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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13:55:53

오진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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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15대 천황
오진 천황
應神天皇
파일:Emperor_Ōjin.jpg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출생 201년
사망 310년 2월 15일 (향년 108-109세)
능묘 에가노모후시노오카능 (惠我藻伏崗陵)
재위기간 제15대 천황
270년 1월 1일 ~ 310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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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호무타, 호무다(品太, 誉田, 品陀, 凡牟都)
한풍
시호
오진 덴노(應神 天皇, 응신 천황)
화풍
시호
호무타와케노미코토(誉田別尊)
호무타노스메라미코토(誉田天皇)
호무타와케노스메라미코토(誉田別天皇)
이자사와케노미코토(去来紗別尊)
하라노우치니마시마스스메라미코토(胎中天皇)
호무다와케노미코토(品陀和氣命)
오오토모와케노미코토(大鞆和氣命)
호무다노스메라미코토(品太天皇)
호무타와케노미코(凡牟都和希王)
부모 부친 주아이 천황(仲哀天皇)
모친 진구 황후(神功皇后)
배우자 나카쓰히메노미코토(仲姫命)
자녀 닌토쿠 천황(仁徳天皇)
누카타노오오나카쓰히코 황자(額田大中彦皇子)
오오야마모리 황자(大山守皇子)
우지노와키이라츠코 황자(菟道稚郎子皇子)
야타 황녀(矢田皇女)
메토리 황녀(雌鳥皇女)
와타누케후타마타 황자(稚野毛二派皇子)
하야부사와케 황자(隼別皇子)
황거 카루시마토요아키라노미야(軽島豊明宮) }}}}}}}}}
1. 개요2. 행적
2.1. 아버지?2.2. 신라와의 공방전?2.3. 기타 한국사 관련 기록
3. 추측4.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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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제15대 천황.

일본 최초의 천황이라는 기록도 있으며 제10대 스진 천황과 마찬가지로 시호에 '신'(神)자가 들어간다.

제14대 주아이 천황의 4남으로 어머니는 오키나가타라시히메노미코토(氣長足姬尊), 즉 진구 황후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어머니 진구 황후가 신라를 정벌하고 돌아온 200년 겨울 12월에 츠쿠시(筑紫)의 가다(蚊田)에서 그를 낳았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사물을 깊이 생각하며 멀리 내다보았고, 하는 행동이 법도에 맞아 성스러운 징표가 있어 203년, 3세 때 황태자가 되었다.

태어날 때 팔 위에 굳은 살이 있었고, 그 모양이 활을 쏠 때 착용하는 팔 보호대와 같았으며, 이는 진구 황후가 용감하게 몸단장을 하고 활 보호대를 했을 때의 모양과 같았다고 했다. 활 보호대는 '호무타'(褒武多)라고 불렀기에 그 이름을 높여 호메타 천황(譽田天皇)으로 불렸다고 한다.[1]

일본서기》 <응신천황> 조에 이런 일화가 있다. 오진 천황이 황태자이던 시절에 코시국(越國)에 가서 츠누가(角鹿)의 케히노오호카미(笥飯大神)를 참배했는데, 이때 신령과 황태자가 서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신령은 '이자사와케노카미'(去來紗別神), 황태자는 '호무타와케노미코토'(譽田別尊)가 되었다. 《일본서기》의 필자는 이 부분을 서술하며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신령의 원래 이름은 '호무타와케노카미'(譽田別神), 황태자의 원래 이름은 '이자사와케노미코토'(去來紗別尊)였을 테지만, 다른 기록이 없으므로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
라고 부언했다.

나라~헤이안 시대 이래로 세이와 겐지(淸和源氏)를 비롯한 일본의 네임드 무가들로부터 무신(武神)으로 열렬히 숭배를 받았던 하치만신(八幡神)과 동일시된다. 하치만은 그전까지는 오이타 지역의 농업의 신이었고, 오진 천황과는 별 관련이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2. 행적

270년 1월 1일에 즉위했고, 처음에는 타카키노 이리비메(高城入姬), 타카키노 이리비메의 동생인 오토히메(第姬), 미야누시야카히메(宮主宅媛), 오나베히메(小甂媛), 오토히메(第媛), 이토히메(糸媛), 히무카노 이즈미노 나가히메(日向泉長媛) 등 비 7명을 두어 아들, 딸을 합쳐 자식 20명을 낳았다. 271년 3월 3일에 나카츠히메(仲姬)를 황후로 삼았다.

272년 겨울 10월 3일에 북방의 에미시로부터 조공을 받으면서 우마야사카노 미치(廐坂道)를 만들도록 했고, 11월에 바다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오호하마노 스쿠네(大濱宿禰)를 파견해 그들을 평정하고, 오호하마노 스쿠네를 미코토모치(宰, 재)로 삼았다. 274년 8월 13일에 여러 나라에 아마베(海人部, 해인부), 야마모리베(山守部, 산수부)를 정했고, 겨울 10월에 이즈국(伊豆國)에게 배를 만들도록 명령해서 길이가 10장이 되는 대선이 완성되자 '카라노'(枯野)라고 불렀으며, 275년 봄 2월에 오미국(近江國)으로 가 우지노(莵道野)에 이르러 노래를 불렀다.

278년 여름 4월에 권신 타케우치노 스쿠네를 츠쿠시로 보내 백성들을 감찰하게 했지만 그의 동생 우마시우치노 스쿠네(甘美內宿禰)가 자신의 형이 츠쿠시에서 삼한을 차지하고 왕이 되겠다는 모의를 했다며 모함했고, 오진 천황은 사자를 파견해 타케우치노 스쿠네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다가 오진 덴노는 두 사람을 추궁했고,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고집하자 두 사람의 손을 '탐탕'(探湯)[2]하도록 했으며, 이에 두 사람이 시키노 카와(磯城川)의 물가에서 탐탕을 했다가 타케우치노 스쿠네가 이기자 우마시우치노 스쿠네를 기노 아타히(紀伊直) 등의 선조에게 예민으로 주도록 했다.

280년 겨울 10월에 츠루기노이케(劒池), 가루노이케(輕池), 가노카키노이케(鹿垣池), 우마야사카노이케(廐坂池)를 만들었다. 히무카국(日向)의 가미나가히메(髮長媛)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자 기뻐해 찾고자 했다. 282년 봄 3월에 사람을 보내 가미나가히메를 불러 가을 9월에 오자 구와츠노무라(桑津邑)에 살게 했고, 아들인 오호사자키노미코토(大鷦鷯尊)가 가미나가히메를 좋아하자 오진 천황이 이를 알고, 결혼시키기 위해 후궁에서 열린 연회 때 오호사자키노미코토에게 가미나가히메를 주었다.

288년 겨울 10월에 요시노노미야(吉野宮)로 행차했고, 291년 봄 3월에는 나니하(難波)에 행차해 오호스미노미야(大隅宮)에 머물렀으며, 14일에 비 에히메(兄媛)가 부모를 그리워해 서쪽을 보고 탄식하자 88명을 뱃사공으로 삼아 배를 타고 서쪽에 가도록 했다. 가을 9월 6일에는 아와지마(淡路嶋)에 사냥을 나가면서 키비(吉備)에 행차하고 아즈키시마(小豆嶋)에서 놀았으며, 10일에는 하다노(葉田)의 아시모리노미야(葦守宮)에 머물렀고, 미토모와케(御友別)가 자신을 공손히 받들자 그의 가족들에게 키비를 나눠서 주었다.

306년에 사람을 중국 오(吳)나라에 보내 봉공녀를 구하게 했고, 이에 오나라 국왕으로부터 봉공녀 4명을 받았으며, 309년 봄 정월 8일에 오호야마모리노미코토(大山守命), 오호사자키노미코토를 불러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 큰아들과 작은아들 중 누구를 더욱 사랑하느냐고 질문했다. 이에 오호야마모리노미코토는 큰아들을 사랑한다고 했고, 오호사자키노미코토는 큰아들은 성인이 되어 걱정이 없으나 작은아들은 성인이 못 될지도 몰라 가엾다는 말을 했다. 오진 천황은 우지노와키이라츠코(菟道稚郞子)를 황태자로 하려는 마음이 있었고, 두 황자의 마음을 알고자 질문한 것이라 오호야마모리노미코토의 답에 기뻐하지 않았다. 24일에 우지노와키이라츠코를 황태자로 삼으면서 오호야마모리노미코토에게는 산천임야를 관장케하고, 오호사자키노미코토에게는 황태자를 보좌해 국사를 다스리게 했다.

310년 봄 2월 15일에 아키라노미야(明宮)에서 죽었는데, 이때의 나이가 110세였다고 하며, 다른 기록에는 오호스미노미야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때 오나라로 보낸 자들이 봉공녀를 데리고 돌아왔지만 오진 천황이 이미 붕어해 만나지 못했다.

사후 에가노모후시노오카능(惠我藻伏崗陵)에 묻혔다고 한다.

2.1. 아버지?

《일본서기》나 《고사기》에서는 오진 덴노가 주아이 천황의 유복자라고 서술했지만, 이상하게도 일본 내의 다른 기록에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도 있다.

8세기의 서적인 《스미요시 대사 신대기》(住吉大社神代記)에서는 진구 황후가 남편 주아이 천황이 붕어한 뒤 스미요시 대신(住吉大神)[3]과 관계하여 오진 천황을 잉태했다고 서술했다.

14세기 《하치만 우사궁 어탁선집》(八幡宇佐宮御託宣集)에서는 진구 황후가 적을 물리치게 해달라고 신령에게 기원하자, 스미요시 대신이 나타나 관계하여 하치만(오진 천황)를 낳았다고 설명했다.

15세기에 저술된 《애낭초》(壒嚢鈔)[4]의 <미롱사>(尾籠事)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오진 덴노가 해신의 아들이라 몸에 꼬리가 달렸기 때문에, 꼬리를 가리고자 옷에 '쇼조쿠쿄'(装束裾)라는 것을 달아 길게 늘어트렸다. 어느 날 오진 천황이 문 밖으로 나가는데 시종이 아직 옷자락이 다 빠져나오지 않았는데도 실수로 문을 닫아버리자, 천황이 "꼬리가 안에 있다."(尾籠也)고 말했기 때문에, 이후 '비로'(尾籠)라는 말이 '무례'를 뜻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화적 이야기들에서 한 가지 공통점이라면, 오진 천황이 바다와 연결이 되어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해신의 아들, 용의 꼬리, 스미요시 대신의 아들. 이러한 표현은 전부 바다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오진 천황이 해안가 쪽 세력과 연계하여 정권을 탈취하여 왕위에 오른게 아닌가 하고 추측하는 설이 있다.

2.2. 신라와의 공방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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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을
참고하십시오.
그의 재위 연간에 왜(야마토 왕권)가 신라를 특히 자주 공격했다. 287년에는 왜군이 민가에 불을 지르고 신라의 백성 1,000명을 잡아서 도망갔으며, 292년에 사도성, 294년에는 장봉성으로 왜군이 쳐들어왔다. 이에 맞서 당시 신라의 유례 이사금도 왜국으로 원정할지 논의하기도 했다.
즉위 12년(295)에 유례왕은 왜국 원정을 결심하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왜인들이 자주 우리의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없으니 내 생각엔 백제와 더불어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어떠한가?"

이에 서불한 홍권(弘權)이 만류했다.

"우리는 수전에 익숙지 못한데 모험을 무름쓰고 바다를 건너 원정하면 예기치 못한 변을 당할까 우려되며,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를 삼키려는 마음이 있으니 백제와 일을 도모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에 유례왕은 왜국 원정을 그만두었다.
당시 신라가 한성백제와 왜국, 특히 그 중에서도 왜구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다. 훗날 실성 마립간 때도 비슷하게 왜국으로의 예방전쟁을 왕이 제안했지만 그때도 비슷하게 대신의 만류로 그만뒀다.

그런데 고려시대 중반 《삼국사기》 편찬으로부터 수백년 후 저술된 조선 시대 역사서인 《동사강목》에서는 조선통신사 김세렴과 이경직이 참고한 일본의 사서 《연대기》(年代記)의 다음 기록을 인용하여 신라의 왜국 침공 기록을 적었다.
일본은 극동에 멀리 떨어져 있고, 사면이 큰 바다로 둘려 있어, 외국의 군사가 들어갈 수가 없다. 다만 그들의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명석포(明石浦)는 대판(大阪, 오사카)에서 겨우 100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의 동쪽에 한 구롱이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주기를 청하여 백마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다 묻었다." 한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응신(應神) 12년 신해(辛亥, 291)가 바로 유례왕 8년(291)에 해당되니, 이 해와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대개 같은 때의 사건인데, 동사(東史)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글이 빠진 것이다.

즉, 김세렴과 이경직이 참고한 일본의 사서(기록)인 《연대기》(年代記)의 기록에서는 신라 유례왕이 왜국 원정을 나서서 명석포(아카시시)까지 가 왜국을 공격하고는 화친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반면 《삼국사기》의 기록은 유례왕이 왜국 원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만두었다고 하고 있어서 《연대기》[5]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신라가 침공을 시도한 시기도 295년으로 일본에서 기록한 291년 침공 시점과 약 4년 정도가 다르다. 물론 291년의 침공과 295년의 침공 시도를 별개로 본다면 291년에는 어떤 상황인지 몰라도 실제 침공에 성공했지만 295년의 침공 시도는 여러 문제점들 때문에 결국 포기했다고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관련 기록들이 너무 부족하여 정확한 상황은 파악할 수가 없다.

추가로 에도 막부 초기에 쓰인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6]에도 해당 기록이 똑같이 나온다.
진 원강(元康) 원년(291)[7] 신라병이 일본을 공격하매[여], 깊이 명석포에 들어왔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파일:신라의 왜국 침공.jpg

만약 실제로 신라가 왜국을 침공했다면 신라는 어떻게 왜국(야마토 왕권)을 공격했을까? 일단 침공 루트는 세 가지 경로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를 지나, 하관(시모노세키)를 거쳐 명석포에 다다르는 방법
두 번째는 주고쿠 지방(규슈 옆에 있는 섬)을 통해 육지에 상륙해서 명석포로 가는 방법
세 번째는 대마도 서남부로 우회해 규슈 남부를 지나 시코쿠 지방의 남부 지역을 지나는 방법이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위험하지만, 신라는 셋 중 하나를 선택하여 명석포로 진격해 오사카에서 왜왕의 항복을 받아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신라의 왜국 침공이 만약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신라는 당시 야마토 정권의 중심지인 나니와(難波) 근방의 아카시노우라(明石浦)를 공격하기까지 했고, 이 덕분에 한동안 왜구의 침입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서기》 응신(應神) 22년(291) 조에 있는, 갑자기 등장한 어우별[御友別] 세력에게 오진 천황이 6현을 떼어주었다는 기록이 유례 이사금 시절 신라가 일본을 침공했다는 기록과 모종의 연관이 있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다.
엽전(葉田)의 위수궁(葦守宮)에서 머무름 / 어우별(御友別)의 형제, 자손에게 길비국을 나누어 줌

경인(10일)에 다시 엽전(葉田: 하다노)[葉田은 하다(簸娜)라고 읽는다.]의 위수궁(葦守宮: 아시모리노미야)으로 가서 머물렀다. 이때 어우별이 찾아와 그의 형제 자손으로 하여금 선부(膳夫: 카시하데)로서 (천황의) 식사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였다. 천황은 어우별이 삼가 공손히 받드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길비국을 나눠서 그 자손 등에게 주었다. 즉 천도현(川嶋縣: 카하시마노아가타)을 나눠서 큰 아들 도속별(稻速別: 이나하야와케)에게 주었다. 그가 하도신(下道臣: 시모츠미치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상도현(上道縣: 가미츠미치노아가타)을 둘째 아들 중언(仲彥: 나카츠히코)에게 주었다. 그가 상도신(上道臣: 가미츠미치노오미)과 향옥신(香屋臣: 카야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삼야현(三野縣:미노노아가타)을 제언(弟彥:오토히코)에게 주었다. 이가 삼야신(三野臣: 미노노오미)의 시조다. 또 파구예현(波區藝縣: 하쿠기노아가타)을 어우별의 동생 압별(鴨別: 가모와케)에게 주었다. 이가 입신(笠臣: 가사노오미)의 시조다. 그리고 원현(苑縣: 소노노아가타)을 그의 형 포응별(浦凝別: 우라코리와케)에게 주었다. 이가 원신(苑臣: 소노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직부(織部: 하토리베)를 형원(兄媛: 에히메)에게 하사했다. 이로 인해 그 자손이 아직 길비국에 살고 있다. 이것이 그 연유이다.
일본서기》 웅신 22년(291) 9월 10일 원문

2.3. 기타 한국사 관련 기록

일본서기》의 목적인 천황과 유력 씨족의 위엄을 높이기 위하여 곡필, 윤색된 부분이 많이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
오진 덴노는 3세기 초부터 4세기 말까지 재위한 인물이지만 진사왕부터 구이신왕까지는 4세기 말부터 5세기에 해당되는 왕이기 때문에 연대상으로 맞지 않으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주갑인상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3. 추측

오진 천황을 실존했던 천황이라고도 말하지만, 일부 사학자들은 전설적인 천황으로 여기기도 한다. 오호도 왕(26대 게이타이 천황)과 마찬가지로 고유의 시호를 가지고 있고, 고분의 출토로 실존인물이라고 확인된 제16대 닌토쿠 천황와 달리, 오진 천황은 제10대 스진 천황에서 진무 천황이라는 신화적 존재를 만들어낸 사례의 재탕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닌토쿠 천황>조의 기록의 중복과 혼란 등이 있어, <오진, 닌토쿠 동일인물 설> 등이 있다. 그 연대는 《고사기》 간지붕년(干支崩年)에 따르면, 4세기 후반쯤이 된다. 기기(記紀)에 기록된 오진 천황의 계보는 당시에 권력을 차지했던 자의 계보를 조작하여 만든 것이라고 보아야 타당하다는 설이 있다.

오진 천황의 실존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어, 여러가지 설이 나왔다. 오진 천황의 일본식 시호인 호무다가 8대 이전의 가공의 천황과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점에 의거해 실존했다는 설, <3왕조 교대설>에 있어서의 정복왕조의 창시자로 보는 설, <야마타이국의 동천설>에 관련되어 황실의 선조로서 제사지내지고 있는 신으로 보는 설, 진무 천황=스진 천황과 동일인물이라는 설, 카와치 왕조(河内王朝)의 시조라고 보는 설 등 있다.

또, 일본 밖의 사료와 비교하여, 《송서》, 《양서》에 보이는 왜5왕(倭五王) 중 (讃)에 비정하는 설, 닌토쿠 천황이나 제17대 리추 천황에 비정하는 설 등이 있다.

4. 가계


==# 천황 계보 #==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제2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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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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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대
제90대
제92대
제91대
제93대
제95대
제94대
제96대
북조 초대
북조 제2대
제97대
북조 제3대
북조 제4대
제98대
제99대
북조 제5대
북조 제6대
제100대
제10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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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대
제105대
제10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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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대
제10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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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대
제11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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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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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대
제120대
제121대
제122대
제123대
제124대
제125대
제126대




[1] 알렉산더 보빈 교수는 이 이름을 한국어족에 속한 어휘(팔+묻-+-악)로 풀이하기도 했다. 진구 황후 항목 참조.[2] 죄인의 손을 열탕에 넣어, 데이거나 그렇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신명재판이다.[3] 우와쓰쓰노오(表筒男命)・나카쓰쓰노오(中筒男命)・소코쓰쓰노오(底筒男命) 세 신령을 가리키는데 항해를 보호한다고 한다. 세 신을 가리키는 말이라 스미요시 3신(住吉三神)으로 쓰기도 한다. 《일본서기》 <신대기> 상의 일서(5-6)에서 이자나기이자나미를 만나러 저승에 다녀온 후 여울에 몸을 씻을 때 '스미요시 3신'이 나왔다고 설명한다. 또한 《일본서기》의 <진구기>(神功紀)에서는 진구 황후에게 신라를 정벌하라고 신령들이 계시를 내릴 때, 진구 황후가 “이런 가르침을 내리시는 신들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고 묻자 다른 신들의 이름과 함께 언급된다. 이후 진구 황후가 정벌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신들을 모시라는 신탁을 내렸다.[4] 1446년에 저술된 백과사전의 일종이다. 제목은 '먼지(壒) 같은 잡다한 이야기를 주머니(嚢)처럼 담은 문집(鈔)'이란 뜻이다.[5] 임진왜란 이후 제2차 조선통신사 오윤경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갔던 이경직이 확인한 일본의 역사 기록이다. 1617년 에도 막부(幕府) 관리의 소개로 《일본연대기》(日本年代記) 기록을 보고 현장답사까지 확인한 후에 자신의 저서인《부상록》(扶桑錄)에 해당 기록을 인용했다.[6] 겐로쿠(元禄) 원년(1688), 에도시대 국학자 마쓰시타 겐린(松下見林)이 쓴 역사 연구서로 상권 3책, 중권 8책, 하권 4책이다. 30년간에 걸쳐 중국, 한국의 서적 126종 중에서 일본에 관계되는 기사를 뽑아, 의문 제기와 비판 등을 더하여 편찬했다. 이 책은 당시 조선에도 들어와 한치윤이 편찬한 《해동역사》 권41 <통일본시말>(通日本始末) 편에 내용 일부가 인용되었다.[7] 여기서 원강(元康) 연호는 중국 서진 혜제가 사용한 연호로, 신라 유례왕 8년, 일본 응신 22년에 해당한다.[8] 정확히 어느 지역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백제인이라는 추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