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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08:36:58

노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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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1966) 윤여정 · 지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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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기(1968) 강태기 · 김시원 · 김하림 · 정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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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현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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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동양방송 로고_White.svg 연기대상 최우수 남자 연기상[1]
이낙훈
(1978년)
노주현
(1979년)
(한국방송공사언론통폐합으로 합병으로 인한 폐지)

}}} ||
}}} ||
<colbgcolor=#C1B4AD><colcolor=#FFFFFF> 노주현
盧宙鉉|Noh Joo-hyun
파일:배우노주현.jpg
본명 노운영 (盧運永, Noh Woonyoung)
출생 1946년 8월 19일[2] ([age(1946-08-19)]세)
서울특별자유시 종로구[3]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광주 노씨 (光州 盧氏)
신체 174cm, A형
가족 2남 1녀 중 셋째
배우자 최성경(1977년 결혼 ~ 현재)
딸 노승희, 아들 노우석
학력 서울청계국민학교[4] (졸업)
배재중학교 (졸업)
배재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영화과[5] / 학사)
종교 개신교
데뷔 1967년 TBC 5기 공채 탤런트[6]
수상 2005년 KBS 연예대상 베스트 엔터테이너상
1989년 KBS 연기대상 남자 최우수 연기상
1979년 TBC 최우수 남자 연기상
1971년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

1. 개요2. 생애3. 활동4. 주요 출연작
4.1. 드라마/시트콤4.2. 영화4.3. 예능4.4. 공연
5. 여담6. 논란
6.1. 섭외 안 들어와 발언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배우.

2. 생애

1946년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3남매 중 막내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6.25 전쟁 때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홀어머니[7] 아래에서 자랐다. 그의 형은 LG전자 부회장을 지냈던 노용악[8], 누나는 화가인 노숙자 씨.[9]

3. 활동

1967년 동양방송 공채탤런트로 연기경력을 시작해서 곧바로 주목을 받았으며[10],
청춘극장에 나온 노주현의 모습 (맨 왼쪽)
1970년대엔 한진희와 함께 TBC 멜로드라마의 단골 남자주인공으로 활약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 즉, 언론 통폐합 이전에는 TV드라마는 TBC가 KBS, MBC에 비해서 압도적이었는데, 그 TBC의 간판 남주 투톱이 노주현, 한진희였으며, KBS에는 이영하, MBC에는 이정길, 박근형의 투톱시대였다.[11] 당시 드라마, 예능에서는 워낙 민방 TBC의 위상이 높았기 때문에[12] 아직까지 대중들에게 1970년대 최고스타는 노주현, 한진희 라는 공식이 통용되는 것이다.[13] 지금의 장동건, 원빈만큼 유명한 꽃미남 스타로 유명했었다.
파일:l_2012111102000348400113312.jpg
파일:external/img2.sbs.co.kr/CH57683124_w320.jpg
젊은 시절 중장년 이후 현재 모습

그리고 40대가 된 이후 198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 이전에는 주로 높으신 분으로 출연하여 점잖은 이미지를 보여 주었다. 대표적으로 김수현이 집필한 사랑과 야망의 장홍조 역 등. 1990년대 초 드라마인 제3공화국에서는 장도영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높으신 분 전용 배우의 대표격인지라 도저히 코믹 연기하고는 접점이 없어보였지만 이후 미국 이민과 복귀를 거치고 돌아온 2000년 12월 김병욱 PD의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주인공으로 출연해 코믹의 극치를 보여주면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다. 아니, 이미지 변신을 뛰어넘어 당시 노주현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컬처쇼크를 줬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한국판 호머 심슨이라고 불릴 정도로 단순무식한 아버지를 기가 막히게 잘 살려냈으며 그 덕분에 노주현을 잘 몰랐거나 중후한 이미지로만 알아서 그다지 친근감을 느끼지 못했던 당시의 어린이 청소년과 젊은 시청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엄청나게 높아졌다.[14]

2009년 여자 아이돌 스타들과 함께 농촌 생활을 체험하는 이야기를 다룬 예능 프로그램인 청춘불패에 고정 출연했다. 예능 프로그램으론 최초. 왕년의 청춘스타가 이젠 딸, 조카뻘 아가씨들과 시골에서 재미있게 지낸다는 컨셉 때문에 중년층 이상 시청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4. 주요 출연작

4.1. 드라마/시트콤

4.2. 영화

4.3. 예능

4.4. 공연

5. 여담


파일:UHLSnNl.png

6. 논란

6.1. 섭외 안 들어와 발언

'박근혜 지지자' 노주현, 문재인 정부 저격? "오비이락…드라마 섭외 안 돼"

2019년 5월 7일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 출연해서 인터뷰 하는 도중 최근 활동을 묻는 진행자의 질문에 “(활동하지 않은지) 2년 됐다. 오비이락으로 문재인 정부 들어서 1편도 섭외가 오지 않는다”라고 답했는데, 이 발언은 마치 정치적인 이유로 문재인 정부에서 압박을 가해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 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 논란이 되었다. 오비이락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농으로 말한 느낌이 있지만, 사건이 사건이니 만큼 단순 농으로 넘기기 힘들다는 점이 큰 문제이다.[35]

노주현은 대표적인 보수 우파 지지 연예인으로, 그와 더불어 이순재, 최불암, 송해, 이덕화 등이 보수 우파 지지자로 알려져 있다. 노주현은 이순재, 최불암과 18대 대선 당시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산하 '문화가 있는 삶' 추진단에서 활동하며 박근혜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 지지 활동을 벌였던 적이 있다. 이와 같은 보수 지지 성향의 연예인이 "문재인 정부 들어서 한 편도 섭외가 오지 않는다"라는 발언을 한다면 아무래도 발언의 진위 여부 논쟁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수 우파 진영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던 다른 인물들이 문제없이 미디어에 잘만 출연하고 있어[36] 노주현의 발언은 매우 신빙성이 떨어지는 상황이다. 앞서 언급했던 이순재, 최불암, 이덕화 등이 현재까지 활발하게 방송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며 복수의 방송사 드라마 PD는 "노주현의 발언이 매우 뜬금없었는지 의아하다"고 전했다(...) 한 PD는 "직접 경험하진 못했지만,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회사에서 특정 배우의 출연을 막았다고 들은 것은 있다"면서 "현재는 그런 일들은 거의 없다"고 못박았다. 또 다른 PD는 "방송사에서는 드라마 한 편에 명운을 걸며 철저하게 산업 논리로 간다"면서 굳이 진실을 말하면 "트렌드와 캐릭터 등을 통해 배우를 섭외하는데, 최근의 트렌드와 노주현 씨의 이미지가 잘 들어맞지 않아서 섭외가 안됐을 수도 있다"고 간략하게 언급했다. '보수 지지' 노주현 "文정부 들어 섭외 안돼"..사실일까

노주현이 특별한 정치적인 의도 없이 정말 시기적으로 딱 맞는지라 "문재인 정부 들어서"라는 표현을 쓴 것인지 아니면 정말 정치적인 성향 때문에 무언가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의도적으로 언급한 것인지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인지라 당사자를 제외하면 아무도 모를 일이다.

문제의 발언 일주일 뒤인 2019년 5월 14일 노주현이 결국 한 드라마에 캐스팅 확정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노주현, '내 이름은 트로트' 출연확정…5년만 브라운관 복귀 또 한번 발언의 신뢰성이 하락하는 부분이기는 하다. 이에 '섭외가 없었다'라는 발언은 5월 7일에 있었고 1주일 뒤인 14일에 와서 드라마 주연으로 확정되었으니 7일 시점에서 '1편도 섭외가 들어오지 않았다'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으나, 섭외 이후 캐스팅 확정이 일주일도 안돼서 이루어졌을지는 의문이다.

묘하게 이 발언 이후 TV조선 드라마 결혼작사 이혼작곡에도 캐스팅되었다.

종합적으로 당사자가 캐스팅이 잘 안되는 이유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닌 현재 나이가 70이 훌쩍 넘었기 때문에 캐릭터 폭이 좁아진걸로 보인다. 노주현보다 한살 많은 탤런트 장용만 보더라도 50~60대 때는 주말드라마 황제로 불릴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최근들어 뜸해진걸 보면, 강인한 아버지 상을 보여줘야 할 나이가 너무 늙어서 나오면 표현이 전달이 제대로 안될수 있기 때문에 제작사측에서 다소 캐스팅을 꺼리는 것도 있다.

웃긴 건 이 사람은 2009년에 실제로 일어난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때에는 입을 꾹닫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당시 논란을 정리하면 탤런트 노주현이 아무 맥락없이 말한 갑작스러운 발언이라 매우 뜬금없는 경우였다고 평가할 수 있고, 당시 대중의 반응은 혹시 정치병에 걸린것이 아닌가? 등의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1] 당시에는 대상이 따로 없었고, 최우수 남자·여자 연기상이 최고의 상이었으나, 1979년에 한정해 대상이 부활해 강부자가 수상했다.[2] 음력 7월 23일[3]서울특별시 종로구[4] 現 서울청계초등학교[5] 現 연극영화학[6] 참조[7] 1916년 12월 10일 출생, 2017년 당시 한국나이 101세 병상에 있는 모습이 나왔다. 어머니(김용자)는 이화학당 출신으로 젊은 시절 ‘종로 거리를 걸어다니면 그 거리가 훤해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미인이었다고 한다. 2019년 3월 22일에 소천하였다.[8] 1940년생이고 노주현과 배재고 동문이다. 노용악이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후 금성사(LG전자)에 입사한 1965년에 노주현은 배재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연영과에 입학했다. 2021년 12월 12일에 별세했다.[9]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교직에 몸담았는데 이 때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바로 왕영은이다.[10] 그가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1970년대 초 한진희가 주연을 맡기 시작하는 시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짧지만, 사실상 드라마 쪽은 노주현의 독무대였다.[11] 당시에는 방송사별로 전속 탤런트제도가 있었다.[12] 그 TBC 드라마의 위엄이랄 수 있는 것이 흔히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로 꼽히는 정윤희, 장미희, 유지인 3인은 영화와 드라마 양쪽 모두에서 스타였지만, 드라마의 경우 3명 모두 TBC에서만 활동했다. 영화가 아닌 드라마 여자 탤런트 경우 KBS의 한혜숙, MBC의 김자옥, 김영애가 1951년생 동갑내기로 1970년대 브라운관의 트로이카로 불리기도 했다.[13]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TBC 출신 인기PD와 작가들이 이적하면서 다른 방송사 드라마들이 인기를 끌었으며 MBC에서 임채무사랑과 진실 주인공으로 1980년대 인기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후에 방송에 출연해서 과거를 얘기하던 노주현은 직속 후배였던 한진희를 인정하지만, 임채무에게는 "에이 임채무는 나한테 안 됐지"라며 자기보다 약간 아래로 보는 듯한 농담을 했다. 물론, 농담이었으나 확실히 주연 커리어가 본인들보다 늦은 임채무를 경계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이가 딱 3살 차이다. 다만 임채무는 노주현과 다르게, 해병대를 나온 뒤인 20대 중반에 공채배우로 데뷔했다. 더구나 30대가 넘어서 주연으로 자리잡아 이것도 노주현보다 조금 걸렸다.[14] 재미있게도 이는 극중 노주현의 아버지인 노구 역할로 출연한 신구도 마찬가지. 노주현에 비해서는 그 충격이 덜했지만 이쪽도 그 동안의 이미지와는 180도 다른 연기였다. 비슷한 시기 방영했던 태조 왕건에서 신구가 맡은 왕륭 역할과 노구 역할을 비교해 보면 이미지의 차이가 상당히 큰 편이다.[15] 서민정은 똑바로 살아라 극 중 노주현의 딸 노민정 역을 맡은 바 있다.[16] 551화 출연[17] 비열한 인물로 등장하며 장도영이 <제2공화국> 보다 깎아내려진 <제3공화국>의 경우 장도영 본인이 직접 인터뷰한 장면이 방영되기도 했다. 장도영이 인터뷰에서 한 해명을 나레이션이 직접 비판하는 장면까지 있다.[18] 극중 송승환의 해외 노동 출국에 보증을 서준 검사로 나온다.[19] 50화 출연[20] 1979년 6월 18일부터 1980년 5월 17일까지 방송된 일일연속극이다. 시골 소녀 곰례(정윤희)가 서울 도심 빈민가의 다리가 불편한 김영섭(노주현)에게 시집오면서 일어나는 각종 에피소드와 역경, 갈등을 그려내고 있다. 상류층의 화려한 생활에 초점을 맞추던 그동안의 드라마와는 다르게 도심 빈민가를 무대로 소외계층을 주인공으로 삼아 큰 눈길을 끌었다. 거기에다가 주,조연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과 함께 10.26, 12.12사태로 통금시간이 앞당겨지면서 사람들의 귀가시간이 앞당겨진 덕택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5개월 후 달동네를 집필한 나연숙 작가의 작품이다.#[21] 1978년 7월 30일에 방영한 납량특집극. 장미희와 노주현이 출연했으며, 장미희가 천년 묵은 구미호로 열연을 펼쳤다. 이후 거듭된 재방영 요청끝에 8월 6일에 다시 방송했다.[22] 1978년 11월 11일부터 1979년 3월 11일까지 방영한 주말 연속극.[23] 1978년 6월 24일부터 1978년 11월 5일까지 방영. 가족들을 부양하기위해 자기를 희생해가며 젊음을 바쳐온 한 여인이 순진한 청년과 사랑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24] 1978년 3월 11일부터 1978년 6월 18일까지 방영. 유지인, 장미희, 서미경, 정소녀, 노주현, 임성민 주연이었다. 역경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호스티스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관심을 끌었다. 바니걸스가 주제곡을 불렀다.##하지만 이전까지 방영되던 주말연속극들의 인기가 워낙 넘사벽 이었던지라,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25] 1978년 1월 16일부터 그 해 9월 30일까지 방영된 일일연속극. 노주현, 한진희, 이낙훈 주연으로 나전칠기를 소재로 하였으며 항상 기성세대에 대한 도전을 되풀이하고 그들에게 전통문화를 알리기 위한 세대 간의 갈등을 그렸다.당시 작품의 고증 및 연출에 참여했던 이칠용씨의 회고 방영 당시에 시간대를 여러번 옮겼는데, 처음에 8시 20분 연속극으로 시작해 이후 8시 40분 연속극으로 시간대를 변경했고, 또다시 시간대를 옮겨 최종회까지 9시 35분 연속극으로 방영되었다.[26] 1977년 6월 17일부터 10월 14일까지 금요드라마로 방영했다. 유명 극작가인 유호가 극본을 맡았으며, 하강일PD가 연출했다. 유지인, 노주현, 오현경이 주연배우로 출연해 큰 인기를 끌었다. 방영당시 높은 인기때문에 드라마 촬영도중 출연배우인 오현경이 수영복을 입은채 도망을 가는 웃지못할 일도 있었다. 장미희, 정윤희가 출연해 비슷한 시기에 방영된 '청실홍실'과 함께 2세대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본격적으로 개막시킨 작품으로 평가된다. #[27] 운요호 사건에서부터 한일합병전 조선군대해산까지의 민족의 격동기를 두 자매가 겪는 고난을 다룬 TBC 일일연속사극[28] 1975년 8월 3일부터 방송했던 연속극. 6.25 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했다. 유지인의 TV 드라마 데뷔작이며, 노주현은 극에서 군의관 역으로 출연한다.[29] 세 사람의 삼각관계를 그린 드라마이다. 주인공 동수(노주현)가 본처가 있는데 외국 유학을 가서 애인이 생겨 동거를 하다 같이 귀국하여 고민한다는... 내용이다. 외국에서 만난 애인 지은은 고은아가 연기, 본처 양순 역은 아씨로 유명한 김희준이 연기했다.[30] 아씨의 후속 일일연속극. 1961년 개봉했던 동명의 영화의 리메이크 작이다.[31] 70년 8월부터 71년 9월까지 300회가 넘게 방영된 TBC 매일 연속극[32] 노무현 전 대통령은 탤런트 노주현과 마찬가지로 8.15 광복으로 일제강점기 체제가 끝난 이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 시기를 겪지 않았고, 민주화 이후인 1988년에 정계에 입문해 군사정권과 직접적인 대립을 하지 않았다는 점과 더불어 대통령 당선 당시 인터넷 팬클럽을 통해 자발적인 후원으로 당선된 최초의 케이스이면서 21세기에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이라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당시에는 신세대 정치인으로 언론에서 평가했다.[33] 노주현의 본명은 노운영이다. 노주현이라는 예명으로 활동을 하게 된 이유는 작명인에게 노운영이란 이름으로는 결혼을 3번 한다는 말을 들어서 그렇게 바꾸었다고.[34] 1990년대 초반은 가히 내의업체 자체의 최전성기로. 한창 왕성히 활동하던 남자 연예인들을 간판 모델로 기용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당시 경쟁업체였던 쌍방울 트라이는 이덕화의 문짝 내려치기로 공전의 히트를 쳤고, 또 다른 라이벌 BYC유인촌김영철을 번갈아 기용하면서 자존심 대결을 했다.[35] 실제로 그 이유가 무엇이든 2년 동안 작품 활동을 쉬는 배우가 한둘이 아니라는 점도 노주현의 발언의 진정성을 떨어뜨리고 있다.[36] 이순재의 경우 2020년에 매니저에 대한 갑질이 논란이 되기는 했는데 그건 이순재의 부인과 연관된 문제로 이순재 본인과 직접 관련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갑질 논란에 대해서는 본인이 인정하고 피해자인 매니저에게 직접 사과 의사를 밝혀 매니저 본인과 합의하여 매듭지었다. 무엇보다도 해당 논란의 경우 정치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순재와 마찬가지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던 송재호도 문재인 정부 출범한 2017년 이후 2020년 작고할 때까지 배우 활동을 잘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