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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23:57:25

대마초 파동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상세3. 원인4. 영향5. 여담

1. 개요

大麻草 波動

197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대마초 흡연 혐의로 다수의 연예인이 체포된 사건.

2. 상세

1975년 12월 4일 경향일보에서 이장희, 윤형주, 이종용 이 3명의 가수가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었다고 보도된 것을 시작으로 이틀 뒤에는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신중현과 가수 김추자도 구속되고 이수미, 김세환, 김정호, 장현, 정훈희, 임창제, 임희숙 등 다수의 연예인들이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거나 출연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전까지 관련 규제 법안이 없는 상태였다가 1976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은 대마초 흡연은 망국적 행위이며 대마초 흡연자에 대해서 현행법상 최고형을 적용하여 엄벌하라고 검경에 지시를 내렸고 동년 4월에는 대마관리법[1]을 제정하여 대마초 흡연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근거[2]를 만들었다.

어쨌거나 1970년대 이후로 히피 문화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많은 예술인들이 대마초를 해피 스모우크(happy smoke)라 부르면서 피웠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에서 예고 없이 대마초 단속을 시작하여 대마초 흡연 혐의를 받는 연예인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76년까지 단속이 이뤄져 코미디언 이상해, 이상한, 배우 정미하, 영화감독 이장호도 체포되었는데 이렇게 붙잡힌 연예인의 수만 137명에 달했다.

1977년에는 조용필도 체포되어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구타를 비롯한 고문을 당했는데 채혈검사에서 음성 판정을 받아 풀려났지만[3] 신중현[4]과 함께 10.26 사건이 터질 때까지 출연 정지를 당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유신 체제가 종식되고 나서도 1980년 보컬 그룹 사랑과 평화와 국악인 5명이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됐고 1983년에는 연예인 17명이 대마초 흡연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3. 원인

대마초 파동이 일어난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유신 정권의 사회 경직화로 인해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과 같은 보수정책의 일환이었다는 평이 있는가 하면 대마초 단속을 시작한 1975년이 유신헌법 신임 여부에 대한 국민 투표와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들의 사형 집행, 긴급조치 9호 발동 등이 있었던 해라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연예계의 추문으로 바꾸려 한 조치였다는 시각도 있다.
1973년에 터진 석유 파동으로 인한 물가 폭등과 같은 경제 불만을 덮으려고 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에 이뤄진 전세계적인 마약 규제 관련한 이런 충격파가 전 세계적으로 흔했다는 점에서, 중독성 약물 금지즉, 마약 금지라는 시대적 조류의 충격파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
기본적으로 20세기 초반까지 전 세계가 을 제외한 어떤 약물도 법적 금지조치가 거의 없었다.[5]
즉, 코카인 헤로인 필로폰 대마초 등 술을 제외한 어떤 물질도 전세계적인 금지조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코카인은 코카콜라나 와인등에 사용되었고, 헤로인은 아동용 감기약에도 사용되었고, 필로폰은 일제가 노동자들에게 사용하거나 군인들에게 복용하게 하는등의 인권유린이 흔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이후 UN이 만들어지면서, 각종 마약을 금지하는 협의를 전세계적으로 열게되는데, 이때부터 마약이 차차 금지되었다. 그외에도 술, 담배등의 점진적인 규제강화호 21세기 이후로 술 담배 사용도 많이 줄어들게 된다.

20세기 중반에 미국 주도로 UN에서 각종 마약을 규제하기 시작했지만, 당시 후진국이었던 나라까지 그런 규제가 흘러가들어가는데는 시차가 있었다. 사실 한국에선 각종 마약이 법적으론 불법이었지만, 당연히 양귀비나 대마초도 그때까지 별 규제가 없었고 단속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상 사문화된 법조항이었다. 그런 이유로 시골에서 특히 양귀비같은것이 재배되어서 관절아픈 어르신이 몸아플때 한대씩 피는것이 흔했다. 양귀비는 아편과 헤로인을 만들수있는 21세기 시점에선 무서운 식물이지만, 거의 20세기 후반까지도 민간에선 가끔 재배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유럽의 68혁명이나, 미국의 히피문화에서 마약중 유독 대마초와 LSD를 많이 애용하는 문화가 널리 퍼졌다.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도덕적 방종으로 폄하되기도하는 이런 문화는 전 세계적으로 퍼지게된다. 당시 미국에서도 대마초, LSD에 대한 대대적인 규제가 들어가게 되는데, 가장 핵심적 이유가 당시 반전운동과 진보에 대한 탄압으로 해석하는 경우도있고, 반대로 모든 마약중에서 어마어마한 인기와 사용자를 가진 마약이므로 강경한 규제가 당연했다는 반응도 있다.

사실 마약천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도 특정 마약이 인구의 1%가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술 담배의 경우는 너무 나도 대중적으로 인기 많은 약물이어서 인구의 50%이상이 사용하는 경우도 흔해서, 술을 규제하는 금주법이 역사가 길어도 술을 완전히 규제하기가 어려웠고, 가장 처절한 실패가 20세기 초반 미국 캐나다의 금주법이다.
놀랍게도 21세기 대마초 합법화되는국가들에서도 대마초 사용자가 인구의 몇십퍼센트가 될정도로 일반 마약의 기준과는 아주 구별된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인기가 높은 마약이다. 술 담배급 즉, 금주법이 실패하거나, 대마초가 합법화 되는것이 바로 이 정도의 많은 인구가 사용하는 인기마약이기때문에 정치적 발언력이 큰 마약이기때문이다.

대마초보다 훨씬 약성이 떨어지는 까트의 경우만해도 전세계적으로 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마약이었으나, 특정 국가에서 유독 인기가 좋아서 그 나라 사회를 흔들어버린 수준까지 간 경우가 있다. 결국 특정국가들에서는 까트라는 마약에 대한 엄격한 금지조치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그 이외의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선 약한 마약인 까트를 거의 단속하지 않은 상황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국가에서 불법이긴 하지만 별로 단속하지 않은 마약인셈이다.
대마초 합법화 논리의 상당부분이 '대마초가 인체에 별로 해를 끼치지 않은 약한 마약'이라는 논리조차도 실제로 대마초보다 훨씬 약한 마약들도 금지마약인데 합법화 운동이 없다는 점만봐도, 대마초가 약한 마약에 속한다는의미보다는 인기마약이고 사용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은것이 합법화 주장이 나오는 가장 큰 이유이면서, 반대로 규제가 강화되는 가장 큰 이유이다.

1970년이전 대한민국의 대마초가 바로 까트처럼 거의 사용자가 없는 마약이었다. 그 이유는 한국의 대마초가 1970년대 이전에는 사실상 마약으로 사용된적이 거의 없기때문이었다.
대마초는 오랜기간 마약용으로 재배하면서 개량할수록 유효약물 성분이 올라가므로, 한국의 삼베농가에서 삼베목적의 대마식물에선 제대로된 약효를 볼수가 없는데다가, 유효성분이 꽃봉우리에 많은데 마약용으로 재배하는게 아닌 이상은 꽃봉우리를 따지는 않고, 기껏 해야 잎을 말려서 피는 정도였으므로, 제대로된 마약 대마를 한국에서 사용한적은 없다시피한다. [6]

즉, 1970년대 이전 대한민국에서 실제로 마약 대마에 대한 문화도 없었고, 삼베밭에서 일하던 일꾼들이 가끔 담배 대신 피웠다는 대마잎은 실제로 마약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즉, 그러니 대마초가 불법이어도 굳이 규제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미국의 제대로된 대마문화가 한국에 퍼지고 나서야 한국에서도 대마초라는걸 마약으로 사용하게 된다. 미국에서 마약목적으로 제대로 키워서 꽃봉우리를 따서 말린 제대로된 마리화나를 한국에서 접하게 된것이다.
대한민국은 특히 미국문화의 영향이 큰 나라여서 58운동보다는 미국 히피문화가 큰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대중문화는 미8군무대가 한국대중음악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데, 6.25이후 궁핍하던 한국에서 당시 대중문화인들이 그마나제대로된 안정적 수익을 거두는 무대가 미8군무대였고, 거기서 인정받은 밴드들이 한국대중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대표적인것이 록의 대부인 신중현이다. 게다가 70년대 이후 미국 영향을 받은 통기타, 맥주, 청바지 열풍등도 마찬가지로 미국의 문화가 수입된것이다.
연예계, 특히 가요계에 대마초가 유행한 것은 미8군 무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수들이 동두천이나 파주 등 미8군 클럽에서 밤일을 자주 했었기에 자연스럽게 대기실 등에서 대마초를 접한 것이다. 조용필도 당시를 회고하면서 “어렴풋이 미8군 클럽에서 누군가가 담배의 일종이라고 피워보라고 권해서 무심코 피웠던 기억이 있다”라면서 “내가 명성을 얻자 누군가가 그때 일을 밀고하면서 끌려갔던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

20세기 중반 미국주도로 유엔에서 합의된 대마초에 대한 규제 역시도 이미 한국에 수입되어있었지만, 1960년대 까지는 한국의 대마초라는게 실제로는 마약의 의미가 거의 없었기때문에 규제가 없었다가, 미국에서 재배된 제대로된 대마초를 사용하는 문화가 점차 퍼지면서 결국은 단속의 필요성이 생기고 사문화된 법이 실제로 실효성을 가지는 규제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미국에서 출발해서 UN에서 합의되어 전 세계적으로 퍼진 마약 규제와 미국에서 출발한 대마초 문화가 한국으로 수입되는 과정에서 큰게 커진것이 대마초 파동인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사문화된 법조항이 갑자기 강경하게 단속되는 경우는 2010년대의 프로포폴단속의 경우도있다. 프로포폴의 경우 수많은 연예인과 재벌총수까지 조사받았고, 그보단 약한 이슈지만 졸피뎀의 경우 특정 프로구단이 집중조사받을 정도였다. [7]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것은 마약 규제란것이 20세기 중반이후에 인류 처음으로 생긴 규제이고, 그래서인지 마약규제의 초창기였던 1950~60년대 미국의 대마초 LSD 규제나 1970년대 한국의 대마초 파동의 경우는 정치적 의미를 따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후 몇십년이 지난 2010년대의 프로포폴 단속의 경우는 그 정치적인 탄압의 뉘양스를 따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4. 영향

1960년대 말부터 성장하던 포크 음악과 록 음악이 완전히 몰락해 버리면서 대중음악계가 크게 후퇴하고 말았다.

1976년 1월 29일 문화공보부는 한국연예협회에 구속당한 연예인 명단을 작성해 제재조치를 취할 것을 지시했고 협회는 신중현, 윤형주, 이장희, 이종용 등 연예인 54명을 제명하는 제재를 내렸다.

제재당한 연예인들이 너무 많아 금지곡도 덩달아 늘어나면서 방송사에서는 방송에서 틀 노래가 없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5. 여담


[1]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2] 대마관리법에 따라 대마초를 수출입, 매매, 수수, 흡연 또는 섭취하거나 소지한 사람은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 징역에 처할 수 있었다.[3] 그도 그럴것이 조용필은 거의 10년 전 미군 공연 초창기 시절에 친해진 미군의 권유로 대마초를 한 번 피웠다가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 몸에 안 맞아서 다시는 안 피웠다.[4] 신중현 역시 이미 약식기소되어 사건이 종결된 상태였었는데도 다시 잡아갔었다.[5]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규제되고 금지된 물질이 술이다. 20세기 초반에는 미국 캐나다의 금주법으로 마피아가라는 조직자체가 탄생할 정도였다. 특히 21세기까지도 이슬람교에서는 술을 금지해서, 이슬람교가 국교인 나라에선 술이 금지된다. 게다가 전세계적으로 미성년자 구입제한이라거나, 특정 시간이후 구입제한이라거나, 특정 마트에서만 구입되는 등의 여러가지 규제가 많은 물질이 술이다.[6] 꽃봉우리가 수정되면 열매가 열리는것이므로, 장미꽃등 꽃자체가 목적이 아닌 이상은 꽃에서 열매가 열리게 놔둔다.[7] 프로포폴의 경우는 2010년경 우유주사라는 이름으로 급격히 강남에서 퍼져나가다가 사망사건이 터지고 나서 갑작스럽게 이슈가 되어서 수많은 연예인들이 잡혀들어간 사건으로, 당시 프로포폴이 불법인지조차 모르면서 병원에서 매일 맞던 이승연등 많은 연예인들이 조사를 받았고, 이후 최고재벌총수조차도 수사받는등의 큰 이슈가 되었다. 이후 졸피뎀의 경우도 특정 야구선수가 후배에게 대리처방을 받게 하는 등의 이슈로 거의 수사대상에 오르지않던 졸피뎀이 큰 이슈가 되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