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진 주요 저널ㆍ여론조사 선정 기록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1999년 | |
이름 | 강수진 | |
분야 | 발레 무용수 | |
보관문화훈장(3등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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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35E5D,#010101><colcolor=#fff>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감독 강수진 姜秀珍 | Kang Sue-jin | |
출생 | 1967년 4월 24일 ([age(1967-04-24)]세)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진주 강씨 (晉州 姜氏) |
신체 | 167cm|49kg|O형 |
가족 | 작은외증조부 구자옥 외조부 구본웅 아버지 강재수[1], 어머니 구근모 배우자 툰치 쇼크맨 |
학력 | 경희국민학교 (졸업) 선화예술학교 (무용과 / 졸업) 선화예술고등학교 (무용과 / 졸업) 모나코 왕립발레학교 (졸업) 숙명여자대학교 (무용학 / 명예박사) |
소속 | 대한민국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감독) |
입단 | 1986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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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발레리나. 대한민국 발레계의 대표격인 인물로, 현재는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2. 발레리나 경력
리틀엔젤스예술단 출신으로, 언니를 따라갔다가 뽑혔다고 한다.[2] 선화예술중학교를 지원했을 당시에는 한국무용을 배웠었고 한국무용을 전공하기로 했지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발레과에 사람이 없어서 지원자를 받는 것을 보고 발레과에 지원했고, 그렇게 골격 테스트를 통과한 후 발레를 전공하게 되었다고 한다.선화예술고등학교 재학 시절인 1981년 12월에 모나코의 왕립발레학교 교장 마리카 베소브라소바의 눈에 띄어 모나코로 떠나 3년간 유학 생활을 했으며, 1986년에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아시아인 중 최초로 입단하여 2015년까지 활동했고, 2016년 발레단에서 매년 있는 단원평가와 승진심사에서 면제되어 원할 때까지 수석 무용수 자격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아시아 최초의 종신 단원 자격으로서 은퇴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1994년에 솔리스트, 1997년에 수석 발레리나가 되었다.
1985년 아시아인으로서 2번째로[3] 로잔 콩쿨 (Prix de Lausanne)에서 공동우승하였다. 1999년엔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소설 <춘희>를 바탕으로 한 까멜리아 레이디의 마르그리트 역으로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 상을 받았다. 당연히 한국인 최초이며, 18년 현재 이 상을 받은 한국인은 강수진과 김주원, 박세은 그리고 발레리노 김기민, 2023년 발레리나 강미선 5명뿐이다. 2007년에는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정부로부터 궁중 무용가에 해당하는 캄머탠처린(Kammertanzerin)이라는 상을 받았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인간 문화재이고, 이 역시 아시아 최초[4][5][6]
이러한 그녀의 기록은 당시 한국 출신 발레리나 중에서는 거의 최초였다.
특이사항으로, 발레의 대명사이자 각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가 의무적으로 맡는 프티파-이바노프 버전의 걸작 발레 블랑인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 역으로 무대에 선 적이 한 번도 없다. 대신 차이코프스키 3대 클래식 발레이자, 클래식 발레리나로서 최고 난도를 자랑하며 무용수의 자질을 평가받는 작품이라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는 출연했다. 이렇듯 강수진은 드라마티컬 발레에 최적화된 동양 무용수로서, 오네긴, 말괄량이 길들이기, 지젤, 카멜리아 레이디처럼 연극적인 요소가 많은 발레를 대표 레퍼토리로 갖고 있다.
2.1. 강수진의 발
특히, 혹독한 연습으로 인해 발가락 마디가 기형적으로 돌출되어있는 등 발의 형태가 많이 흉한 것은 그녀에 관해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자료사진은 강수진 다큐멘터리 이후 수많은 발레리나들이 발 공개 요구를 받는 일이 생겨 충격과 공포 사례로 박제가 될 까봐 공개를 서로서로 꺼리는 와중에, 기자들이 아주 힘들게 확보하게 된, 국립발레단 주역으로도 활동했던 재일교포 강화혜 발레리나의 발 사진이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가 촬영한, 가장 전형적인 1990-2000년대 주역급 발레리나의 발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다. 강수진의 발이 물집이 심하게 부어오른 단계에 남편이 찍은 사진이라면 이 케이스는 시의적절하게도 그 물집이 몇 번 터지고 아물어 딱지가 앉은 상태를 잘 보여준다. 이 상태에서 계속 굳은살이 박히면 휴식 기간에 피부색이 돌아오지만 까맣게 물든 발톱 색은 돌아오지 않는다. 발톱 모양이 빠진 상태에서 새로 나면 형태마저도 이상해지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인 발의 형태는 물론 강수진의 혹독한 연습, 끈기와 노력 끝에 생긴 것도 있지만, 애초에 강수진의 발이 발레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다쳐서 치료를 해야 하는데도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발 형태가 망가진 것도 있다. 실제로 강수진의 팔, 다리, 목 길이는 완벽한 반면 의외로 무릎 아래로는 발레리나로서 부적합한 형태로, 이 때문에 턴아웃을 하는 데 특히 애를 먹었으며 나와있는 무릎을 넣고 발등아치가 없는 형태의 발을 튀어나와 보이도록 교정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심지어 연습 중 발가락뼈가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진통제를 먹고 발을 붕대로 감아서 끊임없이 연습했다는 일화도 있는데[7], 사실 이건 미친 짓이라고 봐도 좋다. 아무리 강수진처럼 되고 싶어도, 일단 무용수나 운동선수들이 부상을 입으면 완전히 회복하기 전까지는 절대안정을 취하고 충분한 휴식기간을 가지는 것을 잊지 말자. 무대에서 영원히 은퇴할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시범을 보이는 발레교육자조차도 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강수진 본인도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했을 당시 골절로 인한 수술 일정과 피로 때문에 기념 공연 무대에 서지 못하는 아쉬움을 겪었다. 그리고 무대를 보면 당장이라도 다시 연습실로 뛰어들어갈까봐 카멜리아 레이디 출연 시즌에는 긴 머리를 단발로 잘라 배역에 맞지 않는 스타일로 바꾸는 초강수를 두면서 욕망을 차단했으며, 1년간 충분한 휴식을 가진 끝에 마침내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주역을 맡아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무조건 열심히'라는 사상이 맞물려, 아직까지도 강수진의 발 사진 한 장 때문에 수많은 무용 전공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는 당시에 비해 토슈즈의 발 보호 패드가 훨씬 발전되어 강수진만큼 흉한 발을 가진 발레 전공자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발레리나의 발이 깨끗한 것을 보고서 연습을 열심히 안 했다고 착각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8] 또한 하루에 2~3시간만 자며 공부하고 시험기간에는 며칠 밤을 새가며 발레 연습을 했던 것은 어릴 적 리틀엔젤스에서 활동할 당시 학업과 무용 연습을 병행하던 경험과 수면 부족 상태에서 쪽잠을 자는 데 익숙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며, 이렇게 혹독한 스케줄을 소화하며 두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발레 유망주는 많지 않다. 강수진의 압도적인 재능과 인간을 뛰어넘을 정도로 기울인 노력을 폄하할 이유는 당연히 없지만, 그럼에도 부상을 극복해 낸 정신력만큼 운 역시 좋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최근에는 자기관리를 충분히 하면서도(적어도 뼈가 부러지면 쉬면서) 우수한 실력을 보여주는 무용수들이 많다. 발레리나들의 고질병인 무지외반증 없이도 토슈즈를 신고 있는 발레리나들도 있으며, 교수법이 발전하여 더 이상 다리에 철심을 박는 것이 미덕이 아니게 되었다. 물론 이 분위기가 전세계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다.[9]
3. 국립발레단 단장 경력
2014년부터 임기 3년의 대한민국 국립발레단의 예술감독에 취임했다. 이후 2015년 11월에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 예브게니 오네긴을 펼친 것으로 대한민국 무대에서의 활동을 끝냈고, 2016년 7월에 독일에서의 공연 예브게니 오네긴을 마지막으로 발레리나 활동에서 은퇴했다. 은퇴를 위해 작품을 하나씩 정리했던 것.국립발레단 단장으로서 단원을 선발할 때 신체조건보다는 근성, 열정, 재능을 먼저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도 자신이 이러한 평가 기준 덕분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왔기 때문.
2017년 1월에 연임이 결정되어 임기가 2020년까지 연장되었다.
4. 수상
- 2022년 2021 무용 분야 예술대상 발레 부문
- 2021년 제25회 만해대상 문예대상
- 2016년 제9회 이미륵상
- 2016년 제10회 파라다이스상 특별공로부문
- 2015년 제34회 세종문화상 예술부문
- 2014년 제25회 고운문화상 고운문예인상
- 2014년 바덴뷔르템베르크 공로훈장
- 1999년 보관문화훈장
5. 기타
- 슬럼프를 매운 음식, 그것도 아주 매운 음식으로 해결한다고 한다.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도 매운 요리를 주문했을 정도. 셰프들이 요리 과정에서 청양고추와 매운 고추가루를 많이 쓰다보니 눈물까지 흘리면서 준비했으나, 정작 강수진이 원하는 '뒷골이 땡기는 매운 요리'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게다가 매운 요리를 잘 못 먹는다고 했던 서장훈도 강수진의 요리를 먹으며 이 정도면 맛있게 맵다고 할 정도인것을 보면 셰프들이 아무래도 강수진이 즐긴다는 매운 맛의 정도를 낮게 잡았거나 원하는 기준만큼 나오지 못한 듯.
- 다이어트는 특별히 하지는 않지만, 체력을 위해 억지로 굶지는 않는 타입이다. 식판 위에 적당히 먹을 정도로만 올려놓고 먹는 편으로, 밑반찬은 한식을 선호한다. 방송에서 친구들이 떡볶이를 먹을 때, 옆에서 꿀짱구 과자를 놓고 한 개씩 녹여 먹는다고 선화예술중학교 동창인 박선희 발레리나가 말했다.
- 뛰어난 미모뿐만 아니라 서구적인 얼굴과 타고난 신체 조건으로 유명한데, 실제로 유학 시절 당시 한국에 휴가차 놀러왔을 때 잡지 모델로 픽업됐을 정도였다고 한다.
- 동아시아 출신들에게 애정이 깊어 신예 발레리나들을 아시아에서 발굴하려 했던 스승 베소브라소바가 가장 사랑했던 아시아인 제자로 알려져 있다. 유학 시절 극심한 향수병으로 발레를 그만두려 했을 때, 스승이 자신의 집에 데려가 예절교육과 트레이닝을 시키며 제 2의 엄마 노릇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때의 경험으로 성격이 바뀌었을 정도이며, 매너 외에도 언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까지 4개국어를 현지인 수준으로 구사한다.
- 2016년 5월 10일에 연세대학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SSG 지식향연에서 1부 강연자로 초청됐는데, 평범한 신변잡기적 내용으로 많은 아쉬움을 일으켰다. 차라리 인생이야기보다는 발레를 통해 이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이를 준비하기 위한 과정과 결과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미학적인 이야기를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 2017년 9월 18일 비정상회담에 출연, '은퇴 후에도 일하는 나 비정상인가요?'를 안건으로 가져와 은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남편에 대한 사랑 표현으로 남자 패널들의 부러움을 샀고, 은퇴 번복에 대해서는 "본인이 하고 싶다면 하게 둬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나 자신은 못할 것 같다"고 일축했다. 참고로 현재 50살이 넘는 나이에도 대단한 동안 미모를 자랑, 실제 그녀의 나이를 들은 패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오프닝 영상에 특별출연하였다.
- 남편 툰치 소크맨은 튀르키예인으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남자 무용수로 활동하던 중 발레단 동료로 그녀를 만났다. 부상으로 발레리노에서 은퇴한 후 강수진과 결혼해 매니저로 활동했는데, 2014년 모 예능에서 그녀가 첫사랑이 아니었다고 양심고백을 했다. 툰치 소크맨은 현재 국립발레단의 무보수 객원으로 근무하며 배우자의 활동을 돕고있다.
- 그녀의 외할아버지인 서양 화가 구본웅(具本雄)은 칼럼 등으로 일제 전시체제에 협력할 것을 주장하여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유명한 친일파이다. 왜냐하면 어머니 구근모(具嫤謨)[10]의 아버지가 구본웅이기 때문이다.
- 2020년 3월 19일 배철수의 음악캠프 30주년 기념 특집방송 오프닝 때, 강수진의 명언 중 일부가 언급되었다. # 소개된 말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냐구요? 나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하루하루를 반복해서 대단한 하루를 만들어낸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였다.
- 2024년 4월 27일 부친상을 당했다.
[1] 2024년 4월 27일 87세로 별세했다.[2] 강재수와 구근모의 4남매(1남 3녀) 중 둘째인데, 본인뿐만 아니라 언니와 여동생 모두 예술 분야를 전공했다.[3] 아시아인 최초는 1983년도에 수상한 일본인 요시다 미야코. 로열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였다. 로잔 콩쿨의 상위 입상자들은 장학생상 자격으로 원하는 발레단 산하 발레학교에 유학할 수 있는 특전을 부상으로 받으며 이러한 코스로 세계 유명 발레단의 솔리스트, 프리마 발레리노나 발레리나가 된다.[4] 혈연, 지연을 따지는 한국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이 정도면 무조건 아시아인 최초라는 수식어가 필수로 붙어야 할 지경이다. 무려 면책 특권이 있다고 한다[5] 정당한 사유가 있으면 법을 어겨도 봐주는 특권이다. 무려 살인을 저질러도 정당한 사유가 있을 시 면책특권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물론 거의 사문화된 일종의 명예포상이고 살인면허 같은 것은 아니다.[6] 강수진의 캄머텐저린은 엄밀히 따지면 주정부에서 내려준 명예 개념이다. 대한민국 국적인 그녀가 독일 국가 차원의 캄머텐저린이 되기는 불가능하다. 진짜 캄머텐저린은 독일 내 어느 발레단에 가서도 취업을 '요구'할 수 있다.[7] 한술 더 떠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나온 바에 의하면 토슈즈 안에 생고기를 넣고 무대에 섰다가 도중에 핏물이 나왔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얇게 저민 생고기를 발가락에 감거나 환부에 붙이면 된다. 생고기와 밀착되면 슈즈 안쪽의 살이 쓸리는 고통이 줄어들고 차가운 온도로 열감이 내려 통증도 덜해 무용수들이 선호했다고 하며, 특히 물집이 터진 발로 토워크를 했을 때 드러난 환부를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크게 줄어든다고 한다. 그러나 비린 냄새와 핏물의 습기는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아무리 핏물을 빼도 발의 습기로 아교와 종이가 녹으면서 배어나오기 때문이다.[8] 사실 애초에 발레리나에게 발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부터가 실례다. 신데렐라 언니 라는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여동생을 너는 발이 왜 이렇게 깨끗하고 이뻐? 연습이란걸 하긴 하니? 라고 디스 하는 장면이 나온다. 발레리나에 대한 편견이 들어간 장면중 하나... 이긴 하나, 사실 그 나이 대라면 콩쿠르와 발레단 입단시험을 꾸준히 준비하는 시기이기에 발톱이 빠지고 굳은살과 물집이 잡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엄지 상태가 엉망이라 20대 발레리나들은 샌들 신을 일이 생기면 페디나 네일페디스티커로 못생겨진 발톱 상태를 가리는 편이다. 보통 자신의 몸 상태를 이해하고 발톱이 몇 번 빠지며, 물집이 터졌다 아물기를 반복한 발가락은 그나마 봐줄 만 한 상태가 된다. 그리고 차츰 해골의 발 상태같은 뼈대와 힘줄선이 드러난 상태로 고착되는 것이다. 최태지 국립발레단 전 단장도 발레를 택한 자신의 맏딸에게 엄지발톱이 몇 번은 빠져야 발레리나는 주역 자리를 경합할 수 있다면서, 양 발톱이 모두 빠진 것을 좋은 징조라며 축하해 주었다. 발레계에서는 외관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에 발 사진 공개를 꺼리는 경향이 있을 뿐, 토슈즈라 불리는 포인트 슈즈를 신는 단계서 발은 피고름 상태를 겪는다. 리듬체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리타 마문은 본래 연습하던 발레 루틴을 처음으로 체조용 반슈즈가 아닌 발레 포인트 슈즈를 신고 선보였는데, 촬영이 모두 끝난 마문의 발가락에는 여느 10대 발레전공자들이 처음 토슈즈워크를 시작할 무렵처럼 얼룩덜룩한 멍과 핏자국이 드러났다. 그저 강수진처럼 처참한 발 상태가 되지는 않을 뿐, 토슈즈를 신기로 결심한 이상 누구든 발이 그렇게 깨끗할 수는 없는 셈이다.[9] 이유 중 하나는 토슈즈 제조법이 발전해서이다. 과거 슈즈 2-3켤레를 눅눅해지지 않게 말려 가며 신던 시절에는 슈즈가 너무 억센 강도로 통일되어 나왔으며 발 힘으로 합판과 다름 없는 나무 바닥을 꺾어 신었지만, 당연히 상대적으로 힘이 떨어지면 발은 슈즈에 혹사당해 물집과 피투성이가 되는 것이다. 마치 차체가 튼튼하면 추돌시 차는 덜 구겨지되 안의 사람이 부서지지만, 럭셔리카는 완전히 구겨져 파손되면서도 차체가 충격을 대부분 흡수한 덕분에 좌석의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힐 확률이 줄어드는 것과 같은 것. 이 문제는 고질적인 발레리나들의 클레임 요소였으나 토슈즈 제조공정에서 나무를 뺄 수가 없던 시절을 감수했던 발레리나들의 빠른 은퇴 요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슈즈강도가 다양해졌으며, 바닥을 꺾고 길들여 신느라 발에는 부담이 줄어들고 슈즈 수명도 줄어들었다. 발끝이 바닥에 닿는 토플랫폼이 완전히 무너지고 주저앉는 데드포인트 상태가 될 때까지 발등을 밀어 서는게 아니라, 발가락 모양에 딱 맞추기 위해 바닥에 탕탕 두드려 우그러뜨리다 보니 형태가 부드러워져 그만큼 데드포인트가 빨리 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 발레 전공자들은 일 년에 수백 켤레를 소모하는 일도 흔하다. 무른 질감으로 유명한 러시아 카페지오 브랜드를 신는 전공자는 심지어 12시간을 쉼 없이 연습하다 하루에 3켤레가 한꺼번에 무너진 적이 있다고. 1970년대에 비해 발레전공생들은 10배에서 최대 200배나 더 많은 토슈즈를 신는다. 그래서 나온 슈즈가 특수플라스틱 소재로 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린 게이놀민든 토슈즈. 데드포인트가 늦게 오는 대신 다른 브랜드보다 2-3배 정도 비싸기에 발 상태가 잘 맞으면 이 브랜드를 선호한다. 강수진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솔리스트로 승급하자마자 산샤 브랜드와 유럽 브랜드 토슈즈를 무료로 지급받게 되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토슈즈를 소비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수진 입장에서는 당연히 공연 일정을 지키는 책임감과 발 건강이 최선이었기에 슈즈공급 담당자의 하소연 속에서도 계속 소비했으며, 한 번에 15켤레를 꺼내 가는 정도로 수많은 토슈즈를 저승길로 보낸 덕분에 불편하면 바로 교체할 수 있는 환경에서 발 상태는 좀더 나아졌다고 한다.[10] 출처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