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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19:32:22

타이라노 마사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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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신황(新皇)
타이라노 마사카도(たいらの まさかど, 平 将門/평장문)
생몰 년도 903년~940년
재위 기간 939년

1. 개요2. 생애
2.1. 숙부와의 전쟁2.2. 요시카네와의 격돌2.3. 간토 땅의 신황이 되다2.4. 조정과 벌인 일전, 그리고 죽음
3. 평가4. 마사카도의 머리무덤
4.1. 대중매체에서4.2. 도시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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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이안 시대 일본의 무장으로 도고쿠(東國) 즉 지금의 간토 지방의 세력가로써 간토를 거점으로 신황(新皇)을 자처하며 일본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가 진압되었다.

흔히 반역자로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에는 그렇게까지 사악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는 않고, 오히려 그가 반역을 일으킬 당시 조정이 동쪽에 상당히 가혹한 지배를 했으며 조정의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않는 점을 이용해 지방관들이 저지른 위법행위들 또한 지적받는다.[1]

2. 생애

2.1. 숙부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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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츠보법봉를 휘두르는 마사카도(...) 장비?

원래는 조정에서 관직을 얻으려고 수도로 올라갔고 당시의 간파쿠 후지와라노 다다히라의 눈에 들어 그의 개인 가신이 되기도 하지만, 끝내 관직을 얻는 데는 실패하고 도로 내려와야 했다. 그러나 내려오자마자 숙부 다이라노 구니카(平國香)가 그를 시부야 강(涉谷川)에서 습격하면서부터 마사카도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935년 2월에 마사카도는 미나모토노 마모루[2]의 아들들에게 습격당했으나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그대로 미나모토노 마모루의 본거지인 마카베 군까지 진군해 인근 마을들까지 모조리 불살라버렸는데, 이때 구니카의 근거지였던 이시다(石田)도 공격을 당했고, 미나모토노 마모루의 아들들 뿐 아니라 다이라노 구니카도 화재로 죽었다.

아들과 사위를 잃은 미나모토노 마모루는 다시 다른 사위 다이라노 요시마사(平良正)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이마저도 마사카도에 의해 패하고, 요시마사가 다시 요시카네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요시카네에 이어 구니카의 아들이었던 사다모리(貞盛)까지 마사카도를 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거꾸로 마사카도의 기습을 받아 패하고 시모스케(도치기현)의 관아로 도망쳐 보호를 요청했는데, 쇼몬키에는 이때 마사카도가 시모스케의 관아를 포위해 놓고도 일부러 슬쩍 포위를 풀고 요시카네를 도망치게 한 뒤, 직접 관아와 교섭에 나서서 자신이 거병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하게 한 다음 회군했다고 한다.[3] 결국 미나모토노 마모루는 마사카도를 조정에 고발했지만, 조정은 2년이 지나 조헤이 7년(937) 4월 7일, 스자쿠 덴노의 원복을 기념하는 대사면령을 내리면서 마사카도의 죄까지 사면했기에 마사카도는 돌아올 수 있었다.

2.2. 요시카네와의 격돌

마사카도가 돌아온 뒤 다시 다이라노 요시카네는 마사카도를 공격해 마사카도가 관리하던 국영목장 쓰네하네노 미하야(常羽御厩)를 쳤다. 이 싸움에서 마사카도는 패하여 도망치고, 마사카도의 처자[4]는 요시카네에게 잡혀갔다. 하지만 요시카네의 다른 아들들인 기미마사(公雅)나 기미쓰라(公連)의 도움으로 마사카도의 처자는 탈출해 마사카도에게로 돌아왔고, 처자가 돌아온 것에 힘을 얻은 마사카도는 조정, 후지와라노 다다히라에게 요시카네의 악행과 자신의 정당성을 호소했는데, 조정에서는 마사카도가 관리하고 있던 국영목장이 요시카네 등에게 공격받은 것에 더 무게를 두어 11월 5일에 다이라노 마사카도에게 다이라노 요시카네나 사다모리, 미나모토노 마모루 등을 치라는 태정관부(太政官符)를 보내왔다. 이를 계기로 마사카도는 본거지를 도요타에서 이시이로 옮기고, 이시이를 야습해온 요시카네의 군사를 격파하고 쓰쿠바(筑波) 산으로 내몰았다. 이 패전 뒤 요시카네의 세력은 급속히 약해져, 결국 3년 만에 요시카네는 병사했다.[5]

한편 요시카네가 죽기 1년 전인 조헤이 8년(938) 2월에, 몸둘 곳이 없게 된 다이라노 사다모리는 도산도를 거쳐 교토로 가려 했지만, 사다모리가 자신을 조정에 고소할 것을 걱정한 마사카도는 1백 기를 거느리고 이를 추격해 시나노의 치쿠마 강에서 양자 간 전투가 벌어졌다. 사다모리는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간신히 몸만 빠져나와 교토로 도망칠 수 있었는데, 교토 조정에 마사카도의 난폭함을 호소한 사다모리는 조정이 마사카도에게 내린 소환장을 가지고 도고쿠로 돌아와 히타치노스케(常陸介)[6] 후지와라노 고레모토(藤原維幾) 편으로 그 소환장을 마사카도에게 보냈지만 마사카도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무쓰(陸奧)로 도망치려던 계획마저 마사카도에 의해 수포로 돌아간 사다모리는 마사카도에게 쫓기면서 도고쿠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덴교(天慶) 2년(939) 2월, 무사시 국에 새로 부임한 곤노카미(權守) 오키요 왕(興世王)[7]과 스케 미나모토노 쓰네모토(源經基)[8], 그리고 아다치 군지(足立郡司) 무사시노 다케시바(武藏武芝) 사이에 벌어진 양자간 갈등[9]에 마사카도가 중개에 나서서, 오키요왕과 다케시바를 대면시켜 서로 화해하게 했는데, 다케시바의 군사가 갑자기 쓰네모토의 진영을 포위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이유는 불명), 놀란 쓰네모토는 교토로 도망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오키요왕, 무사시노 다케시바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조정에 고발했다. 그러나 마사카도는 다시 히타치ㆍ시모우사ㆍ시모스케ㆍ무사시ㆍ고즈케 다섯 구니의 관아에서 나서서 작성한 "모반은 사실무근"이라는 연판장을 첨부해 보냈다. 이로써 조정은 마사카도의 혐의를 풀었고, 반대로 쓰네모토가 무고죄로 처벌받았다.

그런데 오키요 왕은 새로 무사시노카미로 부임해 온 구다라노 사다쓰라(百濟貞連)[10]와의 불화로 임지를 떠나 마사카도에게 의지해 왔고, 또한 히타치의 호족으로서 부동창[11]을 부순 혐의로 추포령이 내려져 있던 수배자 후지와라노 하루아키(藤原玄明)가 비호를 요구해오자 마사카도는 받아주었다. 히타치 관아에서는 마사카도에게 하루아키의 신병 양도를 요구했지만 마사카도는 "하루아키는 이미 도망쳤다"며 거절하고, 오히려 덴교 2년(939) 11월 21일에는 병사를 모아 하루아키에게 떨어진 추포령을 철회할 것을 히타치 관아에 요구했다.[12] 히타치에서 당연하게도 이것을 거부하더니 마사카도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마사카도는 1천여 군세로 히타치 관군 3천 군사를 단번에 격파했다. 히타치노스케 후지와라노 고레모토는 싱겁게 항복해버렸고, 히타치의 관아를 접수한 마사카도는 수령의 인일(印鎰)[13]을 몰수했다. 이 사건은 정말 빼도 박도 못할 '반역'이었다.

2.3. 간토 땅의 신황이 되다

이 정도까지 온 판에 오키요 왕이 마사카도에게 "히타치 한 개 구니를 빼앗은 것도 죄가 큰데, 기왕 이렇게 된 거 간토의 구니를 모두 차지해 버리시죠?"라고 부추겼고, 마사카도 역시 이에 동조해 시모스케와 고즈케를 거쳐 구니에서 수령을 내쫓고 마찬가지로 인일을 빼앗았다. 간토 8개 구니를 빼앗은 뒤에 당시 천황을 몰아내고 새로운 천황이 되고자 자신을 신황(新皇)이라노 자칭했다.[14]

쇼몬키에는 한 무녀가 나서서 자신에게 신이 내렸다면서 "하치만 대보살(八幡大菩薩)의 명으로 마사카도에게 천황의 지위를 내리셨으니, 스가와라노 아손(管原朝臣,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이 마사카도에게 천황의 임명을 집행하노라." 하는 신탁을 마사카도에게 전했고, 이에 마사카도가 기뻐하면서 신황을 자처하였다고 한다.

하치만 대보살은 일본의 무가(武家)가 숭앙했던 하치만신으로 마사카도가 살았던 당시에는 일본 천황가의 시조인 오진 천황(應神天皇)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마사카도가 살았던 당시에는 일본 조정으로부터 내쳐지고 좌천된 다자이후에서 조정에 대한 원한을 품고 죽어 벼락의 원령이 되었다는 전설이 퍼져 조정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가문과도 연줄이 있었던 듯하다. 미치자네의 셋째 아들인 카네모치(兼茂)가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영지와 가까운 히타치의 지방관을 지냈던 것도 있고,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아버지 요시마사가 살던 도요타군 인근의 마카베군에 미치자네의 아들인 가게유키(景行)가 살았고 마사카도의 동생인 마사히라가 그에게 학문을 배웠던 적도 있으며, 가게유키는 이후 마사카도의 숙부인 요시카네와 함께 자신이 살던 지역에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모시는 신사를 짓기도 하는 등 마사카도 집안과 여러 모로 연줄이 있었던 모양. 메이지 시대에는 아예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환생이 타이라노 마사카도였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황성을 짓고 백관을 두는 등[15] 반도에서 기세가 대단하자, 조정은 그를 치고자 여러 신사와 사찰에 조복기도[16]를 올리게 했고, 마사카도는 이에 후지와라노 다다히라에게 "제가 그래도 간무 덴노의 5대손이고, 과거의 여러 역사를 살펴봐도 강한 무력을 지닌 자가 한 나라를 차지하고 임금으로 받들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제가 일본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해서 안될 게 뭐 있겠습니까?"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17]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난을 일으킨 시기에 즈음해 하필이면 서쪽에서도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라는 자가 해적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조정에서는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두 사람이 작당하고 동서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당대의 기록에서는 두 사람이 작당하고 일으킨 반란인 것처럼 되어 있고, 두 사람이 만나 반란을 모의했다는 바위도 교토 히에이 산에 남아 있지만, 현대의 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두 사람이 처음부터 작당한 것은 아니고 그냥 우연의 일치였다고 한다.

사실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은 아예 교토 코앞까지 위협했다는 점에서는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 이상으로 위협적이었다. 중국은 당나라가 몰락하고 5대10국시대의 대전란이 한창이었고, 한반도에서는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926년)하고, 신라가 궁예의 고려, 마진, 태봉(후고구려)과 견훤의 백제(후백제)의 발호로 쪼개지더니만 후백제가 신라를 쳐서 거의 박살을 내놓고 그 신라가 고려에 귀부하여 사라지는 등, 국제적으로 일본과 때를 비슷하게 해서 일어나 존속했던 나라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말 그대로 '난세'였다. 발해가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한 것은 이미 동단국에서 사신으로 보내 온 옛 발해인을 통해 일본 조정에도 알려져 있었고, 신라도 후백제의 침공으로 박살난 뒤 고려에 흡수되었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는 조정으로서는 "당나라도 멸망했고 발해(+신라)도 멸망했는데 이거 우리도 쟤들하고 똑같이 되는 거 아니야?" 라는 공포를 느끼기 딱 좋은 지경이었다.

2.4. 조정과 벌인 일전, 그리고 죽음

결국 조정은 후지와라노 다다후미를 정동대장군으로 하는 진압군을 파견하고, '적의 괴수(마사카도)를 잡는 자가 있다면 누구든 상관없이 주자(朱紫)의 위(位)[18]를 주겠다.'는 내용으로 태정관부를 전국에 내리기에 이르렀고, 앞서 마사카도에게 쫓기고 있던 다이라노 사다모리 뿐 아니라 시모쓰케의 호족 후지와라노 히데사토(藤原秀郷) 등이 마사카도 공격에 나섰는데, 이 무렵 마사카도는 자신을 따르던 군사들을 추수 때문에 돌려보낸 상황이라서 군사가 1천 명밖에 없었던 판이었다.

시간을 끌면 불리해진다고 판단한 마사카도는 2월 1일을 기해 출격했지만, 마사카도의 휘하 무장이었던 다지노 쓰네아키라 등이 사다모리와 히데사토의 연합군을 발견하고 마사카도에 보고도 없이 공격을 개시했다가 패하여 도망치고, 이를 추격해 온 시모우사의 가와구치에서 마사카도군은 전투를 벌였다. 마사카도가 직접 진두에 서서 분전한 싸움에서 초반에는 사다모리나 히데사토 등도 밀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숫적으로 우세였던 그들에게 마사카도군이 밀리며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사카도는 지형지물에 익숙한 본거지로 적을 끌어들여 승부를 내고자 고지마 군(幸島郡)의 히로에(廣江)에 숨었다. 하지만 사다모리나 히데사토 등은 그를 뒤쫓는 대신 조정에서 보낸 관군이 이기고 있음을 홍보하면서 마사카도의 본거지 이시이로 쳐들어가 모든 것을 다 태우는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살 곳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은 신세가 된 백성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태워버린 추토군보다도 마사카도를 원망해, 마사카도의 모병에 응하지 않았다. 4백 군세만으로 북쪽 산을 등지고 진을 친 채 아군의 원군을 기다리던 마사카도를 조정군이 공격해 왔고, 2월 14일 오후 3시에 연합군과 마사카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마사카도군은 거칠게 불어오는 북풍을 등지고 화살을 쏘며 연합군을 몰아붙였다. 사다모리의 중진이 기습을 시도했지만 실패하면서, 사다모리와 히데사토ㆍ다메노리의 군사들은 격파되어 군병 2900명이 도망가고, 정예병 300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마사카도가 우쭐한 사이, 갑작스럽게 바람의 방향이 북풍에서 남풍으로 바뀌어버린다. 마사카도 쪽으로 부는 바람을 업고 기세를 얻은 연합군은 다시 마사카도군에게 반격을 개시했다. 마사카도는 직접 말을 몰고 진두에 서서 분전했지만, 빠르게 달리던 말의 발걸음이 흐트러지면서 마사카도도 중심을 잃고 흔들렸고, 어디선가 날아온 눈먼 화살이 마사카도의 이마를 명중시켰다.

그러나 교토로 보내져 강변에 효수되었던 그 목은 효수된 뒤에도 며칠이나 눈을 부릅뜨고 살아있는 것처럼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斬られた私の胴体はどこにあるのか。持って来い。首をつないでもう一戦しよう。
잘려나간 내 몸은 어디에 있는가. 가져와라. 내 몸을 찾아 몇 번이고 다시 싸워주겠다.

그러고는 어느 날 문득 사라져서 공중으로 떠올라 홀로 근거지였던 에도 지방으로 날아갔다고 전한다.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은 이후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과 함께 사건이 일어났던 해의 연호를 따서 '죠헤이 덴교의 난'이라 불리게 되는데, 이는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가 서로 동서에서 작당하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속설, 나아가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처음부터 조정에 반역하려 했다는 설을 전제로 하는 용어라서[19] 현대 일본 학계에서는 죠헤이를 빼고 '덴교의 난'이라고 부르거나, 그냥 양자를 나눠서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으로 부르고 있다.

3. 평가

일단 반역자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만한 반란을 일으킬 정도의 세력가였으니[20] 자연히 당시 사람들에게는 절세의 호걸로 여겨졌으며, 일본의 원령 사상과 결합되어 마사카도를 숭배하는 움직임이 생겨나 민간 신앙으로 발전했다. 특히 그가 기반했던 반도(坂東: 간토)는 옛날부터 수도로부터 촌구석, 미개지역 취급을 받던 곳이라 그 일대에서는 수도인 교토 정부의 횡포에 대항하는 영웅으로 떠받들렸다. 이런 영향력 때문에 훗날 그는 일본삼대원령 중 한 명으로 인식되게 된다.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일본 덴노의 존재와 그 덴노를 정점으로 하는 일본의 역사, 사회에서 놓고 볼 때 좀 삐딱하게 말하면 '머리가 깬 사람'에 가까웠다. 일본의 국왕인 덴노는 맹자의 천명사상, 역성혁명론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유교적 정치문화 측면에서 보면 꽤나 이질적인 존재이다.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다른 왕조 국가들과 달리, 진승왕후장상 영유종호라는, 민중에 의한 혁명과 왕조 교체를 긍정한 (나아가서는 전근대적인 신분제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이어질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게 되는) 그 유명한 말이라던가 "정치 똑바로 못하면 하늘과 백성의 이름으로 왕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천명사상, 역성혁명론으로 대표되는 맹자의 사상이 유독 현실 정치에서 좀처럼 통용되지 않았던 경우가 일본의 덴노이다.

마사카도가 살았던 헤이안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덴노와 쇼군의 권위가 말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던 센고쿠 시대에 이르러서도, 입을 옷이 없어 모기장을 뒤집어쓰고 살든, 즉위식은 고사하고 선왕의 장례식 치를 돈도 없어 글씨를 팔아서 혹은 다이묘들의 성금을 받아서 연명하든 일본 안에서 덴노는 '언터처블'의 존재였다. 온갖 신분 세탁과 족보 위조를 통해서 자신은 겐페이토키쓰의 먼 친척이네 어쩌네 하면서 득세해서 권력을 잡고 자기 주군까지 쳐내는 하극상을 벌이며 등장한 그 많고 많은 유력 다이묘들이 "내가 천하를 쥐겠노라" 호언하면서도 정작 교토의 덴노와 그 조정 자체를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았으며,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끌어내리고 유명무실해진 무로마치 막부를 아예 박살내 버린 '마왕' 오다 노부나가조차도 덴노는 건드리지 않은 것이다. 진승이 말한 "왕후장상이 어디 그 씨가 따로 있다더냐"라는 유명한 말의 예외적인 사례가 일본이라고 할 수 있다.

무사정권 수립 이래로 실권을 잃고, 백 년에 걸쳐 거의 화석 내지 껍데기뿐인 존재로 전락한 덴노였음에도 일본의 그 수많은 무사들, 다이묘들이나 잇코잇키도 마사카도처럼 그 덴노가 정점에 위치해 군림하는 기존의 일본 체제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로부터 이탈해 독립하려 들었던 역사가 손에 꼽을 정도로 없고, 모기장을 뒤집어쓰고 살든 글씨를 팔아서 연명하든 '덴노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으로 신성불가침적 존재이며, 이 일본이라는 왕국의 유일무이한 ‘왕’이니, 하늘이 무너지고 집안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덴노는 오직 덴노의 일족 외에는 그 누구도 될 수 없다'라는 명제를 고정불변의 절대적 진리로 여기며 부정하려 하지 않았던 일본 사회에서 그러한 일본의 지배 체제와 사회 구조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기를 들 생각을 할 인물은 일본 역사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 외에 그 어떤 인물도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차라리 센고쿠 시대는 "실권이 없어 있으나 마나 한 존재라 속되게 말해서 '거저 줘도 안 하는 자리'라서"라는 이유를 들어 넘겨 버릴 수 있더라도, 엄연히 덴노가 일본이라는 나라의 군주로써 군림하고 동시에 통치하던 헤이안 시대에 덴노에 대한 '찬탈'을 노리는 이가 마사카도 이전, 그리고 이후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21] 같은 시대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역사의 다른 군주정 국가들과 비교해도 분명히 이질적인 특징이 틀림없다. 덴노가 특별히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의 여느 군주들보다 선정을 펼쳐서 그랬을 리는 당연히 없다. 덴노라는 존재가 일본 역사와 일본 사회에서 어떤 위치이기에, 그리고 그 덴노를 정점으로 세워진 일본이라는 나라의 사회 구조가 어떤 사상과 이념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짚어보는 과정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존재는 분명히 이색적인 존재인 동시에 이단적인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봉기하면서 후지와라노 다다히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 "예로부터 힘 있는 자가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그러했다. 바로 얼마 전에 발해도 거란에 멸망하지 않았던가. 내가 가진 이 무력도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니, 하늘로부터 받은 이 무력으로 내가 이 일본 천하의 절반을 차지한다 한들 그것 역시 하늘의 뜻에 따르는 것뿐이지 않느냐 말이다"라는 말은 마사카도가 자신이 동쪽에서 군사를 일으켜 간토 지방을 석권한 '모반 사건'의 대의명분을 '하늘'로부터 찾고 있으며, 마사카도 자신이 간토 지방을 차지할 수 있었던 '무력' 또한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맹자가 말했던 천명사상과도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백성의 뜻으로 군사를 일으켰다"고는 운위하지 않았다 해도 자신의 군사력은 엄연히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것과 그것을 행사하여 자신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새로운 국왕'이 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비추어 정당한 것이라는 논리는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에서야 지극히 당연한 사고방식이었지만[22] 마사카도 이전이나 이후에 그 누구도 감히 입 밖에 꺼내기는 고사하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파천황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이었다.

천명사상은 일본이 당나라로부터 율령제를 배워 올 때부터 수용된 것이었지만, "임금에게 덕이 없다면 하늘은 새로 덕이 있는 자를 찾아 그에게 '천명'을 부여하며, 그로 하여금 왕조를 교체한다"라는 사상은 일본서기에서 일본 신토의 최고 신이자 온 세상을 비추는 태양의 여신인 아마테라스가 니니기에게 말한 이른바 '천양무궁의 신칙' 즉 "지상은 내 후손인 니니기와 그 자손이 영원히 다스릴 땅이다"라는 덴노에 대한 일본의 고대적인 관념과는 정면에서 상충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국왕이 아무리 정치를 엉망으로 해도, 무모한 전쟁을 벌여 수천 수백의 목숨이 죽어나가도 덴노의 자리에는 오로지 덴노의 일족만이 오를 수 있었고, '천양무궁의 신칙'으로 하늘로부터 받은 덴노의 왕권에 리콜하거나 회수할 권리는 고사하고 이의를 제기할 존재는 일본 안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 권한을 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마저도 그런 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는 덴노와 그 후손들에게 일본 천하를 다스릴 권한에 대한 '약속'만을 주었지, 유사시 그 권한을 '리콜'할 수 있는 장치는 마련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물론 임금이라도 정치 똑바로 못하면 갈린다는 맹자의 사고방식 자체는 일본에도 분명히 존재했고 긍정되었다.[23] 문제는 "너 정치 똑바로 못하면 갈린다"의 대상에 어떤 경우에도 덴노가 들어가지는 않았다는 점이고, 이는 덴노가 실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차이가 없었다. 맹자가 말한 "하늘과 백성을 거스르고 실정을 일삼는 군주는 그 덕이 쇠약해지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덕이 있는 다른 자에게로 옮겨가 버릴 수도 있다"는, 동시에 마사카도가 말한 누구든 국왕의 자리에 오를 만한 힘이 있는 자는[24] 누구든 그 자리를 힘으로 쟁취할 수 있다는 사고는 한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봉기한 것과 시기를 같이 해서 대륙에서는 3백 년에 걸쳐 세계의 중심으로 기능했고 일본이 국가 경영의 모범으로써 적극 모방했던 당나라가 멸망(907)했고, 일본 왕실의 시작과 시기를 거의 비슷하게(어쩌면 더 앞서) 시작했던 신라발해(926)에 이어 멸망(935)했다. 당나라의 쇠퇴와 멸망은 일본에 있어서 국가와 왕실의 모습을 바꾸는, 정확하게는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학계에서는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25]부터 일본에서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덴노가 국토와 인민을 지배한다"는 관념도, "덴노의 인격 아래 국가 기구를 일원적으로 통합하자는 이념"도 희박해져갔고, 이런 와중에 10세기 이후 일본에서는 더 이상 고대적인 왕권의 잔존만으로는 "덴노라는 존재가 일본의 '국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덴노에게 일본을 다스리는 통치자 즉 국왕이라는 정당성은 어떻게 성립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어려웠다고[26] 지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등장해서 "나는 하늘이 주신 이 무력으로 간토를 점령했다. 이제 하늘의 명을 받은 이 내가 새로운 덴노로써 일본을 지배한다"고, 중국식 '천명사상'을 외치며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천명 사상'을 자신의 봉기를 정당화한 마사카도가 실패한 뒤에, 일본에서 천명 사상은 다른 형태로 수용되었다. 마사카도 이후에 등장한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시대에는 귀족들 사이에도 '급'과 '직무'가 나뉘어 특정한 사회적 지위와 그에 관련한 직무(관직 포함), 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재정(토지)과 행정 기록 작성 및 관리도 이에(家)라 불리는 각각의 특정 가문에서 나누어 맡고 이를 집안 대대로 세습하게 되는 형태로[27] 일본 중세 귀족 사회 질서의 골격이 굳어져가던 와중이었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후손 역시 정실부인의 아들이 대대로 섭관의 지위를 계승하는 것으로 '셋칸케(攝關家)' 즉 섭가(섭정관백가)를 이루었으며, 마사카도와 스미토모의 반란을 진압한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다이라노 사다모리, 미나모토노 쓰네모토, 다치바나노 토야스, 그리고 오노노 요시후루 등의 후손들이 군사 임무를 집안 단위로 도맡아 세습하는 무문(武門) 즉 무가(武家)로 자리잡은 것도 이러한 특정 가문에 의한 사회적 지위 및 직무의 세습 현상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집안들의 각각의 '가업'과 '격'을 근저에서 뒷받침한 것이 일본에서 '군주'의 지위를 독점적으로 계승하는 집안인 '가문' 즉 왕실의 존재였고, 사회적인 지위와 직무를 집안 단위로 분담, 세습하게 된 '섭가', '무가'와 같은 각 집안들은 그들의 위치와 역할로 이 '왕가'를 보좌하고 그 존립을 보장하는 일을 책무로써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형태로 덴노의 '일본 국왕'으로써의 존립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덴노의 조정을 보좌해 나라를 다스리는 역할을 명신(明臣)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직계가 맡고, 치안을 유지하고 외침을 방비하는 역할을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을 진압한 '국가유공자'의 후손들이 맡듯이 덴노 역시도 아마테라스 이래의 일본이라는 나라의 '국체(군주)'라는 지위를 보존하고 독점적으로 그 후손에게 계승시킬 권리를 지닌 집안이며, 섭가도 무가도 모두 이 '왕가'를 보좌하여 내우외환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다스려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이라고 덴노의 존재 이유를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사학자 우에지마 스스무는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 이후 덴노의 인격 아래 국가 기구를 통합하려는 이념은 후퇴했지만, 대신 덴노의 '인격'과 '지위'를 완전히 분리하는 사고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즉 덴노라는 지위와 이를 중심으로 하는 체계는 그대로 유지하고 지켜야 할 것이 되어도, 그 덴노의 지위에 있는 현실의 인간은 분명히 구별되어, 덴노라는 지위와 이를 중심으로 하는 체제를 계속 유지, 계승할 수 있다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인간'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말 임금의 자리에 전혀 걸맞지 않은 수양제인간말종이 국왕이 되어 정치를 개판으로 하고 그로 인해 백성들이 괴로워한다면 당연히 그런 임금은 국왕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고 머지않아 지위를 잃게 된다는 것은 인정되었지만, 그 이념의 토대는 맹자가 말한 천명사상론이 아니라 불교적인 인과응보[28], 그리고 신대(神代)로부터 내려온 온갖 고대적 전승들의 재해석이었다. "군주에 걸맞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국왕을 삼는다 해도, 일본의 경우는 "국왕의 종성(種姓)을 가지지 못하면 국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신대 이후로 정한 관습"[29]이었고, 여기서 중국처럼 백성으로부터 들고 일어나 국왕을 갈아치우는 것이 아니라 국왕을 보좌하는 신하가 '신하 된 자의 자격'으로 '국왕(인 인간)'을 갈아치우는 것을 신하의 책무이자 '국왕(라는 지위)'을 지키는 한 방편으로 허용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마저도 갈아치우는 경우 그 갈아치우는 신하 자신이나 다른 백성 가운데 누군가를 새로운 군주로 삼는 게 아니라 국왕의 다른 일족 가운데 '군주에 걸맞는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는 자'를 선출해서 세워야 한다는 규정 역시 빠지지 않았다. 국왕이 인간으로써 혼자서 정치를 다 할 수는 없으니 신하를 가려 뽑아 국왕을 보좌하게 하되, 신하가 국왕을 보좌하고 섬기며 국왕을 지키는 역할에 '국왕을 다른 왕족 가운데에서 선출하여 교체하는 행위'를 포함시킨[30]것이 일본의 국왕, 덴노제의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31] 그리고 그렇게 국왕(자리에 있는 인간)을 폐위시키는 것 역시도 군주(라는 제도)를 지키는 행위로 정당화시키면서 동시에 그 국왕의 일족에 속하지 않은 하급 백성들로부터 무언가 '천명사상'을 내세워 국왕의 자리에 도전할 가능성을 차단해 버린 것이다. # 이러한 일본의 '덴노'에 대한 기존 인식의 재정립과 덴노의 '군주'로써의 정당성에 대한 '재해석'이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동서 봉기를 진압한 뒤에 일어났다.

일본의 NHK에서 만든 역사 다큐멘터리 그때 역사가 움직였다에서는 마사카도가 자신의 영지에서 농민들과 함께 대부분이 삼림 지대였던 땅을 개간하면서 철제 농기구를 생산해 보급하고, 영지에서 많은 수의 말을 길러 군사적으로 활용했으며 오늘날 알려진 것과 같은 휘어진 형태의 일본도를 만들어 보급하는 등 군사적 개혁도 행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을 진압한 다이라노 사다모리나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미나모토노 쓰네모토[32] 등의 후손들이 국가유공자로서 이세 헤이시카와치 겐지 등 네임드 무사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헤이케 정권과 가마쿠라 막부, 그리고 이후 무사정권의 수립에 대해서도 한 다리 걸친 셈이다.

센고쿠 시대의 오타 도칸(太田道灌)이나 호조 우지쓰나(北條氏綱) 등의 무장들도 간다묘진에 무운을 빌기도 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앞두고 간다묘진에게 전승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으며 에도 막부가 들어선 뒤에는 아예 간다묘진을 에도의 수호신으로 모셨다.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의 시대에는 칙사로서 에도에 내려왔던 다이나곤(大納言) 가라스마루 미쓰히로(烏丸光廣)가 막부로부터 마사카도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조정에 호소해 역적이라는 이름도 제거하게 했다.(물론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무너진 뒤에는 가차없었다.) 에도 막부가 마사카도를 유난히 숭배한 것은 조정에 대항했던 다이라노 마사카도를 막부의 수호신으로 삼음으로써 조정을 정치에서 배제하겠다는 의도가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간다묘진의 현 위치는 에도 막부가 옮긴 것으로 에도성의 동북쪽 귀문(鬼門)에 해당하는 곳에 해당한다고.

모로 미야가 쓴 헤이안 일본이라는 책에 보면 메이지 덴노가 살아서 몸소 참배한 두 곳이 야스쿠니 신사와 마사카도의 간다묘진이었다고 적었다. 물론 조정에 반역했던 자에게 천황이 머리를 숙인다는 것이 아무래도 정서상 용납될 수는 없는지라 1884년메이지 덴노가 간다묘진을 참배할 때는 마사카도의 신위는 신사 본전에서 빼서 경내의 섭사(부속신사)로 옮기고 본전의 빈 자리에는 원래 있던 오쿠니누시 신령과 짝을 맞추어 스쿠나비코나 신을 권청해 모셨다. 마사카도가 간다묘진의 본전으로 돌아온 것은 1984년으로 섭사에 들어간 지 백 년만의 일이었다.

2014년에 일본의 모 여성잡지에서 '가장 끔찍한 악당' 4위로 꼽히기도 했다. 1위는 아케치 미츠히데... 판단은 각자 알아서.# 2위는 하필 오다 노부나가다.

4. 마사카도의 머리무덤

마사카도의 묘가 두 군데 있는데, 한 곳은 몸이 묻힌 곳이고, 다른 한 곳은 참수된 마사카도의 머리가 날아가다가 도중에 멈춘 곳이라 한다. 에도 막부에서는 이 지방을 근거로 했던 마사카도의 영을 위무하기 위해 7개의 신사를 건립했는데, 그 중 마사카도의 머리가 날아가다 멈춘 곳은 머리무덤(首塚)이라 한다. 이 머리무덤은 도쿄 고쿄 동쪽, 오테마치역 주위의 빌딩들 사이의 큰길가에 있는데, 주변에 몇십층 짜리 빌딩들이 있는 사이에 자그마한 사당이 홀로 버티는 것을 보면 이 머리무덤에 대한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몇 번 밀어버리려고 하다가도 저주 때문에 관뒀는데, 대표적으로 간토 대지진으로 인해 머리무덤이 파괴된 일이 있었다. 당시에는 대장성(현 재무성)의 임시 청사를 짓기 위해 머리무덤을 발굴하고 밀어버리려다 공사 관계자부터 당시 대장대신 하야미 세이지까지 관계자 14명이 이런저런 원인으로 죽는 일이 벌어졌고, 마사카도의 분노를 두려워한 일본 정부가 머리무덤을 현재의 형태로 복구했다. 지금도 이런 경외는 변함이 없어서, 2020 도쿄 올림픽을 대비한 오오테마치 재개발에서도 해당 위치만 교묘하게 빠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상단의 '平将門の首塚' 부분 그 외에 일본의 코메디언 듀오 폭소문제의 멤버인 오오타 히카리가 머리무덤에 드롭킥을 날렸다가 한동안 일거리가 없었다(...)는 소문도 있는 모양.

마사카도를 간토의 수호신인 칸다 대명신(神田大明神)으로 모신 칸다묘진이란 신사가 이 머리 무덤에서 얼마 못 가서 있으므로 이 장소를 굳이 고수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곳이 심령스포트로 유명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33]

4.1. 대중매체에서

파일:attachment/타이라노 마사카도/e.jpg

4.2. 도시전설

마사카도의 신사와 무덤들은 북두칠성 모양으로 위치했는데, 메이지 시대 일본 정부에서는 마사카도의 힘을 두려워해서 야마노테선의 철로를 깔아서 마사카도의 신사를 도중에 끊어지게 해 마사카도의 힘을 절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부분 문화에서 귀신들은 철(鐵)과 소금을 두려워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에도 막부는 덴노의 힘을 견제한다는 이유로 마사카도를 잘 대우해줬으나 메이지 유신에도 막부를 뒤집고 일어난 혁명이고 명목상 덴노를 받들었기 때문에, 메이지 정부가 반역자인 마사카도의 힘을 절단하려 했다는 것이다.유튜브영상 참고링크

야마노테선으로 북두칠성의 허리 부분을 두르기 바로 직전에 간토 대지진이 일어났는데 메이지 정부가 자신의 힘을 약하게 하려고 하자 마사카도의 원령이 분노로 일으킨게 아닌가하는 괴담도 있다. 하지만 사실 그 부분은 1919년에 츄오 본선으로 이미 잘린 뒤였기 때문에(...)

일본 설화에 나오는 귀녀 타키야샤는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딸이라고 한다.


[1] 마사카도의 일생을 다룬 군담소설 쇼몬키(将門記)에는, 마사카도의 반란 못지 않게 당시 조정에서 보내 온 지방관들의 행태뿐 아니라 마사카도에게 싸움을 걸었던 마사카도의 집안 사람들의 횡포가 적혔는데, 읽어 보면 거진 삼촌 뿐 아니라 이 지방에 있던 타이라 일문 전체가 그의 적이다.[2] 마사카도를 시부야 강에서 공격했던 다이라노 구니카의 장인이다. 미나모토노 마모루는 구니카 말고도 다른 다이라 일족인 다이라노 요시카네, 다이라노 요시마사와도 혼인 관계였다.[3] 일본의 교육용 만화 만화 일본사 13화에서는 이 장면을 두고 마사카도가 서쪽 포위를 풀어서 도망치도록 하라는 명령에 부하가 놀라 쳐다보자 "가족끼리 죽이는 것은 내 본뜻이 아니야"라고 대답한다. 그 장면 직후에 마사카도는 고발...[4] 요시카네의 딸과 외손자였다.[5] 이 무렵까지도 일본 조정은 마사카도와 그의 적대자간 싸움은 어디까지나 사전(私戰), 즉 호족들 사이 개인적인 다툼으로 여기고, 국가나 조정에 대항하는 반란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정은 다이라노 마사카도라는 인물이 얼마나 동쪽에서 위용을 얻엇는지 알고 나서는 그를 이용해 동쪽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려고 했다.[6] 히타치와 가즈사, 고즈케 3개 구니는 친왕임국(親王任國)이라고 해서 최고 장관직인 카미(守)를 친왕이 맡지만, 친왕들은 막상 실제 부임은 하지 않음으로써 카미 밑의 차관인 스케(介)가 실제 현지에서의 최고 지배자를 맡았다. 훗날 마사카도가 신황을 선포하고 나서 자신의 형제와 측근들을 간토 지역의 지방관으로 임명하는데, 고즈케에는 카미를 둔 것에 비해 히타치와 가즈사에는 그냥 예전대로 스케를 최고 지방관으로 두고 카미를 임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사카도가 정말 기존의 조정과는 다른 새로운 나라를 세울 생각이었다면, 굳이 기존의 교토 조정에서 하던 관습을 답습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예 다 갈아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경우에라도 기존의 제도를 완전히 없애지는 않고 거의 답습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이나, 히타치와 가즈사를 따로 지방관에게 맡기지 않고 마사카도가 신황 자신의 직할령으로 직접 지배하려고 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7] 곤노가미는 말 그대로 카미가 올 때까지의 대리직. 후술하겠지만 이 사람이 사태의 원흉이라고 봐도 무방하다.[8] 세이와 겐지의 시조로 훗날의 무가 겐지의 시조이기도 하다. 쇼몬키는 이 두 사람의 행태, 지방에서의 온갖 착취 및 수탈 행위를 한 쌍의 젓가락으로 은유했을 정도.[9] 쇼몬키에는 부임해 오자마자 무사시 관내를 시찰하겠다는 오키요 왕에게 "아직 정식 카미가 오지도 않았는데 임시직에 불과한 사람이 지방을 시찰하는 그런 전례 같은 거 없거든요?"라고 다케시바가 막아서자 "군지 주제에 건방지게"하면서 오키요 왕이 다케시바를 친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오키요 왕이 미리 수령으로써 뭔가 우려내 먹을 거 없나 하고 준비한 계획이었다는 해석이 대부분이다.[10] 성씨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백제왕자 부여선광의 후손이라고 한다.[11] 전쟁 등을 대비해 마련해 둔 비상용 창고.[12] 사실 이 부분은 마사카도가 너무 막나갔다고 볼 수밖에 볼 수 없는 것이, 조정의 관리로써 엄연히 조정의 법을 어긴 죄인을 잡겠다는데 그걸 숨겨준 것도 모자라 잡지 말라고 한 것이다.[13] 인은 수령으로서의 직책을 상징하는 도장, 일은 관아의 창고의 열쇠다.[14] 당대의 기록에는 신황이지만, 후대의 기록에는 다이라노 신노(平親王)로 나온다. 이에 대해서는 간토를 일본에서 분리독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막부(幕府)라는 이름으로 군사권만을 독점한 채 일본 정부와 병존하는 길을 택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이미지를 반영했다는 지적도 있다는 것 같다. 신황과 친왕은 둘 다 일본어로는 신노라고 읽는다.[15] 일본사에 전무후무한 역성혁명급 반란임을 보여준다.[16] 불력(佛力)으로 어떤 적대적인 존재의 힘을 꺾거나 굴복시키는 것을 조복(調伏)이라고 한다. 귀신이나 요괴 같은 대상부터 산 사람까지도 조복의 대상이 될 수 있다.[17] 재미있게도 이때 마사카도가 '세상에서는 싸워서 이긴 자를 임금으로 모시며, 외국을 봐도 무력을 지닌 자가 나라를 차지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는 사례로 든 게 926년 대거란국발해를 멸망시키고 동단국을 수립한 일이었다.[18] 귀족의 지위.[19]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경우는 처음부터 반란을 일으키려고 거병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지를 탐내고 빼앗으려는 숙부들로부터 자신의 유산을 지키기 위한 자기방어적 성격이었다가 문제가 '삑사리'가 나면서 반도 전역으로 사태가 번지고 조정에 대한 반란 사태로까지 인식된 것이지, 처음에는 반란은 고사하고 아버지의 유산을 탐내는 숙부들에 대한 항쟁이라는 충분한 대의명분이 있었다.[20]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 중국의 조고, 왕망, 주이, 안녹산, 일본의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미나모토노 요시치카,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함께 한때 잘 나갔으나 반란을 일으켜서 훅 간 권신이라 언급된다.[21] 고켄 덴노의 남첩으로 '태정대신선사'에까지 임명되었던 승려 도쿄가 찬탈을 노리고 우사 하치만구의 신탁을 빌리려고는 했다. 우사 하치만구의 신탁이 "ㅇㅇ 도쿄 넌 안 돼"로 나와서 그렇지.[22] 이것도 냉소적으로 말하면 대판 거하게 싸워서 이긴 자가 왕이 되고 거기에 맞춰서 사람들은 '천명을 얻으신 진정한 우리의 지도자시여' 하고 우루루 몰려가서 머리 숙이고 엎드리는, 인간 사회의 씁쓸한 현상이다. 누구 말마따나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반역 아닙니까!"라는 말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쿠데타 수괴의 교활한 자기 정당화도 아니며, 동서고금 막론하고 왕정이나 공화정이나 별 차이 없이 존재해 왔고 현실 어느 사회에서나 그대로 통용되던 불편한 진리다.[23] 당장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사서를 다 읽기 힘들면 맹자만이라도 읽어야 한다고 했던, 맹자 애독자였다. 메이지 유신도 그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요시다 쇼인이 맹자를 강의했다거나 그 문하생인 타카스기 신사쿠기병대 역시 맹자의 '하늘과 백성의 이름으로 실정하는 국왕을 갈아치운다'는 천명 사상에 뿌리를 두었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로 '일본 역사에서 맹자가 위력을 발휘한 몇 안 되는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덴노의 조정이나 막부의 쇼군이라고 그러한 천인상관설을 몰랐거나 혹은 '웃기고 있네' 정도로 치부한 것은 아니어서 국가 재난 사태에는 으레 '덕정(德政)'이라 불리는 국가적 대책들이 시행되었다. 후지와라 세이카 이래 맹자 중심의 신유학인 성리학이 일본에 본격 보급되고 도쿠가와 막부 시대를 거치면서 연구가 심화됨에 따라, 막부 말쯤 되면 시부사와 에이이치 등을 비롯한 유신지사들 중 많은 사람이 맹자 정도는 기본 교양으로 다 알고 있었고, 유교적 이념에 따르면 문제가 많은 조정(덴노)-막부(쇼군) 이원적 지배구조에 대한 불만도 이로 인해 증폭되었다. 시부사와 같은 인물은 아예 맹자를 직접 읽다가 혁명을 부추기는 구절에 영향을 받고서 막부를 타도하려는 무리를 소집했던 사람이다.[24] 물론 여기에는 '국왕의 자리에 오를 만한 힘'을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증명이 필요하겠지만, 애초에 그 많은 경쟁자 다 쳐 죽이고 살아남아 국왕으로 즉위까지 한 사람한테 의심을 품고 나아가 ‘당신의 그 힘 정말 하늘로부터 받은 건지 어디 증명해 보라’고 면전에서 따져 물을 간 큰 인간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25] 황소의 난을 기점으로 당이 쇠퇴한 시기와 겹친다.[26] 덴노의 조정이 지방으로부터 조용을 세금으로 거두어 그 세금으로 전국의 국영/관영 신사에 '봉납'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신토의 전통 신들에 대한 제사를 전적으로 거행하는, 즉 일본 신토의 정점임을 자처한 점도 덴노의 '국왕'으로써의 통치를 정당화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이것도 9세기 후반에는 조용 수취도 덴노의 조정으로 보내지 않고 지방의 고쿠시들이 알아서 거두게 하고 11세기에는 관물로 재편되면서 의미가 없어진다.[27] 이를 관사청부제라 한다.[28] 불경에도 국왕이 정치를 엉망으로 해서 백성들 괴롭힌다는 이유로 신하 내지 백성들이 봉기해 국왕을 끌어내린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나 불경에도 등장하는 깔마샤빠다(반족).[29] 지엔(慈圓) 저 구칸쇼 제7권[30] 후지와라 씨의 시조라는 아마노코야네노 미코토(天児屋命)는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로부터 "네 상전의 곁에서 섬기며 잘 지키라"라는 명을 받았는데, 구칸쇼의 저자인 지엔은 아마노코야네 신의 후손인 나카토미-후지와라 씨는 이 아마테라스와의 약속을 지켰기에 1)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나카노오에를 도와 권신 소가노 이루카를 참살했고 2) 후지와라노 나가테와 후지와라노 모모카와가 쇼토쿠 덴노의 후사로 고닌 덴노를 택현하여 옹립했고 3) 후지와라노 모토쓰네가 '폭군' 요제이 덴노를 폐하고 고코 덴노를 세웠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신하가 왕을 폐위시키고 왕족 가운데 새로운 왕으로 즉위시킨, 한국사 용어로 설명하면 '반정'에 해당하는 군주 폐립 행위도 엄연히 신하가 국왕을 보좌하는 업무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는 것이다.[31] 한국사에서는 진작에 '반정'이라는 이름으로 국왕을 폐립시킨 것이 이미 여러 차례 있었으니 콕 집어서 '일본만의 특징'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국까지 확장하면 상나라이윤이나 한나라곽광도 있다. 애초에 후지와라 집안이 독점하다시피 했던 간파쿠(關白)라는 직책의 기원이 이 곽광이다.[32] 마사카도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조정에 고발했다가 무고죄로 처벌되었던 것을 반란이 일어난 뒤에 '그가 고발한 것이 무고가 아니라 사실이었다.'며 조정이 그에게 종5위 관위를 주었다고.[33] 물론 실제로는 차가 쌩쌩 다니는 큰 길가에 있고, 비록 빌딩 때문에 햇볕은 안 들어와도 어둡거나 골목이 있거나 하는 것도 아니므로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34] 인기 사극인 오오오카 에치젠의 주연을 무려 30년 동안 맡은것으로 유명하다.[35] 이노카와 아케미 작. 시공사에서 3권까지 나오고 안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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