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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주전남기자협회 가입 신문사. 통신사인 연합뉴스, 뉴스1, 뉴시스 제외. [2]: 보도 기능을 갖추지 않은 곳. |
창간 기념일 | 1952년 4월 20일[1]([age(1952-04-20)]주년) |
대표이사 | 김여송 |
웹 사이트 | |
소셜 미디어 | | | |
본사 위치 | |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24 (금남로3가 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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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남 최초 지령 2만 호 |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지역을 대표하는 일간지. 광주·전남에서 역사가 제일 오래된 신문이다. 모기업은 효성그룹이다.
2. 기업의 정신
2.1. 사시
2.1.1. 통합 이전
2.1.1.1. 전남일보 - <우리의 신조>
1952년 2월 10일에 제정했다.1. 우리는 공정, 정확, 신속으로 보도사명의 완수를 기한다.
2. 불편부당한 언론으로써 민족의 총단결을 기한다.
3. 문화계발로써 민족문화의 향상을 기한다.
4. 민족의식의 진작으로써 통일과 부흥과업의 약진을 기한다.
2. 불편부당한 언론으로써 민족의 총단결을 기한다.
3. 문화계발로써 민족문화의 향상을 기한다.
4. 민족의식의 진작으로써 통일과 부흥과업의 약진을 기한다.
2.1.1.2. 전남매일신문
- 사시
1. 공평과 중정의 존중: 빠르고 공정한 보도와 엄정한 논평으로 민주언론 창달의 선두에 선다.
2. 지역개발의 참여: 이 고장 모든 분야 발전에 봉사 헌신하여 그 수준을 끌어올림에 힘쓴다.
3. 국리민복의 도모: 대중 속에 호흡/생활하여 그 권리와 복지를 증진시키는 진정한 대중의 반려가 된다.
2. 지역개발의 참여: 이 고장 모든 분야 발전에 봉사 헌신하여 그 수준을 끌어올림에 힘쓴다.
3. 국리민복의 도모: 대중 속에 호흡/생활하여 그 권리와 복지를 증진시키는 진정한 대중의 반려가 된다.
- 발행 자세
1. 우리는 공정과 정의의 대도에서 대중의 이익을 위한 신문을 만드는 것이다.
2. 우리는 신속, 정확을 기하며 대중의 생활 속에서 대중의 생활을 위한 신문을 만드는 것이다.
3. 우리는 지역사회를 통하여 민족과 조국의 번영을 세계무대로 이끌어가기 위하여 신문을 만드는 것이다.
2. 우리는 신속, 정확을 기하며 대중의 생활 속에서 대중의 생활을 위한 신문을 만드는 것이다.
3. 우리는 지역사회를 통하여 민족과 조국의 번영을 세계무대로 이끌어가기 위하여 신문을 만드는 것이다.
2.1.2. 통합 이후
1. 불편부당의 정론을 편다.
2. 문화창달의 선봉에 선다.
3. 지역개발의 기수가 된다.
2. 문화창달의 선봉에 선다.
3. 지역개발의 기수가 된다.
2.2. 사가
전남일보 시절인 1970년 1월 27일에 제정했으며 작사는 허연, 작곡은 김형구가 맡았다.(1절) 가시덤불 헤치며 성실한 나날 / 새 나라의 고동이 메아리친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웃음을 심는 / 새 역사의 모습이다 등불이다 (2절) 거친 바람 헤치고 참아온 나날 / 새 살림을 알뜰히 가꾸면 산다 거리마다 가슴마다 꽃씨 뿌리는 / 새 세대의 자랑이다 길잡이다 (후렴) 빠른 소식 큰 사명 양심의 목탁 / 굳세어라 빛나라 광주일보[2] |
3. 역사
6.25 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 10월 7일에 전남시국수습협의회 선전부가 귀속 재산인 호남신문 사옥을 인수해 창간한 지역 기관지 <전남일보>[3]가 탄생했다. 1951년 봄에는 前 호남신문, 동광신문 출신의 간부들을 모아 발행인 고광표, 주필인 남봉 김남중, 편집국장 한규종, 편집부국장 고문석, 서두성 등으로 진용을 재편했다.그러나 광주에 복귀한 이은상이 전라남도를 상대로 사옥명도소송을 제기하고 호남신문 사원들을 규합해 사내가 동요했다. 1951년 호남신문 사원들이 통행금지 시간에 전남일보 사옥을 강점하여 호남신문 속간호를 발행했다. 이리하여 사옥 명도소송에서 호남신문이 승소하자 도 기관지로서의 전남일보는 1951년 12월 1일부로 정간되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에 김남중 주필이 이은상에게 호남신문의 사옥과 시설을 넘겨주고 나와 부산 임시정부로부터 전남일보의 판권을 허가받아 1952년 2월 10일부터 민간지로 다시 태어나며 역사가 시작됐다. 전남일보는 1960년부터 조석간을 시도하였으나 1962년부터 석간으로 바뀌었다.
초기에는 충장로1가 대한통신 전남지사 건물에서 시작해 얼마 안 가 금남로5가 자리, 1955년 3월 6일 금남로2가 구 동구청자리 전일인서관, 1958년 충장로3가 하니문화관을 전전하다 1962년 금남로1가 1번지에 전일빌딩이 세워져 이곳에 정착했고, 1965년 주식회사로 법인화하여 1971년에는 전일방송도 개국했다. 같은 해에 1952년 2월 10일을 '속간'에서 '창간'으로 바꾸었다. 또 1978년에는 호남전기(훗날 로케트전기)까지 인수하였다.
1980년 11월 30일 언론통폐합 과정에서 전남매일신문[4]을 흡수해[5] 광주일보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합병 후에도 전남일보의 지령(紙齡)을 계승한다. 다만 구 전일과 전매 자산은 1980년에 세워진 신규법인으로 넘어갔으며, 기존 전남일보 법인은 '전일실업'이 됐다.
2003년부터 대주건설에 매각된 후 이듬해 HH레저로부터 골프장 사업을 넘겨받아 함평다이너스티컨트리클럽을 열었다. 2007년에는 장흥사업부를 '장흥다이너스티'로 분할시켰다.
2010년에 대주가 부도나자 2014년부터 회생절차에 들어갔고, 2015년 8월에 효성그룹이 행남사(행남자기)와 컨소시엄을 만들어 인수해 대주주가 되었다. 이에 따라 신문사업부가 동명의 신규법인으로 넘어가서 기존 법인은 골프장 사업부문만 남긴 채 이듬해 서진건설로 넘어가 '함평엘리체컨트리클럽'이 됐다.
또 2011년부터 채널A와 제휴했지만 얼마가지 않아 삭제됐다.
4. 역대 임원 및 간부
4.1. 통합 전
4.1.1. 전남일보
- 회장
- 김남중 (1975~1980)
- 사장
- 김남중 (1952~1975)
- 김종태 (1975~1980)
- 부사장
- 김희중, 서두성 (1960~1962)
- 박진동 (1969~1980)
- 김종태 (1972~1975)
- 주필
- 김남중 (1952~1958)
- 서두성 (1956~1960)
- 이원기 (1960~1961/1964~?)
- 김재희 (1960/1961~1964)
- 박인성 (1965~1980)
- 부주필
- 김재희 (1958~1960)
- 양동균 (1960~1973)
- 논설위원실장
- 박진동 (1975~?)
- 편집국장
- 김남중 (1952)
- 조옥환 (1952~1958)
- 서두성 (1958~1960)
- 이원기 (1960/1961~1964/1965~1966)
- 김재희 (1961~1962)
- 박인성 국장서리 (1964~1965)
- 박진동 (1966~1969)
- 김종태 국장대리 (1969~1972)
- 김효중 (1971~1974)
- 최승호 (1974~1978(대리)/1978~1980)
- 박광순 (1975~1976(서리)/1976~1978)
- 마삼열 (1980)
4.1.2. 전남매일신문
- 회장
- 심상수 (1973~1980)
- 부사장
- 심상우 (1971~1973)
- 임재수 (1973~1976)
- 한상운 (1978~1980)
- 주필
- 서두성 (1960~1962)
- 장기웅 (1969~1970)
- 한상운 (1973~1976/1978~1980)
- 이경재 (1977~1978)
- 편집국장
- 이교은 (1960~1963)
- 박철 (1963~1966)
- 한상운 (1966~1969)
- 임재수 (1969~1972)
- 정공진 (1972~1976)
- 신용호 (1976~1980)
4.2. 통합 후
- 명예회장
- 심상우 (1980~1981)
- 김종태 (2003~2006)
- 회장
- 김남중 (1983~1987)
- 김종태 (1994~2003)
- 허재호 (2003~2009/2012~2015)
- 김종택 (2010~2012)
- 대표이사 회장
- 김여송 (2022~)
- 대표이사 사장
- 김종태 (1980~1994)
- 최승호 (1994~2002)
- 김형준 (2002~2003)
- 손영호 (2003~2004)
- 백인호 (2004~2006)
- 김진영 (2006~2009)
- 유제철 (2009~2012)
- 김여송 (2012~2022)
- 부사장
- 윤선호 (1980~1981)
- 박진동 (1981~1988)
- 최승호 (1993~1994)
- 남상용 (1994~1996)
- 박현규 (2009~2010)
- 주필
- 최승호 (1982~1988)
- 신용호 (1988~1993)
- 공이송 (1994~1997)
- 조동수 (1997~2003)
- 서영진 (2003~2005)
- 신항락 (2014~2015)
- 이홍재 (2015~ )
- 논설주간
- 신용호 (1980~1982)
- 장기웅 (1980~1985)
- 신항락 (2010~2014)
- 논설위원실장
- 공이송 (1993~1994)
- 조동수 (1994~1997)
- 김종남 (2000~2002)
- 서영진 (2002~2003)
- 김동영 (2006~2008)
- 정재현 (2009~2010)
- 수석논설위원
- 정현채 (1988)
- 전진한 (1990~1993)
- 기현호 (2014~2015)
- 박치경 (2015)
- 편집국장
- 마삼열 (1980~1982)
- 신용호 (1982~1985)
- 정현채 (1985~1988)
- 전진한 (1988~1990)
- 공이송 (1990~1993)
- 조동수 (1993~1994)
- 이용호 (1994~1998)
- 김종남 (1998~2000)
- 서영진 (2000~2002)
- 유제철 (2002~2003)
- 김진영 (2003~2005)
- 지형원 (2005~2006)
- 신항락 (2006~2009)
- 조경완 (2009~2012)
- 기현호 (2012~2014)
- 정후식 (2014~2017)
- 김일환 (2017~2019)
- 최재호 (2020~ )
5. 특징
정치색은 크게 뚜렷하진 않으나, 굳이 따지자면 민주당계 정당 성향을 띄고 있다. 물론 열이면 열 모든 사안에서 그쪽을 대변하기까지는 않는다.전라북도 소식을 따로 다룬다.
고교야구 9대 대회[6] 중의 하나인 무등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주최사였다.
6. 정기 간행물
- 월간예향 (1984~2002/2013~ )
7. 주요 행사
- 호남예술제
- 3.1절 전국마라톤대회
- 무등기 전국고교야구대회 (1994~2010)
- 광주일보 리더스아카데미
8. 참고 자료
[1] 역사가 꽤 복잡해 이날을 공식적인 창간 기념일로 정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역사' 문단 참고.[2] 1980년 언론통폐합 이전에는 후렴구가 '전남일보'였다.[3] 후술할 김남중 가문의 동명의 신문과 1988년에 창간한 전남일보와도 연관이 없다.[4] 1960년 9월 26일에 창간했으며, 5.18 민주화운동 당시 보도통제에 맞서 절필선언을 한 기자들이 이 신문사 소속이었다. 1989년에 창간한 전남매일과는 연관이 없다.[5] 이때 계열사였던 전일방송도 종방되었다.[6] 대통령배(중앙일보), 청룡기(조선일보), 황금사자기(동아일보), 봉황대기(한국일보) 등 4개 대회를 메이저 4대 대회로 일컫는다. 지방 대회로는 화랑대기(부산일보), 대붕기(매일신문), 무등기(광주일보), 미추홀기(인천일보) 등 4개가 있었으며 전국체전 고등부까지 포함하면 총 9개의 고교야구대회가 한 해에 열렸다. 고교야구 주말리그의 도입으로 지방대회 4개 대회가 폐지됐고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가 주관하는 협회장기 대회가 생겼으며 최근에는 기존의 메이저 4대 대회에 협회장기를 추가하여 메이저 5대 대회로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