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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19:27:04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藤原純友
893년(?) ~ 941년 7월 21일

1. 개요2. 생애
2.1. 이요의 해상 호족2.2. 반란을 일으키다2.3. 반란의 최후
3. 기타

1. 개요

헤이안 시대 일본의 귀족, 해적. 세토 내해를 거점으로 하여 거대 반란을 일으켜 일본 조정을 위협한 인물. 그의 반란은 비슷한 시기 동쪽에서 반란을 일으킨 신황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반란과 함께 죠헤이-텐쿄의 난이라고 불린다.[1]

2. 생애

2.1. 이요의 해상 호족

다자이노쇼니(大宰少貳)를 지낸 후지와라노 요시노리(藤原良範)의 아들로 알려져 있는데, 무로마치 시대의 씨족 조사서인 《손피빈먀쿠(尊卑分脈)》에는 작게 주석으로 이요의 해상 호족인 다카하시노 토모히사(高橋友久)의 아들인데 요시노리와 토모히사 사이의 밀약에 따라 후지와라노 요시노리의 양자로 들어 갔다고 적고 있다.

당숙[2] 후지와라노 모토나(藤原元名)가 이요노카미로 부임해 있던 죠헤이 2년(932년)부터 죠헤이 5년(935년) 사이에 스미토모는 처음 이요 땅에 발을 디딘 것으로 보인다. 이요에서는 이요노죠[3]로써 이요의 히부리 섬(日振島)[4]을 중심으로 휘하에 해상 세력을 규합해 거느리고 있었다.

죠헤이 6년(936년)에 일본 조정은 당시 서해 일대에 출몰하던 해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기노 요시토(紀淑仁)를 이요노다이스케(伊予大介) 겸 추포해적사(追捕海賊使)로 삼아 이요로 파견했고, 이요 현지의 해상 세력을 보유하고 있던 스미토모에게도 기노 요시토를 도와 해적을 추토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이때 2,500명이 넘는 해적을 항복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조정에서는 해적 추토의 명목상 총지휘관이었던 기노 요시토에게만 이요노카미 관직을 주는 은전을 내리고 정작 실무진이었던 스미토모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 무렵부터 스미토모는 현지에서 해적들을 규합해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해적을 진압하러 와서 거꾸로 해적으로 눌러앉은 것이다.

2.2. 반란을 일으키다

덴교 2년(939년) 12월, 이요에서 멀지 않은 비젠(備前)에서 현지의 수령이었던 후지와라노 고타카(藤原子高)와 스미토모의 노토(郎党, 가신)인 후지와라노 후미모토(藤原文元) 사이에 알력이 생겼는데[5] 후미모토를 지원하러 스미토모가 비젠으로 올 것이라는 소식에 겁에 질린 후지와라노 고타카는 처자를 거느리고 몰래 교토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12월 26일 인시에 셋쓰의 우사기하라 군(菟原郡)의 스기역(須岐驛)에서 후지와라노 후미모토에게 붙들려 아내를 빼앗기고 자식들은 모조리 살해당했으며 후지와라노 고타카 자신은 후미모토에 의해 코와 귀가 잘렸다.[6] 이듬해인 덴교 3년(940년) 정월 19일에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선단이 빗츄(備中)을 공격했다.

조정의 지방관을 상대로 상상도 못할 끔찍한 보복을 가한 후미모토나 그 배후에 있는 스미토모를 진압해야 했지만 이 무렵에 간토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간토에서 지방관들을 내쫓고 8개 쿠니를 빼앗은 다음, 스스로 신황(新皇)을 자처하며 조정에 맞서 독립 정권 수립을 선언한 상태였고, 조정에서는 일단 스미토모를 추포할 산요도추포흉적사(山陽道追捕凶賊使)의 장관과 차관에 각각 오노노 요시후루(小野好古)와 미나모토노 쓰네모토(源經基)[7] 등을 임명해 둔 다음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에게 종5위하 관위를 내리고 후지와라노 후미모토에게도 관위를 준다는 결정을 내렸다. 후지와라노 스미토모보다는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더 급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하필이면 후지와라노 스미토모가 봉기한 시점이 동쪽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봉기한 시점과 일치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물론 후대에까지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두 사람이 처음부터 작당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교토 히에이 산에는 실제로 두 사람이 만나서 모의했다는 '마사카도 바위'라는 곳도 있었는데, 젊은 시절에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가 교토에서 만나 이곳에 올라서 교토를 내려다보며 "우리 언젠가 같이 손을 잡고 이 교토를 차지하자. 그러고 나면 덴노의 후손인 마사카도가 덴노가 되고 후지와라 씨인 스미토모가 간파쿠가 되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정치를 펼쳐보자"고 맹세했다는 것이다. 다만 현재에는 두 사람이 처음부터 모의한 것은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까 두 사람이 동서에서 반란을 일으킨 시기가 눈치게임처럼 일치했을 뿐이라고 보고 있다.[8]

다만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은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보다 심각하면 심각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는데, 스미토모의 경우는 아예 교토 코앞까지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상략기》나 《고지단》에 따르면 스미토모가 반란을 막 일으켰을 무렵부터 교토 주변에서 의문의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고 적고 있는데, 스미토모 추포의 총책임자였던 오노노 요시후루는 아예 2월 22일, “스미토모가 배를 타고 지금 올라오고(교토로 향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조정이 자신에게 준 관위가 너무 낮다는 이유였다. 교토 조정에서는 황궁의 모든 문에 군사를 배치하고 교토로 들어 오는 입구인 야마시로노쿠니의 야마자키(山崎) 등지에 다시 경고사를 임명했지만, 사흘 뒤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야마자키가 전소된다. 사누키에서도 후지와라노 미타쓰(藤原三辰)[9]가 스미토모에 호응해 거병하고 사누키노스케 후지와라노 구니카제(藤原國風)을 내쫓고 사누키를 점령해 버렸다.

아와지(淡路)까지 털리자 조정은 추포산요도사에 더해 3월 4일에 추포난카이도사(追捕南海道使)를 임명해 난카이도 즉 시코쿠(四國)에 대해서도 조정이 군사를 보낼 수 있다는 의지를 보였고 스미토모도 한 발 물러나 자신이 가진 관위를 반납할 뜻을 보였지만, 그때 이미 비젠ㆍ빗츄는 스미토모의 가신인 후미모토의 실효지배 아래 있었고, 후지와라노 미타쓰에게 쫓겨난 사누키노스케 후지와라노 구니카제는 경고사(警固使) 사카노우에노 토시모토(坂上敏基)와 함께 아와로 달아났다가 다시 아와에서 후지와라노 미타쓰에게 공격당해 수백 명의 군사를 잃은 상태였다. 헤이안쿄에서 셋쓰까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세력(내지 세력에 호응하는 분자)들이 봉기하면서 다자이후와 교토 사이의 연락은 거의 끊어졌고, 다자이후를 통해 오가던 고려오월 등 외국의 국서나 현지 보고서도 스미토모 수군에 막혀서 한동안 교토까지 오지 못하는 등,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세력에 의해 서쪽으로의 교통로는 아예 막혀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야마자키가 전소되기 전날인 2월 25일, 동쪽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후지와라노 히데사토(藤原秀鄕) 등에게 진압되었다는 보고가 수도에 도착했고, 교토 조정은 동쪽으로 보냈던 군세가 귀환한 뒤 6월 10일에 산요도추포사 오노노 요시후루에게 스미토모가 아닌 스미토모의 ‘난폭한 부하’ 후지와라노 후미모토에 대한 추토령을 내렸다. 스미토모에게 순순히 후미모토를 내놓을지 아니면 역적으로써 죽을지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동시에 스미토모의 휘하 무장들을 분열시키기 위한 획책이었다. 후지와라노 스미토모는 이에 추토령 발발 직후에 강탈했던 배를 히부리 섬에 돌려주었고, 스미토모에게 막혀 오지 못하던 다자이후의 보고서와 고려의 첩장이 무사히 교토에 도착하는 등 사이고쿠와 교토 사이의 서쪽 연락망도 복구되었다.

2.3. 반란의 최후

추포산요도사 오노노 요시후루에 쫓겨 노토인 후지와라노 후미모토가 사누키로 달아나고 조정에 다시금 맞서기로 결정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는 8월 18일에 4백 척 선단을 이끌고 이요와 사누키의 고쿠가(國衙)를 습격해 불사르고 비젠과 분고의 병선 100척도 태워버린 뒤, 나가토(長門)를 습격해 관물을 약탈했다. 조정은 이에 맞서 8월 22일에 오우미노쿠니(近江國)에서 병사 100명을 뽑아 아와의 스미토모군을 치게 하는 한편, 8월 27일에 오노노 요시후루에게 산요ㆍ난카이 2도의 해적추포사를 겸하게 한 뒤, 곳곳에 또 경고사를 지정하고 쿠니마다 동원령을 내렸다. 8월 29일에 기이(紀伊)에서 난카이 지역의 스미토모군이 내습했다는 제보가 날아들자 천태산에서 오단상법, 법림사에서 대원수법 같은 조복주법을 행하게 했다.

9월 2일에 사누키에서 스미토모 부하 기노 후미노리(紀文度)가 붙잡혀 교토로 압송되는 성과도 있었지만, 10월 22일, 마침내 스미토모는 다자이후까지 들이닥쳐 약탈을 감행했다. 이는 아키ㆍ스오의 비역(飛驛)을 통해 교토에 보고되었다. 11월에는 스오(周防)의 주전사(鑄錢司, 화폐 주조소)를 습격해 불태웠으며, 12월에는 도사(土佐)의 하타군(幡多郡)을 습격해, 양측 모두 수만 명의 전사자를 냈다. 교토 조정에서는 고승들에게 셋츠의 스미요시 신궁사(住吉神宮寺)[10]에서 서해의 흉적(凶賊)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조복의 기원을 올리게 하고 이어 27일간 비사문천조복법(毘沙門天調伏法)을 닦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런데 이 무렵, 스미토모군의 간부인 후지와라노 쓰네토시(藤原恒利)가 조정군에 항복하면서 스미토모 세력의 기세는 급전직하를 타기 시작했다. 역도들의 거처며 숨어있는 곳이나 수륙 통행에 대한 상세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그가 조정에 투항하고 조정군은 그로부터 받은 정보를 근거로 스미토모의 본거지 히부리 섬을 습격하고, 덴교 4년(941년) 1월 21일 사누키를 쳐서 후지와라노 미타쓰를 전사시켰다. 2월 9일에는 조정군의 효고료(兵庫允) 미야미치 다다모치(宮道忠用)가 스미토모의 본거지였던 이요까지 장악했지만, 스미토모를 잡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요를 떠난 스미토모는 다시 다자이후로 달아나 자신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이때 진제이의 분고(豊後)ㆍ히나타(日向)의 호족으로 보이는 사에키 고레모토(佐伯是基)나 구와바라 이케유키(桑原生行)가 스미토모에 가담해 다자이후를 치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하지만 스미토모의 동생 우에몬노스케(右衛門佐) 후지와라노 스미노리(藤原純乘)가 야나기가와(柳川)에 침공했다가 가바이케(蒲池)에서 다자이곤노소치 다치바나노 기미요리(橘公賴)에게 패하는 등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포위망은 좁혀오고 있었다. 5월에 오노노 요시후루가 이끄는 조정군이 규슈에 상륙해, 사칸(主典) 오쿠라노 하루자네(大藏春實)와 함께 각기 수륙 양쪽으로 스미토모를 쳤다. 6월 6일 스미토모는 다자이후를 불태워버리고 하카타 만으로 가서 하루자네가 이끄는 조정측 수군을 맞아 싸웠다.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와 그를 따르던 해적들은 모두 죽을 각오를 하고 덤볐지만, 조정군측의 오쿠라 하루자네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웃옷도 벗어던진 ‘야차’와 같은 모습으로 뛰어들어 분전한 끝에 스미토모 선단은 크게 패하고 8백 척의 배를 잃었다. 스미토모는 아들 쥬타마루(重太丸)과 함께 히비키나다(響灘)에서 작은 배를 타고 6월 11일에 자신의 본거지였던 이요로 피했지만, 29일에 이요의 경고사였던 도토미노죠(遠江掾) 다치바나노 토야스(橘遠保)에게 붙들려 옥중에서 죽었다.[11] 이후 스미토모 세력들도 하나하나 조정군에 진압당해 전사하거나 처형당했다.

생전에 쥬타마루(重太丸)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 이상으로 해적다운 모습을 보였고, 스미토모가 죽는 순간까지 아버지의 옆을 지키다 전사했다. 사망 당시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다고 한다. 곤자쿠 모노가타리에 따르면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와 그의 아들 쥬타마로 두 사람의 목은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처형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수도로 옮겨졌는데 교토의 덴노와 귀족들은 역적의 수급을 맨눈으로 보면 부정 탄다면서 위문부에 속한 화공을 시켜서 수급을 그림으로 그려서 가져 오게 해서 보았다고 한다.

3. 기타

연연 프로젝트에 등장하는 후지와라노 이요자네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를 모티프로 한 캐릭터로 여겨지고 있다.

조아라에서 연재 중인 팬픽 비관적 니트가 인류사?에 오메가 미드가르드 세력으로 등장한다. 검은 머리카락의 쾌남아로 리프와 함께 나가토키의 세계에 나타나 비테게를 스카웃하려 하지만 번번히 퇴짜를 맞고, 교전하게 되지만 나가토키와 호시노의 개입을 받아 실패. 이후 와일드 헌트의 공세에서부터 비테게를 보호한다. 황염의 도시에도 출현하여 이자요이, 전하와 공투하여 마라 파피야스가 소환한 마하발리와 교전한다. 주 무기는 두 자루의 일본도. 해적인 탓인지 일본 신화의 폭풍의 신 스사노오의 화신으로 설정되어, 간접적으로 우두천왕, 제석천의 화신으로 취급되어 폭풍과 번개의 기프트를 다룬다.

[1] 다만 '죠헤이 덴교의 난'이라는 말은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가 서로 동서에서 작당하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설과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처음부터 조정에 반역하려 했다는 설을 전제로 하는 용어라서 현대에는 단순하게 덴교의 난이라고 부르거나, 그냥 양자를 나눠서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 또는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으로 부르고 있다.[2] 아버지의 사촌형제[3] 사무상 과오 적발이나 공문서 심사라던지 숙직 할당 등의 업무를 맡았다. 중앙정부의 판관직에 해당.[4] 일본 시코쿠 서남쪽에 붙어 있는 섬으로 행정구역상으로는 에히메 현 우와지마 시에 속해 있으며 산이 많고 평지가 적은 데다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쵸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가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에게 대패하고 아들 노부치카(信親)마저 잃은 채 잔당들을 거느리고 숨어들었던 곳이기도 하다.[5] 당시 세금 징수 문제를 놓고 현지 호족들과 중앙에서 온 지방관 사이에 다툼이 벌어져서 호족들에게 지방관이 린치를 당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리고 덴교 2년에는 서쪽에 가뭄이 들어서 식량 부족 사태도 벌어졌다.[6] 같은 시기에 간토에서 지방관을 상대로 항쟁했던 타이라노 마사카도도 지방관들에게서 인장과 부고 열쇠를 뺏고 교토로 내쫓는 정도에서 그쳤던 것에 비하면 끔찍한 처분이었다.[7] 세이와 겐지의 시조다.[8]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두 사람 모두 귀족 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중앙에서 관직을 얻지 못하고 지방의 한직에 머물러 있었던 데다, 저마다 그들이 토대로 하고 있던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돌아가신 아버지 요시마사의 영지를 노리는 백부나 숙부, 조카 등 친족들과 맞서 싸웠고, 후지와라노 스미토모는 아버지로부터의 유산이나 법적 보호는 고사하고 자신의 권리, 공로조차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과 직면해 있었다. 촌구석 취급 받으며 조정으로부터 가혹한 과세에 시달리던 간토 백성들이나 해적 추포의 공적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서해의 해상 세력들은 그것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가 거느렸던 해상 세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들의 거병에 대해 1차적 책임은 동서로부터 무거운 세금을 거두며 폭압에 가까운 지방행정을 벌인 교토 조정에 있었다.[9] 이 사람은 예전에 야마시로노쿠니의 판관직을 지낸 적이 있어서 야마시로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10] 일본에서 야마토 조정의 뱃길을 수호한다고 여겼던 수군의 신.[11] 또는 6월 20일에 다치바나노 토야스에게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