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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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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일본 제국(諸國)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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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노국 왜왕 왜면국 왜왕 야마타이국 왜왕 쿠노국 왜왕
왜노국왕 스이쇼 히미코 토요 히미코코
왜5왕
찬(贊) 진(珍) 제(濟) 흥(興) 무(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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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미상
봉호 친위왜왕(親魏倭王)
히미코([ruby(卑, ruby=ひ)][ruby(弥, ruby=み)][ruby(呼, ruby=こ)])[1]
생몰년도 ? ~ 247년/248년
재위년도 173년 이전 ~ 247년/248년

1. 개요2. 기록3. 실체4. 기타5. 미디어 믹스

1. 개요

卑弥呼

고대 일본 시절 야마타이국을 다스리던 여왕.

재위연도는 173년 이전~ 247년/248년으로 추정. 후한서에 따르면 환제(후한)영제(후한) 시기에,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후한 말에 왜국에 대란이 있었고 이어 히미코가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173년 아달라 이사금에게 사신을 보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2. 기록

보통 자국 역사책에만 나오고, 외국 역사책에는 안 나오는 통치자들이 많은데, 히미코는 매우 특이하게도 중국의 사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한국의 사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만 등장하고, 정작 일본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에서 활약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통치자라는 점에서 더욱 특이하다. 일본 국내에서 전해지는 왕계와도 일치하지 않아 그 정체에 대해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진구 황후라는 얘기도 있지만, 진구 황후는 정황상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이 크며, 실존인물이라고 해도 히미코와 기록이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만약, 히미코 = 진구 황후라면 일본 기록에도 존재하는 셈이긴 하다.

한국식 한자 독음으로 비미호라고도 읽는다.(동명의 웹툰 '비미호'도 있었다).
其國本亦以男子爲王, 住七八十年, 倭國亂, 相攻伐歷年, 乃共立一女子爲王, 名曰卑彌呼, 事鬼道, 能惑衆, 年已長大, 無夫壻, 有男弟佐治國. 自爲王以來, 少有見者. 以婢千人自侍, 唯有男子一人給飮食, 傳辭出入. 居處宮室樓觀, 城柵嚴設, 常有人持兵守衛.
그 나라()는 본래 또한 남자를 왕으로 삼았는데, 70 ~ 80년을 다스리다가 왜국에 난이 있어/왜국이 어지러워져서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여 오랫동안 서로 싸웠다. 이내 함께 한 여자를 왕으로 세우니, 이름을 히미코卑彌呼라고 한다. (그녀는) 귀도(鬼道)를 섬기고 사람들을 혹하게 했고 나이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남편이 없고 남동생이 있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돕는다. 왕이 된 이후로 본 적이 있는 자가 적었다. (여자) 시종 1,000여 인으로 하여금 시중 들게 하며, 오직 남자 한 사람만이 음식을 공급하면 말을 전하여 드나든다. 사는 곳은 궁실과 누각이고 성책을 삼엄하게 둘렀는데, 항상 병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

삼국사기에 있는 히미코 기록은 삼국지 동이전의 기사를 그대로 옮겨실은 부분을 제외하고 딱 한 구절이 더 현전한다.[2]
二十年 夏五月 倭女王卑彌乎 遣使來聘
(아달라 이사금) 20년(173) 여름 5월에 왜의 여왕 히미코가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삼국사기 아달라 이사금 본기

이 기록을 둘 다 신뢰한다면, 히미코는 173년 이전에 왕 자리에 올라 약 70여 년간 왜(倭)를 통치했다. 그러나 사학계에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기록된 사건은 설령 사실이라도 사건이 일어난 연도는 오차가 있는 것이 많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비현실적이거나 외국 기록 및 고고학과 맞지 않는 부분을 지적하며 초기기록의 신뢰성 자체를 부정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연구가 축적되면서 다른 사료나 고고학과의 교차검증이 되는 부분도 계속 드러났고 그럼에도 100% 정확한 것은 아니었기에 수정론이 대세가 되었다.

173년의 외교사절 파견이 반드시 173년이라는 보장은 없다. 송나라 대 『태평어람』에 실려 있는 위략의 기사에 따르면 왜국 내의 전쟁은 광화 연간(178 ~ 184)에 있었다고 하므로, 히미코의 즉위 시점이 이보다 늦었을 수도 있다. 이후 위 명제 연간인 경초(景初) 2년(238)에 나시메, 츠시고리 등을 사신으로 보낸 것을 시작으로 중국에 조공하여 유명해졌다가, 정시 연간에 죽었다. 정사 삼국지엔 정시 8년(247년)의 기술 다음에 히미코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양서북사정시 연간(240년~249년 4월)에 히미코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종합하면 히미코는 247년 혹은 248년에 죽었다.
正始 … 其八年 … 卑彌呼以死, 大作冢, 徑百餘步, 狥葬者奴婢百餘人. 更立男王, 國中不服, 更相誅殺, 當時殺千餘人. 復立卑彌呼宗女臺與/壹與, 年十三爲王, 國中遂定.
정시 8년 (중략) 히미코가 죽자, 크게 무덤을 만들었는데 지름이 100여 보이고 노비 100여 명을 순장했다. 다시 남자 왕을 세우자, (왜)국 내에서 복종하지 않아 다시 서로 죽였는데 당시 죽인 사람이 1,000여 명이었다. 다시 히미코의 종녀 토요(臺與)/이요(壹與)를 세웠는데 13살에 왕이 되었다. (그러자) (왜)국이 따라 안정되었다.

묘사로 보아 히미코는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왜인들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질적인 통치는 그녀의 남동생이 대리한 것으로 보이지만 히미코의 권위는 후에 남성 왕이 세워지자 다시 난리가 일어났다가 여왕이 세워지자 진정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남성은 대체할 수 없는 권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가 히미코 다음 여왕인 토요가 왕이 될 때 당시 토요의 나이는 13살이었다. 13살이라면 왕으로 추대하기에는 좀 어린 나이인데도 그런게 가능했다면 분명 그런 나이임에도 추대받을 수 있을 정도의 권위는 있다는 의미가 된다.

한편 그녀는 여러 나라의 합의로 '함께 (왕으로) 세웠다(共立)'고 하므로, '왜국'은 단일체가 아니라 일종의 연맹체적인 나라였을 것이다.

왜국 중에는 대마국부터 시작하여 9개국이 그 경로가 상세히 나와 있고, 21개국이 이름만 나열되어 있으며, 좀 멀리 떨어진 곳에 4개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 이 중 보통 앞의 30개 국가 중 29개국이 여왕(女王国) 휘하에 속한 것으로 본다. 히미코가 중국에 접촉을 시도한 것은 왜 30국 중에 유일하게 여왕국에 저항하던 남쪽 쿠나국(狗奴國)과의 대립 때문으로 보이는데, 중국에서는 당시 기리영 전투 등으로 마한을 패퇴시키는 등 동방 지역에 대해 적극적인 군사 정책을 펴고 있었다. 이때 히미코는 중국에게서 솔선중랑장·솔선교위 등의 직위를 얻어내고 황색 깃발 등을 받았다고 하여 군사적 권위를 높인 것으로 보인다.

3. 실체

일본 최초의 관찬사서 일본서기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230 ~ 240년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진구 황후가 히미코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단 진구 황후는 히미코를 비롯해 토요의 연대도 흡수했으며, 근초고왕이 등장하는 4세기까지 이주갑인상으로 커버했다. 그래서 일본서기 초기 기록의 연대학에 거대한 설정구멍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역사 편찬자들이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 그녀를 군주의 자리에서 지우려고 그랬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히미코가 무녀이면서 군주였는데, 일본 신화에 나오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로 신격화되면서 역사에서 누락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 의견에 따르면 아마테라스가 남동생의 행패 때문에 동굴에 숨었다가 다시 나온 이야기는 개기일식, 또는 부분일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대 천문학으로 이를 시뮬레이션했는데, 히미코가 죽은 해에 일몰녁에 일식이 있었고, 토요가 즉위한 해에 일출 때 일식이 있었다는 결과를 얻었다.

이것을 토대로 추측하면, 히미코의 죽음과 함께 일몰에 태양이 사라지는 일식이 일어나자 고대인들이 공포에 휩싸여 내전이 일어났고, 히미코 가문의 여성인 토요가 즉위할 즈음에 일출의 일식이 일어났다는 기적으로 인해 그녀의 권위가 인정되고 내전이 진정된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이 일본 신화에 변형, 인용되어 히미코-토요가 아마테라스로 등장하고, 상기와 같은 신화가 생겼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일식은 규슈 지역에 일어났으며 최근 유물들은 긴키 지역에서 나오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를 절충해 진무 덴노의 동정을 이 시기의 일이 인상된 것으로 보고, 야마타이국이 이 시기에 규슈에서 긴키로 옮겼다는 설이 나오고 있다. 이 또한 모순점이 많아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또한 마쓰모토 세이초는 히미코가 쿠나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책임을 지고 타살당했다는 가설을 내놓기도 했다. 고대의 제정일치 사회에서 군주는 통치자이자 한 명의 제사장이었고, 사제로써 필요한 '영험한 능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거나, 가뭄이나 기근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전쟁에서 패배해서, '장로'로서 책임을 지고 죽어야 하는 관습이 있었으며, 히미코 또한 쿠나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책임을 물어 장로이자 제사장으로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당 풍습은 부여의 기록에서 나타나지 야마타이국에서 실제로 했는지 증명된 바가 없어 어디까지나 가설이다.

히미코가 사망한 시대는 야요이 시대에서 고훈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로, 긴키 지방이 야마타이국이라는 주장이 대두되면서 나라현에 소재한 하시하카 고분(箸墓古墳)이 그녀의 무덤이라는 설이 있지만, 궁내청에서는 하시하카 고분이 야마토토토비모모소히메노미코토(倭迹迹日百襲媛命)[3]의 무덤이라는 설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고레이 덴노(7대)부터 카이카 덴노(9대)까지의 시호는 야마토네코로 이 야마토네코라는 시호는[4] 고사기가 만들어진 43대 겐메이 덴노 시절보다 후대에 덴노제의 호칭이 확립되면서 생겨난 시호다. 그 때문에 야마토네코가 시호로 들어가는 이들은 7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 정설이다.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延烏郎細烏女說話)의 세오일 가능성도 있는데, 해당 설화의 시대가 신라 8대 아달라 이사금 때로 삼국사기 아달라 이사금 본기와 기록상 시대가 같다. 다만 히미코는 사서에 남편이 없었다고 나오므로 현실성은 낮다. 오히려 이주갑인상으로 보정된 케이코 덴노의 재위기간이 191 ~ 250년으로 히미코와 거의 똑같다.

4. 기타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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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
파일:external/0cb95d6179b2f59b13ad3532dd4a1589700d162a2060a2ec491cb808ba412c4a.jpg
삼국지 13 PK
파일:卑弥呼.jpg 파일:卑弥呼1.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파일:하미루 애니판.gif
[1]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비미호'이다.[2] 한길사판 이강래 역주 삼국사기는 이 기사에서 '卑彌乎'를 그대로 '비미호'라고 번역했다[3] 역사상 최초의 덴노였던 10대 스진 덴노의 선조로 7대 덴노라 나오는 고레이 덴노의 둘째 딸이라고 전해진다.[4] 이때는 타라시라는 시호가 들어갔는데, 6대 고안 덴노와 12대 케이코 덴노~진구 황후(오진 덴노의 섭정)까지의 시호에 타라시가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에는 10대 스진 덴노이리히코계와 15대 오진 덴노~18대 한제이 덴노까지의 와케계가 서로 다른 왕조이며 이를 연결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5] 명성 700이상, 2개 이상의 주를 제패, 낭야 탐색.[6] 북해 멀리에 섬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성과 항구가 떡 하니 생긴다.[7] '교사'는 부대를 상태 이상에 면역으로 만들어 계략이 안통하는 부대가 된다. '환술'은 부대나 시설의 최대 병사 수에 비례해 광역으로 대미지+혼란을 주는 밸붕급 위력을 가진 병법이다. '요술'은 환술처럼 광역으로 대미지를 주지만 혼란 대신 사기를 낮추며 시설물에도 효과를 준다는 차별점이 있다. '치료'는 주위 모든 아군 부대의 부상병 + 부상입은 장수 + 상태 이상을 즉시 완전 회복시킨다. 하나같이 위력적이고 극히 희귀한 병법들이다.[8] 삼국지 9 장각의 지력은 87(+ 태평요술서 6 = 93)이다. 정치는 82로 왜여왕에게 밀리고, 교사 병법도 없다. 차별점이라면 통솔이 92로 앞선다는 것.[9] 성우는 다나카 리에.[10] 만도의 정체는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