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天下人(てんかびと, てんかじん)문자 그대로 천하의 사람이란 의미. 구체적으로는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을 일컫는 데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1]
주로 진짜 천하를 제패했거나,[2] 사실상 천하를 제패한 거나 다름없는 위업을 세운 인물,[3] 천하의 요지(키나이)를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는 인물에게[4] 쓰인다.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나, 보통 전국시대의 전국 3영걸은 확실히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이 셋을 포함해서 아래 기술된 7명의 인물을 주로 천하인으로 거론하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제외하곤 전부 자신의 후계자 대에서 박살이 났다.
전국시대 배경 외에도 창천항로 등 일본 삼국지 매체나 시대물 등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천하인, 패업 같은 단어가 들어가면 사실상 일본 미디어 확정. 다만 엄밀히 말해 이런 단어는 일본 고유의 영웅주의적 정서가 강하게 배어 있어서 타국의 사례에 대입하기에는 호환이 안 되는 부분이 많다.
2. 천하인이라 불리는 다이묘들
- 전국 3영걸 이전
- 호소카와 마사모토 : 무로마치 막부의 간레이. 일본이 동서로 나뉘어 내분이 일어나 오닌의 난에서 동군을 맡은 호소카와 가문이 우세하게 승리로 끝났는데, 마사모토는 아버지 카츠모토의 뒤를 이어 당주가 되었고, 메이오의 정변을 일으켜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추방해 아시카가 요시즈미를 옹립했다. 호소카와에게 대항한 하타케야마와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물리쳤으며, 야쿠시지 모토카즈, 하타케야마, 잇시키 등을 공격하는 등 세력을 확대해 전성기를 이룩했으나, 자신이 양자를 세 명이나 들이고 후계자를 명확하지 않은 탓에 내분의 불씨를 일으켜 에이쇼의 난이 일어났고 결국 암살당했다.
- 오우치 요시오키: 나가토, 스오의 다이묘. 이와미 은광이 소재한 지역을 장악하고 이를 필두로 주고쿠를 호령하여 압도적인 경제력을 얻었다. 영지의 관리와 확대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중앙에서 호소카와의 난이 발발하자 군사를 이끌고 상락하여 전대 쇼군을 옹립하여 복직시켜주는 등 중앙에도 진출할 정도의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아마고 가문이 대두하자 주고쿠로 돌아와 아마고와 전쟁을 벌여 우세한 정황을 가져나갔으나 병사하고 말았다. 후계는 유능한 문화인인 장남 오우치 요시타카가 이었다.
- 롯카쿠 사다요리 : 오우미의 다이묘. 호소카와 마사카타를 물리치고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타네가 추방되자 호소카와 타카쿠니와 함께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옹립하면서 중앙 정치를 장악해 쇼문 가문의 힘을 등에 업었다.
- 미요시 나가요시: 아와, 셋츠, 카와치의 다이묘. 간레이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가신이었으나 곧 격렬히 대립하여 그를 깨뜨렸으며 오우미로 쇼군이 도망쳐 공석이 된 무로마치 막부를 잠시 차지하였다. 이후 쇼군 가문을 교토로 불러들였으나 곧 대립하여 자신이 직접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깨뜨리고 막부를 차지, 사실상 기능을 정지시키며 새로운 무가 정권을 세웠다. 5년 정도 지나 막부와는 화친했으나 막부와 거의 동등한 권한을 쥐게 되었으며 최대의 항구도시 사카이를 점거하여 적극적으로 이용하였고 자주 문화 활동에 참여하여 나가요시의 실세와 명망은 높아져갔다. 전성기에는 10개국이 넘는 영지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일본의 부를 움켜쥔, 말그대로 천하인과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전성기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병사하였다. 장남이 자신보다 먼저 사망했기에 후계는 동생의 아들인 미요시 요시츠구가 이었다.
- 전국 3영걸
- 오다 노부나가: 오와리, 미노, 오우미의 다이묘.[5] 오와리의 슈고다이(守護代)였던 오다 가문을 급속도로 부흥시켜 도카이도와 주부 대개를 차지하였다. 이후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락, 그를 쇼군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일본의 중앙인 기나이 또한 그의 손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상업을 중시하여 자신의 영지 곳곳의 상업을 진흥시킨 데다 상락 이후의 수많은 역경을 뚫고 오히려 공세로 나갔으며 동서를 가리지 않고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쇼군을 쫒아내어 막부를 차지하여 기능을 정지시켰기에 가히 천하인이라 할 만하였다.[6] 이후 서쪽의 군사를 지원하기 위해 혼노지에 거처하였으나 가신의 손에 살해당하였다. 가독을 물려받았던 장남도 당시에 사망하였기에 그 다음 후계자가 공표되지 않은 오다 가문은 사분오열되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노부나가의 가신.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노부나가에게 중용받아 후에는 주고쿠 공략을 일임받는 방면군 사령관으로까지 올라서게 되었다. 노부나가 사후 급히 군사를 회군시켜 노부나가의 원수를 물리쳤으며, 정적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거나 회유, 교섭하여 사실상 오다 가문을 흡수하게 되었다. 이윽고 서일본과 동일본을 자신의 휘하로 끌여들이는데 성공하여 명실상부한 천하인이 되었다. 천하를 통일한 이후 해외로 진출하겠다며 조선을 침략하였으며 오대로(五大老)라는 아슬아슬한 정치체계를 취하였고 아들이 태어나자 후계자로 지명된 조카를 살해하는 등 실정으로 판단될 행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사망하였으며 후계는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이었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미카와의 다이묘이자 에도 막부의 창시자. 마츠다이라 가문에서 태어나 이마가와 가문에서 인질생활을 했으나 요시모토 사후 노부나가를 따라 그를 보좌해 주었다.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을 차지하자 그와 대립하였으며 간토로 영지를 전봉당하자 착실히 힘을 길렀다.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세력이 분열하자 그 틈을 파고들어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으며 사실상 새로운 천하인이 되었다. 이후 관위를 높히고 동시에 쇼군직에 올라 정식으로 에도 막부를 창시하여 새로운 일본의 시작을 알렸다.[7] 후계는 삼남인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이었으며 에도 막부는 약 260년 동안 일본을 통치해 나갔다. 이렇기에 센고쿠 시대 최후의 승자로도 평가받는다.
보통 민간에서는 요시오키와 나가요시를 "노부나가 이전의 천하인"으로 보나 학계에서는 나가요시부터 시작되는 계보를 "기나이를 제패한 천하인"으로 보며 기나이를 확실히 영토화하지는 못한 요시오키는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최근에는 천하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추가 연구와 여러 재평가를 거쳐, 기나이에 군림하며 막부에 영향력을 끼친 호소카와 가문의 인물들이나 롯카쿠 사다요리 등의 인물들 또한 천하인에 속한다는 인식이 정착되기 시작했다.[8]
3. 판도를 산산이 깨부순 후계자들
-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양자들 : 호소카와 마사모토를 암살해 호소카와 가문의 내분이 시작되었고, 호소카와 스미유키가 당주 자리에 앉은 것을 시작으로 호소카와 스미모토와 호소카와 타쿠니가 반발하면서 에이쇼의 난이 일어나 정권을 잡은지 얼마 안되어 쫓겨났다가 살해당했으며, 호소카와 가문의 내분이 계속되어 오우치 가문의 상락을 불렀다.
- 오우치 요시타카: 당주에 취임한 다음 유능함을 여지없이 발휘하여 오우치의 판도를 늘려갔으나 아마고 원정이 그의 모든 것을 뒤틀어버렸다. 원정의 패전이후 본인은 문약해져 문치파의 인사를 중용하여 영지를 통치해 나갔다. 이는 무단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문치파와 무단파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얼마 안가 요시타카는 스에 하루카타의 배반으로 사망하였다. 이후 오우치 가문은 하루카타가 새로운 당주를 옹립하여 존속되었으나 얼마 가지않아 모리 모토나리와의 전투에서 하루카타가 사망, 오우치 가문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곧 모토나리에 의해 멸망하였다.
- 롯카쿠 사다요리의 아들과 손자 : 아들인 롯카쿠 요시카타는 미요시 가문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대패해 밀리면서 기나이의 패권을 상실했으며, 세력 약화로 인해 아자이 가문의 공격을 불러와 다시 복속시켰다. 손자인 롯카쿠 요시하루는 가신을 암살했다가 내분이 일어나면서 요시카타 부자는 쫓겨났으며, 이 일로 아자이 가문의 침공을 불러와 몰락하다가 상락을 개시한 오다 노부나가에게 멸망한다.
- 미요시 요시츠구: 당주에 취임한 요시츠구는 무로마치 막부와 쇼군을 탐탁지않게 여겼다. 결국 요시츠구는 에이로쿠의 변을 일으켜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살해하고 차기 쇼군을 임명하지 않는 극단적인 정책을 실행하게 된다. 이 정책에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불쾌감을 보였고 결국 기나이 미요시 가문의 중신인 미요시 산닌슈와 히사히데 부자는 격렬히 대립하게 되었다. 요시츠구는 이들을 중재하지 못하고 산닌슈파에 소속하게 되었으며 히사히데를 미요시 가문에서 몰아내는 것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노하라 나가후사를 위시로 한 산닌슈는 새로운 쇼군을 임명하고 요시츠구를 경시하게 되어 요시츠구는 히사히데에게 투신하였다. 히사히데 세력으로 넘어간 요시츠구는 상락하는 오다 노부나가 세력에게 투신하였고 산닌슈는 노부나가에 의해 기나이에서 쫒겨나 기나이 미요시 가문은 멸망했다. 이후 아와 미요시 가문 또한 쇠퇴해갔으며 시간이 지나 결국 멸망하였다.
- 노부나가의 아들과 손자들: 세력의 실질적인 수장인 노부나가 뿐만 아니라 현역 당주인 장남까지 사망한 탓에 오다 가문은 순식간에 분열하였다. 아케치 미츠히데 토벌의 명목상 총대장이었던 삼남 오다 노부타카는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버림받았으며, 장남 오다 노부타다의 아들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장손인 오다 히데노부(당시는 아기였기에 아명인 "산보시"로 불렸다.)는 히데요시에게 옹립됐지만 히데요시가 권력찬탈의 고의를 품고 아기[9]를 옹립한거라[10] 유명무실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시바타 카츠이에에게 옹립된 노부타카가 사망하자 차남 오다 노부카츠가 도쿠가와 이에야스편에 서게 됐으나 본인이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어 다시 히데요시의 밑으로 들어갔다. 결국 오다 가문은 히데요시의 휘하에서 유명무실한 상태로 이어지게 되었다. 히데요시 사후 오다 히데노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다가 패한 이후 영지를 전부 개역당해 완전히 몰락하였다.
- 도요토미 히데요리: 당주로 취임할 당시 매우 어린 나이였고 가신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였다. 이윽고 문치파와 무단파의 대립이 일어났고 이시다 미츠나리는 가토 기요마사에게 암살기도까지 받을 정도로 대립은 극단으로 치닫았다. 이후 문치파와 무단파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격돌하게 되었고 무단파의 무장이 가세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게 되면서 도요토미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결국 오사카의 진에서 이에야스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전쟁에서 지면서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아버지 히데요시의 무모했던 조선 정복 시도와 히데츠구 숙청의 여파로 인한 도요토미 측근들의 세력 약화와 분열이 크게 작용했다.
유일하게 이에야스의 후계자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만이 아버지가 세운 천하를 말아먹지 않았다. 이는 이에야스가 생전에 일본을 완전히 통일시키고 에도 막부의 초석을 제대로 다진 덕분이기도 하지만 히데타다 본인이 뛰어난 정치력을 가졌고 적절한 정책을 추진해 막부를 반석에 올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덕분에 도쿠가와 가문은 260년이나 일본을 다스리며 군림할 수 있었다.[11]
[1] 종종 전국시대 이전의 무가정권 수장을 칭할 때도 쓰인다.[2]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3] 오다 노부나가[4] 호소카와 마사모토, 오우치 요시오키, 롯카쿠 사다요리, 미요시 나가요시[5] 노부나가의 거성이었던 키요스 성, 기후 성, 아즈치 성이 그의 직할령이었던 위 3국에 소재하였다.[6] 혼노지의 변 직전 오다 가문의 세력권은 동으로는 코즈케국(군마현), 서로는 비젠국(오카야마현 동부)에 달했다.[7] 그리고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또 전쟁을 일으켜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 지지세력을 오사카 전투에서 몰살시켰다.[8] 사다요리를 천하인으로 밀어주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무라이 유키가 있다.[9] 몇월생인지 불분명하긴 하나, 어린이도 아닌 아기 수준의 나이였던건 틀림없다. 당시 약 두돌(만 2세) 정도 되어 말도 잘 못하고 걸음마와 옹알이 정도를 하던 아기였다.[10] 원래 오다의 다른 가신들은 첫째 아들이 아버지와 같이 죽었고 첫째 손자가 어린 아기에 불과하니, 당연히 둘째나 셋째 아들이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하시바 히데요시 혼자 "장자 계승이 원칙이니, 장자의 아들인 장손이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른 가신들의 주장을 다 묵살해버렸다. 노부나가의 4남이자 히데요시에게 양자로 보내진 오다 히데카츠 역시 이에 동조했다.[11] 또한 정권을 빼앗긴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도쿠가와 가문은 분가를 포함해 무려 셋이나 되는 공작가를 배출했을 정도로 우대받으며 호소카와 가문과 함께 구 천하인 가문 중 현대에도 가장 번영 중인 집안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