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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2 23:59:00

타이라 가문

사성(四姓) 『겐페이토키츠(源平藤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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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平,ruby=たいら)][ruby(氏,ruby=し)]
타이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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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a3800> 타이라 가문의 가몬
호랑나비
揚羽蝶
씨성 타이라노 아손(平朝臣)
본가 황실(皇室)
씨조 천황의 황자, 왕
씨 최초 하사자 간무 천황 (桓武天皇)
씨 최초 수혜자 타이라노 다카무네 (平高棟)
종별 황별(皇別)
후예 간무 헤이시(桓武平氏), 닌묘 헤이시(仁明平氏), 몬토쿠 헤이시(文徳平氏), 고묘 헤이시(光明平氏)

1. 개요2. 기원3. 계보
3.1. 특징
4. 해당 성씨를 쓰는 인물
4.1. 실존인물4.2. 가상인물
5. 타이라를 본성으로 칭한 가문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성씨.

헤이시 또는 평씨(平氏)라고도 한다. 우지(씨)이기 때문에 성 뒤에 가 붙는다. 가바네(성)와 합쳐서 타이라노 아손(아소미)(平朝臣)이라고도 한다. 일본의 4대 본성인 겐페이토키츠의 일원이었다.

타이라 가문에는 여러 분파가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타이라 가문이라 하면 이세 헤이시, 또는 헤이케로 불리던 가문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헤이안 시대미나모토 가문과[1] 대립한 것으로 유명한 가문이다.

2. 기원

백제계 여인인 타카노노 니이가사의 아들이었던 제 50대 간무 천황의 4남인 카츠가하라노 미코(친왕)가 제 53대 준나 천황에게 자신의 아들들을 신적강하시켜달라고 상소를 하여 그의 아들들이 모두 '타이라노 아소미'(平朝臣, 평조신)을 하사받은 이래, 간무 천황의 손자나 증손자가 타이라노 아소미를 역시 하사받으면서 간무 헤이시(환무 평씨)로 불리게 되었다.[2]

일본어로 '평평함', 또는 '분지'를 '타이라'(たひら)라고 부르는데 平安京을 훈독하면[3] '타이라노 미야코'가 되기 때문에 타이라노 미야코로 처음 천도한 간무 천황의 자손에게 그걸 기념하여 수도의 이름을 따서 사성한 것이었다.

간무 헤이시 말고도 제 54대 닌묘 천황의 증손자나, 모토야스 친왕의 손자들이 제 60대 다이고 천황으로부터 하사받았고, 제 55대 몬토쿠 천황의 증손자이며, 코레히코 친왕의 손자들도 하사받았다. 또한 제 58대 고코 천황의 증손들까지 하사받으면서, 닌묘 헤이시몬토쿠 헤이시, 고코 헤이시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네임드가 있는 후손들이 가장 많이 나온 곳이 간무 헤이시다 보니 '헤이시'라고 하면 '간무 헤이시'를 으레 가리키는 것이 되었다. 헤이시의 라이벌로 여겨지는 겐지도 21개의 유파가 존재했지만[4] 세이와 겐지, 그 중에서도 '무가의 동량'으로 불리는 카와치 겐지 일족이 겐지의 대표격이 된 것과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3. 계보[5]


반도 8헤이시 정도까지 후세로 내려가게 되면 사람 기준으로 하나하나 정리하는 게 너무 정신 사나워진다. 이하는 반도 헤이시를 가문 단위로 간략히 요약한 것의 일부분인데, 관동 지방의 호족 가문답게 네임드 인물의 상당수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거병 및 가마쿠라 막부와 연결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반적으로는 치바, 카즈사, 미우라, 도이, 치치부, 오오바, 카지와라, 나가오의 여덟 개 가문을 반도 8헤이시라고 부른다. (해당 가문들은 굵은 글씨로 별기)

3.1. 특징

헤이시는 여러 분파로 나누어졌는데, 헤이안 시대 말기의 걸웅이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속한 가문은 이세 헤이시(이세 평씨)라는 분파로, 이세 헤이시는 헤이지의 난 이후 헤이케(평가)로 불리게 되었다.

일본 측 위키에 따르면 헤이케는 헤이시 중에서도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후손뿐 아니라 그들을 따랐던 휘하 가신들을 묶어서 부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이유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따랐던 휘하 고케닌(어가인) 가운데에도 헤이시 출신의 무장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당장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장인인 호조 도키마사와 그의 딸인 호조 마사코가 속한 호조씨나 보소 반도를 본거지로 해서 헤이케 정권의 붕괴에 큰 공을 세웠던 치바씨도 간무 헤이시의 후손이었다.[19]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직계 쇼군이 3대로 끊어진 뒤 호조씨가 허수아비 쇼군을 내세우며, 싯켄으로서 교토 조정을 억누르고, 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또한《헤이케모노가타리》 등의 고전의 소재로 알려진 겐페이 전쟁의 영향으로 헤이케와 겐지를 각각 일본의 서쪽과 동쪽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자리매김시켜 '서쪽의 헤이시, 동쪽의 겐지', 또는 '해상의 헤이케, 육상의 겐지' 식으로 분류하는 대중 여론이 일반에 상당히 많은데, 동쪽이라고 헤이시가 없었던 게 아닌 것은 물론, 오히려 반도 하치(8)헤이시 등 헤이시, 즉 타이라 일족의 전통적인 본거지는 서쪽이 아니라 동쪽의 반도 땅이었다. 일본 조정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에는 그 최고 수장을 황실의 종친으로 임명했는데, 서쪽의 경우 다자이후(대재부)가 그랬고 동쪽의 경우는 '친왕임국'(親王任国)이라고 해서 히타치(常陸), 가즈사(上総), 고즈케(上野) 이렇게 3개 구니의 최고 수령(카미)을 친왕으로 임명했다. 물론 친왕들은 실제 부임지에 가지 않아서, 권관 혹은 차관이 현지에서 수령의 업무를 대행했다.

친왕임국이 집중되어 있었던 동쪽 반도 지역에 헤이시의 본거지도 집중되었다. 이른바 '반도 하치(8)헤이시'라고 불리는 지역들은 조정이 지정한 '친왕임국'과 겹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겐지보다 앞서 진작부터 간토 땅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던 헤이시가 차츰 세력을 키우게 되면서 서쪽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전통적으로 해상 교역의 거점이었던 사이카이를 통해 세력을 키운 헤이시가 헤이케로 성장해, 동쪽으로부터 치고 내려온 겐지 일문을 상대로 겐페이 전쟁을 벌이면서 '서쪽의 헤이시, 동쪽의 겐지'로 이미지가 도식화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 때문에 세이와 겐지의 일족들에 의해 호조씨는 몰락하게 되었고, 겐지 중 하나인 아시카가씨에 의해 무로마치 막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사족이지만 이후 센고쿠 시대에 간토(관동)를 기반으로 성장한 유력 가문인 호조씨, 일명 후호조씨(고호조씨)도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마찬가지로 간무 헤이시계였다. 정확히 구분하면 싯켄(집권) 호조씨는 타카모치류 반도 헤이시 중 타이라노 사다모리의 장남쪽 가문의 후손이었고, 후호조씨는 사다모리의 차남 쪽 가문 후손인 이세 헤이시(헤이케) 계통 분가 중 하나인 이세씨를 조상으로 하는 가문이었다.

그래서 겐페이(源平, 원평)라고 하는 말은 '겐지 대 헤이시'가 아니라 겐지 대 헤이케로 '헤이케'와 '헤이시'는 구별해서 불러야 한다고 일본 위키에 설명되어 있다. 당연히 무사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시인이나 구교(公卿)도 많았는데, 헤이안 시대36가선(歌仙)으로 꼽히는 타이라노 가네모리(平兼盛)가 대표적이었다.

카와치 겐지(하내 원씨)에게 멸망한 이후로는 그 후손들이 다이묘가 되거나, 혹은 신흥 다이묘들이 자신의 혈통을 각색하기 위해 헤이시를 자처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20] 한국 측 기록을 보면 쓰시마 도주와 그 가신의 이 '평'(平)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타이라 가문의 후손을 자처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평수길(平秀吉)로 불린다거나 하는 게 그 예시로, 조선 초기에 귀순한 항왜 가운데 평도전(平道全), 평망고(平望古) 부자가 있기도 했다.

여담으로 류큐계 성씨에도 타이라라는 성씨가 존재한다. 한자로는 '平良'으로 표기하며, 본래 발음은 '데라'(でーら)였다고 한다.

4. 해당 성씨를 쓰는 인물

4.1. 실존인물

4.2. 가상인물

5. 타이라를 본성으로 칭한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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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중에서도 주로 카와치 겐지와 대립했다.[2] 간무 천황의 4남이었던 카츠가하라 친왕(葛原親王, 786~853)의 아들이 타마키 왕(高原王, 804~867)이었으며, 그의 아들인 타카모치 왕(高望王)이 간무 헤이시(桓武 平氏)의 시조인 타이라노 타카모치(平高望)였다.[3] 헤이안쿄는 음독이다.[4] 다만 사성받자마자 후손이 단절된 이름뿐인 유파도 포함된다.[5] 대표격인 타카모치류 간무 헤이시 계통만 간략히 정리했다.[6] 아시가라 고개(足柄峠の)와 우스이 고개(碓氷峠の)의 동쪽. 지금의 간토 지역에 해당한다.[7] 쿠니카(国香)류 나오카타(平直方)가 타카타군 호죠 지역에 정착한 걸 기원으로 삼는,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호죠 가문.[8] 이세 헤이시의 일문이 간사이로 흘러들어가 정착한 것이 후쿠하라 헤이케였으며, 세월이 지나 센고쿠 시대 때 이세 헤이시의 또다른 일문이 이즈 반도로 흘러들어가 정착하게 된 것이 센고쿠 다이묘로 유명했던 오다와라 호죠씨였다.[9] 카즈사에 정착한 아버지나 형제들과는 별도로, 사가미노쿠니 가마쿠라군에 정착해 반도 하치(8)헤이시의 시조가 되었다.[10] 겐페이 전쟁 때 히타치 겐지인 사타케 가문을 토벌하는 등 맹활약했지만, 전쟁이 한창이던 도중, 콩가루 본능과 토사구팽 만렙이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마수를 피하지 못하고 모반 의혹이 일어나 당주인 카즈사 히로츠네와 그 적장자가 숙청당해, 사실상 멸문되었다. 이때 카즈사를 잡는 칼로 활약한 인물이 아래에 나오는 카지와라 카게토키였다. 이미 이 시절부터 망나니칼 본능이 솟구치는 인물이었다.[11] 무사시는 사이타마와 도쿄 일대를 포괄하는 개념이지만, 치치부 헤이시가 터를 잡은 곳은 그 중에서도 무사시의 북부(사이타마 현) 일대였다.[12] 원래는 헤이케(홍군)쪽에 더 가까운 집안이었지만, 당주였던 하타케야마 시게타다(畠山重忠)의 눈부신 줄타기로 백군으로 참전해, 겐페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개국공신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당주 시게타다는 싯켄 호죠 토키마사의 딸과 결혼하고, 막부의 대규모 내전이었던 히키 요시카즈의 난(1203년) 때 호죠 편에 붙어서 활약하는 등 가마쿠라 막부의 여당 중진이었으나, 토사구팽과 콩가루의 전통을 자랑하는 가마쿠라 막부 초기의 과학을 피하지 못하고 누명을 쓰고 숙청당해 멸문되었다. 일명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1205년)이었다. 하지만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義純)가 죽은 시게타다의 아내와 재혼하고, 그 성과 영지를 물려받으면서 하타케야마씨는 아시카가 가문의 방계로 족보를 바꿔 존속되었다.[13] 헤이케[14] 카와치 겐지[15] 겐지군(백군)의 기세에 가문이 멸문 직전까지 간 후, 가마쿠라 막부 시절 관동으로 낙향한 후지와라 방계 출신의 관동관령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이 되어 가문을 존속시켰다. 이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지류였던 에치고 슈고 우에스기 가문을 따라 에치고 슈고다이 나가오 가문으로 이어지다가, 하극상으로 에치고 일대를 장악하고 나중에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관동관령 작위까지 승계받은 나가오 카게토라가 이 가문의 후손이었다.[16]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무장으로 한창 활약했던 헤이지의 난 시절, 당주였던 오오바 카게치카(大庭景親)는 헤이케 쪽에 붙어 헤이케의 직계 가신(代官)으로서 스루가 및 사가미 일대에서 권세를 누렸다. 세월이 흐른 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거병하자 이번에도 헤이케(홍군) 쪽에 붙었다가 결국 패배하고, 당주인 카게치카가 참수되었지만 카게치카의 형인 카게요시가 겐지(백군) 측에 붙었기에 가문은 존속될 수 있었다.[17] 콩가루 분위기와 토사구팽, 그리고 숙청으로 유명했던 가마쿠라 막부의 초기 시절 제2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망나니칼로 활약했던 심복 카지와라 카게토키가 이 가문의 당주였다. 겐페이 전쟁 직후, 전쟁의 1등 공신들 중 한 명이었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참소해 몰락시킨 것이 이 사람의 대표 작품이었다. 물론 카게토키 본인도 가마쿠라 막부 특유의 격랑을 피하지 못한채 숙청되었고(일명 '카지와라 카게토키의 난', 1199년~1200년), 심복을 잃은 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도 숙청당해 권력을 잃고, 끝내 이즈의 슈젠지(修禪寺)에서 암살당했다.[18] '도히'로 읽기도 한다.[19] 치바씨는 간무 헤이시의 분가로 타카모치류 반도 헤이시의 8개 분가 중 하나인 보소 헤이시의 종가였다. 센고쿠 시대 초기까지 현재의 치바현 일대를 지배했다.[20] 이는 겐지와 헤이시가 번갈아가며 천하의 주인이 된다는 독특한 관념 때문이었는데, 실제로 헤이안 말기~무로마치 시대는 헤이케-미나모토 요리토모와 그 직계-싯켄-무로마치 막부 순으로 권력이 바뀌었으니 순서대로 헤이시-겐지-헤이시-겐지 순이었다. 그러다 보니 센고쿠 시대에는 이번에는 헤이시 순인가? 하는 생각이 있었다고 하며, 결과론적으론 헤이시의 우에스기 겐신(다만 이쪽은 본래 성인 나가오가 헤이시였고, 입적을 받아 사용한 우에스기 성은 후지와라 계통이었다.), 겐지의 타케다 신겐, 헤이케의 후손을 자처한 오다 노부나가, 역시 겐지의 아케치 미츠히데 등이 엎치락뒤치락하더니, 잠시나마 헤이시를 자처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통일을 하고, 그 뒤에 겐지를 자처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묘하게 징크스가 이뤄지긴 했다.[21] 둘은 자매관계다.[22]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가문이었던 호조씨는 타이라노 사다모리의 2남 고레마사의 자손임을 했고, 센고쿠 다이묘인 후호조씨는 사다모리의 4남 고레히라의 자손인 이세 헤이시에 속했다.[23] 실제로는 에치젠국의 츠루기 신사를 관할하는 신관 가문이 무사로 전직하면서 헤이시로 족보를 위조했다는 설이 정설이며, 본성은 후지와라, 또는 인베(忌部)씨였다는 설이 있다.[24] 우에스기는 헤이시가 아니라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 가주지류(勧修寺流)의 지파로, 후지와라를 본성으로 자처한 집안이었다. 다만, 종가인 야마노우치 우에스기씨가 센고쿠 시대 말기에 반강제로 헤이시 출신인 나가오 카게토라를 양자로 받아들이면서 일시적으로 실질적인 부계 혈통으로는 헤이시였던 시기가 있었다.[25] 반도 하치(8)헤이시의 서류라고도 하고,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일족이라고도 한다.[26] 쓰시마의 도주 가문. 하지만 원래는 도래인 계열인 하타성(秦姓)의 고레무네씨(維宗氏)가 본성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으며 후자가 좀 더 신빙성이 있다.[27] 타이라노 기요모리의 손자인 유키모리(行盛)의 아들이 다네가시마씨의 시조라고 전해진다.[28] 이쪽은 겐지를 본성으로 하는 하타케야마도 존재한다.[29] 이쪽 또한 실제로 타이라 일족이라는 증거가 빈약하며, 몇몇 학자들은 무쓰 남부의 토착 세력인 이와키 구니노미야쓰코(石城国造)의 후예로 훗날 명예를 위해서 헤이시 쪽에 입양된 것이라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