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21:53:48

아가동산

아가동산
Agadongsan
파일:아가동산.svg
<colbgcolor=#2056a5><colcolor=#fff> 로고 [1]
분류 신흥종교, 범죄단체, 사이비 종교
설립일 1982년
소속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교주 김기순
위치
(본부)
[2]
경기도 이천시 대월면 대장로278번길 203-107

1. 개요2. 시초
2.1. 교주 김기순의 종교적 배경2.2. 아가동산의 시작
3. 기행악행
3.1. 어처구니 없는 행각3.2. 노동 착취와 범죄
4. 만행의 끝
4.1. 재판과 가벼워진 처벌4.2. 김기순 등의 근황4.3. 아가동산 해체 이후 이교부의 행보
5. 여담

[clearfix]

1. 개요

1982년에 김기순이 창시한 대한민국의 협업마을형 신흥종교.

대법원 판결상 사이비 종교로 판정받지 않았지만 명백한 '사이비 종교' 로 보는 시각이 있으며 제일 중요한 건 사이비 종교 여부를 떠나 피해자들이 여럿 존재한다는 것이다. 법원에서 교주 김기순에게 확정한 혐의는 조세포탈, 횡령 등이다.

한국경제신문에서 2002년 4월 29일에 보도한 간략한 사건 내역도 참고.

예장합동, 기장, 예장통합 등에서 이단 판정을 받았다.#

2. 시초

[이거 실화야?] "아가야 사랑해 주세요!!" 교주를 향한 절대적 복종
그리고 변질된 믿음이 만든 아가동산 사건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4051823441730103011.jpg

2.1. 교주 김기순의 종교적 배경

파일:external/www.amennews.com/149-2-1238.jpg
교주 김기순

교주는 김기순이라는 자로 1940년 11월 1일(음력)[3] 경상남도 부산부(현 부산광역시) 태생이다. (현재 [age(1940-11-01)]세)

교주가 되기 전엔 평범한 주부였으며, 1978년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4]의 '주현교회'라는 사이비 종교에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주현교회는 이교부라는 사람이 이끄는 교회로 신도들에게 머리를 밀게 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삭발교'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 기이한 별칭에 걸맞게 주현교회에서 일어난 일들도 참으로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교인들을 폭행하는 것은 물론, 명색이 교회라는 건물 안에서 예배 중에 신도들과 함께 천국으로 가자면서 옷을 벗고 껴안고 춤추는 나체 댄스 사건을 일으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것이다.[5]

이교부는 당시 "어렸을 적 다니던 교회의 목사[6]를 본받고자 특유의 스님 같은 차림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나체 춤을 춘 것으로 물의를 빚으면서 말 그대로 망신을 당했다. 거기에 충고하러 온 동료 목사를 폭행하는 사건을 일으킨 것이 결정적인 사유가 되어 구속되었다.[7] 그리고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감옥에서 지내게 되었고, 1981년출소한 후 주현교회를 해산하였다.

2.2. 아가동산의 시작

파일:external/www.amennews.com/149-2-1239.jpg
1996년 당시 아가동산의 정문 입구. 사건 취재를 위해 언론사 차량이 정차돼 있다.

김기순은 1982년 경기도 이천군[8] 대월면 대대리, 도리리 일대의 땅 4천 평 남짓을 구입해 '아가농장'이라는 것을 세웠고 신도들을 모아 아가동산을 세웠다. 이때 주현교회의 해산으로 갈 곳이 없어진 이교부의 신도들을 그대로 인수하며 덩치를 불려 나갔다.

이런 설립 과정에서 김기순은 멀쩡히 살아 있는 이교부의 영혼을 자기가 계승했다는 주장까지 하면서 자신이 이교부의 진짜 후계자라고 자처하였다. 이러한 행각은 당연히 이교부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김기순을 (성경 선악과 일화의) 이라고 비난하면서 김기순과 이교부는 원수지간이 되었다.[9] 김기순은 이 일을 두고 '갈 곳 없는 신도들을 모아 공동체를 만들고 떡 장사, 어묵 장사, 음반 장사 등으로 땅을 샀다.'고 주장했다. 특히 1982년에는 첫 수익사업체 '신나라레코드물류'를 세워 초기에는 트럭으로 다른 음반점에 카세트 등 음반을 팔다가 1984년 서울 종로3가에 자체 매장을 처음 연 후 특유의 가격파괴 전략을 세워 광속으로 음반도매업계를 장악했다. 또한 1992년에는 킹레코드[10]를 설립하고 같은 해엔 하나레코드(대전), 1993년에는 명반레코드(인천) 등을 세우기도 했다.

3. 기행악행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3.1. 어처구니 없는 행각

[오!마이] 아가동산 내부 각종 행사 촬영 화면 공개, 광란의 집단의식!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VN19962350-00_01075320.jpg
뉴스 보도 자료

아가동산은 얼핏 보면 일반적인 개신교 종파 중 하나 같겠지만, 실상은 개신교에서 예수만 빼고 그 자리에 김기순을 대입한 전형적인 사이비 종교에 불과하다. 이 종교의 교리는 일단 김기순은 신이며 3살짜리 아기이기 때문에 '아가야'라고 불러야 하며 어떤 말을 해도, 어떤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촉법소년? 이러한 교리를 '아가야 법'이라고 부르며 신나라에서는 이 법을 따라야 한다는 매우 해괴한 주장을 했다. 김기순은 신도들을 세뇌하기 위해 기성 종교에 대한 비난을 퍼부으며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고 찬송가에 나오는 예수 혹은 예수의 상징을 '아가' 혹은 '아가야'라는 말로 치환해서 자신을 찬송하게 만들었다.[11] 행사에서는 꽃가마를 타고 나타나거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는 등 일반적인 종교에서 찾아볼 수 없는 행각을 보이곤 했다.

3.2. 노동 착취와 범죄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snap087.jpg
협업마을이라고 적혀있지만 절대로 자발적 협업을 하는 곳이 아니었다.

아가농장은 전형적인 노동착취[12]형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농장관리, 장부관리, 의료관리, 학생관리, 세무관리 등 관리직을 두고 철저하게 공동체 생활 및 공동작업으로 운영되어서 신도들은 매일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장에서 CD 및 테이프를 만들며 일하는 식으로 원치 않는 투잡을 뛰었다. 그렇게 벌어들인 수익의 사용처는 드러나지 않았다. 사건 이후에도 신나라네이처팜이라고 이름만 바꾼 채 이천시 도리리 일대에 존재한다. "외부에서 파는 채소에는 독이 들어 있다"고 신도들을 현혹시켰다.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VN19962346-00_01025326.jpg
이 인간의 실체와 범죄를 생각해 본다면 더더욱 사악한 웃음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폭행 및 살인, 암매장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998년 대법원 판결상 폭행과 살해 부분이 무혐의로 밝혀졌다고 하지만 피해자들이 증언도 하였던 것으로 봐서는 정말 폭행과 살인이 없었는지는 여전히 진위가 의심스럽다.

특히 이곳에서 신도 3명을 살해한 것이 발각되었는데 1987년 8월 14일 밤 9시에는 7세 아동 최낙원 군이 교주 김기순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돼지우리에서 신도들이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며 1주일 동안 굶기고 폭행해 죽게 했다. 이때 여러 명이 돌아가면서 몇 대씩 때리고 나오는 방식을 사용해 실제로 아동에게 자신들이 가하는 폭력의 수위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었다.[13] 1988년 1월 2일 정오에 과수원 관리책임자이던 윤모 씨도 교주의 말을 잘 안 듣는다며 살해당했으며 11월 21세 여성 강모 씨는 '교주의 아들을 현혹시켜 교리를 어지렵혔다'는 명목으로[14] 창고로 끌려가 부모에게 따귀를 맞은 후 여러 신도들의 각목에 맞아 타살당했으며 교단 측은 '가출'로 처리했다. 특히 사망자 윤씨의 아들이 이천경찰서에 진정서를 냈으나 아내가 "남편은 음독 자살했다"고 주장해서 수사가 안 됐고, 병원 의사들도 사체검안 당시 최 군의 사인을 '선천성 심장질환', 윤씨는 앞서 말했듯 '음독 자살' 등으로 처리했다. 이렇듯 경찰의 수사 비협조와 부실한 사체검안, 유족들의 비협조 등이 수년간 그 사건을 은폐했던 것이다. 또한 목격자들도 폭행 광경을 봤지만 실제 살해 과정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기사)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 기사 참고.

교인들에게는 1년에 딱 4번 휴가를 줬는데 신정, 광복절, 크리스마스, 그리고 교주 생일이었다고 한다. 교주 생일에 쉬는 이유는 교주 김기순을 우상으로 하는 연극을 상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주말과 추석, 설날 연휴에도 일했다. 그리고 텔레비전, 신문, 외부 출입, 가족 면회 등 바깥 소식을 접하는 건 아예 금지되었다.

가족도 김기순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이유로 다 흩어 놓았는데 아버지는 아저씨라고 부르고, 어머니는 아줌마라고 부르면서 남인 것처럼 대하게 한 것도 모자라서 호부호형까지 금지했다고 한다. 심지어 부부끼리 동침도 금지했고,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신도들이 데리고 간 아이들도 대부분이 중졸[15] 정도의 학력에 병역까지 고의로 면탈하도록 종용했다고 한다.[16] 특히 병역을 고의 면탈한 경우 형법상으로는 병역기피로 간주하기 때문에 처벌 대상이 된다.

또 김기순은 지상천국을 세운답시고 신도들의 재산 50억 원 정도를 강제로 빼앗기도 했으며, 수사 당시 김기순의 은신처에 있는 금고에 만원권 지폐로 헌금 7억 원과 1996년 당시 환율로 1,600만 상당의 달러가 보관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러한 반인륜적 착취 끝에 6년 만에 4천 평이었던 땅이 13만 평으로 대략 32배나 늘어났고, 1993년에는 '신아영농조합법인'을 세워 농림수산부로부터 '첨단기술농업시범단지'로 지정되어 1994년 유리하우스 등을 세우며 정부와 경기도청 등으로부터 국고 23억 5천여만원을 지원받았다.

당연하지만 악행과 고혈 위에 쌓은 그 권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4. 만행의 끝

4.1. 재판과 가벼워진 처벌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80062-00_01491208.jpg
당시 뉴스 보도 화면[17]

1995년 8월에 아가동산 이탈 주민들이 교단 측의 탈세와 사기 등 온갖 비리에 대해 경찰에 진정서를 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20일만에 내사 종결처분을 내 버렸다. 이에 이탈 주민들은 1996년 7월 15일 경기도청에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하자 이천경찰서가 재수사에 나섰다. 12월 1일 수원지방검찰청 여주지청은 이천경찰서로부터 아가동산 관련 수사자료를 넘겨받고서 검-경 합동수사에 돌입해 7일에는 김기순과 관련자 6명에 대해 일부 주민 살해 및 사기 등의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김기순만 영장이 발부됐다.

동월 10일에 관리책임자 김씨 등 핵심신도 3명을 구속한 후 공개수사로 돌입했다. 그 사이 김기순은 영장이 발부된 후 남편과 함께 시골을 전전하다 동월 16일에 대외업무 담당 정문교 등 3명과 함께 검찰로 자진 출두했으나 관련 혐의에 대해서는 부인했고, 결국 구속됐다(진술내용 전문). 19일에는 실종자 강씨의 유해발굴에 착수했지만 유골은 찾지 못했고, 27일에는 김기순 외 10명이 살인 및 사기 혐의로 기소됐다.

1997년 4월 28일 김기순[18]에게는 사형을 구형했으며, 나머지 간부 9명에게는 징역 7년에서 15년을 구형했다. 하지만 그 사이 1996년 노동법 날치기, 한보 사태, 김현철 스캔들, 황장엽 망명 사건 등 숱한 사회적 이슈들이 잇따라 터지며 아가동산은 점차 잊혔고 그해 1월 3일, 증거보전 청구심과 21일 검찰 조서에서 당시 신도 사체 암매장 혐의자였던 굴삭기 기사 윤씨가 진술을 번복한 사실이 밝혀져 검찰의 무리수 의혹이 퍼졌다. 5살의 피해자 최모 군에 대해서도 최 군의 친모까지 현장에서 진술을 번복해 "아이는 살해당하지 않고 선천성 심장병으로 죽었다"며 교주를 감싸는 바람에 피해 사실을 입증하지 못했다.[19]

결국 5월 20일, 주범 김기순은 수원지법 여주지원에서 조세 포탈, 횡령 등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4년과 벌금 56억원을 선고받았고 신도 김씨 외 5명의 살해 혐의는 무죄, 신나라유통 대표이사 강활모에겐 징역 2년 6개월 및 벌금 60억원 등을 각각 선고했다. 이들 중 김기순은 10월 10일에 보증금 1억원을 내는 조건 하에 보석으로 일단 석방되었다. 1심 선고 당시 재판부는 "아가동산이 순수한 협업마을에서 시작되어 김기순을 지도자로 부각시킬 때 일부 변질은 있었으나, 종교의식과 포교 활동이 없는 것으로 보아 검찰의 주장대로 '사이비종교'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는 식으로 증거재판주의에 입각해 발표했다.[20] 이후 1998년 3월 3일 서울고법 항소심, 6월 23일 대법원 상고심에서도 똑같은 판결이 내려졌다. 대법원 1998. 6. 23. 선고, 98도869 판결문 전문

신도 살해와 폭력은 위와 같은 이유로 무혐의로 판결되었으나 이후에도 이에 대해 증거하는 피해자들이 적지 않았기에 이에 대해선 뭔가 의심스럽다는 평이 많다. 또한 "그간 사람들을 착취하고 중노동시킨 죄과에 비해서는 너무 가벼운 처벌"이라는 의견이 많았으며 아가동산의 노동력 착취 피해자들은 이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1심 판결 당시 한국기독교이단사이비대책협의회 등 이단대책기구와 몇몇 개신교 주류 교단이 반발하기도 했고, 문제점도 제기했다.

2001년 7월 4일, 검찰은 굴삭기 기사 윤씨와 일부 신도들이 강씨가 암매장됐다고 주장한 유리온실 주변 부지 15평에서 발굴작업을 다시 했지만 유골은 또 못 찾았고 2002년 4월 2일에 김기순에게 위증교사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또다시 강씨의 유골을 발굴하려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동월 29일, 김기순은 공소시효 만료로 수배가 해제되어 사실상 수사가 종결됐다.

여하튼 김기순이 신도들의 노력을 훔쳐 세운 아가동산은 김기순이 구속되고 난 후 그 세가 약해지기 시작해 신도가 줄어 사실상 와해되었고 2000년 8월에 완전히 출소한 김기순은 교주로써의 권력을 잃었다.

4.2. 김기순 등의 근황

파일:external/ilyoseoul.co.kr/26810_4381_0834.gif
사건 이후에도 건재한 신나라레코드[21]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순은 징역 4년 판결을 받고 수감 생활을 하다가 출소 후 벌금도 완납하여 유유자적하게 잘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사건에 대해서는 "나는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고 문란한 성생활을 하지 않았으며, 신격화조차 안 했다."는 식으로 변호했다. 사건이 터진 데는 이교부가 배후에 있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벌금도 내고 아가동산 간판도 내려 돈이 궁할 것 같지만 마지막 남은 사업체인 신나라레코드아이돌 음반 판매 장사에 요긴하게 잘 이용해 재기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허나 이런 사실을 아는 과거 아가동산의 피해자들은 "교주 김기순이 그간의 악행에 비해 가벼운 처벌을 받은 것도 모자라 석방 후 세상을 조롱하듯 부를 누리고 있다"며 분개했다. 게다가 사건 이후 인력들이 전부 떠나간 아가동산을 신나라네이쳐팜이라는 일반 개인 농장으로 바꾸고 추가로 운영하면서 재정을 더욱 불리고 있다.

원래 신나라레코드 자체가 아가동산의 계열사로 설립되었고 아직도 운영 중이며 용산이나 센트럴시티[22] 등지에 지점을 갖추고 있다. 거기다가 아주 잘 나가고 있으며 한국에서 가장 큰 음반 판매 매장이다. 참고로 여기는 아직도 아가동산 명의로 된 회사다. 전술했듯 과거 아가동산의 교주였던 김기순은 신나라레코드의 회장으로 재임 중이며,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여전히 떵떵거리며 부유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우선 아가동산의 명목상 대표이사는 신옥희라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 신옥희는 사건 당시 아가동산의 경리 담당으로 김기순의 동생 뻘 측근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이 '신나라'라는 건 신난다 → 신나라가 아니라 아가동산의 교리였던 '신의 나라'라는 뜻의 신(神)나라다.[23] 신나라 미디어 홈페이지에 가면 '노래, 춤, 웃음의 나라 신나라' 라는 문구를 볼 수 있는데, 아가동산의 교리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각 노래, 춤, 웃음이라고 한다.

2020년대에는 코로나19 여파로 많이 어려워졌지만[24], 김기순 본인 입장에서는 이미 돈을 벌 만큼 벌었고 어차피 저거 말고도 농장 등 일부 수입원이 있어서 큰 문제는 없을 듯하다. 또한 이미 법적 처벌도 다 끝나 버린 상황이다.

그나마 뒤늦게라도 댓가를 치른 것이라 한다면, 현재 김기순이 치매로 인해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아가동산의 실체를 알린 넷플릭스에다가 가처분신청 고소를 한 안동조 아가동산 이장에 따르면, 김기순은 치매에 걸려 서울에서 치료 중이라고 하고, 가처분신청도 김기순이 아닌 본인의 주도로 이뤄졌다고 한다. # 물론 정말로 아가동산 이장의 주도로"만" 가처분 고소가 이루어졌는지도 불분명하기에 김기순이 진짜로 치매인지도 불확실하다. 정말 치매로 고생한다고 쳐도, 김기순이 상당한 부를 축척하여 밖에다 알리지 않고 고급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일 테니 그녀의 부는 여전할테고 말이다.

4.3. 아가동산 해체 이후 이교부의 행보

파일:external/www.amennews.com/149-2-1244.jpg
아가동산과 관련이 많던 이교부의 본거지인 주현교부 구건물

참고로 앞서 구속되어 출감 이후 15년 동안 밑준비를 하던 이교부는 아가동산이 와해되자마자 '주현교부'라는 사이비 종교를 또 설립해서 아가동산 신도들을 재흡수했다. 실제로 이교부는 같은 사이비 종교 교주이면서도 아가동산이 와해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탈자들을 데리고 검찰에 출두해서 증언하기도 했는데, 물론 이는 순수한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김기순의 아가동산을 해산시킨 뒤 빼앗긴 신도들을 전부 다시 자기 편으로 되돌리려는 참 치졸한 목적이었다. 이교부는 김기순과 척을 진 후 아가동산을 내분시키거나 아가동산이 자멸할 경우 신도들을 전부 되찾기 위해 작정하고 벼르고 있던 것이었다.

주현교부는 사건 이후에도 익산시에서 운영되고 있는데 <현대종교>에 따르면 종교적인 활동은 줄어들었다고 하고 오늘날에는 노인들이 모여서 식사하거나 친목 모임을 하는 곳으로 바뀌었다고 하며 교리가 사이비이기는 해도 지역사회에서 크게 물의를 빚는 일이 없이 그냥저냥 잘 운영되는 듯하다. 월간 <교회와신앙> 97년 2월 호에 주현교부와 아가동산 관련으로 간략한 역사가 있으니 궁금한 위키 유저는 참고하면 된다. 주소. 2020년에는 옛 건물을 철거하고 신축했다. #

아가동산과 주현교부 모두 원 안에 십자가가 있는 상징을 쓰고 있다.[25]

2023년 3월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에서 이교부가 출연했다. 5화에서 김기순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회고하며 주현교회에서 김기순이 본인의 신도들을 어떻게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는지를 설명하였다.

5. 여담


[1] 원 안의 십자가 로고는 전신인 '주현교회'와 후속 종교 단체인 '주현교부'에서도 그대로 사용되었다.[2] 이름은 '신나라 네이처팜'으로 변경되었지만 버스정류장 명은 '아가동산'으로 되어 있다.[3] 양력으로는 11월 29일[4] 1995년익산군이리시가 통합되어 현재의 익산시가 되었다.[5] 이 당시에도 뒤로는 사창가 가서 할 만한 사람들은 다 했지만 학생들이 연애하는 만화는 검열삭제하거나 미니스커트는 단속 대상이 되는 등 공적으로는 엄숙주의가 일반적이었는데, 목사라는 사람이 대놓고 나체로 춤췄다는 건 충격적인 일이었다.[6] 아현교회 김현봉 목사. 그의 제자로는 예장계신 설립자인 창광교회 이병규 목사, 신촌교회 안병모 목사, 염천교회 이한영 목사와 더불어 이교부도 제자 중 한 명 이었다. 현재는 제자들도 거의 세상을 떠났고, 그 제자들이 계승하였다. 이병규 목사를 제외하면 대체로 개교회(독립교회)로 남아있고 아현교회 시절의 형태에 가깝게 고수하고 있다. 또한, 예수교장로회한국총공회의 설립자인 백영희 목사와 교리적 유사성이 있어 과거 한때 김현봉 목사와 교류가 있기도 했다.[7] 출처: 참조.[8] 현재의 이천시. 사건이 알려진 1996년 3월에 시로 승격됐다. 아가동산은 웬만한 이천 주민들에게도 안 좋은 쪽으로 잘 알려져 있다. 참고로 사건 이후에는 네이쳐팜으로 이름이 바뀐 채 농장만 남아 있다. 아가동산의 영리성 사업체인 신나라레코드 소유의 농장이다. 다음 로드뷰. 인근에 버스정류장이 있는데, 딱히 주변에 정류소 이름으로 쓸 만한 시설이 없는 관계로 정류소 이름으로 '아가동산'을 사용 중이다. 이천 버스 28-4가 이 앞으로 지나간다.[9] 훗날 이교부는 아가동산 사건 재판 이후 김기순이 투옥되자 피해자들을 위하는 척하며 아가동산 신도들을 전부 인수해 아가동산을 와해시키는 것으로 김기순에게 복수했다. 굳이 따지자면 빼앗긴 자기 신도들을 되찾은 셈이라고 할 수 있다.[10] 현 신나라뮤직. 박성배가 세운 동명의 음반사와 다르다.[11] "아름다운 노래"라서 아가(雅歌)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12] 이 역시 김기순은 이스라엘키부츠 같은 협업마을이라는 주장을 했다. 물론 이스라엘의 키부츠는 이곳처럼 노동착취를 하는 곳이 아니다. 노가다로 유명한 소련 콜호스북한 협동농장도 저 정도까진 아니었다.[13] 사후 최 군의 유해는 경기도 고양시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됐다. 약 30년 뒤, 과천시은혜로교회에서도 비슷한 범죄를 저질렀다.[14] 당시 강모 씨는 신도들 사이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용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교주의 집에 드나들며 집안일을 대신 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집에 있던 교주의 아들이 강모 씨에게 먼저 관심을 가지고 교주인 엄마에게 부탁해 '그녀를 식모로써 사용하자'고 부탁한 것. 이후 이를 다른 신도들에게 들키자 반발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교리를 어지럽혔다'는 명목으로 구타했다.[15] 하필 중졸인 이유는 당시에도 중학교는 사실상 의무교육이었기 때문이다.[16] "하늘나라에선 배운 놈이건 못 배운 놈이건 평등하다"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물론 이왕 평등할 거면 배운 평등이 좋을 텐데 반대라서 문제.[17] 자막의 단어를 바로잡자면 형사소송에서 소송을 받게 된 자이므로 피고인이 정확한 명칭이다.[18] 당시 김기순의 변호는 김종훈과 양인석 변호사가 맡았는데, 김종훈은 참여정부 시절이었던 2003년에 대북송금 특검보를 맡아 수사했다. 양인석은 2003년부터 1년여간 청와대 사정비서관을 지냈다.[19] 나는 신이다에 직접 출연하여 밝힌 바에 따르면 재판 전날 김기순이 피해자의 친모를 직접 불러 회유했으며 현장에도 아가동산 관계자들이 와서 감시하고 있었다고 한다.[20] 당시 검찰 측은 아가동산에서 압수한 비디오테이프와 목격자들의 증언을 근거로 살인 혐의를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21]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 있다. 올림푸스 간판이 있는 이유는 올림푸스 AS센터가 이 건물 2층에 입주해 있기 때문.[22] 현재는 철수된 상태이다.[23] 이런 이유로 몇몇 회사(주로 일화통일교, 등)들은 사이비 종교에 돈 대주는 것 같다고 기피되는 일이 많으며 실제로 개신교계에서는 이런 업체들에 대한 불매를 권고하는 경우가 많다. 뭐 신나라 같은 경우는 해당사항이 아니라는 듯. 한때는 압구정동의 모 예배당 건물 지하에 신나라레코드 매장이 들어와 있었으니 아이러니. 아가동산 문제가 불거지자 '저희 OO교회는 아가동산과는 관계없습니다'라는 현수막을 걸기도 하였다.[24] 코로나도 코로나지만 이들의 실체를 알게 된 사람들이 이들과 교류를 끊었다고 한다.[25] 공교롭게도 이는 한국 가톨릭에서도 상징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자세히 보면 아가동산과는 달리 원의 모양이 약간 불규칙하므로 쉽게 구분이 가능하다.[26]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한나라당 서울특별시 금천구 후보로 출마했다가 열린우리당 후보 이목희에게 밀려 낙선했고, 현재 법무법인 진솔 변호사로 재직 중이다.[27] #1, #2.[28] 다만 한국일보한겨레 사이트에선 나중에야 복원되기도 했다.[29] 강제 노동을 강요, 무자비한 폭행, 교주 숭배 강요, 생일 외에는 휴일 사실상 박탈, 외부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 신도들의 가족을 강제로 흩어 놓음, 일반적인 신도들의 성욕은 죄악이라고 한 주제에 정작 교주들은 남색을 밝히며 난잡한 성생활을 일삼음, 고주가 손수 아동에 대한 육체적 폭력에 가담 등이 있다.[30] 김기순은 자신의 스승을 자처한 자, 파울 섀퍼는 최측근(콜로니아의 총무,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여 자신의 악행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의 딸[31] 김기순: 1940년 11월 29일생(양력), 파울 섀퍼: 1921년 12월 4일[32] 다만 섀퍼는 아르헨티나로 도피하던 와중에도 부유층들의 주택단지에서 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