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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10:38:44

서선(조선)

<colbgcolor=#e8ad85><colcolor=#000000> 서선
徐選 | Seo Seon
출생 1367년
사망 1433년 (향년 66세)
본관 이천(利川)
부모 아버지 서원(徐遠), 어머니 정윤 최홍의(崔洪義)의 딸
자녀 아들 서달(徐達)
대숙(大叔)·언부(彦夫)
해화당(海華堂)·신당(莘堂)
시호 공도(恭度)
종교 유교 (성리학)
1. 개요2. 적서제도의 기안자인가?3.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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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유학자, 관료.

조선의 관료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했던 조선 초창기의 재원이다.
태조 집권후 이듬해에 사마시에 합격해 몇년후 문과에도 급제하여 이듬해 임관 했다. 그 이듬해인 1398년에 무인정사[1]가 발발했으니 관료 생활에 적응하기 전부터 파란만장하게 시작한 편이라 할 수 있다. 급제자이긴 했지만, 이당시는 아직 말단 관료 위치기도 했고, 춘추관기사관 자체가 실록을 관리하고 기록하는 관리직인 만큼 별 영향은 없었을 것으로 보이긴 하다만.

이후에도 정종태종에게 양위 할 즘 해서 문하주서[2]가 되어 딱히 정치와는 크게 관련 없는 직을 역임했다. 그러면서 능력이 뛰어났는지 이듬해 부터 바로 여러직을 역임하면서 정치에 참여 했다. 하지만 태종 3년에 사헌부장령으로 있다가 계사(啓事)[3]를 잘못하여 유배당한다. 아무래도 태종이 집권한지 아직 초창기라 불안정한 모습도 있고, 여러 행동등을 책잡다가 미움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능력은 괜찮았는지 3년뒤에 바로 복직한다. 하지만 1412년 우사간 역임중 또 말 실수를 하여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事)로 좌천 된다.[4] 임금과 관리들의 언행을 기록하는 사관직에 있었던 만큼, 아직 사관이 일거수일투족으로 기록하는게 익숙하지 않았던 태종이 따로 기록하지 말라고 한걸 극렬하게 거부한거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다. 하지만 3년뒤에 다시 승진하며 복귀한걸 봐서는 능력 자체는 확실히 인정 받은 듯. 우부대언으로 임관 직후 동료들과 서얼의 차별 대우를 진언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후술.
하지만 뭐가 또 잘못되었는지 중앙에서 정말 먼 곳의 지방관으로 임관[5]한다.

세종이 즉위하며, 고부 겸 청시부사(告訃兼請諡副使)[6] 자격으로 명나라의 사신으로 떠나고 귀국후 바로 한성부윤으로 임명된다.

세종 시기 직후에는 아예 관찰사[7] 자격으로 지방 관리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후 중앙행정직으로 재진출하여 사망때 까지 별일이 없었고, 사후 그간의 공을 인정 받아 정1품 우의정에 추증 된다.

태종때는 아직 한창 혈기 넘칠 때였었고, 그덕에 태종과 부딛치는 경우가 잦았던 걸로 보인다. 그 당대에는 고집있고, 맡은 일에 부지런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쪽같은 성격이라 말을 감추지 못한건지 종종 말실수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 아무리 외척을 단호하게 처형하고 조선시대 왕중 왕권이 가장 강했던 태종이라지만, 유능한 관리를 유배보내거나 좌천하는건 쉬운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서에 남은 기록만 최소3번이니 실제로는 더 많이 부딛쳤음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세종 시기로 넘어 오면서 부터는 무려 22년차 관리 였기에, 노신까진 아니었지만[8] 세종도 함부로 다루긴 어려웠을 시기였을 것이다. 또한 이런 것과 함께 능력이 뛰어난 신하는 아껴주고 말 그대로 죽을때까지 부리는 걸 선호했던 세종이기에 태종 집권기에 비해선 더 무난하게 관리 생활을 한것으로 보인다.

공과가 뚜렸한 인물이지만, 워낙 자료가 적어 현대에는 적서제도의 기인자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2. 적서제도의 기안자인가?

조선의 적서제도를 조선 태종 때 서선이 도입했다는 기록 때문에 서선이 적서제도를 도입하여 서얼 차별을 만들어냈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는 조선 이전 시대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여 생겼던 오해에 불과하다.

사실 조선 사회의 서얼 차별은 조선 시대 이전부터 내려 오던 것이 조선 시대에 그대로 이어졌던 것에 불과했으며 조선 태종과 서선이 도입하였던 서얼금고법과 적서제도는 기존에 존재하던 서얼 차별을 명시하기만 하는 것에 불과하였지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서얼 차별을 만들어 내는 법과 제도가 아니었다.

적서 차별은 한반도 왕조가 중국 왕조와 가졌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이기도 한데 첩의 신분이 어디까지나 양인이었고 천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송대 이후 중국에서 그 소생들이 재산 상속 등에서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은 것과 달리 고려도, 그리고 이전 왕조인 신라도 기본적으로 첩에 대한 대우는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왕이 비천한 첩을 총애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대신 은영(殷影)이 간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으니, 은영이 그 첩을 잡아다 죽였다. - 삼국사기 권 12 신라본기 효공왕
허유는 성격이 혹독하고 포악하여 첩이 가노(家奴)와 간통하였다며, 첩의 두 귀를 베고 두 눈을 상하게 하였으며, 또 그 노비의 두 눈을 뽑고 덧붙여 귀·코·발꿈치를 베었으며 또 그의 생식기를 베어 첩에게 먹게 하였으므로 듣는 사람이 몸을 움츠렸다. - 고려사 권 105 열전 18 허공(許珙) 부 허유(許猷)
(최사전의 )아들은 최변(崔弁)과 최열(崔烈)이다. 최사전(崔思全)이 일찍이 최변과 최열에게 금 술잔(金罍) 하나씩을 주었는데, (최사전이)죽자 첩이 그 하나를 훔쳤다. 최변이 화가 나서 그녀를 채찍으로 때리려 하니 최열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사랑하던 사람이니 마땅히 가산(家産)을 기울여 돌보아야 하는데, 하물며 이러한 물건으로 그래야 하겠습니까? 아우가 얻은 것이 아직 있으니 형에게 드리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 고려사 권 98 열전 11 최사전
그의 (정숙첨)형 우복야(右僕射) 정진(鄭稹)도 탐욕이 많아서 남의 토지를 강탈해 차지했다. 또 집안을 바르게 다스리지 못해 처와 첩의 분별이 없었으므로 공부상서(工部尙書)로 강등시켰다. -고려사 권 100 열전 13 정세유(鄭世裕) 부 정숙첨(鄭叔瞻)
김원명과 찬성 이구수(李龜壽)는 생사를 같이 하는 친한 벗이었다. 하루는 이구수가 김원명의 집에 들러서 술을 마시는데 김원명의 첩이 본처와 동석(同席)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자네가 오늘날 재상이 되어 집안을 다스리지 못하고 어찌 나라를 바로 잡겠는가?”라고 하고 그 첩을 꾸짖어 물러가게 한 다음 술도 마시지 않고 돌아갔다. - 고려사 권 125 열전 38 김원명

효공왕대의 기록은 신라 후대 왕권의 열악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대신이 왕의 총애를 받는 첩을 마음대로 죽여버릴 수도 있었을 정도로 첩의 위상이 보잘 것 없었음을 드러낸다.

허유와 최사전 아들들에 관한 기록은 첩을 가정내에서 재량껏 형벌을 가할 수 있었음이 드러나는데 허유에 관해서 주변에서 경악했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 어떤 법적인 제지도 받은 적이 없다. 최사전 아들들의 이야기 역시 왕이 최열의 관대함을 칭찬했다는 후일담만 있을 뿐이다. 즉, 최변의 행위 자체는 그 당시에 불법도 아니고 혹독하긴 해도 되는 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진과 김원명의 일화는 첩의 사회적 위신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처와 절대 동격일 수 없는 존재였고 가내에서 엄격히 구분되어 가장이 처와 첩을 동등하게 대하면 그것이 탄핵 사유가 되었다.

고려 초기인 성종 시기 기틀이 잡히는 고려의 오복제, 쉽게 말해 상복 입는 방식에서도 첩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이 드러난다.

조선은 경국대전에서 첩이 남편의 부모를 위해 자최복(齊衰服)을 입을 것을 규정하고 있으나 고려와 고려가 참고한 당제에선 무복(無服). 관련된 규정이 전무하다. 조선의 첩은 남편 사후에 참죄(斬衰) 3년복, 남편의 부모, 자식, 자신의 자신, 남편의 첩을 위해서 기년복(朞年服)을 입도록 되어 있었다. 남편을 제외하곤 모두 일괄적으로 기년복을 입도록 한 것인데 남편 사후 참죄 3년복은 같으나 자식 상례에 입을 상복은 장자와 차자의 구분을 엄격히 뒀던 고려와 차이가 있었다.

고려의 첩은 남편과 남편의 처(妻) 상례에 상복을 입으나 첩이 먼저 죽었을 때 상복을 입는 건 남편과 첩의 자식들 뿐. 남편과 처는 상복을 입을 의무가 없었다.

남편의 자식이 첩을 위하 성복을 입은 건 어쨌든 서모(庶母)에게 예를 지키라는 것인데 이게 오복 중에 가장 가벼운 3개월짜리 시마복(緦麻服)으로 정해져 있었다. 아들이 있는 첩에 한정된 것이긴 하나 지팡이를 짚고 자최장기복(齊衰杖期服)을 입도록 한 조선시대의 조치보다 훨씬 저열한 것이었다.

고려의 첩은 공적으로 인정받는 존재가 아니라 가문, 가장에게 소유된 존재에 가까웠기에 이토록 지위가 낮았고 이는 자연히 첩 소생 자녀들의 지위 약화로 이어졌다. 심지어 왕족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흔히 소군(小君)으로 불린 고려 왕의 서얼들조차 조선에 비해 극히 열악한 대우를 받았다.
기미일. 소군(小君) 한 명이 국가의 금령(禁令)을 어겼다 하여 어사대(御史臺)의 관리가 모욕을 주었으나 왕은 금지할 수 없어 그를 가구옥(街衢獄)에 수감시켰다. 당시 국가의 제도상 왕을 모시는 궁인이 낳은 아들은 머리를 깎아 승려로 만든 후 그를 소군이라 불렀다. - 고려사 세가 권 26 원종 6년 4월

무신정권 실세라면 왕권 약화가 원인이겠으나 상대는 일개 어사대 관리였는데 소군을 모욕주고 감옥에 수감시킬 수 있었다. 이는 낮은 신분의 어미를 둔 소생에 대한 당대 사회적 인식을 보여준다. 조선에서 간택 제도가 탄생하는 이속 사건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확연하다.

무신 집권 최장기 집권자 최우의 아들 최항의 사례 역시 비슷하다. 무소불위의 당대 최고 권력자 자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얼자라는 이유로 최우의 사위 김약선에게 후계자 경쟁에서 밀리고, 조카 김미의 지지자들에게 도전을 받고, 승계 이후에도 지지세력 부족으로 고심해야 했던.

이토록 대우가 시궁창이었던 고려와 조선 초기까지 일반적이었던 양측적 친족구조 때문이다. 고려는 익히 알려져 있다 시피 친가와 외가. 아버지 가문과 어머니 가문 서열이 동등했는데(남녀가 동등한 게 아니니 주의) 양쪽 가문을 모두 중시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천한 어머니 가문, 첩과 서얼들의 지위가 시궁창에 떨어진 것이다.

흔히 조선 태종 때 만들었다고 '잘못' 알려진 서얼금고법은 기실 고려 시대에 존재하던 법과 관행에 (아직 고려의 습속이 그대로 남아있던 초기 조선에서)유교 껍데기를 씌운 것에 불과했다. 오히려 태종은 서얼의 관직 진출 제한을 유지하기 1년 전인 태종 14년에 한품서용제로 고위 관료 소생 서얼들의 제한적인 관직 진출과 면천을 허락했는데 바꿔 말하면 고려 시대에는 제한적이 관직 진출과 면천 조차 일반적이지 않은 호사였다는 소리.

고려와 조선은 연속이며 고려가 서얼에 관대했는데 고려 사람들이 세운 조선이 갑자기 차별한 게 아니라 원래 고려시대까지 차별이 극심했던 것이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를 거치면서 조금씩 완화되어 조선 초기에는 얼자들이 공공연히 면천을 받고 서자들이 제한적이나마 관직에 나가는 제도가 보장된 것이다.

시중에 풀린 많은 개설서 등에서 양측적 친족관계를 강조하며 고려가 조선보다 더 평등한 사회였다고 주장(남녀평등이 아닌 걸 알면서도 그런 늬앙스로 서술하는 식으로)하나 기실 조선보다 훨씬 심한 차별과 혹형을 사회적으로 보장하는 이면이 숨겨져 있었다. 조선이 개국하고 성리학적 질서가 조금씩 뿌리내리면서 부계 혈통을 훨씬 중시하는 쪽으로 기울며서 비로소 서얼들이 운신할 폭이 넓어지고 양측적 친족관계가 희미해지는 조선 후기에 익히 알려전 서얼 허통이 활발이 진행될 수 있었다.

오히려 조선 태종은 서얼금고법과 적서제도를 제정하기 전에 한품서용제라는 제도를 시행하여 서얼들에게도 기회를 주었고 이후 조선은 태종 때를 시작으로 서얼 차별 완화를 시작하여 서얼 차별을 해소하였고 이후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서 법적으로 서얼 차별은 없어지게 되었다.

3. 연혁


1393년(태조 2년) 사마시에 합격

1396년에 문과에 급제

1397년 부봉사(副奉事)

1398년 춘추관기사관

1400년 문하주서

1401년 주부(注簿) 병조좌랑·이조좌랑 겸 지제교, 감찰 등을 역임

1402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역임

1402년 죽산(竹山)에 유배.

1405년(태종 5) 전사시영·세자시강원좌문 역임

1406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역임

1408년 동부대언·경연참찬관·보문각직제학·지제교(知製敎)·춘추관편수관 겸 군기감사, 지공조사를 역임

1411년 우부대언 겸 군자감사, 지호조사 역임

1412년 좌부대언·집현전직제학 겸 판사재감사·지형조사를 역임

1412년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事) 역임.

1415년 우부대언(右副代言) 역임.[9]

1417년 충청도관찰사로 임관

1419년(세종 1년) 고부 겸 청시부사(告訃兼請諡副使)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 귀국하여 한성부윤 임관.

1420년~1425년 경기도·경상도·전라도 등의 관찰사와 형조·예조·이조의 참판 등 내외직 역임

1427년 형조판서 역임

1429년 판한성부사로 절일사(節日使)가 되어 명나라에 출구 후 이듬해 귀국

1431년 좌군도총제 역임

1433년 사망

사후 우의정에 추증 및 이천의 설봉서원(雪峯書院)에 제향.


[1] 1차 왕자의 난[2] 기사관과 같은 맥락으로 문하부의 문서나 기록을 관리하는 직이다[3] 임금에게 서면 또는 언사로 아뢰는 행위[4] 도호부사가 종3품이기 때문에 품계 자체는 승진으로 보거나 같은 품계 내에서 이동한 것으로 볼 수 있긴 하지만, 중앙 행정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좌천성격으로 배치된거라 본다.[5] 한창 왕권이 강했던 시기라 그러기도 쉽지 않은데, 무려 기록상으로만 3번이나 보일 정도인걸 보면 태종과는 뭔가 잘 안맞았거나, 그냥 그런거 신경 안쓰고 마이웨이로 해야 하는 말을 대쪽같이 한걸수도 있다.[6] 풀어 말해 이전 왕의 부고를 알리고 새 임금이 즉위하니 허가를 구하는 사절직이다. 하지만 직위 내용중에 포함이 되었을 뿐이고, 당시 태종은 세종 즉위 후 5년은 더 살았으며, 그 기간내내 태상왕 자격으로 암중 지배를 했으니, 실제로는 새왕이 즉위 했다고 보고겸 해서 간 것이다.[7] 앞서 언급된 좌천 성격의 임관 과는 결이 다르다. 무려 종2품이다. 여기부턴 윗줄 품계라고 해봐야 고작 3개 밖에 없다. 현시대로 치자면 도지사 내지 군수급. 사실상 다음 단계 승진을 위해 공을 쌓는 과정에 들어선거라 보면 된다.[8] 사실 당시 평균 수명이나 일반적으로 자녀를 보는 나이가 16~18임을 감안하면 세종이 무시 못할 적잖은 나이긴 했다.[9] 이때 태종에게 적서제도의 기반이 되는 주청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