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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10:21:15

우성망족


1. 개요2. 종류
2.1. 고씨(高氏)2.2. 장씨(張氏)2.3. 이씨(李氏)2.4. 오씨(烏氏)2.5. 양씨(楊氏)2.6. 두씨(竇氏) 혹은 하씨(賀氏)
3. 발해 멸망 이후4. 관련 문서

1. 개요

渤海國, 去燕京・女眞所都皆千五百里, 以石累城足, 東並海. 其王舊以大爲姓, 右姓曰: 高・張・楊・竇・烏・李, 不過數種. 部曲・奴婢無姓者, 皆從其主.
발해국은 연경, 여진의 수도에서 1,500리 떨어져 있고, 돌을 쌓아 성을 지어서 동쪽으로는 바다와 나란히 하였다. 그 왕은 예전에 대(大)를 성으로 하였다. 우성(右姓)이 고(高) ・ 장(張) ・ 양(楊) ・ 두(竇) ・ 오(烏) ・ 이(李)로 몇 종(種)에 불과하다. 부곡(部曲) ・ 노비(奴婢)로 성이 없는 자는 모두 그 주인의 성을 따른다.
송막기문(1156)

발해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6개의 귀족 가문을 나타내는 용어. 송막기문의 기록을 따라서 우성망족이라고 하는데 왜 우(右)자가 쓰인 지는 불명.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오른쪽을 왼쪽보다 높이는 풍조가 있었으니 '높은 집안'이라는 의미로 그랬을 수도 있고, 송막기문이 편찬될 무렵에는 한창 여진족의 금나라(1115~1234)가 흥기하던 시대였으며 금나라가 수도로 삼고 있던 상경회령부(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에서 보면, 대부분 이미 거란족요나라 시대 때 요양 지역으로 이치된 이들 '우성망족' 가문은 금나라 옥좌의 오른쪽[1]에 해당되므로 그렇게 불렀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망족(望族)은 그냥 '명망 있는 집안'이라는 뜻으로 조선 시대까지도 쓰였던 말이며 특별히 발해만의 용어로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기록에 따르면 왕족인 대씨(大氏)를 제외한 고씨(高氏), 장씨(張氏), 양씨(楊氏), 두씨(竇氏)[2], 오씨(烏氏), 이씨(李氏)가 대귀족 집단을 형성하여 발해 역사 중 약 200년[3]에 가까운 시기 동안 발해의 외교, 군사,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 외에도 49개 성씨를 가진 일반귀족집단이 있었는데 이 중에는 특이하게도 부여의 국성[4]이자 백제대성팔족이었던 해씨(解氏)가 있었다. 하지만 문왕 시기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해비응(解臂鷹)과 대이진 시기 유학생인 해초경(解楚卿) 이외에는 기록이 없다.[5]

2. 종류

2.1. 고씨(高氏)

우성망족 중 필두로 고구려의 국성이었다. 발해의 기록이 부족하여 알 순 없지만 옛 고구려 왕족 출신 중에서 대조영 집단에 있었거나 대조영이 정통성을 세우면서 고구려 왕족 출신의 여인과 혼인 후 고씨가 대귀족집단에 들어갔을 개연성은 있다. 고씨는 나무위키에 기록된 발해의 인물들 중에서 대씨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으며 훗날 발해부흥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2.2. 장씨(張氏)

고구려계 귀족으로 추정되는 성씨로 무왕시기 등주전투에서 활약한 장문휴가 있으나 이후에는 문왕 시기, 장선수(張仙壽) 외에는 기록이 부재하여 알 수 없다.

2.3. 이씨(李氏)

장씨와 더불어 고구려계 귀족으로 추정되는 성씨로 이들의 기록은 무왕 시기에 처음 나오며 주로 문관계 사신으로 기록된 편.

2.4. 오씨(烏氏)

말갈계 대귀족으로 추정되는 성씨로 첫 등장은 무왕 시기 당에 사신으로 간 오차지몽으로 이후 나오는 오씨와 관련성은 불명이다. 이들도 고씨와 더불어 발해부흥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2.5. 양씨(楊氏)

고구려계 귀족으로 추정되는 성씨이며 인지도는 미약하지만 양씨도 고씨, 오씨와 함께 발해부흥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양규 등의 인물이 유명한 고려의 양(楊)씨도 (전부 다 그런진 알 수 없지만 대부분 혹은 적어도 일부) 이 우성망족 양씨의 후예로 추정하기도 한다.[6]

2.6. 두씨(竇氏) 혹은 하씨(賀氏)

여섯 우성망족 중 가장 미스터리한 성씨로 고구려계인지 말갈계인지 알 수 없는 것과 더불어 두씨는 현재 기록된 발해인 중에 없다.

그래서 하씨의 오기라고 보는 의견도 유력한데, 실제로 두씨가 아닌 하씨로 본다면 꽤 초기부터 나온다. 만약, 하씨가 맞다면 거란의 유력집단인 대하(大賀) 씨족 중 일부가 발해 건국 때 합류해서 귀족집단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3. 발해 멸망 이후

발해 멸망 이후 한국에서 (고구려 왕족 고씨가 아닌 발해귀족 고씨를 포함하여) 후손으로 추정되는 집안이 일부 전해지고 있다.

4. 관련 문서



[1]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중국을 비롯해서 모두 "임금은 남면해서 나라를 다스린다"는 관념이 있어서 옥좌의 방향은 무조건 남쪽을 향하게 두고, 옥좌에 앉은 금나라 황제의 시야를 중심 기준으로 좌, 우를 구분할 경우 요양은 오른쪽이 된다.[2] 하(賀)씨의 오기라는 설도 있다[3] 발해사 전체가 아닌 이유는 대위해, 대인선 항목 참조.[4] 부여의 경우 신화나 설화상에선 국성으로 나오긴 하는데 정작 정사상으로 확증된 기록은 없고, 부여 멸망 뒤 왕족 출신 유민들은 부여의 국호에서 따온 여(餘)씨를 썼다.[5] 발해가 요동을 정복하면서 고구려의 건안성에 이치된 소백제를 흡수했던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있기 때문에 이들은 백제계였을 가능성이 있는데, 실제로 삼국시대 중기를 지나면서는 해씨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부여나 고구려나 해씨를 쓴 사례가 말 그대로 전무하다.[6] 무엇보다 양규 이전의 한국사에서 양씨가 등장하는 것은 이 발해의 양씨가 유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