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찰 차일혁[1] 車一赫 | |||
<colbgcolor=#0054a6><colcolor=#fff> 호적명 | 차갑수(車甲洙) | ||
이명 | 김철(金喆), 차철(車轍), 차리혁(車利革)[2] | ||
출생 | 1920년 8월 20일[3][4] | ||
충청남도 홍성군 | |||
본적 |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성계리 | ||
사망 | 1958년 8월 9일 (향년 37세) | ||
충청남도 공주군 공주읍 금강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경찰 1묘역-502판-943호 | ||
본관 | 연안 차씨[5]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54a6><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차경석 | |
배우자 | 진복희[6] | ||
자녀 | 아들 차길진 | ||
서훈 | 화랑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대통령수장 종군기장 공비토벌기장 보관문화훈장 | ||
학력 | 김제 원평공립보통학교 (전학) 홍성 홍동공립보통학교 (졸업) 고창고등보통학교 (전학) 홍성공립공업전수학교 (중퇴) 황푸군관학교 (정치과 / 졸업) | ||
경력 | 조선의용대 반공유격대 전라북도경찰국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충주경찰서장 진해경찰서장 충청남도경찰국 경비과장 공주경찰서장 | ||
최종계급 | 경무관[7] | ||
주요 참전 | 중일전쟁 6.25 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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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경찰공무원.2. 생애
1920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 충청남도 홍성군의 외가에서 아버지 차유선의 아들로 태어났다.[8] 아버지 차유선은 보천교 교주 차경석의 집사였다고 한다. 본적은 전라북도 김제군(현 김제시) 금산면 성계리이다.[9]김제 원평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집안 사정으로 외가가 있던 충청남도 홍성군으로 이사하여 홍동공립보통학교에 전학해 그곳에서 졸업했다. 이후 고창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집안 사정으로 홍성공업전수학교[10]에 전학했다. 그러나 이 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6년, 평소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발언을 자주 하던 조선인 교사가 일본인 고등계 형사에 연행되면서 강압적인 대우를 받자, 이를 참지 못하고 일본인 고등계 형사를 폭행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처벌을 피하기 위해 17세의 나이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하였으며, 이후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1938년부터 1945년까지 팔로군과 함께 항일 유격전 활동을 벌였다.
그래도 일제와 싸우기 위해서였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는지 다른 팔로군 출신들과는 달리 북한이 아닌 남한으로 돌아간 차일혁은 경찰계에 투신하여 6.25 전쟁 당시 반공 유격대를 결성하여[11]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반 공산당활동을 펼쳤다. 특히 1951년 1월에 정읍 칠보발전소에서 18전투경찰대대장 신분으로서 단 75명의 경찰 병력을 이끌고 2천여명의 공비들을 막아내는 대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칠보발전소 전투 이후에도 한창 임무를 수행하던 1951년 5월, 상부에서 지리산 내의 사찰과 암자를 모두 소각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는 녹음기 때 빨치산들이 은거할 만한 장소를 사전에 아예 없애 버리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당시 구례군의 고찰 화엄사 일대를 작전 지역으로 맡고 있던 제8보병사단 대대장 방득윤 중령은 천 년이 넘은 문화유산 화엄사를 불태운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고, 이에 같이 화엄사 지역을 방어하던 차일혁이 화엄사 내 대웅전을 포함한 건물의 문짝만 뜯어 불태우자는 묘책을 내놓았다. 차일혁은 이 명령을 "빨치산들의 은신처를 없애고 관측과 사격을 용이하게 하자는 것"으로 이해하여 문짝만 뜯어내 소각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 의견에 방득윤 대대장도 찬성하여 화엄사는 문짝만 제외하고 전부 불타 없어지는 횡액을 피할 수 있었다. 그 외 화엄사 인근의 천은사, 쌍계사, 선운사 등에 대한 사찰이나 문화재도 폭격이나 소각을 피하는 쪽을 택했고, 결국 차일혁은 명령 불이행으로 감봉 처분 등의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12][13]
한편, 차일혁은 무력으로 공격하기보다는 빨치산들을 감성적으로 설득하여 귀순시키는 방향을 택했고, 덕분에 많은 빨치산들이 차일혁의 인간적인 태도에 감화되어 순순히 전향하면서 목숨을 건졌다.[14]
1953년 5월 24일 경감에서 총경으로 진급하여 서남지구전투경찰대 제2연대장에 보임되면서[15] 호남지역의 빨치산 소탕 작전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정전 협정이 체결된 뒤인 1953년 9월 18일,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지리산지구 반야봉 동쪽 5km 무명고지에서 당시 남부군 총사령관인 이현상을 사살하는 대공을 세웠다.[16] 그리고 사살당한 이현상의 시신도 차일혁이 수습하여 화장한 뼈를 직접 철모에 넣고 M1 개머리판으로 빻은 유골을 경상남도 하동군의 어느 소나무 숲에 뿌려 수목장시켜 줬다고 한다. 이 전공으로 인해 차일혁의 부대에 태극무공훈장이 세 개나 주어졌으나 정작 부대장인 차일혁은 한 개도 못받았다고 한다.
1953년 12월 10일부터 1954년 5월 17일까지 제11대 임실경찰서장을 겸직했고, 그 사이 1954년 4월 6일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 수사사찰과장에 보임되었다. 이어 1954년 9월 9일부터 1956년 2월 20일까지 제10대 충주경찰서장을 지냈다. 이때 충주군에 직업소년학교를 세워 지역의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학업의 기회를 제공했고, 여러가지 지역 밀착적인 정책으로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높으신 분들에게 찍힐대로 찍혀 있던 차일혁은 일제강점기 그가 복무했던 조선의용대가 중국공산당의 팔로군과 같이 활동한 부대였고, 빨치산 토벌시 온정적인 작전을 펼쳤다는 사실을 빌미로 좌익 용공분자로 몰려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지만 이현상 사살 등 부인할 수 없는 공적을 감안하여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6.25 전후에 이런 혐의가 걸리면 중형을 받는 건 거의 떼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여러 논란이 있지만 경찰 고위 간부였던 최능진이 처형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저런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차일혁은 지방 경찰서장 등 한직만 떠돌게 되었던 것이다.
1956년 2월 20일부터 1956년 9월 26일까지 제11대 진해경찰서장을 지냈고, 1956년 9월 27일 충청남도경찰국 경비과장에 보임되었다. 1957년 3월 21일 제18대 공주경찰서장에 취임했다. 1958년 4월 13일 현역 자유당 제3대 국회의원(충남 공주군 갑)으로 그해 5월 예정된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한 염우량을 만나 당시 내무부장관 이근직이 자유당의 복수공천을 받은 박충식을 전적으로 밀라는 지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이에 염우량은 4월 29일 오후 3시에 대전지방검찰청 공주지청에서 내무부장관 이근직을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고소했는데, 5월 13일 대전지방검찰청에서 "고소 사실이 허위"라는 이유로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이 직후에 차일혁은 이근직에 대한 고소를 제기한 염우량을 무고죄로 고소하기도 했다.
그러던 1958년 8월 9일 오후 1시에, 가족들과 함께 금강으로 피서를 갔다가 오후 3시경 수영하던 도중에 심장마비로 익사하였다. 그의 나이 불과 38세였다. 아들 차길진의 증언에 따르면 <볼가강의 노래>를 부르며 강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고, 19시간 뒤에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평소 차일혁이 수영을 잘했다는 증언도 있기에 자살을 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가 토벌 작전 당시 사용하던 철모 같은 유품 일부가 경찰박물관에 있으며, 사이버 박물관도 있다. 경찰인재개발원에는 그의 이름을 딴 '차일혁홀'이 마련되어 있다.
3. 사후 및 가족
사후 아내 진복희(秦福喜) 여사와 아들 차길진(車吉辰) 등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258-1번지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 이때 차일혁의 부하 김 모 경위의 소개로 중구 을지로2가 199-36번지에 있던 '양양'이라는 다방을 차일혁이 유산으로 남긴 300만 환을 지불해 매입하였다. 그런데 이 다방은 당시 양경옥(梁京玉)이라는 마담의 소유였는데, 다방을 계약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후 다방을 인수해 개업하려는데, 지갑순(池甲順)·홍정호(洪貞鎬) 등 두 사람이 찾아와 가옥임대차계약서 등 권리서와 공증인을 내세우며 "여긴 내 다방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진 여사는 다방을 매입할 때 돈을 지불한 영수증을 보여주었는데, 그 영수증은 정작 김옥록(金玉祿)·양어진(梁於珍)·강태윤(姜泰允) 등 난데없는 세 사람의 이름으로 된 것이었고 이 밖에는 다방을 매입했다는 증거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진 여사는 다방을 몽땅 빼앗기고 쫓겨났고, 수 차례나 자살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 후 1960년 1월 6일 서울지방검찰청에 이러한 사연이 담긴 진정서를 제출했는데, 이후 결과는 알 수 없다.1960년 1월 7일 동아일보 기사차일혁은 2011년에 6.25 전쟁 때 공적을 인정받아 뒤늦게 총경에서 경무관으로 1계급 특진되었고, 화엄사 등 사찰과 문화재를 보존하는 데 힘쓴 공로로 조계종(1958년)과 문화재청(2008년)의 감사장을 받았으며, 1998년에는 화엄사 경내에 그의 공적비가 세워졌다. 화엄사에서는 2024년에도 차일혁을 기리는 추모 다례를 열었다.
2013년 10월 16일에는 그의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 경찰 1묘역 502판-943호에 이장되었다.
아들 차길진[17]은 아버지 차일혁 경무관이 전쟁 중 불교 문화유산을 보호했던 인연으로 불교에 귀의한 뒤 법사 겸 생명 컨설턴트
김성모 화백의 대본소 만화 빨치산이 바로 이 사람의 전기 만화라고 할 수 있다.
여명의 눈동자의 주인공인 장하림과도 비슷한데, 장하림이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OSS에서 복무한 부분은 장준하나 박순동[18]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2015년 6월에 차일혁을 비롯한 6.25 전쟁의 영웅을 기리는 기념우표가 발행되었다. 우표 발행 안내 페이지
4. 기타
5. 서훈 내역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차일혁은 빨치산 토벌전에서 세운 전공으로 무공훈장을 가장 많이 받은(6개!) 경찰관이기도 하다.# 비록 등급이 낮기는 하나, 숫자만 놓고 보면 심지어 백선엽 대장(5개[19])보다도 더 많이 받은 것이다.충무무공훈장(3등급) | 1회 | 1954년 6월 15일 |
화랑무공훈장(4등급) | 5회 | 1952년 6월 25일 |
1952년 8월 15일 | ||
1952년 10월 20일 | ||
1953년 3월 5일 | ||
1953년 12월 29일 | ||
대통령 수장 | 1회 | 1952년 11월 15일 |
무공포장 | 1회 | 1952년 6월 25일 |
6.25 종군기장 | 1953년 6월 25일 | |
유엔종군기장 | 1958년 8월 2일 |
이후 화엄사 등 지리산의 문화유적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2008년 10월 18일에는 보관문화훈장(3등급)도 추서되었다.
6. 관련 문서
[1] 호적에는 차갑수, 족보에는 차용철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2] #[3] 대한민국건국십년지에 의하면, 1918년 2월 17일에 출생하였다고 전한다.출처[4] 음력 7월 7일[5] 문절공파(文節公派). 족보명은 차문남(車文南) → 차용철(車鏞徹)이다.[6] 秦福喜.[7] 사후 추서, 생전 최종계급은 총경[8] 보천교의 교주 월곡 차경석의 서자 내지는 사생아라는 설이 있다. 일단 족보상에는 차경석의 아들 중에 차일혁은 없고 정설은 아니다. 차일혁의 아들 차길진 법사는 위 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보천교에 호의적인 글을 쓴 적이 있을뿐만 아니라 자기가 차경석의 환생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몸으로는 차경석의 손자이나 영혼은 차경석본인이라는 것이다.[9] 아들 차길진이 쓴『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에 의하면, 1920년에 전라북도 김제군(현 김제시) 금산면 성계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출처[10] 대전 한밭대학교의 전신으로, 1927년 5월 20일에 충남 홍성공립공업전수학교로 설립되었다. 이후 1935년에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학교명을 대전공립공업전수학교로 고쳤다. 이때까지는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1968년에 국립대학으로 이관하면서부터 대학으로 바뀐 듯하다.[11] 팔로군 출신으로 반공 인사가 되는 의외의 케이스가 아주 없지는 않다. 후일 법학자로 유명한 신상초의 경우도 학도병 탈영 →팔로군 활동의 길을 걸었지만 여생은 반공 인사로 살았다. 신상초는 특히 해방 후 팔로군을 탈주하여 귀국한 혐의로 북한 정권에 체포된 적도 있었다.[12] 강원도에서 6.25 전쟁의 전화를 모면한 오대산 상원사의 경우도 흡사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951년 1.4 후퇴 당시 70세가 넘은 방한암 스님(1876~1951)이 홀로 절을 지키며, 절을 태우러 온 군인들에게 "당신은 장군의 부하요,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나는 부처님을 따를 테니 당신은 장군을 따르시오."라고 했다. 이에 군인들은 그냥 법당의 문짝을 떼어 불사르고 떠났다고 하니 전국에 당시 비슷한 일화가 다수 있었던 것 같다. 방득윤은 전쟁 후 경찰로 전직하여 경무관까지 진급하고 경북와 강원 경찰국장을 지냈던 것으로 보아, 총경에서 진급이 막힌 차일혁과 달리 큰 불이익은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3] 이때 친일반민족행위를 저질렀던 이두황을 부관참시하고자 그의 묘를 파헤쳤으나, 일본식으로 화장해 뼛가루가 든 항아리만 있었기에 뼛가루를 내던져버리고 항아리는 깨부쉈다고 한다.[14] 6.25 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전에서 경찰과 빨치산 간의 관계는 상호간에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양측의 포로 대우는 효수 내지 참수는 기본이고 인육 취식 등의 도시전설도 있을 정도였다.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정규군이 토벌에 참여하면서 빨치산에 대한 관대한 처우가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였는데, 차일혁은 경찰임에도 빨치산에 대해 대단히 관대한 방침을 고수했다.[15] 당시에는 경찰 조직에 경정 계급이 없었다.[16] 1953년 9월 22일 조선일보 기사. 대한민국 국군에게 사살당한 이현상의 목만 잘라갔다거나, 북한에서 처리한 걸 시체만 주워 왔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차일혁 본인도 수기에서 이현상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남기고 있다.[17] 2019년 12월 3일에 편도암(뇌종양 전이 포함)으로 별세했다.[18] 태백산맥에 나오는 조정래의 인척이다. 미얀마 전선 → 탈영 → OSS 복무나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김범우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데, 김범우나 장하림과는 달리 해방 후 정치와 무관하게 살았다.[19] 태극무공훈장(1등급) 2개, 을지무공훈장(2등급) 2개, 충무무공훈장(3등급) 1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