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음반 제작사. 1990년 소규모의 음반기획사로 출발했지만 이후 많은 히트 가수들을 배출하며 90년대 초중반 대중음악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2. 연혁
라인음향은 주로 어학 학습용 테이프를 생산하고 유통했던 덕윤산업(대표 이성균)을 모기업으로 출범했다.시초는 1990년 덕윤산업에 근무하던 사맹석 부장에게[1] 당시 나이트클럽 DJ였던 김창환 프로듀서가 어느 무명 가수의 데모테이프를 내민 것이었다. 음반 제작 경험이 있었지만 실적은 신통치 않았던 사맹석은 이 음악을 듣자마자 잘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 음악의 주인공은 바로 90년대 발라드의 황제가 되는 신승훈으로, 바로 음반 제작에 들어가 1집과 2집이 연속 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는 대박을 친다.
그 후 김건모, 노이즈, 박미경, 클론이 연속적으로 히트 행진을 이어가면서 굴지의 음악 레이블로 성장하게 된다. [확대경] 패션음악 선두주자 라인음향 독주 언제까지.. 90년대 초중반 라인음향의 위세는 대단해서 기존의 음반시장을 대표하던 동아기획을 밀어내고 대영AV와 투톱을 이루면서, 1991년부터 1996년까지 6년 연속으로 소속 가수들의 가요톱10 골든컵 수상곡[2]을 배출했을 정도였다. 골든컵은 아니여도, 날 울리지마(신승훈), 널 사랑하니까(신승훈), 이유 같지 않은 이유(박미경), 혼자만의 사랑(김건모) 등도 가요톱텐 1위를 차지하며 막강한 세를 과시했다.
- 1991년 - 미소 속에 비친 그대(신승훈 1집)
- 1992년 - 보이지 않는 사랑(신승훈 2집), 우연히(신승훈 2집)
- 1993년 - 너에게 원한 건(노이즈 1집), 첫인상(김건모 1집)
- 1994년 - 핑계(김건모 2집), 그 후로 오랫동안(신승훈 4집)
- 1995년 - 잘못된 만남(김건모 3집), 상상속의 너(노이즈 3집), 이브의 경고(박미경 2집)[3]
- 1996년 - 꿍따리 샤바라(클론 1집)
1995년은 라인음향 최고의 전성기로 무려 3곡이나 골든컵을 수상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1996년 별들의 전쟁 시기에는 클론의 꿍따리 샤바라가 라인음향과 결별한 김건모의 스피드 골든컵을 1주차로 저지하고 골든컵을 수상했다.[4] 이후 클론은 90년대 후반 대만 등지에서 인기를 끌며 중화권 한류 가수의 시초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허나 9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불어닥친 1세대 아이돌로 대표되는 가요계의 재편 영향과 거듭되는 음반 실패[5], 98년 7월 세무조사 사건[6]과 내부 갈등 등으로 인해 이전의 위상이 무상하게 쇠락하고 만다. 다만 모기업이었던 덕윤산업 자체는 어학 콘텐츠를 중심으로 2020년대에도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김창환은 이후 라인음향을 나와[7] 한국음반산업협회 부회장이었던 김광환 사장과 손을 잡고 "우퍼엔터테인먼트"라는 새 회사를 세웠다. 이 우퍼엔터가 미디어라인엔터테인먼트로 사명 변경을 거쳐 CJ미디어 산하의 CJ미디어라인으로 변신했다. CJ뮤직이 생기면서 CJ미디어라인이 흡수됐다.
CJ미디어라인 당시 김창환은 클론의 사고와 홍경민의 군입대 공백을 대체할 새로운 신인으로 이정과 채연을 데뷔시키는데 이때 자회사 버프를 받아 CJ 산하 케이블 음악채널에서 뮤직비디오가 굉장히 많이 방영되었다. 이를 기억하는 80년대 후반 출생자들이 많은 편이다. 몇년 뒤 미디어라인은 CJ에서 다시 분리되었고, CJ와의 협업은 김광수 대표와 이루어져 엠넷미디어가 출범한다.[8]
3. 주요 연예인
4. 주요 제작자
- 김창환
- 천성일 : 본인이 소속했던 노이즈의 곡뿐만 아니라 소속 가수들의 곡 작업 시 작사와 작곡에 주요 참여하였다.
- 김형석 : 천성일이 댄스 음악을 주로 작업했다면 당시 김형석은 발라드 곡 작업의 비중이 높았다.[9]
- 김우진 : 편곡을 주로 담당했다. 최용준과 데뷔부터 함께 했으며 1992년 듀엣앨범 '야윈새의 추억'을 내놓았다.
[1] 이후 라인음향 대표가 된다.[2]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으로 1위를 차지하면 골든컵이라는 별도의 트로피를 수여하고 순위에서 명예졸업하던 제도.[3] 실질적으로는 3집이다.[4] 가요톱10에서 클론과 김건모가 1위 후보곡으로 대결했으며 클론이 1위로 선정되자 강원래는 김건모와 포옹했는데 구준엽은 김건모와 스킨십을 피했다. 훗날 방송에서 술회하기를 라인음향을 떠난 김건모에 대한 당시 감정이 좋지 않아 그랬다고 밝혔다.[5] 기존 소속 가수들이 떠나는 마당에 특히 대형 신인으로 기대를 모았던 콜라가 흥행 부진을 겪은게 컸다.[6] 상기된 96년 '확대경 패션음악 선두주자 라인음향 독주 언제까지..'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라인음향은 당시부터 많은 언론들에게 '다수의 밀리언셀러 음반을 보유한 회사이면서도 정확하고도 객관적인 음반판매량을 공개하지 않아 과세 현실화 문제에 전혀 기여하지 않고 있다'는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라인음향은 "언제든지 정확한 음반판매량과 과표공개를 선도할 의사가 있다. 그러나 아직은 국내 음반시장이 이러한 일들을 추진할 만큼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으며 라인의 여력도 모자란다. 잇따른 성공으로 이미 질시의 대상이 된 상태에서 그와 같은 일들을 선도해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면서 사실상 배째라 입장을 밝히고 있던 상태라 어찌보면 IMF까지 터진 마당에 예견된 참사기도 했다. 이때 경영진이 검찰 소환되면서 불똥이 김건모와 신승훈까지 튀어 둘도 탈세 의혹으로 고소당했다가 99년 1월 무혐의로 끝나기도 했다.[7] 90년대 후반 라인음향이 둘로 갈라지며 이때 김창환을 따라나온게 클론이었다고 한다.[8] 이들이 누리던 홍보들은 김광수 사단의 SG워너비, 씨야 등 자사 배출 신인가수들과 BIG4 등의 프로젝트 음원 출시가 연이어 이어지고 이효리의 단독 프로모션을 진행하기도 했다.[9] 김형석은 90년대 후반 들어 DR뮤직의 걸그룹 베이비복스를 전담하면서 댄스 장르 곡들을 다수 히트시키게 된다. 여담으로 이때쯤 김형석에게 프로듀싱 배우고 싶다고 졸라 제자로 들어가게 된 사람이 박진영이었다. 당시 박진영은 라인음향에서 일종의 연습생 생활을 하며 김건모 1집 백댄서를 하고 있었는데, 김창환은 93년 박진영을 박미경, 강원래(구준엽이라는 말도 있지만 당사자들이 강원래라고 말하는걸 봐선 강원래가 맞아보인다. 둘 다 클론이 되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 모양.)와 함께 혼성 3인조 그룹 프리스타일로 데뷔시키려 했으나 결국 이 세명을 묶을 컨셉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무산되었고, 이후 박진영은 삼호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해 솔로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