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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결사팔대([ruby(缺,ruby=けっ)][ruby(史,ruby=し)][ruby(八,ruby=はち)][ruby(代,ruby=だい)])는 제2대 스이제이 천황부터 제9대 가이카 천황까지의 천황 8명을 통칭하는 역사학적 용어이다. 명칭은 '역사에서 빠진 8대'라는 뜻이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초대 진무 천황부터 제33대 스이코 천황까지 초기 천황 33명의 기록 중, 결사팔대 천황 8명은 아무 치적도 기록되지 않았다. 아직도 일본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질리도록 물고 늘어지는 떡밥이다.2. 표기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전 구자체로는 "缺史八代"라 표기하였고, "궐사팔대(闕史八代)"라고 쓰기도 하였다. 패전 이후 신자체가 제정되면서 현재 일본에서는 이지러질 결(缺) 자를 대체하여 신자체로 흠(欠) 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현대 표기가 "欠史八代"로 되었다. 이 신자체 표기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흠사팔대'지만, 원 글자를 살려 한국에서는 '결사팔대'라고 읽는다. 이지러질 결(缺) 자와 하품 흠(欠) 자가 한국어에서는 독음이 서로 다르지만 일본어로는 똑같다.3. 이론의 역사
결사팔대를 처음으로 주장한 츠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는 무려 태평양 전쟁 때에 천황숭배가 절정에 달했을 때에 천황의 계보를 의심하는 이 이론을 펴서 1942년 유죄 판결을 받았다. 패전 이후 천황숭배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의 이론이 주류가 되어서, 한때는 위 8명뿐 아니라 오진 천황 이전 천황들이 전부 실존인물이긴 한지 의심하는 설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의 연구로 제10대 스진 천황 이후의 천황들은 기년조정이나 세부적 비판은 있을지언정 어떤 형태로든 역사 속에 실존한 인물들이었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4. 재위기와 수명
일본에서도 진무 천황은 신화 속 인물이라는 설이 많지만, 결사팔대를 두고는 입장이 엇갈린다. 일본서기의 기술이 사실이라 간주할 경우, 결사팔대 천황들의 재위기간은 각각 다음과 같다.- 제2대 스이제이(綏靖): 기원전 581년~기원전 549년
- 제3대 안네이(安寧): 기원전 549년~기원전 511년
- 제4대 이토쿠(懿德): 기원전 510년~기원전 477년
- 제5대 고쇼(孝昭): 기원전 475년~기원전 393년
- 제6대 고안(孝安): 기원전 392년~기원전 291년
- 제7대 고레이(孝靈): 기원전 290년~기원전 214년
- 제8대 고겐(孝元): 기원전 214년~기원전 158년
- 제9대 가이카(開化): 기원전 158년~기원전 98년
이들 중 제5대 고쇼 천황부터 제9대 가이카 천황까지 5명, 그 중에서도 제5대 고쇼 천황부터 제7대 고레이 천황까지 3명은 재위기간이 비정상적으로 길다. 이는 초대, 제10-16대 천황도 마찬가지다. 가장 짧은 고겐 천황이 56년을 재위했고, 제6대 고안 천황은 재위기간만 100년이 넘는다. 이들의 재위시기를 종합하면 제2대부터 제9대까지 483년간 8명, 특히나 제5대부터 제7대까지는 260년간 단 3명만 재위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게다가 이들은 전부 친아들이 제위를 계승했다고 기록되었으니 본인이 즉위하기 이전 시절까지 수명에 더해야 한다. 일본서기의 서술이 사실이라면 100년 넘게 통치한 제6대 고안 천황은 수명이 137세, 그 아들 제7대 고레이 천황은 128세에 달한다. 의학이 발전하여 평균수명이 껑충 늘어난 현대에조차도 100세를 넘는 장수자들은 드물고, 특히나 110세를 넘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그런데 기원전 일본에서, 한 명도 아니고 부자가 둘 다 120세 넘게 장수했다고 하면 믿을 수가 없다. 그뿐 아니라 결사팔대 천황들은 기록상 모두 장수하였다. 한국사의 단군신화나 삼국사기를 비롯해 그 외 대다수 문명에서도 기록이 부실한 역사 초창기 군주들은 수명이 비정상적으로 길게 기록된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만큼 장수를 누릴 정도로 하늘에게서 정통성을 부여받았다는 프로파간다의 일종이다.
5. 논쟁
5.1. 부정론
원래 결사팔대 천황 8명은 중국의 혁명사상에 따라, 또는 천황 가문의 뿌리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탄생되었다는 것이 부정론의 기초가 된다.1978년 사이타마현 교다시 이나리야마고분(稻荷山古墳)에서 금착명철검(金錯銘鐵劍)이 출토되었다. 금착명철검은 같은 곳에서 출토된 다른 유물들과 함께 1983년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다.[1] 여기에 오호히코(意富比垝)로부터 시작되어 7대손 오와케노오미(乎獲居臣)에 이르는 8대의 계보를 새긴 명문이 있었다. 이중 시조 오호히코를 고겐 천황의 큰아들로 일본서기에서 오히코노미코토(大彦命), 고사기에서 오히코노미코토(大毘古命)라고 기록한 인물이라고 비정하면서 논란이 생겼다.
일본서기는 오히코노미코토가 고겐 천황의 큰아들이고 부황으로부터 장군으로 임명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오히코노미코토를 포함하여 황족 네 명이 장군으로 임명되어 네 지역에 파견되었으므로 이들을 통칭하여 사도장군(四道將軍)이라고 한다. 그런데 금착명철검의 명문에는 오호히코를 두고 고겐 천황의 큰아들이니 장군이 되었다느니 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금착명철검을 제작한 시절에는 그런 천황의 존재가 없었다는 증거다. 또 스이제이 천황로부터 가이카 천황에 이르기까지 역대 천황들의 치세가 어떠했는지 내용이 전혀 없고 대관식 정도만 간략하게 기록한 이유는 이들이 역사적으로 실존하지 않은 천황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5.2. 긍정론
역시 1978년 출토된 금착명철검을 예시로 든다. 오호히코노미코토가 '당연히' 고겐 천황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따로 그런 내용이 새겨지지 않은 것이고 오호히코노미코토의 후세들이 8대에 걸쳐 기록된 만큼, 결사팔대는 실존했다는 증거가 이 금착명철검이라는 것이다. 또 치세의 기록이 완전히 결여된 것은 시진 천황 이후의 천황들의 기록에서도 사례가 있으므로, 부정설의 증거로 사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제2~9대 천황의 기록이 사라졌다고 보는 설도 있다.또 시호의 경우에도 제2대·제3대·제5대 천황은 분명히 실명을 시호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한다. 일본식 시호 작법이 눈에 뜨이지 않음이 더더욱 그들의 실제성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1] 금착(金錯)이란 어떤 기물에 홈을 파서 황금으로 글씨나 그림을 그려넣음을 말한다. 그러니까 '금착명철검'이란 명칭은 '금착 기법으로 글(銘)을 새긴 철검'이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