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방원 趙邦元|Cho Bang Won | |
<colbgcolor=#A4A4A4> 본명 | 조보원(趙輔元) |
출생 | 1927년 1월 2일[1] |
전라남도 무안군 지도면 광정리 월산 (現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 광정리 월산마을)[2]# | |
사망 | 2014년 5월 9일 (향년 87세) |
본관 | 한양 조씨 |
호(號) | 아산(雅山)[3] |
가족 | 부인, 슬하 2남 2녀 |
직업 | 동양화가[남종화(南宗畵)][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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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동양화가로서, '남도화의 완성자', '남종화의 마지막 거장' 등으로 불릴 만큼 한국 수묵산수(水墨山水)의 대가이다.남농(南農) 허건(許楗) 선생 문하에서 그 기법을 배웠으며, 후에 본인만의 독창적인 전통 먹산수 화풍을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아산은 남농의 제자이면서도 남농을 따르지 않았다. 그가 그린 남종화의 세계는 유현하고 선명한 먹빛에 전라도의 강렬하고 구성진 자연을 담아내며, 그 속에서 터전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항구적인 정신을 집약시켜 보여준다. 자연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현실 도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그것을 초극해, 토착적이면서도 영원한 정신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는 남종화라는 무대 위에서 인간의 정혼(精魂)을 불태울 수 있는 천부적인 예술가라고 할 수 있겠다.
장석원[5], 「아름다운 착각(2019)」 中 '최후의 남종화가 조방원'
장석원[5], 「아름다운 착각(2019)」 中 '최후의 남종화가 조방원'
2. 작품
一 生 墨 奴 |
급우 |
모운 |
석경 |
청산백운 |
추성부 |
3. 경력
-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제3회·12회)
-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제19회·24회·27회)
- 전라남도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제1회·3회·6회~12회·14회~17회) 및 운영위원(제18회)
- 전라남도 문화상 심사위원(제13회·20회)
- 동아미술제(동아일보사) 심사위원(1985년)
- 현대한국화협회 창립이사(1981년)
- 전라남도 국악협회 고문(1979년)
- 전라남도 문화재 전문위원(1978년)
4. 수상
- 2004년 - 의재 허백련 미술상
- 1999년 -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
- 1992년 - 성옥미술상(성옥문화재단)
- 1991년 - 무등문화상(광주일보사)
- 1977년 - 제4회 대웅상(大雄賞) 대상(전남매일신문사)
- 1958년 - 제7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6](이하 '국전') 특선, 전라남도 문화상
- 1957년 - 제6회 국전 특선
- 1956년 - 제5회 국전 특선
- 1955년 - 제4회 국전 문교부장관상
- 1954년 - 제3회 국전 입선
- 1953년 - 제2회 국전 입선
5. 기타
- 조방원 선생의 생전에 개관한 아산조방원미술관[7]은 대한민국 최초의 도립미술관이다.
- 1942년 목포 평화극장에서 있었던 최승희의 무용 공연을 관람한 것이 그가 예술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 중의 하나였다고 회고하였다.
- 광주 • 전남 지역에 조방원 선생 문하 교사 제자가 있다!
- 제자의 말로는 조방원 선생은 인생에 도움이 많이 될 정도로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8]
- 다수 제자들 중에 교사가 많다. 그림 그려서 그럭저럭 먹고 살만한 시절에 조방원 화백이 화가로서 큰 꿈을 가지고 있는 어린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그림만 그려서는 먹고 살기 대단히 힘든 시대가 곧 올 것이니, 평생 밥 먹고 살 여건은 마련해놓은 후에 그림을 그려라" 라는 지론 때문.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대단한 선견지명이였던 셈.
- 월산 조선 화백은 조방원 선생이 큰아버지이다.
[1] 음력 1926년 11월 29일. 음력생일을 사용하였다.[2] 한양 조씨 집성촌이다.#[3] 영암군 삼호읍에 있는 대아산(大牙山)에서 그 이름을 따왔으며,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하면서 처음 사용하였다.[4] 동양화의 한 분파로 북종화(北宗畵)에 대비되는 화파로서, 대표적으로 '수묵산수화'를 그 예로 들 수 있다.[5]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출신의 미술평론가이다. 전직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전북도립미술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2001년에는 대한민국 화관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6] 現 대한민국 미술대전[7] 개관 당시의 명칭은 '도립 전라남도 옥과미술관'[8] 5.18 민주화 운동 직후의 방황하는 제자를 잡아주었다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