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와 양희은 등의 포크 가수들에게 곡을 주며 작곡가로 활동하던 한대수는 제대 전에 도움을 준 CBS 기독교방송 김진성 PD의 주선으로 신세계레코드에서 계약금 50만 원을 받고 데뷔 음반 녹음에 들어갔다. 당시 한대수에게 주어진 녹음 시간은 고작 8시간이었다고 한다. [3]
한대수는 여성 포크 가수 방의경의 기타를 빌려 드럼의 권용남[4], 베이스의 조경수, 첼로의 최동휘, 피아노와 플루트의 정성조와 함께 4트랙 동시녹음으로 데뷔 앨범 작업을 했다. 발매된 앨범은 당시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었으나 안타깝게도 지금봐도 파격적인 커버 사진과[5] 수록곡 물 좀 주소가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 때문에 금지 음반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한대수는 아예 앨범 커버 뒷면을 앞면으로 바꿔서 재발매를 하였으나, 이마저도 금지되었고 결국 1989년에 다시 커버 사진을 앞면으로 바꾸고 미발표곡 하루아침을 수록한 삼반을 발매해야 했다.
절규하듯 거칠게 부르는 한대수의 창법이 인상적인 곡. 상기했듯이 물고문을 연상시킨다고 금지곡이 되었다. 이 '물'이란 것을 민주주의를 은유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갤럭시 익스프레스, 불싸조, 어어부 프로젝트 등 여러 인디가수들이 모여서 이 곡의 리메이크만 수록한 앨범이 있다.
때때로 부분은 전체보다 크다. 일그러뜨린 가수의 초상은 시대의 환부를 비추었다. 고단함이 묻어나는 제목은 가수의 삶을 규정하는 신탁과도 같았다. 저 멀리 프랑스에서 대학생들이 억압적인 구체제에 항거하던 1968년 귀국한 한대수는 예술가에 우호적이지 않은 조국의 현실과 마주한다. 그로부터 1년 후 열린 남산 드라마센터에서의 전위적 라이브와 미국의 히피로부터 직접 영향 받은 패션은 그의 악명을 드높이는 계기로 작동하게 된다. 고압적이고 경직된 태도로 일관하던 군부정권은 그를 곱게 보지 않았다. 노래는 금지곡이 되었고, 무대를 잃어버린 가수는 쓸쓸히 군대로 사라졌다. 아직 음반 한 장 내지 못한 상태였다. 지배세력의 눈에 비친 한대수의 모습은 대한민국이라는 ‘안정된 사회’를 전복하려는 데카당에 불과했다.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포크 앨범 중 하나이자 한국의 모던 포크, 포크 록을 개척한 음반이며, 김민기 1집과 함께 데뷔 때부터 번안곡이 아닌 자작곡을 만듦으로서 한국 포크 음악이 발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행복의 나라로, 물 좀 주소 등 한대수의 대표곡들이 많이 수록되었으며, '스테레오 힛트집' 같이 앨범명을 대충 짓거나 타이틀 곡 제목 두 개를 붙였던 당시 한국 대중음악계랑 달리 얼마 안되게 제대로 앨범명을 붙인 앨범이기도 하다.
김민기의 김민기 1집과 유사한 점이 많다. 둘 다 금지 음반으로 지정되었고, 데뷔 음반이며, 포크 음반이다.
[재발매판] 재발매판에서는 재생 시간 35:08, 곡 수 총 9곡.[재발매판][3] 당시 한국 스튜디오 문화로는 프로라는 개념이 있었는데, 1프로에 3시간 반 정도라고 한다. 훗날 나온 김두수 1집도 7프로(=21시간)만에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앨범은 더 터무니없는 조건에서 만든 셈.[4] 신중현과 엽전들의 드러머로 활동하기도 했다.[5] 이 당시 한국 음악 앨범 아트는 대체로 가수 정면 사진+가수명+수록곡로 정형화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런 정형성을 깨고 앨범의 콘셉트를 보여주는 디자인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한국 앨범 아트 역사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앨범이기도 하다. 커버 사진은 한대수 본인이 직접 찍었으며, 이후로도 한대수는 앨범 아트에 있어서 여러 인상적인 시도를 펼치기도 했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