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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06-27 08:09:39

타이라노 마사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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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신황(新皇)
타이라노 마사카도(たいらの まさかど, 平 将門/평장문)
생몰 년도 903년~940년
재위 기간 939년

1. 개요2. 생애
2.1. 숙부와의 전쟁2.2. 요시카네와의 격돌2.3. 간토 땅의 신황이 되다2.4. 정부와의 일전, 그리고 죽음
3. 평가4. 마사카도의 머리무덤
4.1. 대중매체에서4.2. 도시전설

1. 개요

헤이안 시대 일본의 무장으로 도고쿠(東國) 즉 지금의 간토 지방의 세력가로써 간토를 거점으로 신황(新皇)을 자처하며 일본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가 진압되었다.

흔히 반역자로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에는 그렇게까지 사악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는 않고, 오히려 그가 반역을 일으킬 당시 조정이 동쪽에 상당히 가혹한 지배를 했으며 조정의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않는 점을 이용해 지방관 내지 지방관들이 벌였던 위법행위 또한 지적되고 있다.[1]

2. 생애

2.1. 숙부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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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츠보법봉를 휘두르는 마사카도(...) 장비?

원래는 조정에서 관직을 얻으려고 수도로 올라갔고 당시의 간파쿠 후지와라노 다다히라의 눈에 들어 그의 개인 가신이 되기도 하지만, 끝내 관직을 얻는 데는 실패하고 도로 내려와야 했다. 그러나 내려오자마자 숙부 다이라노 구니카(平國香)가 그를 시부야 강(涉谷川)에서 습격하면서부터 마사카도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935년 2월에 마사카도는 미나모토노 마모루[2]의 아들들에게 습격당했으나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그대로 미나모토노 마모루의 본거지인 마카베 군까지 진군해 인근 마을들까지 모조리 불살라버렸는데, 이때 구니카의 근거지였던 이시다(石田)도 공격을 당했고, 미나모토노 마모루의 아들들 뿐 아니라 다이라노 구니카도 화재로 죽었다.

아들과 사위를 잃은 미나모토노 마모루는 다시 다른 사위 다이라노 요시마사(平良正)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이마저도 마사카도에 의해 패하고, 요시마사가 다시 요시카네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요시카네에 이어 구니카의 아들이었던 사다모리(貞盛)까지 마사카도를 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거꾸로 마사카도의 기습을 받아 패하고 시모스케(도치기현)의 관아로 도망쳐 보호를 요청했는데, 쇼몬키에는 이때 마사카도가 시모스케의 관아를 포위해 놓고도 일부러 슬쩍 포위를 풀고 요시카네를 도망치게 한 뒤, 직접 관아와 교섭에 나서서 자신이 거병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하게 한 다음 회군했다고 한다.[3] 결국 미나모토노 마모루는 마사카도를 조정에 고발했지만, 조정은 2년 뒤인 조헤이 7년(937년) 4월 7일의 스자쿠 덴노의 원복을 기념하는 대사면령을 내리면서 마사카도에 대한 죄까지 사면해 버렸고, 마사카도는 돌아올 수 있었다.

2.2. 요시카네와의 격돌

마사카도가 돌아온 뒤 다시 다이라노 요시카네는 마사카도를 공격해 마사카도가 관리하고 있던 국영목장 쓰네하네노 미하야(常羽御厩)를 쳤고, 이 싸움에서 마사카도는 패하여 도망치고, 마사카도의 처자[4]는 요시카네에게 잡혀갔다. 하지만 요시카네의 다른 아들들인 기미마사(公雅)나 기미쓰라(公連)의 도움으로 마사카도의 처자는 탈출해 마사카도에게로 돌아왔고, 처자가 돌아온 것에 힘을 얻은 마사카도는 조정, 후지와라노 다다히라에게 요시카네의 악행과 자신의 정당성을 호소했는데, 조정에서는 마사카도가 관리하고 있던 국영목장이 요시카네 등에게 공격받은 것에 더 무게를 두어 11월 5일에 다이라노 마사카도에게 다이라노 요시카네나 사다모리, 미나모토노 마모루 등을 치라는 태정관부(太政官符)를 보내왔다. 이를 계기로 마사카도는 본거지를 도요타에서 이시이로 옮기고, 이시이를 야습해온 요시카네의 군사를 격파하고 쓰쿠바(筑波) 산으로 내몰았다. 이 패전 뒤 요시카네의 세력은 급속히 약해져, 결국 3년 만에 요시카네는 병사한다.[5]

한편 요시카네가 죽기 1년 전인 조헤이 8년(938년) 2월에, 몸둘 곳이 없게 된 다이라노 사다모리는 도산도를 거쳐 교토로 가려 했지만, 사다모리가 자신을 조정에 고소할 것을 걱정한 마사카도는 1백 기를 거느리고 이를 추격해 시나노의 치쿠마 강에서 양자 간 전투가 벌어졌다. 사다모리는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간신히 몸만 빠져나와 교토로 도망칠 수 있었는데, 교토 조정에 마사카도의 난폭함을 호소한 사다모리는 조정이 마사카도에게 내린 소환장을 가지고 도고쿠로 돌아와 히타치노스케(常陸介)[6] 후지와라노 고레모토(藤原維幾) 편으로 그 소환장을 마사카도에게 보냈지만 마사카도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무쓰(陸奧)로 도망치려던 계획마저 마사카도에 의해 수포로 돌아간 사다모리는 마사카도에게 쫓기면서 도고쿠를 떠도는 신세가 된다.

덴교(天慶) 2년(939년) 2월, 무사시 국에 새로 부임한 곤노카미(權守) 오키요 왕(興世王)[7]과 스케 미나모토노 쓰네모토(源經基)[8], 그리고 아다치 군지(足立郡司) 무사시노 다케시바(武藏武芝) 사이에 벌어진 양자간 갈등[9]에 마사카도가 중개에 나서서, 오키요왕과 다케시바를 대면시켜 서로 화해하게 했는데, 다케시바의 군사가 갑자기 쓰네모토의 진영을 포위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이유는 불명), 놀란 쓰네모토는 교토로 도망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오키요왕, 무사시노 다케시바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조정에 고발했다. 그러나 마사카도는 다시 히타치ㆍ시모우사ㆍ시모스케ㆍ무사시ㆍ고즈케 다섯 구니의 관아에서 나서서 작성한 "모반은 사실무근"이라는 연판장을 첨부해 보냈다. 이로써 조정은 마사카도에 대한 혐의를 풀었고, 반대로 쓰네모토가 무고죄로 처벌된다(...).

그런데 오키요 왕은 새로 무사시노카미로 부임해 온 구다라노 사다쓰라(百濟貞連)[10]와의 불화로 임지를 떠나 마사카도에게 의지해 왔고, 또한 히타치의 호족으로서 부동창[11]을 부순 혐의로 추포령이 내려져 있던 수배자 후지와라노 하루아키(藤原玄明)가 비호를 요구해오자 마사카도는 받아주었다. 히타치 관아에서는 마사카도에게 하루아키의 신병 양도를 요구했지만 마사카도는 "하루아키는 이미 도망쳤다"며 거절하고, 오히려 덴교 2년(939년) 11월 21일에는 병사를 모아 하루아키에게 떨어진 추포령을 철회할 것을 히타치 관아에 요구했다.[12] 히타치에서 당연하게도 이것을 거부하는 동시에 마사카도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고, 마사카도는 1천여 군세로 히타치 관군 3천 군사를 단번에 격파했다. 히타치노스케 후지와라노 고레모토는 싱겁게 항복해버렸고, 히타치의 관아를 접수한 마사카도는 수령의 인일(印鎰)[13]을 몰수했다. 이 사건은 정말 빼도 박도 못할 '반역'이었다.

2.3. 간토 땅의 신황이 되다

이 정도까지 온 판에 오키요 왕이 마사카도에게 "히타치 한 개 구니를 빼앗은 것도 죄가 큰데, 기왕 이렇게 된 거 간토의 구니를 모두 차지해 버리시죠?"라고 부추겼고, 마사카도 역시 이에 동조해 시모스케와 고즈케를 거쳐 구니에서 수령을 내쫓고 마찬가지로 인일을 빼앗았다. 간토 8개 구니를 빼앗은 뒤에 당시 천황을 몰아내고 새로운 천황이 되고자 자신을 신황(新皇)으로 자칭하게 된다.[14]

쇼몬키에는 한 무녀가 나서서 자신에게 신이 내렸다면서 "하치만 대보살(八幡大菩薩)의 명으로 마사카도에게 천황의 지위를 내리셨으니, 스가와라노 아손(管原朝臣,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이 마사카도에게 천황의 임명을 집행하노라"는 신탁을 마사카도에게 전했고, 이에 마사카도가 기뻐하면서 신황을 자처하였다고 한다. 하치만대보살은 일본의 무가(武家)가 숭앙했던 하치만신으로 마사카도가 살았던 당시에는 일본 천황가의 시조인 오진 천황(應神天皇)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마사카도가 살았던 당시에는 일본 조정으로부터 내쳐지고 좌천된 다자이후에서 조정에 대한 원한을 품고 죽어 벼락의 원령이 되었다는 전설이 퍼져 있어 조정으로부터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가문과도 연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미치자네의 셋째 아들인 카네모치(兼茂)가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영지와 가까운 히타치의 지방관을 지냈던 것도 있고,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아버지 요시마사가 살던 도요타군 인근의 마카베군에 미치자네의 아들인 가게유키(景行)가 살았고 마사카도의 동생인 마사히라가 그에게 학문을 배웠던 적도 있으며, 가게유키는 이후 마사카도의 숙부인 요시카네와 함께 자신이 살던 지역에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모시는 신사를 짓기도 하는 등 마사카도 집안과 여러 모로 연줄이 있었던 모양. 메이지 시대에는 아예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환생이 타이라노 마사카도였다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전생과 현생을 이어 전개되는 장대한 보복극의 서사시

신황을 칭한 뒤 황성을 짓고 백관을 두는 등 반도에서 기세가 대단했던 마사카도를 치기 위해서 조정에서는 전국의 여러 신사와 사찰에 조복기도[15]를 올리게 했고, 마사카도는 이에 후지와라노 다다히라에게 "제가 그래도 간무 덴노의 5대손이고, 과거의 여러 역사를 살펴봐도 강한 무력을 지닌 자가 한 나라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제가 일본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해서 안될 게 뭐 있겠습니까?"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난을 일으킨 시기에 즈음해 하필이면 서쪽에서도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라는 자가 해적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조정에서는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두 사람이 작당하고 동서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16] 더구나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은 아예 교토 코앞까지 위협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 이상으로 위협적이었다. 왠지 궁예견훤이 오버랩된다.[17]

2.4. 정부와의 일전, 그리고 죽음

결국 조정은 후지와라노 다다후미를 정동대장군으로 하는 진압군을 파견하고, "적의 괴수(마사카도)를 잡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 누구든 상관없이 주자(朱紫)의 위(位)[18]를 주겠다"는 내용의 태정관부를 전국에 내리기에 이르렀고, 앞서 마사카도에게 쫓기고 있던 다이라노 사다모리 뿐 아니라 시모쓰케의 호족 후지와라노 히데사토(藤原秀郷) 등이 마사카도 공격에 나섰는데, 이 무렵 마사카도는 자신을 따르던 군사들을 추수 때문에 돌려보낸 상황이라서 군사가 1천 명밖에 없었던 판이었다. 시간을 끌면 불리해진다고 판단한 마사카도는 2월 1일을 기해 출격했지만, 마사카도의 휘하 무장이었던 다지노 쓰네아키라 등이 사다모리와 히데사토의 연합군을 발견하고 마사카도에 보고도 없이 공격을 개시했다가 패하여 도망치고, 이를 추격해 온 시모우사의 가와구치에서 마사카도군은 전투를 벌였다. 마사카도가 직접 진두에 서서 분전한 싸움에서 초반에는 사다모리나 히데사토 등도 밀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숫적으로 우세였던 그들에게 마사카도군이 밀리며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마사카도는 지형지물에 익숙한 본거지로 적을 끌어들여 승부를 내고자 고지마 군(幸島郡)의 히로에(廣江)에 숨었다. 하지만 사다모리나 히데사토 등은 그를 뒤쫓는 대신 조정에서 보낸 관군이 이기고 있음을 홍보하면서 마사카도의 본거지 이시이로 쳐들어가 모든 것을 다 태우는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살 곳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은 신세가 된 백성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태워버린 추토군보다도 마사카도를 원망해, 마사카도의 모병에 응하지 않았다. 4백 군세만으로 북쪽 산을 등지고 진을 친 채 아군의 원군을 기다리던 마사카도를 조정군이 공격해 왔고, 2월 14일 오후 3시에 연합군과 마사카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마사카도군은 거칠게 불어오는 북풍을 등지고 화살을 쏘며 연합군을 몰아붙였다. 사다모리의 중진이 기습을 시도했지만 실패하면서, 사다모리와 히데사토ㆍ다메노리의 군사들은 격파되어 군병 2,900명이 도망가고, 정예병 300여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마사카도가 우쭐한 사이, 갑작스럽게 바람의 방향이 북풍에서 남풍으로 바뀌어버린다. 마사카도 쪽으로 부는 바람을 업고 기세를 얻은 연합군은 다시 마사카도군에 대한 반격을 개시했다. 마사카도는 직접 말을 몰고 진두에 서서 분전했지만, 빠르게 달리던 말의 발걸음이 흐트러지면서 마사카도도 중심을 잃고 흔들렸고, 어디선가 날아온 눈먼 화살이 마사카도의 이마를 명중시켰다.

그러나 교토로 보내져 강변에 효수되었던 그 목은 효수된 뒤에도 며칠이나 눈을 부릅뜨고 살아있는 것처럼 말을 했으며,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잘려나간 내 몸은 어디에 있는가. 내 몸을 찾아 몇 번이나 다시 싸워주겠다"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어느 날 문득 사라져서 공중으로 떠올라 홀로 근거지였던 에도 지방으로 날아갔다고 전한다.

3. 평가

일단 반역자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만한 반란을 일으킬 정도의 세력가였으니 자연히 당시 사람들에게는 절세의 호걸로 여겨졌으며, 일본의 원령 사상과 결합되어 마사카도를 숭배하는 움직임이 생겨나 민간신앙으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그가 기반했던 반도(坂東:관동)는 옛날부터 수도로부터 촌구석, 미개지역 취급을 받던 곳이라 그 일대에서는 수도인 교토 정부의 횡포에 대항하는 영웅으로써 떠받들어졌다.

일본의 NHK에서 만든 역사 다큐멘터리 그때 역사가 움직였다에서는 마사카도가 자신의 영지에서 농민들과 함께 대부분이 삼림 지대였던 땅을 개간하면서 철제 농기구를 생산해 보급하고, 영지에서 많은 수의 말을 길러 군사적으로 활용했으며 오늘날 알려진 것과 같은 휘어진 형태의 일본도를 만들어 보급하는 등 군사적 개혁도 행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을 진압한 다이라노 사다모리나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미나모토노 쓰네모토[19] 등의 후손들이 국가유공자로서 이세 헤이시나 가와치 겐지 등 네임드 무사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마쿠라 막부 및 이후 무사정권의 수립에 대해서도 한 다리 걸치고 있는 셈.

센고쿠 시대의 오타 도칸(太田道灌)이나 호조 우지쓰나(北條氏綱) 등의 무장들도 간다묘진에 무운을 빌기도 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앞두고 간다묘진에게 전승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으며 에도 막부가 들어선 뒤에는 아예 간다묘진을 에도의 수호신으로 모셨다고 한다.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의 시대에는 칙사로서 에도에 내려왔던 다이나곤(大納言) 가라스마루 미쓰히로(烏丸光廣)가 막부로부터 마사카도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조정에 호소해 역적이라는 이름도 제거하게 했다(물론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무너진 뒤에는 가차없었다). 에도 막부가 마사카도를 유난히 숭배한 것은 조정에 대항했던 다이라노 마사카도를 막부의 수호신으로 삼음으로써 조정을 정치에서 배제하겠다는 의도가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지금의 간다묘진의 위치는 에도 막부가 옮긴 것으로 에도성의 동북쪽 귀문(鬼門)에 해당하는 곳에 해당한다고.

모로 미야가 쓴 헤이안 일본이라는 책에 보면 메이지 덴노가 살아서 몸소 참배한 두 곳 가운데 하나가 마사카도의 간다묘진이었다고 적고 있다.[20] 물론 조정에 반역했던 자에게 덴노가 머리를 숙인다는 것이 아무래도 정서상 용납될 수는 없는지라 1884년에 메이지 덴노가 간다묘진을 참배할 때는 마사카도의 위패는 신사 본전에서 빼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스쿠나비코나 신을 권청해 넣었다고. 마사카도가 간다묘진의 본전으로 돌아온 것은 1984년으로 간다묘진에서 벗어난지 백 년만의 일이었다.

2014년에 일본의 모 여성잡지에서 '가장 끔찍한 악당' 4위로 꼽히기도 했다. 1위는 아케치 미츠히데... 판단은 각자 알아서.# 2위는 오다 노부나가다.

4. 마사카도의 머리무덤

마사카도의 묘가 두 군데 있는데, 한 곳은 몸이 묻힌 곳이고, 다른 한 곳은 참수된 마사카도의 머리가 날아가다가 도중에 멈춘 곳이라 한다. 에도 막부에서는 이 지방을 근거로 했던 마사카도의 영을 위무하기 위해 7개의 신사를 건립했는데, 그 중 마사카도의 머리가 날아가다 멈춘 곳은 머리무덤(首塚)이라 한다. 이 머리무덤은 도쿄 고쿄 동쪽, 오테마치역 주위의 빌딩들 사이의 큰길가에 있는데, 주변에 몇십층 짜리 빌딩들이 있는 사이에 자그마한 사당이 홀로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머리무덤에 대한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몇 번 밀어버리려고 하다가도 저주 때문에 관뒀는데, 대표적으로 관동 대지진으로 인해 머리무덤이 파괴된 일이 있었다. 당시에는 대장성(현 일본 재무성)의 임시 청사를 짓기 위해 머리무덤을 발굴하고 밀어버리려다 공사 관계자부터 당시 대장대신 하야미 세이지까지 총합 14명의 관계자가 이런저런 원인으로 죽는 일이 벌어졌고, 마사카도의 분노를 두려워한 일본 정부가 머리무덤을 현재의 형태로 복구했다. 지금도 이런 경외는 변함이 없어서, 2020 도쿄 올림픽을 대비한 오오테마치 재개발에서도 해당 위치만 교묘하게 빠져 있는 걸 알 수 있다. 그림 상단의 '平将門の首塚' 부분 그 외에 일본의 코메디언 듀오 폭소문제의 멤버인 오오타 히카리가 머리무덤에 드롭킥을 날렸다가 한동안 일거리가 없었다(...)는 소문도 있는 모양.

실제로 마사카도를 관동의 수호신인 칸다 대명신(神田大明神)으로 모신 칸다묘진이란 신사가 이 머리 무덤에서 얼마 못 가서 있으므로 이 장소를 굳이 고수해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곳이 심령스포트로 유명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21]

여담으로 일본 설화에 나오는 귀녀 타키야샤는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딸이라고 한다.

4.1. 대중매체에서

파일:attachment/타이라노 마사카도/e.jpg

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4.2. 도시전설

마사카도의 신사와 무덤들의 위치는 북두칠성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메이지정부에서는 마사카도의 힘을 두려워해서 야마노테선의 철로 마사카도의 신사를 도중에 끊어지게 해 마사카도의 힘을 절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귀신과 원령들은 철(鐵)을 두려워한다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대부분의 문화에서 소금과 철이 귀신을 쫓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에도 막부에서는 덴노의 힘을 견제한다는 이유하에 마사카도를 잘 대우해줬으나 메이지유신은 에도막부를 뒤집고 일어난 혁명에다 친덴노파라서 마사카도가 메이지 자신을 좋게 볼 일이 없다라는 이유에 메이지정부에서 마사카도의 힘을 절단하려 한 거라고 추측된다.유튜브영상 참고링크

야마노테선으로 북두칠성의 허리부분을 두르기 바로 직전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는데 메이지정부가 자신의 힘을 약하게 하려고 하자 마사카도의 원령이 분노로 일으킨게 아닌가하는 괴담도 있다. 하지만 사실 그 부분은 1919년에 츄오 본선으로 이미 잘린 뒤였기 때문에(...)


[1] 마사카도의 일생을 다룬 군담소설 쇼몬키(将門記)에는, 마사카도의 반란 못지 않게 당시 조정에서 보내 온 지방관들의 행태 뿐 아니라 마사카도에게 싸움을 걸었던 마사카도의 집안 사람들의 횡포가 적혀 있는데, 읽어 보면 거진 삼촌뿐 아니라 이 지방에 있던 다이라 일문 전체가 그의 적이다.[2] 마사카도를 시부야 강에서 공격했던 다이라노 구니카의 장인이다. 미나모토노 마모루는 구니카 말고도 다른 다이라 일족인 다이라노 요시카네, 다이라노 요시마사와도 혼인 관계였다.[3] 일본의 교육용 만화 만화 일본사 13화에서는 이 장면을 두고 마사카도가 서쪽 포위를 풀어서 도망치도록 하라는 명령에 부하가 놀라 쳐다보자 "가족끼리 죽이는 것은 내 본뜻이 아니야"라고 대답한다. 그 장면 직후에 마사카도는 고발...[4] 요시카네의 딸과 외손자였다.[5] 이 무렵까지도 마사카도와 그의 적대자와의 싸움은 어디까지나 사전(私戰, 호족 사이의 개인적인 다툼)으로 간주되었을 뿐, 그것이 국가에 대한 반란이라고 보는 인식까지는, 조정 측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조정은 다이라노 마사카도라는 인물이 얼마나 동쪽에서 위용을 얻고 있는지 알고 나서는 그를 이용해 동쪽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려고 하는 입장이었다.[6] 히타치와 가즈사, 고즈케 3개 구니는 친왕임국(親王任國)이라고 해서 최고 장관직인 카미(守)를 친왕이 맡게 되어 있고, 친왕들은 막상 실제 부임은 하지 않음으로써 카미 밑의 차관인 스케(介)가 실제 현지에서의 최고 지배자를 맡았다. 훗날 마사카도가 신황을 선포하고 나서 자신의 형제와 측근들을 간토 지역의 지방관으로 임명하는데, 고즈케에는 카미를 둔 것에 비해 히타치와 가즈사에는 그냥 예전대로 스케를 최고 지방관으로 두고 카미를 임명하지 않아서 마사카도가 정말 기존의 조정과는 다른 새로운 나라를 세울 생각이었다면 굳이 기존의 교토 조정에서 하던 관습을 답습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예 다 갈아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경우에라도 기존의 제도를 완전히 없애지는 않고 거의 답습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이나, 히타치와 가즈사를 따로 지방관에게 맡기지 않고 마사카도가 신황 자신의 직할령으로써 직접 지배하려고 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7] 곤노가미는 말 그대로 카미가 올 때까지의 대리직. 후술하겠지만 이 사람이 만악의 근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8] 세이와 겐지의 시조로 훗날의 무가 겐지의 시조이기도 하다. 쇼몬키는 이 두 사람의 행태, 지방에서의 온갖 착취 및 수탈 행위를 한 쌍의 젓가락으로 은유하고 있을 정도.[9] 쇼몬키에는 부임해 오자마자 무사시 관내를 시찰하겠다는 오키요 왕에게 "아직 정식 카미가 오지도 않았는데 임시직에 불과한 사람이 지방을 시찰하는 그런 전례 같은 거 없거든요?"라고 다케시바가 막아서자 "군지 주제에 건방지게"하면서 오키요 왕이 다케시바를 친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오키요 왕이 미리 수령으로써 뭔가 우려내 먹을 거 없나 하고 준비한 계획이었다는 해석이 대부분이다.[10] 성씨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백제왕자 부여선광의 후손이라고 한다.[11] 전쟁 등을 대비해 마련해 둔 비상용 창고.[12] 사실 이 부분은 마사카도가 너무 막나갔다고 볼 수밖에 볼 수 없는 것이, 조정의 관리로써 엄연히 조정의 법을 어긴 죄인을 잡겠다는데 그걸 숨겨준 것도 모자라 "잡지 말라"고 한 것이다.[13] 인은 수령으로서의 직책을 상징하는 도장, 일은 관아의 창고의 열쇠다.[14] 당대의 기록에는 신황이지만, 후대의 기록에는 다이라노 신노(平親王)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간토를 일본에서 분리독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막부(幕府)라는 이름으로 군사권만을 독점한 채 일본 정부와 병존하는 길을 택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이미지를 반영했다는 지적도 있다는 것 같다. 신황과 친왕은 둘 다 신노로써 발음이 같다.[15] 신불의 힘으로 조정의 적을 멸한다는 기도[16] 물론 아니다. 당대의 기록에서는 두 사람이 작당하고 일으킨 반란인 것처럼 되어 있고, 두 사람이 만나 반란을 모의했다는 바위도 교토 히에이 산에 남아 있지만, 현대의 연구에서는 두 사람이 처음부터 작당한 것은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 시기가 눈치게임마냥 일치했을 뿐이라고...[17] 해당 시기는 묘하게도 한국의 후삼국시대 종결 20년 후였으며 중국은 5대10국시대의 대전란이 한창이던 국제적인 난세였다.[18] 귀족의 지위.[19] 마사카도가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조정에 고발했다가 무고죄로 처벌되었던 것을 반란이 일어난 뒤에 "그가 고발한 것이 무고가 아니라 사실이었다"며 조정이 그에게 종5위 관위를 주었다고.[20] 나머지 하나는 악명 높은 야스쿠니 신사.[21] 물론 실제로는 차가 쌩쌩 다니는 큰 길가에 있고, 비록 빌딩때문에 햇볕은 안 들어와도 어둡거나 골목이 있거나 하는 것도 아니므로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22] 이노카와 아케미 작. 시공사에서 3권까지 나오고 안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