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본처의 소생과 첩실의 소생을 차별하는 신분제도.2. 한국의 경우
본래 조선 시대 이전부터 본처와 첩실이 엄격하게 차별받았다. 이는 조선 이전 시대가 조선 시대 보다도 더 폐쇄적인 신분사회 였기 때문이다. 간혹 한국 사회의 첩과 서얼에 대한 차별은 조선시대때 생겼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는 조선 이전 시대에 대한 연구가 부족해서 생긴 오해에 불과하다. 조선 태종과 서선이 규정한 서얼금고법과 적서제도는 그냥 조선 이전부터 존재하던 첩과 서얼에 대한 차별을 유지만 하는 법과 제도에 불과했으며 오히려 조선은 이전 시대 보다도 좀 더 개방적인 신분사회를 제공하고 한품서용제라는 서얼들에게도 기회를 주는 제도를 통해 첩과 서얼에 대한 차별을 완화시켜 나갔다.원칙적으로는 양인과 천인으로, 이후에는 양반, 중인(中人), 평민, 천민으로 분화되는 신분제도와는 달리, 적서제도는 양반 계급 중에서 일부 양반 출신이 본처(本妻)[1]가 아닌 기생 또는 애첩 등과의 관계를 통해서 출산한 자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사이에서 출산하게 된 이들은 본처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적자 출신들로부터 천민 못지않은 천대와 멸시를 받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아무리 아버지가 양반이라 해도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슬픈 사연을 갖고 있으며 어머니들이 아버지라 부르지 말고 대감 또는 대감마님이라 부르라고 권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이 서자녀들과 얼자녀들에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한 적은 없다. 적자 형과 오빠, 적녀 누나와 언니야 신분차이가 있으니 그러려니 해도, 아버지는 아버지로 부를 수 있었다. 홍길동전의 경우는 소설적 과장이거나, 당시로서는 아버지의 신분을 확실히 알 수 없었던 천인 신분이었던 어머니 탓으로 보아야 한다.
엄격한 적서차별은 왕실도 예외가 없었는데, 중전 소생은 대군과 공주였으나 후궁 소생은 군과 옹주로 작위부터 달랐다. 아버지가 왕이기에 어머니의 출신이고 뭐고 왕족에 무품[2]이긴 하였으나, 대군과 공주는 무품상계, 군과 옹주는 무품하계로 엄연히 다른 신분이었다.[3] 왕위 계승 서열 역시 대군과 군 중에 대군이 더 높다.[4] 자녀의 적서를 구분하는 것은 세자의 자녀도 예외가 아니었다. 왕세자의 적자는 정1품 상계 현록대부에 봉해졌으나, 서자는 정1품 하계 흥록대부였다. 딸 역시 적녀는 정2품 군주, 서녀는 정3품 현주로 구분했다. 배우자의 품계 역시 대군의 처는 정1품 상계 부부인이나, 왕자군의 처는 정1품 하계 군부인이었고, 같은 부마라 해도 공주의 남편은 종1품, 옹주의 남편은 종2품이었다. 무품이거나 품계가 같으면 상계와 하계로 구분하여 무조건 적자녀가 더 높게 했다. 조선 왕실은 아예 후궁이 낳은 자식들을 정궁 소생으로 입적하여 '어마마마'와 '어머니'를 구분했는데, 후궁이 죽더라도 소생인 군이나 옹주는 생모의 장례에 참여하지 못했다.[5]
적자녀 및 본처 출신의 자식들은 대부분 양반과 기생 및 애첩 등이 낳은 자식들을 서얼 또는 서자(庶者) & '서녀'라고 부르며 이들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경우도 있었다.[6]
서얼 및 서자녀 출신의 경우 적자녀 출신과는 달리 사실상 고위 관직에는 등용될 수 없었으며[7] 하위직에서 전전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정조 대에 서얼 출신들은 중인들과 함께 소청운동을 벌여 관직 진출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정조는 그들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하여 불만을 다독이고자 했지만, 근본적인 처방은 되지 못하였다.[8]
이후 1894년 갑오개혁과 1895년 을미개혁을 통해 폐지되어서 적서제도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얼자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대감마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이 적서제도 때문이었다. 연암 박지원은 이런 호부호형 금지하는 것을 유교가치에 벗어난 천륜을 끊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적서차별에 분노한 양반가 사람들이 모임을 만든 경우도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강변칠우 참조. 문서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서얼들은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과 가까운 관계였으며, 계축옥사에 연루되어서 행방불명된 박치의를 제외한 다른 서얼들은 모두 전멸했다.
드라마 닥터 진에 나오는 김경탁 역시 작중에서는 서얼 출신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대신 대감마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3. 중국의 경우
중국은 한반도에 비해 국가의 대권을 잡는 민족이 자주 바뀌었었다. 때문에 지도층을 차지한 민족의 성향에 따라 어느정도 차별하는 경향이 아예 없는건 아니었지만, 조선처럼 극단적이다 싶을 정도로 적서차별이 심하지는 않았었고, 일단 귀족가의 자손이기만 하면 상대적으로 그렇게 심각한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었다.[9] 반대로 사족과 평민간의 차별은 매우 큰편이었는데, 조선에 경우 평민도 과거를 통해 얼마든지 양반이 될수 있었던[10][11] 반면 중국에 경우 평민이 귀족이 되는 방법은 전시에 공을 세우는 것과 과거 시험을 보는 것 두가지가 있었지만, 사실상 과거 시험을 보는 것 자체도 추천을 통하고 그 뒤에 따로 시험까지 봐야 했기에,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는 것을 제외하곤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했다.[12]이런 기조가 무려 한왕조 초기 부터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보니 뒤로 갈수록 사족과 평민의 경계는 더 커졌다. 그래도 개중에는 정말 운과 실력이 좋아 왕에 눈에 띄어 바로 발탁되는 극히 드믄 경우가 있기는 했다. 한국인에게는 연계소문이나 대조영과 같은 역사드라마에서 적대세력의 등장인물로 익숙한 설인귀가 바로 이 극히 드믄 사례중 하나라 볼 수있다. 중국은 넓고 역사도 길다 보니, 설인귀와 같은 사례가 많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미 나라가 온전하게 세워지고, 자리도 잡고 있던 상태에서 설인귀 처럼 일약 스타가 되는 식으로 등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믈었다. 그 긴 역사에서도 설인귀와 같은 사례 자체를 보는 게 드믈 정도. 보통 평민에서 사족으로 지위가 상승 하는 것은, 개국 이전부터 왕이 될 사람과 함께 했거나 개국 초창기에 아직 나라가 불안정하던 시기에 타이밍 좋게 합류해 같이 활동하다 추후에 인정 받았을 때나 가능했었다.[13] 더 나아가자면, 초패왕이 활동하던 시절 이후 부터는 스스로 개국을 하려는 왕재들 조차 가문을 따져 가며 인재를 선발 했었다.[14]
중국에 경우 고대부터 근현대 직전까지 추천 제도로 임관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15], 당연히 아무나 추천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 추천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며, 이후 따로 과거시험도 봐야 했다. 물론 조선의 음서제도 같은 것도 존재하긴 했지만, 십상시가 전횡을 일삼던 시절 수준만 아니라면, 조선에서 음서로 관직을 얻은거 이상으로 무시당했었다.[16]
삼국지연의에 등장한 조조가 당대에 매우 특별하게 비춰지고, 또 당대와 후대의 유학자들의 평가가 많이 깍이는 부분[17]이기도 한데, 당시에는 조조처럼 가문 같은 걸 무시하고 순수하게 능력우선 주의를 펼치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사람들이 죄다 나빠서 그런게 아니라 한미한 가문의 사람을 뽑아 일을 시킬 정도면 본인은 얼마나 덜떨어진거냐 하는 식에 시선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평민인 사람을 요직에 두고 쓰는 것만으로도 당사자 뿐만 아니라 이를 추천한 사람과 그 추천을 받아 쓴 사람의 명예가 깍여 나가는 문화가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그런 사회적 시선 아래에 조조가 그리 행동했다는건 여러모로 특별하게 보일수밖에 없었던것. 이에 비견해 일평생 인력난에 시달렸던 유비만 하여도 그렇게 개고생 하면서 밑바닥을 전전하였지만, 결국 출신성분은 꼬박꼬박 따져 가며 사람을 받았으며, 촉한을 개국한 이후에도 사실상 한미한 가문 출신이 요직에 앉은건 한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18]
반면 적서 차별 자체는 유별나게 두각을 보이진 않았었다. 애초에 적장자가 무조건 생존하기도 어려운 시절에 만들어진 국가의 제도와 사회 문화였고, 중국땅 안에서 나라가 쪼개진다 해도 그 자체만으로도 워낙 넓어 굳이 자리 싸움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19]
당장 국가의 정치 기반이었던 유학에서도 적서에 차별을 두는걸 두둔하는 내용이 없다.[20] 애초에 중국 유학에서 서자의 정의는 적장자를 제외한 자녀 모두를 이른다.[21] 무엇보다 유학상에 이런게 존재했었다면, 중국에서의 적서차별 자체는 조선을 능가할 정도로 심각했을 것이다.[22] 또한 중국은 평민조차도 부유하면 첩을 두는 게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조선과는 비교하는 게 민망할 정도로 서얼이 많았다. 당연히 모래알 처럼 많았던 식자층 중 다수가 서얼이었고 더더욱 이런 내용을 학문 차원에서 다루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즉, 조선의 적서차별은 유학에 기반 했다기 보다, 조선의 자체적인 국가운영정책 이었을 뿐이란 말이 된다.[23]
물론 그렇다고 적서에 차별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공개된 사기의 대부분에서 이러한 차별을 어느정도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니, 아예 없었다고 주장할수는 없다. 단지, 조선에 경우 처럼 아예 정부 차원에서 서얼을 차별해 이를 법으로 명시한것과는 달리 적어도 국가에서 이를 권장하고 제한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의 본능이라는 게 그리 합리적이진 못하고, 과거에는 이게 더 심했기에 차별은 존재 할수밖에 없었다.[24] 유학 차원에서 따로 차별하는 정책은 없거나 그 자체를 못난 행동이라 정의하고는 있어도, 개인의 자격지심을 공격하는 것은, 사람의 정서에 타격을 가할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때문에 말로 공격할때 자주 쓰였다 정도 수준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당장 많은 오해를 받는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어느정도 차별은 있었을 지언정 그게 심각하진 않았다는 걸 알수 있다. 원소만 하더라도 생모가 천민 출신이지만 이게 대화중 약점적인 요소로 적용되는 경우가 있긴 했어도 그렇게 까지 심한 명분을 줄 정도는 또 아니었다. 이런 것들에 대표적인 예로 조조는 아예 환관의 양자였다. 유비는 황숙이라 불릴 정도긴 했지만, 유씨 집성촌 출신이라는거 말고는 이게 진짜 거기 출신은 맞는 건지 거기서 적장자는 맞는건지 아닌지 조차 불분명해서 당대에는 정말 가루가 되도록 욕을 먹어가며 세력을 일궜었고, 이는 현시대까지 설왕설레 할 정도다. 하지만 각자 세력을 일구는거 자체에는 큰 문제로 적용되지 않았었고, 또한 당대에 받던 대우 자체도 적대 세력이 비난할때, 할말없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정도 수준[25]이었지 딱히 이 자체가 엄청난 약점으로 보진 않았다.[26] 이런 출신 성분에 대한 약점이 거의 없는 상태로 시작해 마지막까지 살아 남은 군벌이라고 해봐야 오나라 군주들 정도뿐이다. 그외에 군벌은 기본적으로 출신 성분에 하나 둘 문제가 있었다. 명분에서도 그렇고 세력적으로도 압도적이었던 원술에 경우 자만과 여러 악제가 겹처 일찍 탈락했기에 출신 성분만 가지고 비교한다면 손가에 비빌만한 군벌은 아예 없었다. 연의에서 보면 군벌들이 원소에게 적서 문제로 공격하는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이건 너도 우리랑 똑같은 놈일 뿐이다 수준에 발언에 가깝지, 딱히 생모가 천민 출신이라고 비난한 것도 아니다. 그나마도 이걸 가지고 대놓고 공격하는 건 배다른 형제이자 본인이 원가의 적장자라고 주장을 하려면 어떻게든 원소를 깍아 내려야 했던 원술 정도였지 다른 군벌들은 그런건 신경도 안썼다. 이런건 배다른 형제의 내전에 개념에 가까웠지, 당시 시대상을 감안한다면, 이런걸 심각하게 봐서 공격했던거라 볼수가 없다.
후대에서도 이런 문화기조는 계속 유지되었었고, 마지막 중세 국가인 청대에 이르러서도 조선만큼의 적서차별이 심해지지는 않았다. 사실 생모가 정말 심각한 수준에 결격 사유[27]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적서의 차별이라기 보다는 그냥 배다른 형제 정도 수준에 인식이 강했다.
국내 무협지에서 다루는 적서차별은 사실 국내 정서에 맞춰 조선시대 풍으로 변화된거라 볼수 있다. 당연히 한 가문에서 배다른 형제자매 간에 암투 정도야 존재는 했겠지만, 흔한 배경이 되는 명나라나 청나라 시절의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참고로 적장자에게 특혜를 주는 것과 적서 차별을 혼동하면 안된다. 장남에게 특혜를 줬던건 어디까지 가문의 재력과 권력이 분산되지 않게 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고, 이런 관습이 오랜 시간 지켜지다 보니 안좋게 굳어 진것 뿐이다. 또 이경우 딱히 특혜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가문의 장남은 특혜를 받은 만큼 그 의무도 무시 못하게 컸기 때문이다. 지역 유지 소리를 들을 정도로 큰가문의 장자여서 가문의 가주가 되면, 적어도 6촌 이내 대가족을 강제로 책임지는 경우가 일반적 이었다. 평민이라 딱히 가문이라 할게 없었더라도 손 아래 형제자매와 그 자식선까지는 미래를 책임져야 했었다. 당연히 이를 이행하지 못했을때 받는 사회적 비난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건 상위 계층일수록 더 심했고, 시간이 지나 사회적으로 명예를 중시하는 기조가 강해질수록 의무에 목숨거는 경향이 커지기도 했다. 물론, 정말 뒤가 없을 정도로 가난한 층에 경우 특혜도 변변치 않았기에 딱히 의무가 강제 되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도덕적인 책임 정도는 존재했었다. 그래서 역사 기록에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 상류계층에 집에 가서 노역을 해주고 손 아래 형제자매들을 시집 장가 보내는 경우가 자주 보고 되는 것이다. 이건 딱히 중국만 그랬던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나타는 현상이기도 하다. 즉, 특혜와 의무가 함께 했던 장자가 받던 특혜와 한쪽만 말도 안되게 손해를 보던 적서제도를 유사하게 볼수는 없다..
4. 서양의 경우
서양에서 적서차별이 본격화 된 것은 암흑시대 기독교 그러니까 로마 가톨릭의 발흥 이후이다.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전 유럽을 휩쓸고 다녔던 게르만족은 아버지1명과 어머니1명과 동복자식들로 구성되는 현대적 핵가족 비슷한 개념이 없었으나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혼인제도를 받아들였다. 이 기독교식 혼인제도는 혼인을 절대자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성사로 보는 반면 혼외의 성행위를 사단이 주재하는 부정한 죄악으로 간주하였지만, 그렇다고 유럽인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제 버릇 남주고 불륜을 멈춘 것도 아니며 혼인이 금지되어있는 성직자들 중에서도 사생아를 가지는 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혼외자식들은 일부 최상류층 권력자의 핏줄이 아니면 가톨릭 사회에서는 그릇된 죄악의 소산으로써 아예 지옥에 떨어질 존재들로 간주되어 심한 차별을 받았으며, 태어나도 세례를 받을 수 없고 죽어도 교회식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중세유럽의 인적 사회행정은 교구 단위로 교회에서 처리했는데 교회가 주관하지 않은 관계에서 낳은 서자를 교회에 출생신고할수는 없는 것이니 당연히 주민등록도 못받고, 따라서 세례 혼인 장례 등 모든 교회성사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왕가의 사생아마저 계승권이 인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28][29] 조선보다 훨씬 차별이 심했다고 볼 수있다.[30] 조선에서는 적어도 서자는 중인이나 평민만큼의 생활은 가능했지만, 서양에서는 출생의 비밀을 무마시킬 만큼의 뒷배가 없는 서자는 아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사실, 가톨릭 사회에서 자행되어온 이러한 격심한 적서차별은 기독교나 성서에 전혀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첫째, 성서적으로 간음은 부모의 잘못이지 태어난 자식의 잘못이 아니며, 부모의 잘못으로는 자식이 벌받을 이유가 없다. 둘째, 심지어 신조차도 사생아라고 멸시하고 차별한 적이 없다. 솔로몬 또한 아버지인 다윗의 간음과 살인교사로 인해 태어난 아들이지만 야훼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나와 있다.[31]
그러나 단순히 가톨릭의 문제라고만 볼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유럽의 귀족제는 기본적으로 귀천상혼 제한을 기반으로 한다. 귀천상혼 문제는 다시 말해서 자식은 부모 두 사람 중 낮은 신분의 사람이 지닌 작위만을 계승 가능한 것이다. 예컨대 공작 가문의 사람이 백작 가문의 사람 사이에 자녀가 나온다면 그 자식은 백작 이상의 신분을 결코 물려받지 못한다. 그러한 제도는 귀족 가문들이 세대가 지나면서 너무 작위 보유자가 많아지고 영지가 잘게 쪼개지고 귀족 신분의 머릿수가 팽창하는 것을 억제하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귀족들이 천한 신분의 측실, 애첩을 통해 낳은 자식들은 당시 유럽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천한 신분으로 인식된 측면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애첩들은 당연히 남자쪽보다는 비천한 신분이었고 말이다.
이러한 서양의 뿌리깊은 적서차별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정치에서 철저히 배제시키고 나서야 사회적으로나마 철폐될 수 있었다. 20세기 이후에는 유럽 왕실에서도 사생아의 상속권을 인정하였고, 21세기에는 왕위계승권 여부는 논란이 있더라도 최소한 사생아를 왕실의 일원으로 인정해 준다.[34] 그러나 종교적인 차별은 현재진행형이며, 아직도 서양에서는 미혼모의 자식 또한 정식 혼인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생아로 간주하여 세례를 거부하는 신부들이 많아 이 때문에 무려 교황이 그러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야할 정도이다. 하지만 워낙 오래된 종교적 폐습인지라 근본적인 해결은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
5. 관련 문서
[1] 다만, 사별로 인해서 양인 신분의 처와 다시 혼인한 경우에는 또한 본처에 해당하고 그 사람의 후손들 또한 적자에 해당한다.[2] 품계가 없다는 뜻이다. 왕, 왕비, 왕대비, 대왕대비, 세자, 세자빈, 대군, 왕자군, 공주, 옹주가 여기에 속한다.[3] 대군/공주/군/옹주라 해도 세자와 세자빈보다 낮은 신분인 건 마찬가지였다.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마주 앉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4] 세자에게 자녀가 있을 경우 세자의 적장자가 가장 우선시되고, 그 다음이 세자의 적자, 다음은 세자의 서자다. 그 다음 서열이 왕의 적자인 대군이고, 대군 다음 서열이 왕의 서자인 군이다.[5] 예외가 희빈 장씨와 영빈 이씨다.[6] 보통 양반+평민을 서자&서녀, 양반+천민을 얼자&얼녀라 불렀다.[7] 고위관직으로 가는 지름길인 청요직에 오를수 없었다.[8] 사실 정조 이전에도 서얼에 대한 유화책이 등장하기도 했다. 인조때에는 서얼에서 몇대손쯤 내려가면 서자녀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조치를 내리긴 했다만 그게 얼마나 효력이 있었을지 의문이다.[9] 평민에 경우, 적서 차별이 발생할 정도로 부를 쌓았다면 귀족가와 유사했다. 반대로 하루벌어 하루먹고 살거나 소작을 하며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정도라면, 차별이고 뭐고 하는 문제를 떠나 장자를 제외한 모든 자식은 집안에 재산 성격을 띄었다. 이경우 대놓고 노예 취급을 받지는 않았지만, 실 생활은 적서 할거 없이 밥만 겨우 주고 노동력으로 부릴수밖에 없어 사실상 노예와 다를바 없었다. 세계 각지에서 여성이 다른 집안으로 시집갈때 받는 지참금은 바로 이런 재산화된 성격에 근거하는 것이다.[10] 하지만 공부를 한다는건 어느정도 생활에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게 보통이다. 때문에 기존에 양반가가 계속 상위 지위를 누리는 게 일반적이어서 계층이동이 적었던 것일 뿐이지 제도 자체는 조선이 망할때까지 과거제도를 운영했기 때문에 능력만 있다면 지위 이동 자체는 계속 가능했었다. 단 노동을 하면서도 사서삼경을 보고 이해하며 달달 외워야 했을 뿐이다. 그래도 기회 자체는 언제든 열려 있는 셈이었고, 음서를 제외하면 중국처럼 추천을 받아 관리를 임용하는 것 자체를 부정이라 여기고 아예 법적으로 금지 되었었다.[11] 물론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고, 중종 때 조광조의 제안으로 현량과라는 추천 제도가 한때 도입되기도 했지만 역시나 부작용이 어마무시했던지라 조광조가 죽은 뒤로는 현량과 역시 폐지되었다.[12]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다고 해도 공이 온전하게 윗전에 보고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이 때문에 평민이 출세하여 귀족이 되는 경우 자체가 극히 드믈었다. 하급자의 공이 상급자의 것으로 둔갑하는 일은 지금도 비일비제한데, 과거 중국은 단순히 잦다 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게 일반적이었다. 때문에 전쟁터에서 세워진 공은 사족들끼리 나눠 같는 정도였고, 평민 장수들에게는 사적으로 공치사를 해주는 정도로 끝냈다. 괜히 사돈에 팔촌까지 찾아가며 추천을 받는 경우가 잦았던 것이 아니며, 이것이 훗날 꽌시문화로 발전한다.[13] 괜히 이런류의 설화나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게 아니다. 겨우 이야기에서나 볼법한 드믄 사례기도 했고, 그만큼 선망이 되는 사례였기 때문이다.[14] 당장 항우와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한왕조의 개조인 한고제 유방만 하더라도 본인은 평민출신 이었지만, 개국이후 부터 이미 출신 성분을 꼼꼼하게 따졌음이 여러 고사에서 들어날 정도다. 한나라의 출신성분을 따지던 풍토가 이미 개국 초기 부터 만들어졌었다는 뜻이다.[15] 사실 중국 공산당에 경우 지금도 반쯤은 과거의 추천제도와 유사하게 운영되는 편이다. 단지, 이를 대놓고 외부에 이렇게 된다고 알리지 않을 뿐이라 쉬쉬하는 정도지. 아직도 꽌시는 당연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을 정도니, 여기에 엮인 추천제도가 이를 따라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봐야 한다. 즉, 꽌시가 사라지지 않는한 추천제도가 사라질수는 없다는 뜻이다.[16] 이건 심지어 황제 조차 대놓고 무시할 정도였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추천을 통해 시험을 본후 임관을 했다. 정리하자면, 아무리 능력을 우선 본다고 하지만, 결국 그 사람의 집안이 변변치 않으면, 어지간히 능력이 좋아도 추천 자체를 받기가 쉽지 않았고, 막상 가문이 좋다 하더라도 실제 추천을 받아 과거시험까지 보는 경우는 말 그대로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는 것 만큼이나 힘들었다는 뜻이다. 조선처럼 한정된 인구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게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 이었고, 또 조선 처럼 원하는 사람을 다 받기에는 인구수가 너무 많아 불가능했기에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더 많은 이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도 인구 공급이 수요를 능가하기때문에 불가능했다는 뜻이다. 현 시점 처럼 전산으로 처리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더 그랬다.[17] 물론 서주 대학살 같은 미친짓에 영향이 가장 크기야 하겠지만[18] 삼국시대 군벌들이 죄다 도적같은 느낌으로 묘사되어 말로만 명예를 떠들지 특정인물들을 제외하곤 실제로 크게 신경 안썼을거 같은 인상이 있는데, 이건 후대의 작가들이 대체역사물 같은걸 쓰며 케릭터의 개성을 살리고 현지화 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일뿐이고, 당대 표준은 명예에 죽고 명예에 사는 게 기본이었다. 삼국지 초반의 원가가 괜히 강성했던게 아니다. 당대 인사들이 워낙명예를 중시하였기에 나타난 결과물인것이다. 당장 삼국지 정사에서 조차 무능과 오만의 대명사중 하나로 꼽히는 원술만 하더라도 왠지 잘못한 부하가 있으면 호되게 꾸짖거나 쉽게 매를 들것 같은 인상이지만, 연의가 아닌 정사에 기록으론 명예를 매우 중시했기에 등장 초기부터 칭제 이후 반쯤 미처살던 말기까지도 웬만하면 일단 말로 적당히 타이르려 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당연히 원술이 개중에도 독보적인 대인이라 그랬다는건 아니다. 이건 당시 사족들의 사회상이 그러했기에 그들중 하나였던 원술 입장에선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었을 것이다. 즉, 당시에 식자라 불리는 이들중 명예를 중시하는 이들의 표준적인 모습은 그러했기에 원술도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이 나와 기록된것 이라 보는 게 맞다는 거다[19] 간혹 국내에서 쓰여지는 삼국지 대체 역사 소설에서 이를 무시하는 오류가 발생하는데, 삼국지 시기라고 해봐야 서기 200년~300년 사이의 일이다. 즉, 애초부터 서얼 차별 문화가 자리 잡았다고 주장하는 게 말이 안되는 시기다. 즉, 삼국지를 기반으로 대체 소설을 쓰는데 홍길동식의 극단적인 서얼 차별이 보인다는 건, 케릭터를 설정할때 조선 시대 분위기를 생각하고 만든경우라 봐야 한다. 그런데, 적서차별이 심각했던 조선 조차도 적서제도 비슷한 것이 등장 한 게 1415년이다. 아무리 중국이 한반도보다 문화가 빨랐다 치더라도 무려 1200년이나 차이가 난다는 거다. 설사 중국 역사에 서얼 차별 문화가 뿌리 깊게 박혔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정말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나 가능한 일 이었을 것이다. 조선만 하더라도 태종이 우리 이제부터 서얼 차별할거다 라고 아예 법으로 명문화 하고 나서야 겨우 차별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의외로 조선초 까지만 해도 서얼을 차별하는 문화 자체도 그리 크지 않았었다. 단지 법이 그리 바뀌었다 정도 였지. 우리가 흔히 아는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없는> 으로 대변되는 식에 서얼을 아예 사회적으로 무시하는 차별 문화는 적어도 조선 초중기 이후일이다. 적어도 세조 시기 까지는 법으로 금지한다니까 정도 분위기 였다고 봐야 한다. 아예 홍길동 수준으로 문제시 된 시기는 최소 성종이 집권을 시작할 즘 부터 일 것으로 봐야 한다. 그 이후 연산군때 부터는 서얼을 아예 못쓸인간 수준으로 격하하여 봤을 정도니까.[20] 단지 가문내 혼란을 방지 하기 위해 장자 우선 주의를 권장했을 뿐이다. 이것도 권장하는 수준이지 꼭 그래야 한다는 늬앙스도 아니었다. 막말로 공맹 사상을 만들고 집대상한 인간들이 인격 파탄자도 아닐바에야 일부러 저자 이외에 사람들을 차별할 구실을 만들 이유도 없다. 그 시대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사회 혼란을 최소화 하는 게 목적이었다고 봐야한다.[21] 쉽게 말해 정실에게서 난 장자 외에 모든 자녀 즉, 정실의 차남 이후에 난 자제들 또한 서자 서녀로 봤다는 뜻이다. 조선식 서얼 문화는 말그대로 조선식인거다.[22] 지금도 넘사벽의 인구수를 자랑하지만, 당시에도 인구수의 단위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23] 때문에 일각에선 조선의 적서제도야 말로 근본없는 제도라 평가한다. 딱히 기원이라 할만한 것도 없고, 어디까지나 그 시작은 당시 세자 였던 이제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함을 계기로 해서 발의 된 수준이고, 아이러니 하게도 실제 역할은 양반계층의 비율을 강제 하는 등에 마치 박정희 정권의 산아제한 정책과 비슷한 수준으로 실행되었기 때문이다.[24] 사실 이러한 차별은 근현대 들어서도 아예 없지는 않다. 단지 조선처럼 제도화 되지 않았을 뿐이지.[25]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온라인 게임을 하다가 익명성에 기대어 패드립 날리는 수준에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26] 당대에도 이게 비겁한 행동이라는 인식 정도는 있었다. 그래서 이것도 아무나 하는 짓도 아니었다. 언제든지 뒤에서 칼맞아 죽어도 이상할게 없는 시대였던 만큼 뒤를 생각안하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면, 당연히 자기 말에 힘이 실릴만한 배경도 있어야 했고, 스스로를 지킬수 있는 세력도 있어야 했다.[27] 역적의 딸이라던가 아예 누구에게 무시당할 수준에 최하층이었거나[28] 대표적인 사생아 출신인 정복왕 윌리엄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받은 게 아니라 잉글랜드를 정복해서 왕이 된 것이며, 노르망디 공작 시절에는 사생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온갖 모욕과 멸시와 배신에 시달렸다.[29] 서양의 왕위 계승 서열은 적자>>>적녀>>>그 외 방계혈통 순서였다. 참고로 신라에서도 비슷한 방식이 나타났다. 왕의 아들임에도 서자라는 이유로 적자녀인 왕의 남동생과 여동생이 차례로 왕이 된 후에야 왕으로 즉위한 경우도 있다. 이쪽은 아무래도 골품제의 영향이 컸지만...[30] 조선에서는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하는 것을 큰 죄로 여겼기 때문에, 정 적자가 없으면 서자라 하더라도 아버지의 의사에 따라서 가문의 계승권이라 할 수 있는 제사를 맡을 권한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예로 중종반정의 정국공신 1등 박원종은 적자가 없어서 서자인 박운에게 자기 제사를 맡게 했다. 즉 아버지의 허락만 있다면 서자에게도 계승권이 주어진 셈. 무엇보다도 왕실에서조차 서자가 왕이 되는 경우는 많았다.[31] 생각해보면 아주 단순한 논리로 적서차별을 비판할 수 있다. 부모는 아이를 낳는 걸 '선택'할 수 있지만 아이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그러니까 적자녀, 사생아로 나뉘는 건 철저히 부모의 책임이지 자식의 책임이 아니란 것. 하지만 현실은 지금보다 옛날이 더 자식이 부모에 대한 무조건적인 효를 강조했음을 감안해보면 부모는 얼마든지 사생아로 태어나게 한 죄를 자식에게 물릴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설령 자식이 그걸로 따지면 불효로 몰아붙이면 끝.[32]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고 왕이나 왕족의 애첩이 귀족 부인인 경우는 상당히 많았다. 물론 그 대부분은 왕으로부터 받은 작위이지만 귀천상혼때문에 귀족 출신이면서도 왕족의 배우자가 되면서 첩 취급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33] 국왕의 경우도 (특히 독일권에서 심함) 대부분 같은 국왕급이거나 최소한 신성로마제국의 유력한 제후 가문 신분끼리만 결혼하고, 또 그래야만 귀천상혼에 해당되지 않고 왕위 계승권을 인정받았다.[34] 다만 영국 왕실은 물론이고 그나마 개방적이라고 하는 북유럽 왕실도 여전히 적자/적녀만 왕위계승권을 인정한다. 사실 이건 당연한것이 기독교를 거의 믿는 이들 국가 및 왕실 특성상 연애결혼이 가능한 현대까지 와서 멀쩡한 정실부인(남편)을 냅두고 따로 첩을 두거나 불륜을 저지르는것 부터가 말이 안되고, 용납될리도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불륜이나 첩을 통해 낳은 자녀들에 대해서 왕위계승권을 줄 수도 없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