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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크라이 하산 크라스키노 | |
분류 | 토성 / 성터 | |
시대 | 삼국시대 고구려 남북국시대 발해 | }}} |
<colbgcolor=#2531a2> 크라스키노 토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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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설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크라이(Приморский край, 연해주) 하산지구 크라스키노 마을에 있는 고구려 및 발해 성곽터이다. 발해 때엔 염주성(鹽州城)으로 불렀다.성은 크라스키노 마을로부터 남동쪽으로 2∼3㎞ 떨어진 곳에 있다. 이 성은 엑스페이지치야 만의 북쪽에 위치하며, 동해 해안선과는 약 100~400m 떨어져 있다.[1]
성터는 발해 동경용원부 아래에 있는 염주(鹽州)의 중심 유적지로 인정되고 있다.[2]
크라스키노성이 있는 지역은 두만강에서 북으로 60㎞ 떨어져 있고, 중국 훈춘시[琿春]에서는 동으로 40㎞ 거리에 있다.
2. 조사와 발굴
중국에 있는 발해 유적은 중국이 허가하지 않아 한국 측의 참여가 거의 어렵지만 이 성은 다행히 현재 러시아 영토에 있다.러시아는 한국 학자들의 유적 방문과 조사를 방해하지 않기 때문에 본격적인 조사와 발굴이 1980년 러시아과학원 극동역사고고민족학연구소의 V.I.볼딘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다.
1992년부터는 한국 발굴단이 참여하여 한러 공동발굴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기존에 크라스키노성의 연대는 8~10세기로 비정되었으나, 한러 공동발굴 이후 발해에 앞선 문화층과 고구려 시기의 유물 및 문화층이 발견되었다.
3. 상세
크라스키노성은 평면이 불규칙한 장방형이며, 성문은 북쪽과 동쪽, 남쪽에 각기 1개씩 있다. 성문에는 모두 장방형의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성벽의 전체 길이는 1,380m이며, 성 내부의 면적은 약 12.6ha이다. 성벽은 대부분 표토로 덮여 있으나, 성벽 능선을 따라 석축 골격이 보이는 곳도 있다. 성벽의 남아 있는 높이는 1.5~2m이다. 성벽의 정상부는 폭이 1m이며, 기저부는 10~12m이다.
4. 크라스키노성과 발굴의 역사
4.1. 성이 훼손되다
크라스키노성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는 제정 러시아 시대인 1870년에 팔라디 카파로프가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포시에트 지역의 얀치헤강 근처에 군항이 있을 가능성을 처음 제기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그는 이 성을 답사하고, 제염 저장소의 흔적이라고 잘못 판단하였다. 때문에 크라스키노성은 주목받지 못했고, 두 차례에 걸쳐 크게 훼손되기까지 했다.한번은 19세기 말에 조선에서 이주한 한인 농민들이 성의 북쪽 부분에 농가를 세우고, 경작지로 사용하면서이다. 두 번째는 1930~50년대에 구 소련의 국경수비대가 성에서 군사훈련을 하면서 파괴되었다.
4.2. 1960년대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되다
이후 크라스키노성의 성격이 제대로 밝혀진 것은 1960년 샤프크노프가 이곳을 조사하고부터이다. 이때 발해시대의 형식을 보이고 있는 윤제 도기 조각, 십자 모양으로 된 청동제 수식, 황갈색을 띤 녹유자기 조각, 기와 조각 등이 수습되었다.특히 기와를 토대로 샤프크노프는 크라스키노성을 8~9세기로 편년하고, 발해 염주의 중심지라고 단정하였다.
4.3. 1980년대부터 2007년 이후까지
크라스키노성의 본격적인 발굴은 세 단계로 구분되는데, 대체로 성의 북서 부분에서 진행되었다. 첫 번째 단계는 1980년부터 1992년 이전까지로, 러시아과학원 극동역사고고민족학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발굴이다.발해 사원지, 금당지, 탑기단, 기와가마터, 우물, 사원지 부근의 성벽 기초, 건축지 등을 발굴하였다. 유물로는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들이 주로 발견되었는데, 1983년에는 금동불좌상, 석불좌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때까지 성의 연대는 8~10세기로 비정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1992년부터 2006년까지이다. 1990년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를 하면서 공동 발굴이 가능해지자, 대륙연구소를 시작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구려연구재단(현 동북아역사재단) 등이 러시아측의 주도하에 발굴에 참여하였다.
대륙연구소가 참여한 크라스키노성 사원지 발굴에서는 8세기대의 금동보살입상과 금동불 손, 석조 소불좌상, 석조 천왕상 편, 금동 가락지, 용두형 귀면와, 막새기와, 발해삼채 등이 발견되었다.
고구려연구재단이 참가한 조사에서는 고누판과 알, 원숭이 조각상, 철제 농기구류, 수레바퀴 차축, 머리 장식품 등이 수습되었다. 특히 함께 수습된 목탄의 AMS연대측정결과 540년, 620년, 840년이 나와 크라스키노성의 축조시기를 발해 이전으로 올려 볼 수 있게 되었다.
2005년에는 지금까지 발굴된 발해 온돌 시설 중 가장 큰 9×6.4m 규모의 주거지가 발굴되었다. 주거지의 온돌은 두 고래 ‘ㄷ’자형 구조로, 고래의 폭은 22~30㎝이다.
온돌의 북서구간은 5m, 남동구간은 4.4m이며, 폭은 모두 1.2m이다.
2004년부터는 지구물리학적 조사를 병행하고 있는데, 성 내부와 그 주변에 대해 마이크로 자기 촬영과 전기측량을 실시하여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표토 아래의 유적 현황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있다.
세 번째 단계는 2007년 이후로, 한국측이 정식 발굴단을 구성하여 러시아측과 공동발굴을 거의 매해 실시하고 있다.
여러 층위의 주거지, 대형 건축지, 저장용 구덩이, 노지, 담장, 도로 등이 조사되었다. 이들 조사에서도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주요 유물로는 명문 토기, 고구려형 시루와 기와, 청동과대, 청동 핀셋, 철제 창, 다듬이돌, 낙타 다리뼈, 청동낙타상, 편병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명문 토기의 “도융홍지(道隆弘知)”는 일본 승려의 이름으로 발해와 일본의 교류 증거라는 주장이 일본에서 제기된 바 있다.
편병은 청해진 장보고 유적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하여, 발해와 장보고 상단의 교역을, 청동낙타상 등은 서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증거로 보기도 한다.
세 번째 단계의 중요 성과 가운데 하나는 고구려 관련 유물과 문화층위의 발견과 함께 마이크로자기촬영과 전기측량으로 성내 우측에서 고구려 시대의 내성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이로써 크라스키노성의 연대가 고구려 시대까지 올라가는 것이 확실해 졌다. 또한 기존의 건축학적 구조나 유물 연구 외에도 어업, 곡물, 어류, 동물 등 경제 및 식생활 연구에도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