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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이제이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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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일본 제2대 천황
스이제이 천황
綏靖天皇
파일:스이제이 천황.jpg
출생 기원전 632년
사망 기원전 549년 6월 28일 (향년 83세)
나라현 갈성고구궁
(現 일본 나라현 고세시)
능묘 쓰키다노오카노에능([ruby(桃花鳥田丘上陵, ruby=도화조전구상릉)])
재위기간 제2대 천황
기원전 581년 2월 23일 ~ 기원전 549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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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부모 부황 진무 천황
모후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
형제자매 3남 중 3남
배우자 이스즈요리히메[1], 카와마타비메[2]
자녀 1남
종교 신토
관저 카츠라기노타카오카궁([ruby(葛城高丘宮, ruby=갈성고구궁)])
한풍 시호 스이제이 천황([ruby(綏靖天皇, ruby=수정천황)])
화풍 시호 {{{#!wiki style="margin: 0 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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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명천이존(神渟名川耳尊)[3]
신소하이명(神沼河耳命)[4][5]
신정명천이천황
(神渟名川耳天皇)[6][7]
건소하이명(建沼河耳命)[8] }}}}}}}}}
}}}}}}}}} ||

1. 개요2. 생애
2.1. 일본서기 권제3 진무 덴노(卷第三 神日本磐余彦天皇 神武天皇)2.2. 일본서기 권제4 스이레이 덴노(卷第四 神渟名川耳天皇 綏靖天皇)2.3. 일본서기 권제4 안네이 덴노(卷第四 磯城津彦玉手看天皇 安寧天皇)
3. 기타4. 가족5. 《일본서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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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제2대 천황.

결사팔대의 첫 번째 천황. 스이제이 천황부터 제9대 가이카 천황까지 천황 8명은 기록이 부족하여 가계만 전해지고 있다.

2. 생애

2.1. 일본서기 권제3 진무 덴노(卷第三 神日本磐余彦天皇 神武天皇)

신유년(B.C.660) 봄 정월 경진삭(1일)[9]에 천황이 카시하라노미야(橿原宮)에서 즉위하였다. 이 해를 천황 원년으로 하였다. 그리고 정비를 높여서 황후로 하였다. 황자 카무야위노 미코토(神八井命)[10], 카무누나가하미미노 미코토(神渟名川耳尊)[11](스이제이 덴노)를 낳았다.

42년(B.C.619) 봄 정월 임자삭 갑인(3일)에 황자 카무누나가하미미노 미코토를 황태자로 하였다.

76년 봄 3월 갑오삭 갑진(11일)에 천황이 강원궁에서 죽었다(崩). 그때 나이가 127세였다.[12]

다음 해 가을 9월 을묘삭 병인(12일)에 천황을 무방산동북릉(畝傍山東北陵)[13]에 장사 지냈다.

2.2. 일본서기 권제4 스이레이 덴노(卷第四 神渟名川耳天皇 綏靖天皇)

카무누나카하미미노 스메라미코토[14]는 카무야마토이하레비코스메라노 미코토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노 미코토(媛蹈鞴五十鈴媛命)이라 한다. 코토시로누시노 카미(事代主神)[15]의 큰 딸이다. 천황은 모습이 훌륭하였다. 젊어서는 남자다운 기상이 있었고, 장년에는 용모가 두드러지고 튼튼하였다. 무예가 뛰어났고 의지가 깊고 굳었다.

그가 48세였을 때 카무야마토이하레비코스메라노 미코토가 죽었다(崩). 그때 카무누나카하미미노 미코토(神渟名川耳尊)는 효성이 지극하여 끊임없이 슬퍼하고 그리워하였다. 특히 장례에 마음을 썼다. 그의 서형(庶兄) 타기시미미노 미코토(手硏耳命)[16]가 나이가 많아 오랫동안 조정의 일을 담당하였으므로 일을 맡기고 친히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왕은 본래 성질과 마음씨가 인의에 어긋나, 드디어 국상 중에 권력을 마음대로 하였으며 나쁜 마음을 가지고 두 아우를 죽이려고 하였다.[17] 이 해의 간지는 기묘이다.[18]

진무 천황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다. 동방 정벌을 단행하기 전 히무카에서 만난 아내 아히라츠히메(吾平津媛)는 타기시미미(手硏耳)를 낳았고, 동방 정벌 때 진무를 따라갔다. 진무는 새로 도착한 카시하라(橿原) 땅, 즉 지금의 나라현에서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媛蹈鞴五十鈴媛命)[19]를 정실로 들였고, 두 아들 카무야이(神八井)와 카무누나카와미미(훗날의 스이제이 천황)를 낳았다.[20] 이후 진무 천황이 붕어하고, 맏아들 타기시미미가 제위를 이었다.

겨울 11월에 카무누나카하미미노 스메라미코토와 그의 형 카무야위미미노 미코토(神八井耳命)[21]가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잘 막아내었다. 산릉(山陵) 일[22]이 끝나자 유게노 와카히코(弓部稚彥)[23]에게 활을 만들게 하고, 야마토노 카누치아마츠마라(倭鍛部天津眞浦)[24]에게 사슴 새끼를 잘 맞출 수 있는 화살촉을 만들게 하고, 야하기베(矢部)[25]에게 화살을 만들게 하였다. 활과 화살이 완성되자 신정명천이존은 수연이명을 쏘아 죽이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수연이명은 카타워카(片丘)[26]의 큰 동굴에서 혼자 큰 침상에 누워 있었다. 카무누나카하미미노 미코토가 카무야위미미노 미코토에게 “지금이 적당한 때입니다. 비밀스러운 일은 몰래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의 음모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 일은 그대와 나 둘이서만 합시다. 내가 먼저 동굴의 문을 열 터이니, 그대는 그를 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갔다. 카무누나카하미미노 미코토가 그 문을 밀쳐 열었지만, 카무야위미미노 미코토에게 손발이 떨려 활을 쏠 수가 없었다. 그때 카무누나카하미미노 미코토가 형이 가지고 있던 활과 화살을 빼앗아 잡고 타기시미미노 미코토를 쏘았다. 첫 발은 가슴을 맞추었고 두 번째 발은 등을 맞추어서 마침내 죽였다. 그러자 카무야위미미노 미코토는 부끄러워하며 카무누나카하미미노 미코토에게 “나는 그대의 형이지만 나약하여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었다. 지금 그대는 무용이 뛰어나서 몸소 원흉을 죽였다. 마땅히 그대가 천황의 자리에 올라 황조(皇祖)의 업을 이어야 한다. 나는 그대를 도와서 신기(神祇)를 제사 지내는 일을 하겠다.”라고 말하였다. 이가 곧 오호노 오미(多臣)[27]의 시조다.

원년(B.C.581) 봄 정월 임신삭 기묘(8일)에 카무누나가하미미노 미코토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카츠라기(葛城)를 도읍으로 정하였다. 이를 타카워카노미야(高丘宮)[28]라 한다. 황후를 높여서 황태후라 하였다. 이 해의 간지는 경진[29]이다.

2년(B.C.580) 봄 정월에 이스즈요리히메(五十鈴依媛)[30]를 황후로 삼았다[어떤 책(一書)에서는 시키노 아가타누시(磯城縣主)[31]의 딸 카하마타히메(川派媛)[32]라고 하였다. 어떤 책(一書)에서는 카스가노 아가타누시오호히모로(春日縣主大日諸)[33]의 딸 이토리히메(糸織媛)이라 하였다.]. 즉 천황의 이모다. 황후는 시키츠히코타마테미노 스메라미코토(磯城津彥玉手看天皇)를 낳았다.

4년(B.C.578) 여름 4월에 카무야위미미노 미코토가 죽었다(薨). 무방산 북쪽에 장사 지냈다.[34]

25년(B.C.557) 봄 정월 임오삭 무자(7일)에 황자 시키츠히코타마테미노 미코토(磯城津彥玉手看尊)를 황태자로 삼았다.

33년(B.C.549) 여름 5월에 천황이 병이 났다. 계유에 죽었다(崩). 나이 84세였다.

2.3. 일본서기 권제4 안네이 덴노(卷第四 磯城津彦玉手看天皇 安寧天皇)

시키츠히코타마테미노 스메라미코토는 카무누나카하미미노 스메라미코토(神渟名川耳天皇)의 태자다. 어머니는 이스즈요리히메노 미코토(五十鈴依媛命)이라 한다. 코토시로누시노 카미(事大主神)의 둘째 딸이다. 천황은 카무누나카하미미노 스메라미코토 25년에 황태자가 되었다. 그때 나이 21세였다.

33년(B.C.549) 여름 5월에 카무누나카하미미노 스메라미코토가 죽었다(崩).

그 해 7월 계해삭 을축(3일)에 태자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원년(B.C.548) 겨울 10월 병술삭 병신(11일)에 카무누나카하미미노 스메라미코토를 야마토(倭)의 츠키다노 워카노 워헤노 미사자키(桃花鳥田丘上陵)[35]에 장사 지냈다. 황후를 높여 황태후로 하였다. 이 해의 간지는 계축이다.

3. 기타

서기 700년경만 해도 제40대 덴무 천황이 승천했다는 반가가 지어질 정도로 신화상의 인물이다. 《고사기》는 86세에, 《일본서기》는 102세에 승하했다고 하는 등 기록도 서로 다르다. 게다가 남북조시대에 기록된, 신도의 한 교단인 안거원창도(安居院唱導)의 교전 《신도집》(神道集)의 기록에 따르면 식인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아침•저녁으로 사람을 7명씩이나 먹어치워 주위를 위협하기에 대신과 신하들이 '하늘에서 불비가 내린다.'는 거짓말로 스이제이 천황을 동굴에 유폐시켰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이다. 이는 페르시아의 고전 서사시 샤나메에 정확히 같은 기록이 있어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기기(《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따르면 진무 천황이 기원전 585년에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은 뒤 이런 내전이 벌어진 탓에 스이제이 천황은 부황이 죽고 4년이 지나 기원전 581년에 즉위했다. 물론 이 동안 무정부였던건 아니고 타기시미미가 천황으로 재위했었다. 즉, 스이제이는 실제로 3대 천황이었던 셈.

결사팔대가 대부분 실존성이 낮다는 평을 듣지만, 스이제이 덴노의 시호는 독자성이 강해서 결사팔대 중에서는 그나마 실존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꼽힌다. 스진 덴노의 조상이 맞는지 의문스러울 뿐. 스진 덴노는 학계에서 야마토 왕권의 실질적인 첫 번째 대왕으로 진무 덴노와 동일인물로 취급되는 인물이며, 사서에서 왕이 즉위할 때마다 수도가 이전되었다고 했지만 고고학적인 시대적 특성상 근거지가 다르다는 건 사실상 다른 나라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진무부터 스진까지 근거지가 전부 다르다는 건 다 다른 나라의 왕이었다는 뜻이나 다름없다.[36] 같은 이유로 근거지가 다른 안네이 덴노도 실제로는 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스이제이 덴노가 실재했다고 가정하면 스진 덴노야마토 왕권이 성립한 3세기 중후반 인물이라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에, 단순히 8대조로만 생각하면 160년 전 인물이 되어 1세기 초 인물이 되나, 정말로 스이제이 덴노 내지는 모티브가 되는 인물이 실재했을 경우 실제로는 스진 덴노와 마찬가지로 3세기 사람일 수도 있다. 진무 덴노부터 주아이 덴노까지 이어지는 제1왕조 내내 같은 장소를 근거지로 한 인물은 스이닌-게이코의 마키무쿠뿐으로, 게이코는 시호 문제 때문에 실존성 논란이 크나 모티브가 되는 인물까지 없었으리란 보장은 없다. 나머지 대왕들은 전부 근거지가 달랐는데, 아예 긴키 밖을 근거지로 둔 세이무 덴노, 주아이 덴노같은 인물도 있다.

야마토 왕권이 처음 성립되었던 3세기 중후반~4세기 초반의 야마토 왕권은 연맹체라고도 하기 힘든 가야제국(諸國)에 더 가까운 상태로 3세기 중후반에 성립되어 폭풍 성장한 금관국이 4세기 중반까지 가야 제국의 수장국 노릇을 하기는 했지만 연맹이 아니라 가야 소국들의 대표에 지나지 않았듯, 야마토 대왕의 자리는 스진 덴노의 제1왕조는 물론이고 오진 덴노부터 부레쓰 덴노까지 이어지는 제2왕조조차 야마토 왕들의 대표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으며, 제2왕조의 대왕들도 실제로는 부자-형제지간이 아닌데 일계로 조작된 정황이 있는 인물들이 많다. 가야에서 수장국 노릇을 하던 나라가 금관국-반파국-안라국으로 지속적으로 바뀌었듯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 야마토의 수장국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었다.

1세기의 키나이 일대는 야요이 시대로 인한 군장 사회였는데, 한반도보다 시대적 변화가 느렸던 고대 일본 열도의 특성상 삼한의 소국들도 군장 사회를 못 벗어나거나 막 벗어난 게 대부분이었는데 야요이 시대 초기 부족장들이 전부 근거지조차 다른 상태에서 '대왕'으로 정사 기록에 삽입될 만큼 구전이 자세히 남을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1세기 초면 기원전 1세기 초중반에 성립된 고구려도 극초반일 때고[37] 백제는 고구려에서 분리되기 전이고(2세기 중후반에 고구려에서 남하한 무리가 백제를 세웠다) 신라는 사로 6촌조차 막 형성된 시기이다.(사로국 건국은 2세기 중후반이다) 금관국을 비롯한 가야 소국들은 3세기 중후반에 본격적으로 군장 사회를 벗어나 발달하기 때문에 야마토 정권과 형성 시기가 비슷한 수준이다.

3세기 초부터 시작된 고분인들의 대거 이주로 고분 시대가 형성되며 키나이 일대에 군장 사회를 넘어선 가야 소국들과 비슷한 상태의 소국들이 키나이 일대에 대거 형성되었고, 이 과정에서 4세기 초 금관국이 그러했듯 스진 덴노가 그러한 소국들의 대표 노릇을 처음으로 맡은 인물이었다.[38] 스진 이후 제1왕조의 왕들은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모티브가 되는 인물들은 대체로 3세기 중후반~4세기 중반까지 활동했으며, 7~8세기의 사건을 인상해서 기록한 게이코 덴노같은 사례가 있기는 해도 이러한 전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결사팔대의 모티브가 된 인물들이 제3왕조 성립 이후에도 존재가 구전되어 천황의 일원으로 이름을 올릴 정도라면, 야요이 시대 군장보다는 스진 덴노와 비슷한 시기 일본 열도가 고분 시대로 발전하면서 군장 사회에서 나라로 발전한 키나이 내 각 소국들의 왕이었고 가야 각국의 왕들이 사서에서 이름을 남긴 것처럼 존재가 구전되어 7세기 말부터 편찬이 시작된 고사기-일본서기 등에서 천황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신라가 사서를 편찬하면서 신라가 병합한 진한, 가야 소국들의 왕을 왕계의 일원으로 끼워넣은 느낌에 가까울 것이다. 신라 김씨 왕조의 김알지와 비슷한데, 학계에서는 김알지는 김씨 족단의 시조인 3세기 초중반 충주 금릉동에서 친목지국 성향의 마한 거수국을 세운 태조 성한왕의 아버지로 비정되며 김씨 족단이 금릉동 마한 소국이 멸망하고 사로국에 이주해 김씨 족단을 형성한 시기가 4세기 초반에 가서임에도 사서에서는 탈해 이사금기에 김씨 족단이 형성되었다고 조작했듯 결사팔대도 비슷한 포지션이라 볼 수 있다.

고대 일본 씨족의 성씨 관념이 부계제가 아니라 사위, 외손, 방계, 양자 등을 포함하는 '직능'의 특성을 반영한 것을 고려하면 부자지간으로 조작되었을 뿐 이들은 꼭 직계가 아니더라도 제1왕조-제2왕조-제3왕조로 이어지는 모계 혈연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1왕조-제2왕조의 기록을 보면 당대 키나이 일대 소국들의 왕가들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중세 유럽 왕실이 그러했듯 소국 왕가들끼리의 결혼이 매우 활발했기 때문에 모계를 통한 혈연의 형성은 충분히 가능했고, 일찍부터 키나이 밖까지 혼맥을 가지기도 했다.

사서에서는 스이제이 덴노가 기묘년(19/79/139/199/259/319년)에 타기시미미와 싸웠으며, 경진년(20/80/140/200/260/320년)에 즉위했다고 한다. 고분 시대의 성립 시기가 3세기 중후반임을 고려하면 260년 즉위 가능성도 적지 않다.[39] 일본서기에서는 스이제이 덴노가 기원전 549년(임자년)에 사망했다고 하는데 임자년은 232/292/352년으로 260~292년일 경우 32년 재위한 것이 된다. 다만 사서에서 결사팔대의 재위기간을 조작했음을 고려하면 재위 간격은 모를까 될 수는 있어도 즉위년과 사망년은 정확히 맞지는 않을 듯하다.

카츠라기(葛城)를 도읍으로 삼았다는 사서의 기록을 보아 스이제이 덴노는 카츠라기 일대의 전승과 관련이 깊은 인물이었던 듯하다. 스이제이 덴노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이 고분 시대 성립기의 인물이었다면 거주지를 군장 사회에서 주도권을 잡고 국가로 발전시킨 진한 사로국혁거세 거서간이나 가야 금관국수로왕처럼 야마토(大倭) 산하 카츠라기국(葛城國)의 건국 시조 비슷한 존재였던 모양이다.

다만 카츠라기노 소츠히코의 카츠라기 씨족이 스이제이의 후손을 자처하지 않은 걸 보아 이들은 스이제이 덴노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과 다른 일족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의 근거지가 같은 것과 카츠라기노 소츠히코의 주 활동 시기가 제2왕조 초기임을 고려하면 4세기 초반 무렵에 카츠라기 왕(葛城王)위가 카츠라기노 소츠히코의 일족으로 교체된 모양이다. 그럼에도 스이레이 덴노가 사서에 결사팔대의 일원으로 실릴 정도였다면 스이제이 덴노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이 카츠라기 일대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 유추할 수 있다.[40]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로 대표되는 카츠라기 씨족은 도래인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추정되며, 고분 시대의 성립에 한반도에서 내려온 고분인들의 영향이 매우 컸음을 고려하면 스이제이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도 도래인일 가능성이 있다. 고분인이 아니더라 야요이인이더라도 야요이인 또한 대부분은 한반도에서 이주한 자들의 후손이 대부분임을 고려하면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었을 듯하다.

4. 가족

제2대 스이제이 천황
제1황후 이스즈요리히메노 미코토(五十鈴依媛命) 황후제2황후 카와마타히메(川派姬) - 《고사기》에서는 안네이 천황이 그녀의 아들이라고 한다.
제3황후 이토리히메(糸織姬)

==# 천황 계보 #==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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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본서기》 기록



[1] 《일본서기》[2] 《고사기》[3] 카무누나카와미미노미코토[4] 카무누나카와미미노미코토[5] 《고사기》(古事記)[6] 카무누나카와미미노스메라미코토[7] 《일본서기》(日本書紀)[8] 타케누나카와미미노미코토[9] 신유혁명설에 의거한 것이다. 즉 601년 또는 661년을 기준으로 하였다. 신유년 정월 경신삭을 서력으로 환산하면 기원전 660년 2월 11일이 된다. 1873년 일본 정부는 2월 11일을 기원절이라고 이름하고 국경일로 삼았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일시 폐지되었으나, 1967년에 부활한다.[10] 『고사기』와 『일본서기』 스이제이 기에서는 카무야이미미노 미코토(神八井耳命)로 표기하며, 고사기에는 형 히코야이(日子八井)가 있었다고 한다.[11] 『고사기』에서는 神沼河耳命으로 표기하였다.[12] 『고사기』에서는 진무가 137세로 사망하였다고 하였다.[13] 『고사기』에서는 畝火山 북방 白檮의 尾上에 있다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 672년 7월 임인조에서 「神日本磐余彦天皇之陵. 」이 보이므로 7세기 후반에는 神日本磐余彦天皇 즉 神武天皇의 陵이라고 하는 무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희식(延喜式)』 제릉(諸陵)에는 야마토국(大和國) 高市郡에 있다고 적고 있으며, 『陵墓要覽』에는 카시하라시 大久保町에 있다고 적고 있다. 현재 나라현 카시하라시 大久保町에 神武陵이 있는데, 이 무덤은 에도 시대 말기인 1863년에 만들어져 그후 확장, 정비된 무덤이다.[14] 스이레이 덴노 『고사기』에서는 神沼河耳命, 建沼河耳命으로 표기되어 있다. 제2대 스이제이 덴노부터 제9대 가이카 덴노까지는 구체적인 사적이 보이지 않아 결사팔대라고 불리며 실재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15] 신의 託宣을 전하는 역을 담당한 神이다. 『일본서기』 신대(神代) 제8단에서 코토시로누시노 카미는 八尋熊鰐으로 변하여 三嶋의 溝樴姬와의 사이에서 딸 姬蹈鞴五十鈴姬命을 낳았다고 한다. 스이제이 기와 안네이 기에서는 제2대 스이제이 덴노와 안네이 덴노의 비(妃)를 코토시로누시노 카미의 딸이라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 덴무 즉위전기에서는 코토시로누시노 카미가 임신의 난 때 덴무 측을 위해 활약하고 있다.[16] 진무 덴노가 즉위 전 日向國 吾田邑의 吾平津媛에게서 낳은 맏아들이다. 『고사기』에서는 多藝志美美命, 當藝志美美命으로 표기되었다.[17] 『고사기』 진무 단에서는 진무 덴노가 사망한 후에 타기시미미노 미코토인 多藝志美美命이 진무 덴노의 적후(適后)인 히메타타라이스케요리히메(伊須氣余理比賣)와 결혼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다예지미미명이 왕권의 정통 계승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서기』 스이제이 기에서 타기시미미노 미코토의 반란 전승으로 기록된 내용은 사실은 스이제이 덴노의 반란 전승이라고 볼 수 있다. 『고사기』에서는 히메타타라이스케요리히메가 자신의 아들 카무야이미미노 미코토와 카무누나카와미미노 미코토에게 노래로 다예지미미명의 음모를 알리고 있다. 이러한 『고사기』의 서술은 스이제이 즉위의 정통성을 말하고자 하는 『일본서기』 스이제이 기와는 다르다.[18] 진무 기에서는 진무 덴노가 재위 76년에 사망하였다고 하는데, 간지로는 병자년에 해당한다. 기묘년은 기원전 582년이므로 진무 덴노가 사망한 후 3년이 경과하였음을 알 수 있다.[19]고사기》는 '히메타타라이스케요리히메'(比賣多多良伊須氣余理比賣)가 그녀의 다른 이름이라고 기록했다.[20] 이건 《일본서기》 기준이고, 《고사기》에는 카무야이의 이름이 '카무야이미미'(神八井耳)로 되어 있으며, 그 위로 형 '히코야이'(日子八井)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21] 스이제이 덴노의 동모형(同母兄)으로 진무기에서는 神八井命으로 되어 있다.[22] 진무 덴노의 능을 조성하는 일[23] 弓部는 弓削部로, 활을 만드는 部民을 가리킨다. 궁부치언은 이곳에만 보이고 있다.[24] 倭鍛冶部, 鍛冶部는 鍛冶를 담당한 직업부로 倭鍛部와 韓鍛部가 있다.[25] 활을 만드는 부민(部民)[26] 현재 나라현 키타카츠라기군(北葛城郡) 王寺町이다.[27] 오호노 오미는 야마토국(大和國) 十市郡 饒富(현재 나라현 키시군 田原本町多)를 본거지로 하는 씨족이다. 多는 太, 意富로도 표기한다. 685년 11월에 아소미(朝臣) 카바네를 사성받았다. 『신찬성씨록』 좌경황별에서는 多朝臣이 오호노 오미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고사기』 진무단에는 카무야위미미의 후손으로 意富臣, 小子部連, 坂合部連, 火君, 大分君, 阿蘇君, 筑紫三家連, 雀部連, 雀部造, 小長谷造, 都祁直, 伊餘國造, 科野國造, 道奧石城國造, 常道仲國造, 長狹國造, 伊勢船木直, 尾張丹羽臣, 嶋田臣 등 모두 19씨를 적고 있다.[28]나라현 고세시 森脇 부근이다[29] 『일본서기』 기년으로는 기원전 581년이다.[30] 코토시로누시노 카미의 딸이며 스이레이 덴노의 어머니 媛蹈鞴五十鈴媛命의 여동생이다. 스이레이 덴노의 황후를 『일본서기』 본문에서는 코토시로누시노 카미의 딸로 적고 있지만, 여기에 분주로 인용된 일서(一書)에서는 시키노 아가타누시의 딸로 간주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서기』 편찬자가 아가타누시(縣主) 집안은 황후의 집안으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고친 것으로 추측된다.[31] 시키노 아가타누시는 684년 무라지(連)를 사성받은 야마토(大和) 분지의 오래된 씨족이다. 『고사기』에서는 시키(師木)縣主로 표기하였으며, 시키노 아가타누시가 제2대 스이레이 덴노부터 제4대 이토쿠 덴노까지 천황의 비(妃)를 배출하였다고 하며, 『일본서기』에 인용된 一書에서는 시키노 아가타누시가 제2대 스이레이 덴노부터 제6대 고안 덴노까지 천황의 비(妃)를 배출하였다고 전한다.[32] 『고사기』에서는 河俣比賣로 표기하였다.[33] 카스가(春日)는 현재 나라현 카스가 산(春日山)의 산록지대다. 사서에서 카스가노 아가타누시오호히모로가 보이는 곳은 이곳뿐이다. 그러나 『고사기』에서는 고레이 단에 카스가의 千千速若比賣, 가이카 기의 建國勝春戶日賣의 딸 沙本之大闇見戶賣를 춘일현주의 일족으로 보아, 沙本之大闇見戶賣의 아들 沙本毘古의 모반으로 외척이었던 카스가노 아가타누시도 멸망하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사기』의 모반 이야기나 카스가노 아가타누시가 스이레이 덴노의 비를 배출했다는 일서의 이야기는 카스가노 아가타누시가 야마토 분지의 유력한 세력이었다가 몰락하였음을 말해준다.[34] 『養老令』 喪葬令條에 의하면 「親王及三位以上薨, 五位以上及皇親卒, 六位以下庶人死. 」라고 하였다.[35] 『고사기』에서는 츠키타노 오카(衝田岡)으로 나와 있다. 『능묘요람』에서는 소재지를 현재 나라현 카시하라시 大字四條町이라 정하였다.[36] 스진 덴노가 고분인이 맞을 경우 스진 덴노는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온 지 얼마 안 된 일족 출신일 가능성이 높으며, 심하면 본인 대에서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왔을 가능성도 꽤 된다.[37] 현대에는 주몽계와 다른 왕계로 유력시되는 제2대 유리명왕의 집권 시기다.[38] 고고학적으로 4세기 초반~중반에 걸쳐 활동한 것이 확인되는 파사 이사금-지마 이사금, 일성 이사금-아달라 이사금이 수백 년 전의 인물로 기년이 인상되었듯이 3세기 인물을 이전 시대 인물로 조작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39] 야마토 초대 대왕인 스진 덴노는 갑신년에 즉위했기 때문에 3세기 중후반임을 고려하면 264년이다. 다만 가이카 덴노도 갑신년에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오류가 났을 가능성이 있다.[40] 고구려, 백제, 신라 역사에서도 복수 왕계가 일원화된 이후 다른 왕계의 인물을 삭제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중요성이 높은 인물들은 가족관계를 조작해서라도 남겨놓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스이제이 덴노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도 비슷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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