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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2:36:40

일본 황실의 후계자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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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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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여계 황족의 지위 유지
2.1. 관련 여론조사
3. 구황족의 복귀4. 후궁(측실) 제도의 부활 혹은 이혼 허용5. 황별섭가 복귀
5.1. 황별섭가 후손 목록 및 근황

1. 개요

125대 아키히토 천황 재위기(1989-2019)에 일본 황실에는 127대, 혹은 128대 천황이 될 어린 남자 계승자가 없었다. 2006년 9월에 126대 나루히토 천황의 하나뿐인 남자 조카이자 후미히토의 외아들인 히사히토(悠仁) 친왕이 태어나긴 했지만, 히사히토와 동세대, 혹은 다음 세대인 남자 황족이 전무하므로 천황가의 혈통이 단절될 위기에 놓였기 때문에 수많은 대책과 논의가 나왔다.

2. 여계 황족의 지위 유지

사실 여계(女系) 천황은 고사하고 천 년 동안 일본의 황가는 살리카법처럼 여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과거에 여성 천황이 있었는데 여계를 인정하지 않았다니 무슨 말인가 싶을 테지만, '여계 천황'과 '여성 천황'은 전혀 다르다. 여성 천황은 여자의 몸으로 천황이 되는 것이니 이 자체는 문제가 없다. 여성 천황의 다음 황위는 방계의 남성이나 같은 황가의 남성과 근친혼해서 낳은 자손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과거 일본에선 여성 황족을 인정할지 말지 논란이 될 이유가 없었다.[1] 쉬운 예로 신라 역사에서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 등 여왕 3명이 있었지만, 결혼을 하더라도 근친혼으로 같은 경주 김씨 남성들과 결혼했으며 셋 다 자녀가 없어 후계를 다른 경주 김씨에게 물려준 일이 있다.

근현대 일본의 황실전범은 여자가 황위를 계승함을 전면 부정한다. 사실 1889년 제정된 황실전범의 초안에서는 한때 여계 계승이 고려되기도 했는데 궁내성이 입안한 <황실제규> 1조는 "황족 중 남계(男系)가 끊어졌을 때 황족 중 여계로 계승한다."라고 하였고 7조는 "황녀 또는 황통의 여계가 황위를 계승할 때는 그 황자에게 물려주며, 만약 황자가 없을 때에는 그 황녀에게 물려준다."고 못박았지만 여러 논란이 일자 그냥 지워버렸다.

과거에 여성 천황이 있었기 때문에 만약 황실의 남자 씨가 마른다면 '만세일계'를 유지하기 위해 황실전범을 고쳐서 아이코 공주가 아버지 나루히토의 뒤를 이어 즉위하는 것 자체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문제는 황실에 남자아이라고는 아이코 공주의 사촌동생(5살 아래)인 히사히토밖에 없어서 아이코 공주와 혼인하게 될 남성은 평민밖에 없고, 이렇게 태어나는 자손은 천황의 자식임에도 여계이기 때문에 황족이 아니라는 기괴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다. 고대처럼 친사촌 남동생인 히사히토혼인해서 자손을 가진다면 해당 문제는 없지만[2] 1990년부터 30년에 걸친 나루히토후미히토 형제간 권력다툼으로 두 집안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져 이쪽도 고려하기가 매우 어렵다.[3] 더하여 법적으로는 사촌간 결혼은 허용되지만 일본 사회에서도 터부시하는 편이라 서로 사랑해서도 아니고 후계를 위해서 사촌간 결혼을 강행한다면 인식이 더 좋지 않을 것이다.

여계 황족 인정이란 이러한 황가의 여계 자손들에게도 황족의 지위를 주고 필요할 때는 여계 자손이 황위에 오를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그 모계 자손의 남성인지 여성인지는 논점과 무관하다.

이에 대한 반론은 다음과 같다.

현재 일본 정부에서 정식으로 이쪽을 검토하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논란이 크다. 여계 천황 및 황족 문제는 2000년대부터 꾸준히 나왔는데 일본 황실은 남성 황족의 비율이 낮았기 때문이다. 히사히토 탄생 이전에는 나루히토 천황 이후 항렬에 남자가 아예 없어서 여천황 허용 의견이 커졌는데 2006년에 히사히토 친왕이 탄생하면서 여자 천황 찬성 여론은 쏙 들어갔지만 이후에도 나루히토 천황 이후의 항렬에서는 남자가 히사히토밖에 없다.

아키히토 천황과 미치코 황후2019년 공무 재분배 당시 '황적을 이탈한 황녀들에게도 일부의 공무는 맡길 방침이 있다'고 한 것을 볼 때 공무 문제는 일반인이 된 이후에도 어느 정도는 시킬 생각으로 보인다.

결국 그동안 여자 천황에 부정적이었던 자민당에서도 여자 황위 계승권을 검토하겠다는 말이 나왔으나# 정부는 남자 황족만 천황을 승계하는 기존 전범을 고수할 방침이다.#

한편으로는 여계 천황의 즉위를 인정하게 된다면 일본 황실의 고질적인 고된 시집살이 문제의 일부도 상당히 해소될 것이다. 고준 황후(나가코)와 마사코 황후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문제 때문에 시집살이를 고되게 당해야 했는데 고준 황후는 어떻게든 그래도 아들을 2명 낳았지만 마사코 황후는 그렇지도 않아서 시부모는 물론이요 황실 전체와 궁내청에게까지 고된 시집살이를 보내야 했다. 그런데 고준 황후는 아키히토를 낳기 전에 딸이 4명 있었고 마사코 황후에게는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가 있다. 자식이 없는 건 아닌데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고되게 당해야 했다는 것, 즉 여계 계승도 인정하면 아들이건 딸이건 상관없이 즉위가 가능해 그냥 자식을 낳느냐, 낳지 못하느냐만이 문제일 뿐 아들인지 딸인지는 문제가 안 된다.[10]

시집가서 황실에서 이탈하는 공주를 특별직 공무원으로 대우하는 '코죠(皇女, 황녀)'라는 직책이 신설될 것으로 전망되었다.#

2021년 3월 16일일본 정부가 여성 미야케 인정 여부를 포함해 안정적인 천황 계승을 논의하는 지식인 회의를 신설하고 첫 회의를 열 것이라고 발표했다.#

2.1. 관련 여론조사

2024년 4월, 교도통신은 나루히토 즉위 5주년을 기념하여 황위 승계 문제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

3. 구황족의 복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구황족 문서
번 문단을
복귀 주장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구황족은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인한 외압으로 황적이탈 당한 세습친왕가 전 황족이다.[11] 남계가 없어서 자연스레 황족 자격이 없어진 다른 가문과는 달리 남성 남계 핏줄이 있는 가문도 있어 황적이탈 되지 않았다면 황위 계승 순위를 받았을 사람들도 있다. 정통성을 크게 해치지 않는 방법이지만 일본 내 구황족의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게 문제이다.

4. 후궁(측실) 제도의 부활 혹은 이혼 허용

일본 황실은 쇼와 덴노가 후궁(측실) 제도를 없애 버린 이래 후궁이 존재하지 않는데 일본에는 후궁 제도 부활을 진지하게 주장하는 인물들도 일부 존재한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일부일처제로는 후계자 걱정이 없을 만큼의 자녀 출산을 기대하기 힘드니 후궁 제도를 다시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부일처제를 오래 전부터 고수한 유럽 왕가가 후계자 부족으로 단절한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사실도 이런 주장의 근거로 든다.[12] 실제로 아들 때문에 후궁을 들인 사례도 존재하기는 한다.[13]

물론 현대 일본에서도 이런 주장은 정신나간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심각하게 논의하지는 않으나 황족으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장남인 토모히토 친왕이 이런 주장을 한 바 있다. 일본 언론에서는 측실제도 재도입 주장은 빼놓고 다른 부분만 발췌하여 보도했으나 외국에서는 "일본 황족이 후궁 제도 부활을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일본의 황실전범 개정과 관련된 인사들도 "구시대적, 전근대적인 발상"이라며 비판했다. 국제적으로도 논란이 예상되는데 당장 태국 국왕 라마 10세가 2019년 공식적으로 후궁을 들이자 국제적인 비판 여론이 높았던 사례가 있다.

이러한 비판을 빼고 진지하게 검토하더라도 측실제도가 다시 생기면 과연 어떤 여성이 후궁을 자원할 것이고 후궁을 둘 것으로 예상되는 황족 남성에게 누가 시집 오겠느냐, 그렇게 되면 어느 부모가 자신의 딸을 황실에 시집 보내겠느냐는 반론이 있다. "모든 국민은 일부일처제를 지켜야 하는데 황실만 예외로 할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고 결과적으로 채택할 가능성은 아주 낮다.[14] 그러나 이런 어이없는 주장이 나올 만큼 후계자 부족이 심각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15]

후궁을 인정할 수 없다면 이혼[16]을 인정하여 후계자가 없을 경우 이혼하고 새로운 아내를 얻어서 자녀를 출산하자는 이야기도 있다.[17] 후궁 제도보다는 덜 구시대적이지만 자녀를 못 얻는다는 까닭에 부부사이에 문제가 없는데도 아내를 내치고 또 아내를 얻으면 부부 당사자에게 심각한 인권침해니 마찬가지로 비판의 대상이며 아들 못 낳았다는 이유로 소박당하는 여자가 21세기에, 그것도 일본 정도의 선진국 황실에서 공식적으로 나왔다간 국제적으로 개망신을 살 것이고 여자가 불임이 아닌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는 것은 남녀공동의 문제이기도 하다.

5. 황별섭가 복귀

황별섭가(皇別摂家)고셋케 문서에 서술되어 있듯이 고셋케 가문들 중에서 황족을 양자로 받아들인 부계 혈통상 황족이 당주로 있는 섭가를 뜻한다. 이 주장은 일부 우익 세력이 펼친다. 대표적으로 고노에(近衛), 이치죠(一条), 타카츠카사(鷹司) 가문이 황실에서 양자를 들였다. 다만 이들 가문도 나중에 혈통이 단절되면서 고노에 가는 무가이면서도 구마모토 번주 가문인 호소카와 가(細川家)[18]에서 양자를 들였고 이치죠 가는 황족을 양자로 받아들이기 전의 타카츠카사 가문에서, 타카츠카사 가는 데이메이 황후의 친정인 쿠죠 가[19]에서 양자를 들여서 현재 혈통상 황족을 조상으로 하고 있는 섭가 당주는 없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도 구황족의 복귀 반박과 비슷한 반박이 가능하다.

5.1. 황별섭가 후손 목록 및 근황

구황족들과 마찬가지로 후손이 남아 있는 가문을 이 색상으로 강조했다.
[1] 일본의 현 상황에 대입하여 설명해보자. 만약 아이코 공주가 천황의 자리에 등극하더라도 사촌 남동생인 히사히토와 결혼을 시켜서 둘 사이에 출생한 아이가 그 다음 천황이 되게 한다면 결과적으로는 히사히토도 황족은 황족이니 부계로 이은 셈이 된다는 논리이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아이코 공주와 히사히토는 또 다시 아들을 많이 낳기 위해 매우 노력해야 할 뿐만아니라, 21세기에 대를 잇고 혈통을 보전시키겠다는 이유로 근친혼을 시킨다는 게 전근대적 발상이라 국내외에 심각한 논란을 불러올 것이다. 사실 일본에서는 사촌간 혼인이 합법이긴 하지만, 법적으로 가능하다는 것뿐이지 오히려 일본 국민정서는 갈수록 사촌간 혼인을 터부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2] 일본은 사촌 간 혼인을 법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법적으로, 그리고 혈통적으로는 문제가 없긴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에서도 사촌간 혼인이 전근대적이라는 인식이 자리잡혀 부정적인 시선이 늘어났기 때문에 21세기 일본에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에는 다소 논란이 있을 논제다. 차라리 촌수가 워낙 멀어서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는 황적이탈구황족 후손들과 결혼시키는 게 그나마 설득력이 있다.[3] 만약 나루히토후미히토 형제가 서로 사이가 좋았다면 아이코 공주의 황족 지위 유지 겸 히사히토의 정통성 강화를 위해 따가운 시선을 무릅쓰고라도 고려해 볼 여지는 있었을 것이다. 사촌간 혼인에 대한 인식이 곱지는 않더라도 '황족이라는 특수한 사정상 어느 정도 용인될 여지가 있다'는 반론도 가능하다.[4] 프랑스에서는 살리카법에 의해 카페 왕조-발루아 왕조-부르봉 왕조의 부계 남성 계승만 인정해 왔으며 현재까지도 부르봉 가문의 당주는 부계 남성으로만 계승된다. 독일은 더 심해서 사실상 남인 사람에게 왕위가 넘어가기도 하고 그러기 힘든 상황이라면 아예 여러 친척이 영지를 쪼개 나눠가지기도 했다.[5] 그 중에서도 '황위는 천황의 직계 남성 또는 황족 남성으로만 잇는다'는 규칙[6] 물론 황실전범 이전에도 계승 법칙이 있긴 했기에 황실전범 자체도 예전부터 쭉 이어진 것도 아닐 뿐더러 이미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개정한 바 있기 때문에 개정을 하면 되긴 된다. 다만 2차 대전 후와는 달리 부계 계승까지 건드려야 하기 때문에 부담감의 무게가 다르다.[7] 과거 여성 천황이 탄생한 전례는 있지만 모두 (1947년 구황족황적이탈 이전에 있던) 황족과 결혼하거나 독신으로 죽었다. 하지만 결혼한 내친왕이 황적을 유지할 경우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하가한 내친왕이 황적을 유지했기 때문에 전례가 있다.[8] 동아시아 대륙에서 부마와 외손의 지위를 어떻게 할지 정하기야 했지만 모계=역성혁명으로 못박아서 금지한 걸 전제로 한다.[9] 카메하메하 왕조가 카메하메하 1세의 외손자 카메하메하 5세의 즉위로 여계가 이뤄졌으나 끝내 대가 끊겼다.[10] 구황족이 복원된다면 부담은 덜할 것이지만 구황족 중 가까운 이들도 20세손은 넘어간다. 말이 좋아 구황족이지 촌수를 따지면 40촌 수준으로 까마득히 먼 남이다. 사람 심리상 아무래도 까마득한 친척보다는 자기 핏줄이 계속 줄줄이 계승하기를 원할 테니 며느리에게 빨리 아들 낳으라고 닦달할 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11] 천황의 아들은 친왕(현재는 손자까지 친왕), 친왕의 자녀는 왕, 왕의 자녀들은 황적이탈하는 것이 관례이나 그것에 상관없이 친왕 칭호를 세습하는 네 가문을 세습친왕가라 한다. 세 가문은 직황족에 흡수되거나 단절되었으며, 나머지 하나도 직계는 단절 확정에 분가들만 명맥을 잇고 있다.[12] 유럽살리카법을 도입하지 않은 이상은 여자(혹은 여계)의 계승은 인정했으나 서자 개념이 없고 정처가 아닌 자에게서 나온 자식은 죄다 사생아 취급해서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동아시아는 대체적으로 서자의 계승도 인정한 대신 여자(혹은 여계)의 계승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확실히 후자가 전자보다 단절된 사례가 적기는 하다. 동양 쪽은 어떻게든 남자만이 계승했기 때문에 성이 교체된다는 건 역성혁명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13] 하지만 이들의 주장을 따라 후궁 제도를 다시 허용한다면 아들이 없거나 외동아들, 독자인 경우만 허용할 가능성이 높다.[14] 무엇보다도 결혼할 자신은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아이 낳는 기계'라는 사실은 인지하고 들어가야 하며 아들을 낳으면 본처인 황태자비 혹은 황후와 갈등도 빚어질 것이다.[15] 다만 황실전범상 인정되지 않도록 되어 있는 '비적출자의 계승권을 인정'하는 방법으로 교묘하게 회피해 갈 가능성은 있다. "적자와 서자 사이에 차별을 두는 것은 인권 침해라는 주장"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16] 현행 황실전범 14조 3항에서는 (본래 황족 출신이 아닌) 친왕비나 왕비가 이혼한 경우 황족 신분을 이탈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혼이 절대적으로 금지된 건 아니라는 말.[17] 실제로 나루히토 현 덴노도 황태자 시절 동생 후미히토에게 황태자 자리를 뺏기지 않으려면 아들을 못 낳는 마사코 황태자비와 이혼하고 새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측근들의 충고를 빙자한 압력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이것이 곪고 곪다가 터져버린 게 "황실 내에 마사코 황태자비의 인격을 부정하는 세력이 있다."는 말로 대표되는 일명 '인격 부정' 회견이다.[18] 나루히토의 당고모인 고노에 야스코의 남편인 고노에 타다테루(近衛忠輝)가 이 집안 출신으로 타다테루의 형인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현 당주다. 작위는 후작. 두 형제의 외조부가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로, 후미마로는 고요제이 덴노의 12대손으로 아키히토 상황의 24촌 황형이다.[19] 이 가문도 현재 쿠죠 가에서 들인 혈통이 단절되어서 도쿠가와 가문의 방계인 오규 마츠다이라(大給松平)가에서 양자를 들여서 당주를 맡고 있다. 다만 이 사람도 혈통상으로 이방자의 외가인 나베시마가의 방계 혈통인데 나베시마 가도 후지와라 가문 후손이다.[20] 구황족들이 최소 700여 년 전에 현 황실과 갈라졌다면 황별섭가는 400여 년(고노에, 이치죠) 내지 300여 년 전(타카츠카사)에 분가했기 때문이다.[21] 물론 히가시쿠니노미야처럼 비교적 최근에 직황족과 통혼한 구황족 궁가는 모계 혈통상으로는 황별섭가보다 더욱 가까운 인물들이니 양성평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이들의 황실 복귀가 차라리 더 합리적이라는 반론도 가능하다.[22] 또한 앞서 예시로 든 다이고 덴노는 할아버지가 고코 덴노였는데, 고코 덴노는 자기 자손들에게 황위를 물려주지 않겠다 하여 모든 자식에게 미나모토 성을 하사했다. 그러나 고코 덴노가 위독해지자 당시 실권자인 후지와라노 모토쓰네가 신적강하된 고코 덴노의 아들인 미나모토노 사다미를 황족으로 복귀시켰다. 그리고 고코 덴노가 죽자 우다 덴노로 옹립했고 우다 덴노와 함께 그의 아들인 다이고 덴노 또한 황족으로 복귀했다. 여기서 문제는 우다 덴노는 아버지가 천황이었던 만큼 천황가와 연이 아주 가까운 인물이었거니와, 신적강하된 지 오래 된 것도 아니었고(신적강하된 지 겨우 3년 만에 복귀했다) 또 원래 한번 신적강하되면 그걸로 끝이었는데 그냥 권신이 자기가 하겠다며 원칙을 어긴 예시인지라 좋은 예시로 들긴 좀 뭣하다.[23] 여담으로 후미타카에게는 게이샤 출신 첩인 아즈마 미요코(東美代子)에게서 얻은 서자인 각본가 아즈마 류메이(東隆明)가 있었지만 서자인 데다 어머니가 천한 신분의 여자였기 때문에 애시당초 후계 대상이 아니었고 아버지 집안과 일체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다만 가문에서는 친자식으로 비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하며 조부와 부친의 묘를 참배하고 있다고 한다.[24] 부계 기준으로 이복동생이며 모계 기준으로는 이종사촌동생이 된다.[25]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고모할머니다.[26] 장녀인 도키코(朝子)는 한때 히로히토의 처로 거론되었지만 이후 방계 황족인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에게 밀려 탈락하면서 방계 황족인 히로요시 왕(博義王)에게 시집을 갔고 1947년 방계 황족들이 황적이탈할 때 후시미 도키코가 되었다.[27] 장남 사네모토는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남작위를 받아 분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차남은 해군 소장인 사노 츠네하(佐野常羽)의 양자가 되었고 메이지 덴노의 외손녀와 결혼하였으며 3남 사네히데(実英)는 난부 도시아츠 백작의 양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