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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21:51:12

클론(가수)



파일:클론 로고 White.png

구준엽
강원래

[ 음반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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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론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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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가요대상 대상
룰라
<날개 잃은 천사>
(1995년)
클론
<꿍따리 샤바라>
(1996년)
H.O.T.
<We are the Future>
(1997년)

}}} ||
파일:attachment/클론(11_zeussr1.jpg
왼쪽부터
구준엽강원래
<colbgcolor=#000><colcolor=#fff> 클론
CLON
그룹명 클론
CLON (영어)
장르 댄스, 일렉트로니카
활동 기간 1996년 ~ 2005년[1], 2017년[2]
데뷔 1996년 정규 1집 〈Are You Ready?〉
소속사 미디어라인엔터테인먼트
링크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1. 개요2. 역사
2.1. 데뷔 전2.2. 데뷔 후2.3. 대만 진출2.4. 비극에서 재기로
3. 음반 목록4. 여담5. 수상 경력
5.1. 시상식5.2. 가요 프로그램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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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원래구준엽으로 구성되어 1996년부터 2005년까지, 2017년부터 다시 활동한 대한민국의 댄스 듀오.

2. 역사

2.1. 데뷔 전

경기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3]인 강원래와 구준엽은 당시 학교와 인근 지역에도 잘 알려진 춤꾼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함께 춤을 추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으며, 이태원의 클럽들을 돌아다니면서 당시 서울에서 잘 나가던 춤꾼들 사이에서도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졸업 후 댄스경연대회에서 강원래가 1위, 구준엽이 4위로 입상한 것을 계기로 이수만에게 발탁되어 1990년현진영이 주축이 된 '현진영과 와와'에서 1기 멤버로 활동했지만,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군에 입대하면서 '현진영과 와와'에서 탈퇴했다. 엄밀히 말해서 '와와'는 전속 백댄서의 개념이었기 때문에 탈퇴는 아니고 하차에 가깝지만. 이들을 대신해 후속으로 들어온 와와 2기 멤버가 이현도김성재.[4]

전역 후에 구준엽1993년이탁(본명 이광민)과 '탁2준2'로 활동했고,[5] 강원래 역시 가수들의 백댄서로 생활하다가 1995년박미경이 발표한 '이브의 경고'에 객원 랩퍼로 활동하며 가수로서의 성공 가능성을 열어갔다.[6][7]

이후 라인음향의 히트 제작자이자 작곡가인 김창환에게 발탁되어 1996년에 데뷔한다.

2.2. 데뷔 후

김창환의 구원투수가 된 클론[8]은 '꿍따리 샤바라'로 데뷔했다. 1996년은 당대 최고의 가수인 솔리드, R.ef, 신승훈, 김건모가 컴백해서 활동하던 시기였으며 이들 모두가 음반을 발매하자마자 한 달도 안 되어 1위 후보에 오를 만큼 정말 각축전이 심한 시기.[9] 나머지 곡들도 꽤 오랫동안 순위권에 머물 정도로 명곡들이 많았다.[10]

강원래와 구준엽은 공식 데뷔만 늦을 뿐, 활동한지는 이미 10년이 지난 중고 신인이고 기성 가수들과 활동한 경험이 많아 능수능란하게 적응을 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으며 제작사에서는 앨범 발매 전부터 미리 클럽 등지에 데모 테입의 형태로 꿍따리 샤바라를 배포해 두면서 크게 홍보를 한 결과 이들은 앨범을 발매한지 1달도 안 되어 각 방송사의 1위 후보에 올랐다.

이들은 이 기세를 몰아서 당대 최고의 가요프로 가요톱10에서 김건모가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던 솔리드, R.ef, 신승훈 등과의 경쟁을 뚫고 '스피드'로 4주 연속 1위를 한 다음 대망의 골든컵에 도전할 때 그 기록을 저지하고 새로운 최강자로 우뚝 서게 되었으며 그 날 이들은 가요톱10 첫 1위가 확정되자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11] 이 날 김건모는 바로 전년도까지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라인음향 소속의 클론이 1위를 할 때 축하를 했지만 속으로는 아쉬움을 참아내는 기색이 역력했다.[12]

구준엽이 훗날 술회하기를 김건모와 클론은 원래 친했으나 김건모가 김창환과의 불화로 인해 회사를 나가면서 김건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1위 발표 후 같이 얼싸안을 때 구준엽은 김건모의 몸에 손도 안 댔다고 한다. 당시 자료화면을 보면서 그 당시는 너무 어려서 저런 행동을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뒤 이들은 그 여세를 몰아 '꿍따리 샤바라'로 다른 경쟁작인 룰라의 '3!4!'와 DJ DOC의 '여름 이야기'와의 경쟁 끝에 골든컵의 주인이 되었으며 1집의 후속곡인 <난>도 1위 후보에 오르면서 입지를 탄탄히 다졌고, 삼속곡으로는 <영화처럼>을 짧게 선보였다. 높은 인기를 증명하듯이 1996년에 개최된 SBS 스타상과 서울가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다.[13]

1집의 기세를 이어서 1997년 6월에는 2집인 여름 바캉스 곡인 <도시탈출>을 선보였을 때[14] 반응은 기획 단계부터 1집의 성공을 너무 크게 의식한 나머지 <쿵따리 샤바라>의 아류작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평가를 떠나 제작자의 앨범 홍보 방향부터가 대놓고 '쿵따리 샤바라 2'였다. 심지어 도시탈출 뮤직비디오 로고에 부제를 대놓고 '쿵따리 샤바라 2'라 칭하기도. 이와 같은 전략을 통해 안전주의적인 선택으로 적당한 인기를 얻긴 했으나, 방송 3사에서 골든컵을 비롯해 각종 1위를 쓸어남았던 전년도의 열풍에는 훨씬 못 미치는 인기였다.

그래도 슈퍼루키 시절의 인기를 통해 여러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 후보에 상당수 진입한 바 있으며 후속곡인 발라드 풍의 '빙빙빙'도 10위권을 유지하면서 선전했다. 음반 판매량이 1집의 밀리언 셀러에서 수직으로 하락해 20만장 대에 그치긴 했지만, 다행히 클론이 기존에 보여준 카리스마있는 이미지와 세련된 비트, 친근한 멜로디 등등의 음악적인 이미지와 컨셉은 그대로 이어갔기 때문에 2집이 부진했던 것에 비하자면 브랜드 파워는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또한 1집의 인기가 워낙 컸기 때문에 2집이 상대적으로 부진하긴 했지만 절대적인 인기가 부족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또한 이 무렵부터 한류 열풍에 슬슬 불을 지피면서 당시에 대만 쪽으로 프로모션을 하게 되어 가수로서, 연예인으로서 새로운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약 1년 반의 공백기를 가진 후 1999년 3월 27일 3집을 발매했다. 두 멤버 모두 강렬한 랩핑과 낮은 음역대의 허스키 보이스를 가지고 있어 기존 멤버들만으로는 음악적인 변화를 꾀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그러한 이유로 파워풀한 가창력을 지닌 객원멤버 김태영과 함께 활동했다. 테크노 리듬과 펑키 리듬을 접목한 <돌아와>를 통해 2집의 부진을 어느 정도 만회했고 이를 통해 한국에서의 하락세를 반등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외에도 <Funky tonight>, Nazareno(1975)의 O.S.T인 When a child is born을 리메이크한 <사랑과 영혼> 등을 통해 앨범 활동을 이어갔으며, 두 곡 모두 이전 활동곡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린 비트와 레트로 느낌의 멜로디를 접목하여 음악적인 다양화를 기하였다.

또한 이 무렵에 대만에서의 인기가 본격적으로 터지면서 H.O.T., NRG와 함께 중화권 한류 1세대로 상징적인 인기를 누렸다. 대만 등 중화권은 1990년대 말 한류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전까지 여리여리하고 부드러운 이미지 혹은 비주얼 락계의 짙은 화장과 화려한 헤어스타일이 일반적이었던 J-POP이 대세였는데, K-POP 스타일이 이들과 크게 차별화되었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것이 곧 한류로 발전했다. 특히 클론이 내세운 강렬하고 남성적인 댄스 퍼포먼스가 신선하게 다가온 점이 주효했다.

3집에서의 반등 및 한류 열풍의 시발점으로 롱런의 기반을 다진 이후, 2000년 4월 4일에 4집 앨범을 발매했다. 당시 유행하던 테크노를 적극적으로 접목시켜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비트로 승부한 <초련 Techno Mix>는 기존의 클론 이미지와 아주 잘 부합하면서 대중적으로 부담없이 다가오는 곡이었고, 결국 나이트클럽 및 레크리에이션계를 섭렵하며 2, 3집보다 훨씬 많은 인기를 끌어 완벽하게 정상의 자리로 다시 올라섰다. 참고로 <초련 Original Mix>도 같은 정규 앨범에 수록되었는데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오락실 발판형 리듬 게임펌프 잇 업에 수록되면서 리듬 게임 유저층 위주로 알려지긴 했다.

KBS 뮤직뱅크에서 무려 4주 1위, MBC 음악캠프에서도 1위를 차지하면서 4년만에 다시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후속곡인 <거짓말> 역시 10위권 안에 드는 등 선전했다. 색상 반전으로 인한 충격과 야광봉 퍼포먼스의 손목 돌리기가 큰 이목을 끌며 유행을 탔고, 20대 나이트 시장을 정확히 타켓팅한 것이 주요한 성공 이유 중 하나였다. 초련의 대성공으로 음반판매량 역시 3집 27만 장을 훌쩍 뛰어넘는 41만 장의 판매량을 올렸다.

밀리언 셀러를 기록한 최전성기 1집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갈 만한 위상을 찾아올 수 있었고, 해외발 인기를 감안하면 1집 이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수준에 도달하면서 인기 가수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2.3. 대만 진출

성공적인 1집 데뷔 후 여름을 대표하는 남성듀오로 인기를 얻으며 '난', '도시탈출', '초련', '사랑과 영혼' 등의 각종 히트곡을 쏟아낸 것은 물론[15] 그 인기가 국외까지 퍼져 아시아권의 원조 한류가수라고도 불린 바 있다. 한류의 시조새 특히 대만에서 국빈 대우를 받을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대만에서는 '빙빙빙'[16]이란 노래가 히트하면서 당시 마이클 잭슨급의 인기[17]였다고 하니... 지금도 클론을 기억하는 대만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대만 활동 내용들이 대만 신문 1면을 장식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구준엽의 인기는 대단해서, 몇년 연속으로 대만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 1위에 선정되며, 대만 톱스타 '서희원'(대만판 꽃보다 남자의 주인공)과 사귀었다.[18] 그야말로 98~99년 당시 대만의 구준엽은 추후 일본의 배용준보다 더한 인기를 가지고 있었던 슈퍼스타였다고 보면 된다.[19]

일설에는 클론이 대만에 진출하게 된 계기가 다음과 같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인즉슨, YUKI라는 활동명의 대만 여가수 서회옥이 클론의 <도시탈출>을 무단으로 리메이크를 하였는데 이 노래가 대만에서 12주 연속 음원차트 1위를 기록했고, 이에 단단히 빡친 김창환 프로듀서가 대만 음반사 측에 원곡자인 클론을 반드시 명기하라고 항의를 했고, 이에 리메이크가 아닌 원곡을 좋아하는 대만 팬들이 늘어나면서 클론이 자연스럽게 대만으로 강제진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당시에는 클론을 비롯한 한국 가요의 무단 리메이크가 중화권(홍콩 제외)에서는 일상이었다. 그래서, 중국 대륙이나 대만이나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없거나 희박한 상태라 여러 한국 가요들이 정당한 저작권료를 정산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결국, 클론의 노래도 역시 제대로 된 저작권료가 없이 불법으로 리메이크가 되었다.

사실, 이 사건에 대해 클론 멤버 둘 다 직접적으로 밝힌 적은 없다. 다만, 화교 출신 음반 기획자가 대만 연예계 쪽에 다리를 놔줘서 둘이 자연스럽게 대만으로 진출했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언급했던 적은 있다. 이 화교 출신 기획자는 일명 '왕서방', '왕사장'으로 알려진 'ROCK RECORDS' 의 한국 지사 사장으로, 1990년대 중반 당시 주주클럽 등 한국에서도 많은 가수와 밴드들을 발굴했고 한국 연예계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덕분에 무단 리메이크가 판치던 중화권에도 주주클럽의 '나는 나', 이원진의 '시작하는 연인들을 위해' 같은 곡은 정식 절차를 밟고 리메이크된다. 특히 이원진의 경우는 장학우와 레진 벨라스퀘즈의 듀엣으로 리메이크되어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클론은 대만에서 초대형 콘서트를 준비 중에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후술하는 강원래의 교통사고로 인해 결국 무산되었다.

2.4. 비극에서 재기로

2000년 11월 9일 강원래가 오토바이를 타던 도중 현재의 신논현역 사거리[20]를 좌회전하는 과정에서 불법 유턴한 차량과 충돌, 하반신을 쓸 수 없는 몸이 되는 사고[21]를 당했다. 이 사고 때문에 강원래가 더 이상 춤을 추지 못하게 되면서 일차적으로 클론 활동이 전면 중단되었고, 그의 하반신이 영구 장애 판정을 받게 됨과 동시에 댄스 가수 활동 역시 불가능하게 되면서 끝내 잠정적으로 해체했다.[22] 2002년 클론의 역대 히트곡과 월드컵 응원가인 <발로 차>, 신곡 <랄랄라> 가 포함된 베스트 앨범을 발표하였다. 2002년 월드컵 시즌에 맞춰 두 곡은 큰 히트를 기록하였으며 MBC 게릴라 콘서트에 출연해 13000명의 관중을 동원하기도 했다.[23]

그 뒤 2005년 강원래가 휠체어를 이용한 안무를 만드는 투혼을 발휘해, 무명가수 원종찬[24]을 객원멤버로 합류시켜 5집으로 컴백했다. 타이틀곡은 '내사랑 송이'이며,[25] 휠체어 댄스를 보여주며 클론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한편, '소외된 외침'과 '무언의 발걸음(feat. 이정)' 이란 노래를 통해 장애인 이동권, 이들의 사회적 편견 문제 등과 같은 사회 비판적 메세지를 담았다. 강원래는 라디오 DJ로, 구준엽은 'DJ KOO'란 이름으로 솔로 가수 및 클럽 DJ로 활동하게 된다.

2006년에는 야후! 코리아Mnet이 제작한 '2006 꼬레 아리랑' 뮤직비디오에 참여하기도 했다. 뮤직비디오 영상 1분 2초경에 등장한다.#

2017년 6월 29일, 12년 만의 새 앨범 'We Are'을 발표하면서 컴백했다. 다만 과거의 스타일이 아닌 클럽풍 EDM 곡들인지라[26] 옛 모습을 기억하는 클론 팬들은 아쉬워하는 듯. 수록곡 중 2개 곡이 하드스타일을 시도하였다.

3. 음반 목록

4. 여담

5. 수상 경력

5.1. 시상식

연도 시상식 수상 부문
1996년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본상
KMTV 가요대전 인기가수상
서울가요대상 본상
서울가요대상 대상
SBS 10대 가수 가요대전 본상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1997년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본상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1999년 KMTV 가요대전 본상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서울가요대상 본상
문화부장관 표창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인기가수상
2000년 Mnet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댄스 부문
KMTV 가요대전 본상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공로상
SBS 가요대전 공로상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2001년 Mnet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공로상
2005년 장애인먼저실천운동본부 장애인먼저실천상 대상

5.2. 가요 프로그램 1위

연도 곡명 수상 비고
1996년 꿍따리 샤바라 7월 13일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1위
7월 14일 SBS TV가요20 1위
7월 17일 KBS 가요톱텐 1위[31]
7월 20일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1위
7월 21일 SBS TV가요20 1위
7월 24일 KBS 가요톱텐 1위
7월 27일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1위 (3주 연속) (BEST OF BEST)
7월 28일 SBS TV가요20 1위
7월 31일 KBS 가요톱텐 1위
8월 7일 KBS 가요톱텐 1위
8월 11일 SBS TV가요20 1위 (4주 연속)
8월 14일 KBS 가요톱텐 1위 (5주 연속) (골든컵)
2000년 초련 5월 9일 KBS 뮤직뱅크 1위
5월 16일 KBS 뮤직뱅크 1위
5월 20일 MBC 음악캠프 1위
5월 23일 KBS 뮤직뱅크 1위
5월 30일 KBS 뮤직뱅크 1위 (4주 연속)

[1] 강원래의 하반신마비 사고는 2000년 11월에 일어났지만, 2002 월드컵 시즌송 '랄랄라', '발로차', 2005년 정규 5집 ‘내사랑 송이’까지 활동이 이어졌다.[2] 이후로 음반 활동이 없다.[3] 84회 졸업생이다. 동기생으로 강용석, 주영훈, 이상복, 강현민, 정호성 등이 있다.[4] 이현도와 김성재도 '현진영과 와와' 활동을 접은 후 듀스를 결성해서 가요계에 데뷔했다.[5] 하지만 탁2준2는 이탁이 필로폰을 투약한 사건으로 인해 와해되었으며 이후 이탁은 현진영과 함께 'I.W.B.H.'라는 팀으로 활동했으나 이마저도 와해되면서 현재는 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6] <이유같지 않은 이유>에서 백댄서였던 강원래는 김창환의 랩 부분을 립싱크하며 주목을 받았고 그후 박미경 2집 때 김창환과 함께 직접 랩 파트를 맡았다.[7] 여담으로 강원래는 프리스타일이라는 팀명으로 박미경, 박진영과 함께 활동하려고 했지만 무산되었다.[8] 그룹 이름 '클론'은 유전학 용어로, 유전자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복제인간을 뜻한다. 멤버 두 사람이 한 몸처럼 춤과 댄스를 구사한다는 의미로 붙은 이름.# 다만 철자는 e가 빠져서 원래 클론 철자와는 다르다.[9] 다만, R.ef의 1집은 대부분 표절곡이다. 1집에 실린 고요속의 외침은 일본 곡, 상심은 벨기에 곡을 표절했다. 작곡가 홍재선은 R.ef뿐만 아니라 룰라 3집 '천상유애'로 크게 터뜨렸다.[10] 1996년 상반기 가요계는 1995년 9~12월에 쏟아진 명곡들이 1위 곡을 비롯한 10위권을 점령했으며 1995년 10월에 나온 음악이 1996년 6월에도 10위권 안에 있던 걸 감안하면 이 당시는 크게 롱런한 곡이 많았다는 뜻. 1996년 1월 3일부터 5월 1일까지 1위를 차지했던 곡은 모두 1995년에 발표한 곡.[11] 김건모가 4주 연속 1위를 했을 때에는 9표차 접전을 펼칠 정도였다.[12] 만약 김건모의 '스피드'가 골든컵 수상에 성공했다면 조용필에 이어서 4년 연속 골든컵, 정규앨범 4장 연속 골든컵 수상곡 배출로 신승훈, 서태지와 아이들도 달성하지 못한 대기록을 수립했을 상황이라, 친한 후배인 클론의 1위를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13] 특히 이 해에는 치열한 대접전으로 인해 가요톱텐에서 <쿵따리 샤바라>와 같이 골든컵을 수상한 곡은 김정민의 <슬픈 언약식>이 유일하며 1996년 발매 곡으로는 쿨의 <운명>이 유일하다.[14] 가요톱10에서 이 곡을 처음 선보였을 때 강원래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3부 반바지를 입고 나왔다.[15] 펌프 잇 업 게임 때문에 Funky Tonight도 꽤 인지도가 있는 편.[16] 홍콩의 가수 겸 배우인 두더웨이(杜德偉)도 번안해서 부르기도 했다.[17] 당시 마이클 잭슨이 대만에 방문했을 때 공연료가 당시 클론과 같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단지 안타깝게도 당시 수익배분 체계가 잘못되어 있던 것 때문에 공연을 중개하던 연예 기획사들이 중간에 많이 가로챈 영향으로 클론 멤버 두 사람은 배분을 별로 못 받아서 큰 돈을 벌지 못했다.[18] 2022년 3월 8일, 20여년만에 재회한 구준엽과 서희원이 결혼을 발표하였다.[19] 물론 일본보다 대만의 연예시장 자체가 작았던 영향도 있었을 것이지만 어찌되었건 각국 단기간 연예계 서열에서 정점은 분명 구준엽이 위였다. 구준엽과 강원래가 게이 커플이라는 식의 찌라시성 루머까지 돌 정도로 당시 대만에서의 인기는 대단했다.[20] 교보타워가 자리잡고 있는 그 사거리 맞다. 이 당시에는 서울 지하철 9호선 개통 이전이었다.[21] 이 이야기는 스펀지에서 380회에서 소개되었으며 사고 당시, 사고를 목격한 행인이 도로 한 가운데에 쓰러져 있는 강원래를 추후 있을지 모를 사고를 대비하여 인도로 옮겼다고 한다. 이로 인해 부러진 뼈가 중추신경을 누르면서 그대로 하반신 마비로 이어진 것. 만일 행인들이 그를 그냥 놔두었다면 하반신 마비를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척추나 경추 다친 사람을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고, 또 도로 위에 계속 있었다면 2차 사고로 사망할 위험도 컸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22] 시기상으로는 업타운이 대마초 사건으로 와해된 지 7개월, 젝스키스가 해체된 지 6개월, NRG의 멤버 김환성이 사망한 지 5개월이 지난 후였다.[23] 구준엽 혼자 클론으로 활동하였으며 당시 강원래는 녹음에는 참여하였으나 재활 치료가 완전히 끝나지 않아 활동은 불가능했고, 결국 베이비복스가 객원으로 나왔다.[24] 당시 예명은 '원우'.[25] 강원래의 아내인 안무가 김송에게 바치는 노래이다. 1989년 댄서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2000년 강원래의 교통사고 이후에도 변함없는 사랑을 이어와 결국 2003년 결혼에 성공하였다. 김송은 강원래가 사고 이후 재활치료를 위해 병원을 왔다갔다하던 2년여의 시간동안 그의 곁을 지키며 정신적으로 큰 의지가 되어주었다. 참고로 김송은 90년대 당시 박미경, 김건모 등 여러 인기 가수들의 백댄서이자 안무가로 활동하였고 1996년에는 김창환이 프로듀싱한 '콜라' 의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 때 구준엽의 솔로 앨범이 나왔는데, 강원래가 휠체어를 타고 컴백무대에 섰다.[26] 각자 라디오 DJ와 클럽 DJ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음악 성향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세월이 워낙 많이 흐르기도 했고.[27] 7월 13일에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 최초 1위를 차지했다.[28] 참고로 싸이더스 소속 연예인 중 한 팀이었다.[29] 구준엽이 서희원과의 스캔들을 언급하기 꺼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서희원이 이혼하고 구준엽과 교제하기 불과 몇달 전의 시점이라는 게 아이러니하다.[30] 당시 홍록기가 선임이었다고 한다.[31] 김건모의 정규앨범 4장 연속, 4년 연속 골든컵 수상을 저지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