박인근에게 징역 10년과 벌금 6억 8,178만원을 선고하는 데 그쳤으며[24], 1987년 11월 12일 대구고등법원 항소심 재판[25]에서 주간감금행위를 무죄로 보고 징역 4년을 선고했다가, 1988년 3월 8일 1차 상고심[26]에서 파기환송됐다.
동년 7월 7일 대구고법은 1차 파기환송심[27]에서 박인근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으나, 2차 상고심[28]은 이를 번복했고, 1989년 3월 15일 대구고법 2차 파기환송심[29]에서는 벌금 없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하고, 7월 11일 대법원은 3차 상고심[30] 에서 김용원 검사 측의 상고를 기각했다.[31] 이에 따라 박인근은 출소하였고 6억여 원의 벌금도 재판을 거치면서 결국 없어졌다. 심지어 폭행, 살인, 시신유기, 시신암거래 등은 기소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형제복지원은 세월이 흘러 흔적도 없이 철거되었으며, 현장에서 증거수집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전두환은 박인근에 대해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2, #3 전두환이 형제복지원의 박원장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 대해 한 말이다. 이 평가 한 마디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의 뒷배를 책임진 권력이 드러난다. 형제복지원이 세워진 배경부터가 4공의 절정기인 1975년에 발효된 "내무부 훈령 410호"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노태우를 제외한 군사정권 전반에 배경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AP통신의 폭로로 전두환 정권이 형제복지원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한 사실이 드러나 의미가 없어졌다. 전두환은 1995년 구속 후 사형까지 선고받았다가 1997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선고 후 12월 특사 때 석방되었다.
31년 뒤인 2018년 11월 20일 문무일 검찰총장이 이 사건과 관련한 비상상고를 대법원에 요청하였다.# 다만 과거 판결을 바로잡는다고 해도 이미 내려진 무죄 효력은 뒤집지 못한다. 비상상고 제도가 재심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5. 사건 이후
부랑인 수용시설의 인권 침해 문제가 언론과 시민단체의 화두로 등장하자 내무부는 1987년 2월 16일 훈령 410호를 폐지하고 부랑인과 관련된 업무를 보건사회부에 맡기도록 했다. 부랑인 시설 운영 개선을 위해 입·퇴소절차 개선, 수용보호의 전문성 확보 및 직업보도 강화 등 복지서비스 제고 및 시설운영의 내실화에 관한 부랑인 선도시설 운영규정(1987. 4. 6.)을 제정(보건사회부 훈령 제523호)하였다.이에 따라 부산직할시는 박인근 대표 등 기존 이사진들을 공식적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에 관선 이사들을 파견하도록 한 뒤 기존 수용자들을 타 시설로 전원 조치토록 하는 한편 1988년경 재단명을 '재육원'으로 고쳤지만 실질적으로 해결된 게 별로 없었고 시설은 사실상 폐허 상태였다. 1991년에 박인근이 그 재단을 되찾고 일부 건물을 고쳐 '실로암의 집'이란 중증 장애인 요양시설을 세웠다. 1995년에 상당수 부지를 대왕건설에 팔고 2001년에는 실로암의 집을 기장군의 새 건물로 이전시켰다.
이에 따라 이 곳에는 주례 한일유앤아이아파트, 반도보라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기사 덕분에 형제복지원은 제대로 된 징벌은커녕 오히려 부지 매각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단지 공사 중 약 40~50여구의 유골이 쏟아졌지만 죄다 무연고 처리 후 납골시설들에 안치시키고 말았다. 400여구의 시신은 찾지도 못한 상태다. 시신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는 이미 들어선 아파트 단지 때문에라도 시신을 찾기 매우 힘들다.
부산직할시공원묘지관리소(현 영락공원 사업단) 매장처리부에 기재된 무연고 시신 현황 자료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사회문제화되고 이사장이 구속돼 관선체제로 전환된 1987년 이후에도 2년간이나 30여 명의 사망자가 추가로 발생했으며 이들은 모두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된 것으로 드러났다. #
한편 사건이 알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소인 형제복지원 울주 수용시설 건물 2동은 2014년 연합뉴스 보도에 의하면 다 쓰러져간 채로 남아 있었으며 노역이 진행됐던 나머지 주변 지역 중 청량면 일대 10필지 10,329m²는 2001년 울산광역시교육청 강남교육지원청에 팔리고#, 2003년 삼정리 784번지 27만 8,164m² 토지는 재단 이사 이XX 등에게 팔리다가 3년 후 이 이사의 해임으로 박인근의 첫째 사위에게 팔리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아파트 1,800여 가구와 초등학교가 자리잡았다.# 이 땅도 2016년 느헤미야 법인 청산 후 법원 공매 과정에서 13차례의 유찰 끝에 개인 4명에게 팔렸다가 2017년 울산 모 농협이 사옥 부지 확보를 위해 85억원에 사들였다. 이 과정의 뒷얘기가 2021년 부산일보 단독보도를 통해 알려졌고 울산적폐청산시민연대 측이 해당 지역농협을 울산북부경찰서에 고발했으며 그 해 10월 국정감사에서도 거론되었으나 경찰은 불송치 결정을 내렸으며 2022년 1월 울산지방검찰청도 검토 결과 재수사 요청을 하지 않는다고 경찰에 통보했다. #
이 사건의 피해자 중 상당수는 아직도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야기인즉슨 사건 이후 일부 원생들은 피해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해방 이후 재사회화도 엉망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가족 단위로 끌려온 피해자는 풀려난 뒤 같이 풀려난 후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아버지와 작은 누나를 정신병원에서야 찾을 수 있었다고 한종선 대표는 회술했으며 몇몇 피해자는 범죄의 덫에 빠져 전과자가 되기도 했다.
5.1. 2012년, 피해자 한종선의 국회 앞 1인 시위
형제복지원은 1987년에 실체가 폭로된 후 한동안 잊혀지다가 2012년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한종선이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 | |
<rowcolor=#fff> 강제수용되었을 당시(1984년)의 9살의 나이의 한종선[32] | 2012년 37세로 성장한 한종선이 국회 앞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33] | 한종선, 전규찬, 박래군 공저 <살아남은 아이>[34] |
인권단체를 비롯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건이었지만 2012년에 형제복지원 생존자인 한종선과 언론학자 전규찬 교수가 글과 그림으로 기록, 증언하고 인권운동가 박래군[35]과 공동저술하여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1987년 이후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한때 나는 개였고 소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 나 역시 아니 우리 가족 역시 당신들과 같은 가정이 있었던 일반 사람이었다. 사람에서 짐승처럼 되긴 쉽다. 그렇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온전히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말로는 쉽지만 사실은 너무나 힘이 든다. 죽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지금 힘들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려 한다.
-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5.2. 2020년, 피해자 최승우의 국회의사당역 고공농성
1982년 당시 중학생이었던 최승우는 4년 8개월간 형제복지원에 강제수용되었고 진상규명을 위해 2019년 11월 5일부터 24일간 단식투쟁을 하다가 실신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2020년 5월 29일에 20대 국회가 종료되면서 과거사법이 불투명해지자 최 씨는 5월 5일에 무기한 단식을 선언하고 국회의원 회관 지붕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였다. 사흘째 되던 날 미래통합당 김무성 의원의 중재로 중단되었으며 김 의원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과거사법)을 통과하겠다고 약속하였다.
2020년 5월 20일 열린 본회의에서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권위주의 정권 시대까지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이 사건을 진상규명할 길이 열렸다. 최 씨는 이 소식을 듣고 김무성 의원에게 감사의 인사로 큰절을 하였으며 행정안전위 간사로 과거사법을 논의했던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며 끌어안았다고 한다.
최승우 씨는 이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생존자다에도 출연했다. 여기서 밝히길 자신을 형제복지원에 수용되게 한 경찰들로 인해 깊은 트라우마를 겪었고, 이 때문에 경찰에게 비협조적으로 대응하며 전과가 39건에 이른다고 밝혔다.
6. 원장 박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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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 |
2021년 12월, 외신인 알자지라가 공개한 박인근 부부 사진(좌)과 원장 박인근(우) |
박인근은 직업군인 출신으로, 1948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4.19 혁명 당시 육군 모 부대 특무상사로 근무했다고 한다.[36] 1960년 부산 감만동에 형제육아원[37]을 설립/운영하면서 매년 20억 원에 달하는 국고를 지원받아[38][39] 횡령, 착복하여 고급 아파트나 콘도, 골프 회원권을 샀고 경남 울주군 청량면 삼정리에 있는 자신의 야산 27만여m²에 있는 개인 토지에 목장과 운전 교습소를 세운다며 원생들을 축사에 감금시키고 하루 10시간씩 강제 중노동을 시켰다. 이쯤 되면 나치 독일, 일본 제국, 중국과 다를 바 없는 짓 을 대한민국에서 자국민을 상대로 저지른 셈이다. 이를 바탕으로 1981년 국민포장 석류장, 1984년 국민훈장 동백장 등 온갖 수훈을 받고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까지 역임했으며 1982년에는 MBC에서 이 시설을 다룬 2시간짜리 대형드라마 <탄생(극본 심영식, 연출 이병훈)>이 방영되었는데 당시 박인근 역은 배우 전운이 맡았다.
6.1. 박인근의 변명
박인근은 이 사건에 대해 "양심적으로 시설운영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을 했는데도 이를 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뜻밖의 변을 당했다"는 주장을 했으며, 자신도 시대적인 상황으로 인해 국가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였다는 다소 말이 되지 않는 말도 했다. 또한 김용원 검사에 대해 자신을 형제복지원을 통해 불쌍한 원생들을 노예처럼 강제 노역시키는 것처럼 묘사했다며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였다.반성은 없고 당시의 부를 그리워하는
'형제복지원을 운영 하면서 가족 전체가 부랑인들과 시설에서 함께 고생하며 살아 왔는데 모략과 중상, 시기와 질투로 의욕상실이라는 위기를 맞기도…"
"전적으로 경찰의 허락과 도움을 받아 입소, 퇴소 절차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운영 등 모략과 중상을 받아 왔기에..."
2004년, 박인근이 한국기독신문과 교회복음신문에 인터뷰한 내용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감금당했고 폭력과 성폭력에 노출되었으며 강제노역과 비인간적인 대우로 26년이 지난 지금에도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며 삶의 버거움에 비틀거리고 있다. 그 때의 사건은 자신을 부정하는 기제로 작동했고 일상은 가난과 불안을 오가며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인근은 지금까지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거짓으로 왜곡하며 공공의 재산을 사적으로 이용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형제복지원 폐쇄 사건을 일부 언론 및 검사의 중상과 모략으로 치부하고 있고 사비를 털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과 봉사, 사랑으로 수용자들을 보살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외화, 엔화가 금고에서 쏟아질 정도로 가득했고, 33개의 필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여러 개의 콘도회원권, 골프회원권이 발견되었지만 모든 사실들을 부정하며 지금까지도 똑같은 방식으로 사회복지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박인근은 지금도 형제복지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83년도 완공된 형제복지원 수용소 사진을 〈실로암의 집〉 1층 거실에, 수용자들을 착취해 강제노역을 시켰던 사진을 2층 거실에 버젓이 걸어 놓은 걸 보면 반성은커녕 폭력으로 획득한 권력과 부를 그리워하는 듯하다.
- 인권오름, [26년, 형제복지원]<3> 87년 형제복지원, 아직도 건재하다 #
'형제복지원을 운영 하면서 가족 전체가 부랑인들과 시설에서 함께 고생하며 살아 왔는데 모략과 중상, 시기와 질투로 의욕상실이라는 위기를 맞기도…"
"전적으로 경찰의 허락과 도움을 받아 입소, 퇴소 절차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운영 등 모략과 중상을 받아 왔기에..."
2004년, 박인근이 한국기독신문과 교회복음신문에 인터뷰한 내용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감금당했고 폭력과 성폭력에 노출되었으며 강제노역과 비인간적인 대우로 26년이 지난 지금에도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며 삶의 버거움에 비틀거리고 있다. 그 때의 사건은 자신을 부정하는 기제로 작동했고 일상은 가난과 불안을 오가며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인근은 지금까지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거짓으로 왜곡하며 공공의 재산을 사적으로 이용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형제복지원 폐쇄 사건을 일부 언론 및 검사의 중상과 모략으로 치부하고 있고 사비를 털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과 봉사, 사랑으로 수용자들을 보살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외화, 엔화가 금고에서 쏟아질 정도로 가득했고, 33개의 필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여러 개의 콘도회원권, 골프회원권이 발견되었지만 모든 사실들을 부정하며 지금까지도 똑같은 방식으로 사회복지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박인근은 지금도 형제복지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83년도 완공된 형제복지원 수용소 사진을 〈실로암의 집〉 1층 거실에, 수용자들을 착취해 강제노역을 시켰던 사진을 2층 거실에 버젓이 걸어 놓은 걸 보면 반성은커녕 폭력으로 획득한 권력과 부를 그리워하는 듯하다.
- 인권오름, [26년, 형제복지원]<3> 87년 형제복지원, 아직도 건재하다 #
6.2. 21세기에도 건재했던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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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당시 박인근의 모습[40] |
출소한 박인근은 개신교 집사가 되었다가 재육원(구 형제복지원)을 되찾고 이름을 바꿔 가면서 사업을 확장했는데 1991년에는 중증장애요양원 '실로암의 집'을 차리며 재단명을 '욥의마을'로 변경했고 2002년에는 형제복지지원재단, 2014년에는 느헤미야 등으로 법인명을 세탁했다. 또한 사회복지법인대표자협의체의 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재단 측은 2001년에 '실로암의 집'을 기장군으로 옮기기 위해 주례동 부지를 팔고 2002년에는 사하구 장림동의 대형 레포츠센터, 2004년에는 괘법동 해수온천 건물을 각각 인수하여[41] 사업부별로 나눠 가면서 운영해 왔다.
셋째 아들 박천광은 "실로암의 집"[42]을 운영했다. 그의 독단적인 운영에 반발하는 이사들은 1명도 없었으며 특히 1990년부터 6번 이사를 지낸 이 모 씨는 2014년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자신은 서울에만 살며 1년에 몇번 정도만 부산으로 내려간다"고도 밝혔다.
부산광역시로부터 지속적인 지원마저 받으면서 재산과 재단을 불리고 끊임없이 위세를 이어 온 이들을 언론에선 일명 "복지 재벌" 이라고 일컬었다. 박씨 일가는 4·5공 군사정권에서 시작된 공권력이나 교계와의 유착이 매우 끈끈하여 허가 없이 실로암의 집 내부에 무허가 종교기관을 세워서 운영해 왔고 관련 공무원들을 강사로 초청하였다. 이에 공무원들은 부산시의 특별감사를 받았으나 경징계에 그쳤으며 이마저도 취소되었다고 한다. # 박인근 대표는 2001년 주례동 토지 매각 당시 대금 중 20억원을 부산저축은행에 입금하면서 김양 부회장과 인연을 맺었고 부산저축은행 등으로부터 끊임없이 거액을 빌렸는데 특히 2005년부터 4년간 재단이 그 저축은행으로부터 118억원을 불법대출한 사실이 국정감사에서 드러났다.
게다가 한국에만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2015년 3월 21일자와 <한겨레> '형제복지원' 3-4회 등에 따르면 1995년 6월 22일 호주의 대형 골프장을 운영하는 비상장법인 잡스타운 사를 인수하더니 부인 임 씨와 딸, 사위에게 차례로 대표를 맡기고 거기에서 스탭으로 고용했던 소수의 인원[43]조차 형제복지원 원생 부리듯 부린 것이 당시 스탭이었다가 쪽방촌에서 살던 어느 노인의 증언으로 밝혀졌으며 처가 및 사위는 현지 한인교회에서 목사로 신분을 세탁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골프장 자체가 어찌보면 한국에서의 일부 자산세탁 목적도 겸하고 있었던 듯하다.
2011년 부산저축은행 사태가 터지자 형제복지원 문제가 다시 수면에 떠올랐고 2012년 9월 18일에는 부산시가 재단 감사결과를 발표했는데 그 사실이 동년 10월 24일 KBS2 <추적 60분>에도 보도됐다.
2014년 4월에 이런 사실이 드러나자 동년 5월 박천광은 시 보조금 횡령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박인근은 뇌출혈로 쓰러진 상태라 3년 구형만 받았을 뿐 재판이 실시되지 않았다. 검찰은 재단과 유착한 공무원들을 기소할 방침이라고 전했고 경남·부산 지역에서 복지 재벌로 이름을 떨친 박인근 일당의 이같은 복지 사업의 운용자금은 2014년 5월 시사저널이 조사한 결과 99%가 국고지원금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으며 부산시는 "실로암의 집"을 법인 청산하려고 한다고 했지만 수십억대 금액을 지속적으로 차입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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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실로암의 집"의 모습 | 잠금장치가 있는 방의 모습 |
2013년 현재 형제복지지원재단
그렇다면 2013년 현재 형제복지지원재단이 운영하는 유일한 시설, 〈실로암의 집〉 모습은 어떠할까. 대부분의 거주인들이 70~80년대 수용시설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똑같은 스포츠형의 머리모양에 고무줄이 들어간 츄리닝을 입고 있었다. 또 장애가 경한 사람들만 식당에서 밥을 먹을 뿐, 장애가 심한 사람들은 냉면 그릇 같은 커다란 그릇에 밥과 반찬을 모두 넣은 채 각자의 방안에서 혼자 벽을 보고 식사하고 있었다. 자해를 한다는 이유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침대에 끈을 묶어 허리를 결박한 사람도 있었고 하루 종일 창밖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채광이 되지 않는 방안에서는 울부짖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고, 마당을 나와 걷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4층 건물에 1층만 거주인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었고 2층 프로그램실, 교실(순회교육), 의무실은 모두 잠겨 있었다. 3층은 교회로, 공적인 시설에 무단으로 들어와 있어 부산시에 의해 고발조치 됐다. 공공시설물에 종교시설이 들어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4층은 뭘 하는 곳인지 모른다고 한다. 그곳에서 십몇 년을 산 거주인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 안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한.....그곳의 주인들이었다. 그런데 이동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어디어디를 맘대로 못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라고 하지만 1층 법인 사무실 한 쪽 벽면에는 6-7대의 CCTV 화면 모니터가 박혀 있었다. 섬뜩했다. 옛날 형제복지원을 운영, 유지했던 방식과 똑같이 거주인들을 감시와 관리의 대상으로 취급했다는 방증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뿐만 아니었다. 식단 또한 딱 3가지 반찬에 먹을 것이 없었고, 어묵 반찬은 상했는지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부실한 식단 때문인지 거주인들 대부분은 비쩍 말라 있었고, 그들의 일상은 그저 무기력하게 초점 없는 쾡한 눈으로 허공을 맴도는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문을 열어놓고 있었지만 모든 거주인들의 방문에는 밖에 잠금장치가 걸려 있었고 침대 외에 개인 소지품이라고 볼 수 있는 물건은 단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지적, 자폐성 장애가 아닌 지체, 뇌병변장애가 있는 거주인 두 사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의사를 표현했다. “'나가서 살고 싶다!”'고.
- 인권오름, [26년, 형제복지원]<3> 87년 형제복지원, 아직도 건재하다 #
그렇다면 2013년 현재 형제복지지원재단이 운영하는 유일한 시설, 〈실로암의 집〉 모습은 어떠할까. 대부분의 거주인들이 70~80년대 수용시설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똑같은 스포츠형의 머리모양에 고무줄이 들어간 츄리닝을 입고 있었다. 또 장애가 경한 사람들만 식당에서 밥을 먹을 뿐, 장애가 심한 사람들은 냉면 그릇 같은 커다란 그릇에 밥과 반찬을 모두 넣은 채 각자의 방안에서 혼자 벽을 보고 식사하고 있었다. 자해를 한다는 이유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침대에 끈을 묶어 허리를 결박한 사람도 있었고 하루 종일 창밖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채광이 되지 않는 방안에서는 울부짖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고, 마당을 나와 걷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4층 건물에 1층만 거주인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었고 2층 프로그램실, 교실(순회교육), 의무실은 모두 잠겨 있었다. 3층은 교회로, 공적인 시설에 무단으로 들어와 있어 부산시에 의해 고발조치 됐다. 공공시설물에 종교시설이 들어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4층은 뭘 하는 곳인지 모른다고 한다. 그곳에서 십몇 년을 산 거주인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 안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한.....그곳의 주인들이었다. 그런데 이동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어디어디를 맘대로 못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라고 하지만 1층 법인 사무실 한 쪽 벽면에는 6-7대의 CCTV 화면 모니터가 박혀 있었다. 섬뜩했다. 옛날 형제복지원을 운영, 유지했던 방식과 똑같이 거주인들을 감시와 관리의 대상으로 취급했다는 방증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뿐만 아니었다. 식단 또한 딱 3가지 반찬에 먹을 것이 없었고, 어묵 반찬은 상했는지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부실한 식단 때문인지 거주인들 대부분은 비쩍 말라 있었고, 그들의 일상은 그저 무기력하게 초점 없는 쾡한 눈으로 허공을 맴도는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문을 열어놓고 있었지만 모든 거주인들의 방문에는 밖에 잠금장치가 걸려 있었고 침대 외에 개인 소지품이라고 볼 수 있는 물건은 단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지적, 자폐성 장애가 아닌 지체, 뇌병변장애가 있는 거주인 두 사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의사를 표현했다. “'나가서 살고 싶다!”'고.
- 인권오름, [26년, 형제복지원]<3> 87년 형제복지원, 아직도 건재하다 #
뉴스타파에서 박인근을 취재하려고 할 때 항변한, 그의 3남 박천광이 운영한 "실로암의 집"도 2013년 '인권오름'에서 조사한 결과 그다지 사정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박인근 본인은 2011년 4월 7일에 재단 대표이사 자리를 3남 박천광에게 넘기고 병환으로 인해 자택과 요양병원을 오가면서 칩거했다가 2016년 6월 27일에 전라남도의 모 요양병원에서 사망했다.
2014년에 박인근 일가는 재단을 서종범 밀성학원 이사장에게 팔았고#, 부산시에서 뒤늦게 법인 청산을 시도했다. 이에 재단 측이 법인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으나 2016년에 법원은 청산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빼돌릴 것은 다 빼돌리고 빈껍데기만 남은 상황이라 청산을 한다고 해도 국고 환수는 커녕 적자 청산이 될 상황이라고 하며 기존 실로암의 집 이용자들은 타 시설로 보내졌다. #1, #2
박인근 사망 후, 막내딸은 사위와 함께 정신요양원을 운영하고 형제복지원 시절 총무였던 차남은 술집을 운영하는 등 사실상 건재한 모습을 보였다. 2019년 2월 7일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해당 사건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육아원 시절 인권유린 행위까지 폭로되었다. 취재진들은 박인근 전 원장의 차남을 만났으나 그는 아버지에 대해 모른다며 당시의 일을 싹 다 부정했다.
- 26년, 형제복지원 <3> 87년 형제복지원, 아직도 건재하다 - 인권오름
- 부산시와 형제 재단의 수상한 동거 - 월간조선
- 형제복지원 박인근 일가 부활한다 - 시사저널
- 박인근 일가 복지 재벌로 떵떵거리고 산다 - 시사저널
7. 검찰의 비상상고
2018년 4월 11일, 법무부 과거사위원회 및 대검찰청 진상조사단은 법무부는 이 사건에 대해 재조사를 하기로 했다. #2018년 9월 13일, 대검찰청 산하 검찰개혁위원회[44]는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권고에 따라 재수사가 진행 중인 형제복지원 사건을 비상상고하라고 문무일 검찰총장에게 권고했다. #
2018년 11월 20일, 검찰은 비상상고(非常上告)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문무일 검찰총장은 대법원에 이 사건에 대한 비상상고를 요청하였다. # 비상상고란 판결에 중대한 법령위반이 있는 경우 검찰총장이 대법원에 그 법령위반을 이유로 판결의 변경을 구하는 것이다. 대법원은 비상상고 요청을 받으면 적법요건을 확인한 후에 요청을 수용해 사건을 다시 심리하거나 기각할 수 있다. 일사부재리 원칙상 박인근에 대한 무죄판결을 유죄판결로 바꿀 수는 없지만 판결의 이유에서 박인근의 죄상과 이에 면죄부를 발급한 법원의 잘못을 선언할 수 있기 때문에 대법원의 이름으로 역사의 심판을 내릴 수는 있는 것이다. 형제복지원 특별법이 통과된다면 국가나 박인근의 유족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의 근거가 될 수 있다. #
그러나 2021년 3월 11일에 대법원은 비상상고를 기각하면서 무죄 판결을 유지했다. 재판부 측은 박인근이 내무부 훈령에 근거해 수용소를 운영했다는 점으로 보아 형법 20조에 의거 특수감금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피해자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당했다는 점으로 보아 국가 차원의 책임을 인정했다.(2018오2 및 2019오1, 법률신문 기사)
8. 법원의 국가 손해배상 책임 인정
이 사건과 관련한 국가 손해배상 소송이 여러건이 진행되었다.- 사건번호: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가합596894
- 재판부: 서울중앙지법 민사29부(한정석 부장판사)
- 사건번호: 서울고등법원 2024나2004450
- 재판부: 서울고등법원 제4민사부
- 사건번호: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가합1402,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가합563146
- 재판부: 서울중앙지법 민사14부(서보민 부장판사)
- 1년당 약 8천만 원을 기준으로 재판부는 대한민국이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두 번째로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다. #
서울뿐 아니라 부산에서도 이와 별도로 진행 중인 재판이 있다.
- 사건번호: 부산지방법원 2022가합48062
- 재판부: 부산지법 민사11부(전우석 부장판사)
- 2024년 2월 7일, 부산에서도 국가와 지자체가 배상해야 한다고 법원이 판결했다. #
- 사건번호: 부산지방법원 2024가단323487
- 재판부: 부산지법 민사7단독(김유신 판사)
- 2025년 1월 22일에도 국가의 손배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다. #
9. 미디어 자료
9.1. 영화 '종점 손님들'
종점 손님들(1981) - 형제복지원 홍보영화 |
1981년에 국립영화제작소가 제작한 형제복지원 홍보 영화다. 보면 알겠지만 거의 주체사상 선전 영화와 그닥 다르지 않은 수준이다.
9.2. 뉴스타파M 1회
|
뉴스타파 취재 당시 인터뷰 |
2013년 3월 6일, 뉴스타파M 1회에서 이 사건의 피해자인 한종선 및 그 가족을 인터뷰하였는데 한종선은 9살이었던 1984년에 친누나와 거리에서 강제 납치되어 입소했고 2년 후 아버지까지 강제 입소되어 재회했다고 한다. 본인을 포함하여 아버지, 누나까지 일가족이 모두 형제복지원의 피해자인 이 가족의 증언을 통해 이 사건을 다루었다. 당시의 처참한 경험을 언론 기사에서도 일부 소개하고 있다. #1, #2
9.3. MBC 시사매거진 2580 876회
2013년 11월 3일에 방송되었다.9.4. 한겨레 《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
한겨레에서 2014년에 제작한 기획기사.- 제1회
- 제2회
- 제3회
9.5. SBS 그것이 알고싶다 932, 977회
2014년 3월 22일(#932)에 '홀로코스트, 그리고 27년 - 형제복지원의 진실'이란 부제로 방영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2014년 신안 염전 노예 사건과 더불어 조명받았다.[45]이후 2015년 3월 21일(#977)에 '형제복지원 다시 1년,, 검은배후는 누구인가'라는 부제로 취재 1년 후의 상황을 취재한 방영분이 방송되었다.
9.6.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184회
2019년 2월 7일 방송되었다. 다만 현재 영상은 비공개 상태이다.9.7.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 74회
2019년 12월 9일에 방송되었다.9.8. 부산일보 《살아남은 형제들》
부산일보에서 2020년에 제작한 '살아남은 형제들' 사이트와 영상자료.- '살아남은 형제들' 홈페이지 - 이 사이트에는 피해자들의 증언과 형제복지원 측 자료까지 총망라돼 있다.
- 형제복지원 '절규의 증언' - 영상구술사 프로젝트
9.9. tvN 알아두면 쓸데있는 범죄 잡학사전 1회
2021년 7월 4일에 방송되었다.9.10.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회
2021년 10월 21일 방송되었다.9.11. MBC PD수첩 1348회
2022년 10월 4일 방송되었다.9.12. JTBC 아무도 몰랐던, 비하인드 4회
2025년 7월 22일 방송되었다. 부산 형제복지원 소송을 위해 피해자 아들을 찾아나는 변호사의 이야기가 나온다.9.13. Netflix 나는 생존자다 1,2화
2025년 8월 15일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나는 생존자다 1화와 2화에서 다루고 있다.10. 관련 자료
10.1. 형제복지원 사건 토론회 자료집
2013년 3월 22일에 열린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 및 해결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의 자료집. 이 사건에 대한 기억·내용 및 관련 범죄자들이 건재한 현황, 사건과 국가책임, 역사·국제적 유사 사례까지 망라되어 있다.10.2.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오름》 문헌
2013년 작성된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오름》 문헌이다.- [26년, 형제복지원]<1> 전두환과 형제복지원의 커넥션
- [26년, 형제복지원]<2> 소리 없는 것들의 소리
- [26년, 형제복지원]<3> 87년 형제복지원, 아직도 건재하다
- [26년, 형제복지원]<4> 1975년 내무부 훈령 제410호를 보면 형제복지원이 보인다
10.3. 진실화해위원회의 인권침해 사건 조사 보고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2023년에 발행한 보고서.11. 외신 언론보도
- AP finds South Korea covered up mass abuse, killing of ‘vagrants’, CBS4, 2016-04-19
- "형제복지원 사건, 알려진 것보다 더 잔혹하고 광범위…한국 정부가 조직적으로 은폐" AP통신, 뉴시스, 2016-04-20
2021년, 외신인 아랍계 알자지라와 영국의 데일리 메일에서 박인근의 후손들이 호주에 골프장 및 리조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하면서 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기도 하였다.
- Secrets of South Korea’s house of horrors hidden in Australia, Al Jazeera, 2021-12-10
- Extraordinary story of how the wealthy family of sadistic man behind world's 'real life Squid Game' has been found living in AUSTRALIA, Daily Mail, 2021-12-13
12. 대중 매체에서
- 라이프 온 마스 - 2018년에 방영된 OCN의 드라마. 1988년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의 12회에서 '행복복지원'이라는 곳이 등장하는데 88올림픽으로 인하여 정화활동을 했다는 멘트가 등장한다. 이 사건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동네변호사 조들호2: 죄와 벌 - 2019년에 방영된 KBS 2TV 드라마. 이 사건이 모티브로 사용되었다.
- 은희 - 2020년에는 박유리 작가가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팩션 소설.
- 오징어 게임 -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작중 게임이 열리는 섬의 분위기를 해당 사건을 모티브로 채용했다고 한다.
- 블라인드 - 2022년에 방영된 tvN 드라마. 드라마의 중심 사건이 되는 희망복지원 사건은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주요 모티브로 하였다. 사건의 경위와 세부적인 전개, 당시 관련자들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것까지도 대부분 일치한다. 문제는 지금도 사람들 관심이 없는 틈을 타서 부산 형제복지원처럼 불법감금 및 학대, 노동 착취가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 모범택시 2 - 2023년에 방영된 SBS 드라마. 15-16회의 에피소드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복지원은 '형제자매복지원'으로 나온다.
- 휴먼버그대학교 - 일본의 영상툰 컨텐츠. 명확하게 한국의 형제복지원 사건으로 소개되었으며, 일본어 원판으로 업로드된 후 2024년 6월 4일자 한국어 더빙판으로도 제작되어 업로드됐다.
13. 해외 사례
- 일본에서도 1946년~1949년에 일본판 형제복지원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오카다 갱생관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도 열악한 환경의 부랑자 수용시설에서 입소자들에게 일상적으로 폭행과 인권 유린이 자행되어 거의 학살 수준의 사망자가 나오고[46] 시설 책임자가 교묘하게 진실을 은폐하고 정부 보조금을 유용했다는 점에서 형제복지원과 유사하다.[47]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 2014년 7월에는 멕시코 서부 미초아칸 주 아동 복지시설 '대가족의 집'에서 생활하던 600여 명(어린이 492명 포함)이 썩은 음식을 먹고 쥐가 돌아다니는 더러운 방에서 생활하고 거리에서 구걸을 강요받으면서 폭행·마약 복용·성폭행까지 당했던 사실이 밝혀진 멕시코판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졌다. 이 시설이 40년 동안 멕시코에서 대표적인 복지시설로 손꼽혀 왔던 점[48], 설립자가 고위층과 유착한 점[49], 멀쩡한 집의 아이를 납치해 수용했다는 것, 설립자 본인도 범죄에 가담했다는 의혹이 있다는 것[50]도 이 사건과 유사하다. 이후 설립자이자 주인이던 로자 베르두스코(Rosa Verduzco, 1934~2018)[51]는 멕시코 법원에 납치, 인신매매, 조직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치매를 앓고 있다는 이유로 기소가 면제되었다고 한다. 결국 그녀는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르지 않은 채 실체가 발각된 지 4년도 안 된 2018년 6월 3일 향년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출처]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시기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고아원[53]들도 정부가 직접 학살을 지시하지는 않았으나 피해자들의 양산을 조장하고 수용시설 점검도 아예 하지 않아 참혹한 환경 속에서 대량학살 수준 인명피해가 나왔다는 점에서 형제복지원과 비슷하다. 자세한 사항은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 문서 참조.
14. 여담
- 이 사건이 발각된 시기와 완전히 똑같은 시기에 대전 성지원(현 자강의집)[54]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1987년 2월 10일 현장 조사를 한 야당(신한민주당) 의원들이 오히려 성지원에서 사주한 원생들에게 폭행당할 정도였다. 이 사건은 형제복지원보다 더 솜방망이 처벌로 끝났고 운영재단인 천성원은 1998년에 양지마을 사건을 일으켰다. 그 사건은 규모만 축소되었지 이 사건과 완전히 똑같은 일이 민주화 이후[55]에도 계속된 사건이다. 양지마을은 사건 이후에도 '금이성 마을'로 교묘히 명칭을 바꾸어 아직도 군림하고 있다.[56] 그나마 성지원 사건은 2024년 9월 서울시립갱생원(현 시립은평의마을), 대구시립희망원, 경기 성혜원 등과 함께 진실화해위에서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졌다. # 당시 전두환의 1986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을 위한 '사회 정화' 목적으로 이런 유괴 및 학대에 동참한 사회복지시설은 한 둘이 아니었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와 동부여자기술원, 부산 덕성원, 성람재단, 경기여자기술학원에서도 국민을 마구잡이로 납치해서 잡아 가두고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으며 전두환 이전에도 선감학원, 대한청소년개척단 등이 존재했다.
- 박인근 대표는 2008년부터 2년간 경남 김해시의 대안학교 신영중/고등학교와 사회복지시설 샘터학교를 운영했던 사회복지법인 신양원의 이사장을 맡았고 장녀에게 이사장직을 넘겼다. # 2012~13년 박인근 일당의 근황이 다시금 언론의 주목을 받아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이 학교의 비리 문제가 터지면서부터였고 그 학교는 2013년에 문을 닫았다.
- 2012년에는 형제복지원 횡령 등의 비리 사건에 대해 일부 복지법인 대표이사들이 부산시, 시의회를 대상으로 소명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 2019년 11월 9일 형제복지원이 돈벌이를 위해 해외 입양아 '공급책' 역할을 했다는 AP통신 보도가 나왔다.
- 2019년 11월 29일엔 과거사법 피해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과거사법 처리를 위한 시위를 벌였으나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이들이 더불어민주당 의원들과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뭔 쇼를 하냐는 비아냥과 비난을 퍼붓는 모습을 보였다. #
- 2020년 7월에는 부산광역시 산하에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추진위원회'가 설치됐다.
- 2021년 3월 19일에 부산광역시는 소유주의 동의를 받아 구 실로암의 집 안에 보관됐던 형제복지원 관련 기록물들을 이관하기 시작했다. 9월 14일에는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과 형제복지원대책위도 자료 900여건을 진실화해위에 전달했다.
- 2021년 5월 20일,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소속 피해자 13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벌였다.
- 2021년 5월 27일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기가 결성되자 이 사건도 조사 대상에 포함됐고 8월 31일 부산시인권위원회도 박형준 부산시장에게 이 사건 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지원체계 강화를 권고했다. 2022년 8월 24일 진실화해위는 이 사건이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하여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 당시 부산에는 밤 시간대에 애들이 밖에 돌아다니면 잡아간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이미 퍼져 있어 좀 조심해야 한다고 애 키우는 가정에 부모가 어린 애들한테 야간 통행금지[57] 비슷한 언질을 전달하였으며 잡아가는 차량이 선도차라고 적혀 있는 차량인지도 시민들이 꽤 알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 가장 큰 문제가 잡혀가면 파출소 같은데서 약간의 소란을 피우던 취객처럼 꾸중을 듣는 줄 알았지 경찰, 공무원들이 아이를 납치유괴한 후 그대로 지옥행일 줄은 상상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서산개척단도 이런 부분이 국민들(대의민주주의 유권자)에게 문제라고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의 한 연구에서 지적하였다. #
- 이 사건 피해자 중에서는 선감학원에 끌려갔다가 나온 뒤 형제복지원으로 다시 잡혀갔던 사례도 있다. 삼청교육대에서 끌려갔다가 나온 뒤 형제복지원으로 다시 잡혀갔던 사례[58]도 있다.
15. 외부 링크
- 형제복지원tv - 생존자들이 모여 만든 유튜브 채널. 당시 상황과 증언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16. 관련 문서
- 전두환 - 해당 사건의 수사를 대통령 권한으로 방해했다.
- 부산 덕성원 사건 - 같은 부산 지역의 아동 보호소로, 형제복지원에서 전원된 원생들이 상당수 있었다.
- 양지마을 사건
- 소쩍새 마을 사건
- 원주 사랑의 집 사건
- 홍천 실로암 연못의 집 사건
- 선감학원
- 대한청소년개척단
- 삼청교육대
- 광주 인화학교 사건
- 장항 수심원 사건
- 대구 희망원 사건
- 경기여자기술학원
- T4 작전
- 국가 폭력
- 성람재단 복지시설 사건
- 아우슈비츠 - 부산 형제복지원과 크게 다를 게 없었지만, 이 쪽은 731 부대가 좀 더 가깝다.
17. 둘러보기
대한민국의 국가폭력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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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C0000,#7C0000><colcolor=#fff> A: 납치, C: 강제수용, D: 군대 관련, E: 교육 관련, F: 누명, L: 노동 관련, M: 민간인 학살, R: 폭동적 시위진압, P: 정치탄압, S: 검열, T: 고문, H: 대중문화 관련 | |
※ 여러 시대에 걸친 경우 시작 시점이 기준. ※ 3공화국기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시기를 포함. | }}}}}}}}} |
[1] 현재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주례한일유앤아이아파트, 주례센텀아파트, 주양초등학교, 반도보라아파트, LG신주례2단지아파트 일대[2] 1975년 내무부 훈령으로 확대 개편된 것이지 전신인 '형제육아원'은 이미 제3공화국 초기부터 있었다.[3] 내무부 훈령은 강제 수용의 최소한의 법적 근거를 만든 것일 뿐, 그 전부터 무력에 의한 납치와 구금이 자행되었으며 이 훈령도 당연히 국민 기본권을 침해한 불법이다.[4]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 문서 참고.[5] 이 때문에 당시 1988 서울 패럴림픽에 대해 장애인 단체에서 냉소적인 시선이 많았다. 패럴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직위원회 사무국을 의료보험관리공단 청사에 마련했을 때 장애인 단체 사이에서 "장애자올림픽 개최할 돈으로 장애인에 대한 복지에 써라. 우리는 수십 년 노력해도 사무실 한 칸 얻기도 힘든데 이런 데 낭비를 하느냐"는 식의 질타가 많이 쏟아져 나왔을 정도로 분위기가 꽤 험악했다는 에피소드가 나올 정도.[6] 군대, 갱단, 민병대, 마약 카르텔 상관없이[7] 다만 박인근 원장은 육군 상사 출신의 전직 군인이긴 했고, 이것이 형제복지원 학살 구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8] 지방자치제가 1991년에야 부활할 정도로 부산시정도 중앙 정부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었기에 정부에서 직접적으로 학살을 지원, 조력해줬다고 봐도 무방하다.[9] 그나마 외국에서 유사한 사례라 할 수 있는 곳은 옛 칠레의 콜로니아가 있지만, 행적은 형제복지원보다는 아가동산과 더 유사하다.[10] 그래서인지 시설 안에는 '새마음교회'란 종교 시설이 있었다.[11] 현재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백양대로 372[12] 노역자들 중 정치범도 포함되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 일부 노역자들이 할당량 채우기에 혈안이 된 관계자들에게 잡혀간 점, 피해 보상이 제대로 안 되었다는 점은 삼청교육대, 주 납치 대상이 어린이었다는 점을 보면 선감학원과 유사하다. 특히 5공 시절에는 이 3개의 시설이 동시대에 운영 중이었다.[13] 당시 한국의 인구중 60세 이상 인구의 비중은 5% 미만 이였다[14] 남녀동이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성 성폭력 피해자는 절대 다수가 직원에 의한 것이다. 남성 피해자는 직원과 기존 수감인원이 모두 포함된다.[15] 이것도 박인근의 주장이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16] "미친 놈,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런 수사를 하느냐" - 브레이크 없는 벤츠 (1993, 예하)[17] 병리과 의사가 법의학자가 된다.[18] 부산항 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 윤석열 정부에서 임명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룸싸롱에서 경찰관 폭행, 위안부 관련 망언, 12.3 비상계엄 옹호 및 헌법재판소 파괴 선동 등의 과격한 행보를 보이며 평판이 심하게 추락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19] 원장실의 대형금고를 산소 용접기를 동원하여 열어 보니 각종 예금증서들과 달러화, 엔화 등이 쏟아져나왔다.[20] 초지였는데 정식으로 초지훼손허가가 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21] 동물들을 위한 축사를 수용자들의 숙소로 용도변경[22] 당시 울산에는 구치소가 없었다.[23] 사건번호 87고합33[24] 당시 박인근의 변호는 전 대법관 전상석과 이재환이 맡았으며 무엇보다 이 시기는 6월 항쟁이 절정에 달하는 과정에 있던 시기랑 맞물려 있다. 자연스럽게 관심을 덜 가질 수밖에 없었다.[25] 사건번호 87노1048[26] 사건번호 87도2671[27] 사건번호 88노144[28] 사건번호 88도1580[29] 사건번호 88노593[30] 사건번호 89도698[31] 상고심 당시 대법관 중에는 훗날 박근혜 정부의 초대 총리 후보로 거론됐던 김용준이 있었으며 주범 박인근에게 2년 6개월의 형을 확정한 부분에 대해서는 김용원 변호사는 엉터리 전제 하에서 내려진 판결이라고 자신의 저서에서 비판했다.[32] 위에 사진에서 봤듯이 강제수용되었을 때 머그샷처럼 찍은 것이며 얼굴 밑의 번호는 '수용된 연도(1984년)-수용된 달(10월)-수용된 사람의 번호'(3618번째)를 뜻한다.[33] 국제신문[34] 2012, 문주출판사/2013, 이리(도서출판 리젬)[35] 민주화 운동가 박래전 열사의 형.[36] 경향신문 1991년 3월 12일자.[37] 1971년부터는 형제원, 1979년에는 형제복지원으로 각각 변경했다.[38] 운영자금 명목으로 1985년에는 18억 원, 이듬해에는 21억 원을 국가 및 부산시에서 지원받았다 - 브레이크 없는 벤츠 (1993, 예하)[39] 1980년대를 기준으로 놓으면 2023년 환율로 연간 80억 원 가량을 지원받은 셈이다.[40] 시사매거진 원본 기사[41] 단 그 중 'ㅂ'스포츠센터는 2011년에 건물 소유권이 넘어가서 형제복지지원재단 측과 더 이상 관련이 없다는 얘기가 있다.[42] 기장군 정관면 곰내재 부근에 있으며 약 400m 앞에 형제복지지원재단 정류장이 있다. 하지만 이 정류장을 지나는 버스는 73번뿐인데 이 노선은 배차간격이 60~75분이다. 더 자주 오는 다른 노선을 이용하려고 해도 곰내터널입구까지 2.4km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탈출을 감행하려고 하더라도 탈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으며 2016년 재단 청산으로 문을 닫아 폐건물이 됐다. 심지어 2002년 8월에는 이곳에서 호우로 인한 산사태가 발생하여 원생 4명이 매몰되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때 박인근이 "내가 책임질 문제냐고, 내가 죽였냐!!!"라고 고함을 질렀다. 참고로 위키백과에도 해당 사건을 다룬 문서가 있다.[43] 한국인이었는데 그것도 교민이 아니라 한국에서 데려온 직원이었다. 현지인이나 교민을 팼다가는 당연히 문제가 생기므로 영어를 못 해 현지인에게 도움을 청하기 힘든 순수 한국인들만 데려와 부려먹었다. 이 방식은 2018년에도 어떤 작자가 벤치마킹했음이 밝혀졌다.[44] 위원장은 송두환 전 헌법재판관이다.[45] 두 사건의 공통점은 장애인, 노숙자 등을 납치해 강제 노역을 시켰다는 것과 지역 사회와의 봐주기식 유착이 있었다는 것이다.[46] 3년간 사망자가 무려 76명이다.[47] 당시 오카다 갱생관의 관장이 워낙 교묘하게 은폐공작을 벌여서 지역 사회에서는 '모범 시설'로 칭송이 자자했으나 마이니치신문 기자 오오모리 미노루와 코니시 켄키치가 목숨을 걸고 갱생관에 잠입 취재한 내용이 보도되면서 진상이 밝혀졌다.[48] 베르두스코는 부유층 집안의 딸로써 1947년 이 시설을 설립했다고 하며 실체가 밝혀지기 전까지 '마마 로자(Mama Rosa)'로 불려 왔다.[49] 그녀는 기업, NGO, 멕시코 정부로부터 백만 달러의 기부금을 받아 왔으며 늦어도 1985년부터 그녀에 실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고 하지만 모두 불기소 처분되었다. 심지어 그녀가 체포되자 25명의 작가, 정치인, 지식인으로 구성된 그룹이 그녀가 누명을 썼다는 내용의 공개 서한을 발표하거나 비센테 폭스 전 멕시코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그녀를 옹호하는 등 뭐가 수상한 냄새가 나는 모습을 보였다.[50] 베르두스코는 아이들에 대한 성적 학대를 인지하면서도 묵인한 것은 애교였고 어린이들에 대한 성적 학대를 지시한 것을 넘어 본인도 소녀에 대한 성적 학대에 가담했다고 한다.[51] 본인은 의도적으로 시설을 열악하게 만든 것은 아니고 나이가 들면서 시설 관리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고 주장했지만 첫 기소될 당시 베르두스코의 나이는 늙지는 않은 나이인 51세였다.[출처] SBS, 연합뉴스, EBS 뉴스, BBC 기사 1, BBC 기사 2, 멕시코 언론 기사 1, 멕시코 언론 기사 2, 멕시코 언론 기사 3[53]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 특성상 저 고아원들은 모두 국영이었다.[54] 운영 주체는 사회복지법인 천성원이며 법인 설립자는 노재중. 500명을 수용했는데 1984년부터 1987년까지 단 3년 동안 121명이 죽어나간 곳이었다. 물론 수용되었다는 부랑자들은 절대 다수가 억울하게 검거, 납치된 일반인들이었다.[55] 그것도 국민의 정부 극초기까지.[56] 공식적으로는 이름을 바꾼 뒤 2003년경 금이성마을을 포함한 몇 개의 시설을 묶어 별도의 사회복지법인으로 독립시켰지만 독립한 사회복지 법인의 이사장이 노재중의 후처이며 금이성마을 직원들도 양지마을 사건 당시의 그 직원들이라고 한다.[57] 공식적으로는 1982년 극초반 해제되었다.[58] 이 피해자는 부마민주항쟁에 참여했다.[59] 문서 상단에 언급된 2020년 국회의사당에서 고공농성을 했던 최승우 씨로 넷플릭스 '나는 생존자다'에서 해당 내용을 증언했다.[60] 학교에서 급식으로 받은 빵이었다고 한다.[61] 당연히 최씨는 절도 혐의를 부정하였으나 경찰의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하였다고 밝혔으며 지금도 경찰제복만 보면 트라우마가 발작하고 경찰과 시비가 붙어 전과도 여러차례 받았을 정도로 정상적인 생활을 보내지 못하는 등 인생이 망가졌다.[62]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입소 초반에는 동성 성폭행 피해까지 입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