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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12 15:03:36

류득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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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류득공(柳得恭)[1]
생몰년 1748년 ~ 1807년
혜풍(惠風) 혹은 혜보(惠甫)
영재(冷齋), 영암(冷菴), 가상루(歌商樓),
고운당(古芸堂), 고운거사(古芸居士),
은휘당(恩暉堂)
1. 개요2. 생애3. 여담4. 주요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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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류혜풍은 박식하고 시를 잘 지으며 과거의 일도 상세히 알고 있으므로, 이미 이십일도회고시주를 지어 우리나라의 볼만한 것들을 자세히 밝혀 놓았다. 더 나아가 발해고를 지어 발해의 인물, 군현, 왕의 계보, 연혁을 자세히 종합해 놓았으니,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고려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한 것이다. (중략) 고려의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라 외에 발해를 포함한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 1785년 박제가가 쓴 발해고 서문 중에서

1. 개요

조선 후기의 북학파 실학자로 박지원의 제자이다.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서이수(徐理修)와 함께 정조가 발탁한 최초의 규장각 검서관[2] 초대 4검서 중 1명이다.

2. 생애

1748년 12월 24일(음력 11월 5일) 부친인 류춘과 모친인 남양 홍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류득공은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 출신이었던 탓에 신분서얼로 살아야 했다. 5세 때에 아버지가 죽고 7세 때 어머니를 따라 무반 집안인 외가로 가게되었다가 10세때 대대로 글짓기를 업으로 삼은 집안이니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모친의 뜻에 따라 이듬해 한양으로 올라가 살게 된다. 이후 숙부(류금(柳琴)또는 류련(柳璉) 문하에서 공부를 했고 20세를 전후해 북학파 실학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해 백탑동인(白塔同人)이라는 동인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25세에 이르러서는 기자조선에서 후삼국 시대 시기의 한시를 모은 동시맹(東詩萌)을 엮으면서 서사시에서 조예를 보이게 된다.

1773년 박지원, 이덕무와 함께 개성평양을 유람하고 백제의 도읍지인 공주를 다녀오는데 이 때의 유람이 토대가 되어 위만조선의 멸망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주제로 한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가 만들어졌다. 1774년 봄 소과 시험에 합격하여 생원은 되었지만 대과 시험인 문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1778년 1번째 중국 여행지인 심양을 방문했다. 심양을 방문하고 귀국하는 길에 정사 채제공을 따라 연경에 갔던 친구들인 이덕무와 박제가를 개성에서 만났는데 이들은 연경에 가보지 못한 류득공을 놀렸다. 류득공은 열폭하면서 "심양이나 연경이나 압록강 넘어간 건 똑같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779년 정조에 의해 초대 규장각 검서관에 등용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35세에는 강화도 외규장각에 머물면서 서적들을 조사하는 업무를 맡기도 하였다. 1784년 포천현감을 시작으로 지방관으로 커리어를 이어가던 중 <발해고>를 저술했다. 1785년 양근군수로 승진했으며 1789년 군수직을 사임하고 한양으로 돌아와 광흥창 주부로 있다가 1790년 5월 사도시 주부로 자리를 옮겼는데 건륭제의 80세 생일 축하 사절의 일원으로 그가 가장 가보고 싶어하던 연경을 방문하였다. 이후 가평군수, 풍천도호부사 등을 역임했다.

말년은 편치 못했는데 1801년 모친이 작고했고 박제가가 윤가기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4년 뒤 유배를 마치고 온 박제가가 한양으로 온지 얼마 안돼서 사망하고 박지원도 눈을 감아 모친, 친구, 스승의 죽음을 연달아 보았다. 관직에서 하야했고 저술에 몰두하며 은거하다 1807년 10월 1일(음력 9월 1일)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후사로는 두 아들인 류본학(柳本學)과 류본예(柳本藝) 외에 2명의 딸이 있었으며 두 아들은 규장각 검서관으로 일한 바 있다.

묘는 경기도 의정부시 낙양동 산120번지에 있었으나 한국수자원공사의 공사로 2003년 8월 의정부시 자일동 산129번지 문화 유(류)씨 중랑장(中郞裝)종중 묘소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3. 여담

4. 주요 저서



[1] 일반적으로 유득공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한글번역에서 '柳'를 일괄적으로 '유'로 번역하고 있고 이를 중•고교 교과서에서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2] 영조 때부터 서얼 출신도 문과 실시가 가능했고, 정조 때부터는 청요직인 규장각 검서관까지 진출을 하였다[3] 광해군 시기 한백겸이 지은 책으로 중국 사서의 열전에 기록된 부족 국가부터 고려 시대까지 한국의 고대사 지명을 고찰한 책이다. 한국 역사지리학의 창시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을뿐만 아니라 이후의 역사지리 연구에 많은 자극을 주었다.[4] 한민족이 만주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은 지리상 방어하기가 어려운데다가 당시에는 생산성이 낮은 지역이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이란건 감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