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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환의 주요 수상 및 수훈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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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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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재 (아일랜드) | → | 송승환 (에쿠우스) | → | 이승호 (신화 1900) | |
대한민국 체육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9년 |
이름 | 송승환 |
분야 | 평창동계올림픽 |
체육훈장 맹호장(2등급) |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2년 |
이름 | 송승환 |
분야 | 배우 |
보관문화훈장(3등급) |
<colbgcolor=#fff,#000><colcolor=#000,#fff> 송승환 宋承桓|Song Seung-hwan | |
출생 | 1957년 1월 10일[1] ([age(1957-01-10)]세) |
서울특별시 성북구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은진 송씨 (恩津 宋氏) |
신체 | 174cm, 69kg |
학력 | 서울안암국민학교 (졸업) 보성중학교 (졸업) 휘문고등학교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양어대학 (아랍어학[2] / 명예학사) |
데뷔 | 1965년 KBS 라디오 <은방울과 차돌이> |
소속사 | PMC프러덕션 |
수상 | 2012년 제3회 대중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 |
경력 | 2005년 명지대학교 영화뮤지컬학부 교수 2011년 성신여자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2012년 구세군 자선냄비 홍보대사 2018년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 |
수훈 | 보관문화훈장 (2012) 체육훈장 맹호장 (2019) |
링크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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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배우 겸 공연 기획자, 연출가, 대학 교수. 1965년 KBS에서 아역 성우로 데뷔한 이래, 여러 드라마와 영화, 연극에서 아역배우로 활약했고, 나이 들어서는 김수현 작가의 작품에 자주 출연하는 배우다.아역 시절 한국 드라마 역사에 남을 두 대작 TBC의 아씨와 KBS의 여로에 출연했다.
휘문고등학교(67회) 재학 시절에는 방송반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당시 방송반 동기로 있었던 사람이 손석희 JTBC 대표이사 사장이다.[4] 가수 이용도 휘문고 동기다. 휘문고 3학년 때인 1974년에는 장학퀴즈에 출연해서 무려 월장원에[5]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장학퀴즈 출연 후 18년이 지난 1993년 10월부터 6개월간 그 장학퀴즈의 MC를 맡게 된다. 하이틴 스타 출신답게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청소년들이 많이 보는 각종 프로그램의 MC를 자주 맡기도 했다. 소년가장 케이스라 대학도 취업이 잘 된다고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에 들어갔다가[6] 방송 일정 때문에 자퇴했다.[7]
젊은 시절 송승환[8] |
인기 최절정기에 모든것을 그만두고 1985년부터 1988년까지 뉴욕으로 유학을 갔었다. 위에도 언급됐지만 1970년대부터 집안의 몰락으로 소년가장 역할을 했었는데, 출연료를 받는 족족 집안의 빚을 청산하느라 사라져서 매우 허탈했었다고 한다.[9] 그래서 연예활동을 정리하고 뉴욕으로 떠났던 것. 비록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같이 떠난 부인과 같이 브로드웨이 연극이나 뮤지컬 등을 원없이 보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며 견문을 넓히기도 해서 매우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귀국후에 다시 연예계에 복귀하여 활동중 미국시절 부터 안면이 있던 강수지의 국내 데뷔를 돕고 음반들을 제작해서 성공시키기도 했었다.
1990년대 이후로는 공연기획자 및 연출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비언어극인 난타의 기획자로 유명하며, 1997년에 초연한 이래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비언어극 공연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10][11] 공연기획자로서의 공적을 인정 받아, 후에 명지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에서 전임교수로 일했고, 시력이 약화된 후에는 강의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성균관대학교 문화예술미디어융합원에서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1.1. 2018 평창 동계올림픽
2015년 7월에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을 맡았는데, 그의 커리어에 비해 빅이벤트 개회식, 폐회식을 총괄하는 것이 우려된다는 시각이 많다. 그는 주로 난타나 어린이 연극같은 연출을 주로 해 왔는데, 깔끔한 무대연출로 호평받던 디자이너 정구호가 연출을 맡고 있었지만 이런 송승환과는 못 해먹겠다고 사퇴하면서 이번 평창 올림픽의 개회식 폐회식의 퀄리티를 두고 모두 걱정하고 있다. 정구호가 연출한 무대 한마디로 알력에서 정구호가 학을 떼고 관둔 것으로, 앞으로도 자신의 아이디어는 쓰지 말아달라고 요구까지 했다고 한다. 알려진 것에 따르면 정구호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연출을, 송승환은 아이들도 즐길 수 있는 재밌는 연출을 원한다고 한다. 말로만 들어도 정구호 쪽의 연출이 올림픽과 더 어울리기 때문에 우려하는 것이다.[12]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차은택 라인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었으나 12월 15일 최순실 국정농단 제 4차 청문회에서의 전 문체부 장관 김종덕 씨의 진술에 따르면 도리어 박근혜 대통령이 송승환의 연출 능력을 우려했고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이 추천하여 정구호 씨가 총연출 직책으로 선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총감독 선정 과정에서 차은택 혹은 박근혜가 직접 개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에 대한 질문에는 그러한 개입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또 송승환과 정구호가 연출에 대한 다른 주장이 충돌하였고 계약서를 송승환 라인의 사람들만 먼저 작성하자 이에 회의감이 든 정구호가 사퇴한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위의 내용들처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평창 동계 올림픽의 개회식과 폐회식의 퀄리티를 걱정하는 여론도 있었지만, 막상 공개된 개회식과 폐회식은 한국의 전통과 문화, 현대를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성공적인 개회식이 되었다.[13] 그의 커리어에도 난타를 넘을 훌륭한 경력으로 남을 것이다(2018 평창 동계올림픽/개회식 2018 평창 동계올림픽/폐회식 각 문서를 참조).
평창올림픽 개, 폐회식 연출 총감독 이력을 바탕으로 2021년에 열린 2020 도쿄 올림픽의 개회식・폐회식,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의 개회식・폐회식, 2024 강원 동계청소년올림픽 개회식, 2024 파리 올림픽의 개회식・폐회식의 KBS 중계 해설을 맡았다.
2. 기타
- 시력장애 4급 판정을 받았다. 평창올림픽이 끝난 직후 황반변성 및 변형된 망막색소변성증이 발생해서 현재는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수준이라고 한다.# 그래서 2019년 출연한 드라마 "봄밤"의 대본도 전부 OCR 기기로 듣고 연기했다고 한다. 그래도 눈이 보이는 한은 계속 연기하고 작품을 연출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서 이성미와의 대담때 밝히기로는 젊었을때부터 야맹증 증세가 있었으며, 이제는 얼굴을 가까이 갖다대야 상대의 얼굴이 보이는 정도라고 한다.
- 이명박 정부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자리를 고사한 바 있다. 여담으로 당시 대타로 문체부 장관 입각한 사람은 바로 유인촌.
3. 주요 출연작
3.1. 드라마
<rowcolor=#fff> 연도 | 방송사 | 제목 | 배역 | 비고 |
1969년 | 똘똘이의 모험 | |||
얄개전 | ||||
1970년 | 파일:MBC 로고(1969-1974).svg | 사돈댁 | ||
아씨 | ||||
1972년 | 여로 | 기웅 | ||
1977년 | 행복의 문 | |||
1979년 | 대한국인 | 유동하 | ||
1980년 | 딸 | |||
1981년 | 사랑합니다 | |||
제1공화국 | ||||
1982년 | 어떤 여름방학 | |||
1983년 | 가면무도회 | |||
봉순의 하늘 | ||||
다녀왔읍니다 | 관용 | |||
1984년 | 불타는 바다 | |||
간호병동 | ||||
신부교실 | ||||
1989년 | 세노야 | |||
거인 | 구중빈 | |||
1990년 | 조선왕조 오백년 - 대원군 | |||
왕조의 세월 | 이구 | |||
1991년 | 고개숙인 남자 | 황용준 | ||
저린 손끝 | 박민기 | |||
고래의 꿈 | 이수남 | |||
1992년 | 분노의 왕국 | 이백수 | ||
두 자매 | ||||
숲속의 바람 | 배동표 | |||
창 밖에는 태양이 빛났다 | 한태규 | |||
1993년 | 댁의 남편은 어떠십니까 | 오진우 | ||
1993년 | 사랑은 못말려 | 정근석 | ||
1994년 | 한명회 | 문종 | ||
1994년 | 빈 잔의 축배 | |||
1995년 | 목욕탕집 남자들 | 염병렬 | ||
1996년 | 유혹 | |||
1996년 | 연어가 돌아올 때 | 주진모 | ||
1997년 | 행복한 아침 | 원정호 | ||
신부의 방 | ||||
1999년 | 누나의 거울 | |||
2000년 | 아줌마 | 박재하 | ||
2002년 | 내 사랑 누굴까 | 탁기환 | ||
고백 | 윤도섭 | |||
2004년 | 아일랜드 | 박재성 | ||
2006년 | 누나 | 민준기 | ||
2008년 | 떼루아 | 양승걸 | ||
2011년 | 내 마음이 들리니 | 최진철 | ||
2012년 | 무자식 상팔자 | 안희명 | ||
2015년 | 부탁해요, 엄마 | 장철웅 | ||
2016년 | 그래, 그런거야 | 유경호 | ||
2019년 | 봄밤 | 이태학 | ||
2022년 | 삼남매가 용감하게 | 김행복 |
3.2. 방송 진행
- 1981년 ~ 1984년 젊음의 행진 MC[14]
- 1989년 경 쇼특급 MC
- 1992년 ~ 1993년 가요톱10 MC[15]
- 1992년 KBS 연기대상 MC
- 1993년 ~ 1994년 장학퀴즈 MC
- 1995년 ~ 1997년 HBS 연예특급 MC
- 2001년 KBS 연기대상 MC
- 2013년 ~ 2014년 스타 패밀리 송 MC
3.3. 시사 / 교양
- 2001년 KBS2 시사난타 세상보기
- 2008년 KBS1 누들로드[내레이션]
- 2012년 60분의 기적 MC
- 2015년, 2020년 SBS 나이트라인 (인터뷰이) 2015년 인터뷰, 2020년 인터뷰
- 2024년 ~ 송승환의 초대 MC
3.4. 라디오
- 1981년 ~ 1983년, 1991년 KBS 제2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
- 2004년 2월 1일 ~ 2004년 2월 16일 MBC 표준FM 여성시대 스페셜 DJ
- 2004년 3월 15일 ~ 2007년 3월 4일 MBC 표준FM 여성시대 정식 DJ[17]
3.5. 영화
- 1976년 주고 싶은 마음
- 1978년 꿈나무
- 1979년 오빠하고 누나하고
- 1979년 가시를 삼킨 장미
- 1980년 춘자는 못말려
- 1981년 색깔있는 여자
- 1982년 갈채
- 1983년 스물 하나의 비망록
- 1983년 내 인생은 나의 것
- 1983년 연인들의 이야기
- 1984년 낮과 밤
- 1984년 젊은 시계탑
- 1984년 가고파
- 1984년 나도 몰래 어느새
- 1989년 랏슈
- 1990년 홀로 서는 그날에
- 1992년 달은… 해가 꾸는 꿈 - 하영 역
- 2002년 굳세어라 금순아 - (특별출연)
- 2007년 별빛 속으로 - 라디오 DJ 목소리 역(우정출연)
- 2021년 더 박스 - 오디션 심사위원 역(특별출연)
4. 여담
- "100인의 배우, 우리 문학을 읽다" 라는 오디오북에서 이상(작가)의 '날개'를 읽었다.
[1] 음력 1956년 12월 10일[2] 76학번[3] 유튜브 채널명: 송승환의 원더풀 라이프[4] 손석희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손석희가 방송반 입회를 위해 방송실에 들어갔는데 한쪽에서 쭈그려 앉아 있던 사람이 송승환이라고 한다.[5] 장학퀴즈는 매주 장원을 뽑은 주장원전을 거친 뒤 그 달의 주장원끼리 모여서 펼치는 월장원전을 치르고 각 분기의 월장원끼리 모여서 '장학퀴즈의 꽃'이라 불리는 기장원전을 치렀다. 송승환은 두 번째 퀘스트까지 뚫은 셈인데 사실 난다 긴다 하는 전국의 수재들이 나오는 퀴즈 프로그램에서 주장원을 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인데 거기서 월장원을 했을 정도면 학업에도 상당한 소질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6] 아랍어과는 지금도 취업 현황이 우수하지만, 송승환이 대학을 다니던 1970~1980년대에는 중동의 오일 달러와 건설 수주 열풍을 등에 업어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7] 후에 대학에서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는데 어머니가 너무 좋아했다고 한다.[8] 1988년 11월 18일 방영된 KBS 젊음의 행진 이문세 편에 MC로 출연.[9] 김혜수, 장윤정 등이 걸었던 길의 선배격인 셈이다.[10] 그는 예전부터 공연 예술에 애착이 많아서 무려 21살의 어린 나이에 뮤지컬을 제작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때 제작비가 조금 모자라자, 드라마 몇 편에서 같이 연기한 바 있어 친분이 있던 김자옥에게 제작비를 빌렸다고 한다. 김자옥은 흔쾌히 예금통장과 도장을 내어주며 필요한 돈을 갖다 쓰라고 말했다고. 뮤지컬은 성공했으나 공연수익금을 수금하러간 사람이 수금후 사라지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김자옥에게 빚을 좀 늦게 갚았다고 한다.[11] 수금후 도주한 사람은 지방으로 갔다는 풍문만 들었을 뿐 아직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12] 참고로 총감독이 되면 IOC와 계약하기 때문에 보수는 드라마 한 편 정도라고 한다.[13] (출처: 박양우, 〈평창동계올림픽과 문화의 힘〉, 《매일경제》, 2018. 3. 9.)[14] 왕영은과 공동으로 진행을 맡았으며, 그가 진행을 맡던 시절에 배철수 감전 사고가 발생했다.[15] 그리고 그의 후임은 손범수였다.[내레이션] [17] 양희은과 공동 D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