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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23:34:07

오우치 요시오키


파일:Ōuchi_Yoshioki.jpg

大内義興
1477년 ~ 1529년

1. 개요2. 행적
2.1. 가독 계승2.2. 세력 확대2.3. 아마고와의 전쟁
3. 평가4. 그 외

1. 개요

일본 전국시대다이묘. 스오 오우치 가문 15대 당주로 오우치 마사히로[1]의 장남. 오우치 가문 최대 전성기를 이룩했으며 라이벌이었던 아마고 츠네히사와 함께 모리 모토나리의 일생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2]

2. 행적

2.1. 가독 계승

1492년 롯카쿠 토벌전에 첫 출전하였으며, 2년 뒤에 아버지 오우치 마사히로가 병으로 물러나자 당주 자리에 오른다. 마사히로가 1495년에 사망하자, 가신인 나가토 슈고다이 나이토 히로나리가 동생 오우치 다카히로를 옹립하려 한다는 스에 다카모리의 참언을 믿고 히로나리 부자를 죽이지만 이후에 히로나리 부자의 무고함을 알게 되자 다카모리를 처형하고 나이토 가를 재건해준다.

2.2. 세력 확대

기타큐슈에서 오토모 가, 쇼니 가를 상대로 싸워 세력을 확대해갔다. 아버지 대부터 내려온 스오, 나가토, 부젠, 치쿠젠에 아키, 이와미 슈고를 겸했으며 히젠 일부까지 지배하였다. 1496년 오토모 가에 내란이 일어나자 개입하여 오토모 마사치카를 처형하고, 오토모 슈신을 후계자로 내세우지만 슈신의 사촌인 오토모 치카하루에 의해 실패한다.

1497년 숙적 쇼니 마사스케를 공격해 마사스케, 다카츠네 부자를 자결시켜 규슈 북부로 세력을 확대한다. 하지만 마사스케의 아들 쇼니 스케모토가 1501년에 거병하고 1506년에는 오토모 가와 연합하여 오우치 가를 공격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니, 이에 요시오키는 과거 무로마치 막부의 10대 쇼군이었다가 메이오 정변으로 쫓겨나 지방을 떠돌던 아시카가 요시타네의 중개로 스케모토와 화친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요시타네가 다시 교토에 입성해 쇼군에 복위할 수 있도록 도왔다. 마침 1507년 교토에서 간레이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암살되고 그의 세 양자들이 내란을 벌이자 기나이로 진출을 시도한다.

요시오키는 지배하에 있는 규슈, 주고쿠의 여러 다이묘들을 소집해 빈고까지 진출한다. 마사모토의 양자인 호소카와 다카쿠니는 요시오키와 연합하여 또 다른 양자인 호소카와 스미모토와 쇼군 아시카가 요시즈미를 몰아내고 정권을 차지한다. 교토 상락을 완수한 요시오키는 보호하고 있던 전 쇼군 요시타네가 폐위됐을 때 그 자리를 차지한 아시카가 요시즈미를 쫓아내고, 요시타네를 다시 쇼군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사쿄노다이부, 간레다이로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함께 교토에서 정권을 차지한다.

그러나 1510년 다카쿠니와 함께 지방으로 도주한 11대 쇼군 요시즈미를 토벌하기 위해 출병했다가 패배했고 또 1511년 셋츠와 이즈미에서 계속 패해 단바로 퇴각한다. 하지만 요시즈미가 급사한데다 롯카쿠 다카요리가 호소카와 스미모토를 배신하면서 전황이 유리해지자 야마시로 후나오카야마 전투에서 스미모토군을 격파하고 교토를 탈환한다. 1513년 구교에 오르지만 다카쿠니와 요시다네의 대립과 아마고 츠네히사의 대두로 인해 1518년 간레다이에서 사퇴하고 귀국한다.

2.3. 아마고와의 전쟁

요시오키가 교토에 있는 동안 세력을 키운 츠네히사는 이와미를 공격하고 오우치 가에 복속하고 있던 모리 가를 복속시키며 모리 모토나리를 이용해 가가미야마성을 공략하는 등 한 때 우위에 섰다. 이에 요시오키는 1521년에 아키, 이와미로 진격해 아마고 가와 싸우며, 1524년에 사토가나 산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도중에 모토나리가 아마고와 사이가 틀어지자 모리 가를 끌어들여 전세를 역전시켰으며 이 후에는 아키와 이와미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쇼니 가와의 전투도 유리하게 진행한다.

1528년에 가나야마성 공략중 병으로 쓰러져 야마구치로 귀국 직후 병사한다. 향년 52세. 장남인 오우치 요시타카가 뒤를 이었다.

3. 평가

주고쿠와 규슈 북부를 평정해 오우치 가문을 서일본 지역의 최강 세력으로 만들었고 미요시 나가요시오다 노부나가 이전에 교토 상락에 성공한 몇 안되는 인물이었기에 천하인으로 불리었을 정도로 뛰어난 다이묘다.[3] 모리 모토나리는 그의 가신에 불과했고 아마고 츠네히사 역시 요시오키가 살아있었을 때는 주고쿠 지역의 패자로 자리잡지 못했다.

여러모로 센고쿠 시대 전반기를 주름잡았던 인물.

4. 그 외

조선과 명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으나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조선에서 무역을 통제하기 시작하며 이익이 줄어들게 된다. 이에 요시오키는 자신이 백제 왕의 후손임을 내세워 특혜를 받으려 했으나 실패한다. 여기에 삼포왜란 크리가 터지면서 사실상 조선과의 무역은 단절된다. 명나라와의 무역도 이를 놓고 다투었던 호소카와 가가 닝보의 난을 일으키는 바람에 단절되고 만다.
파일:大内義興1.jpg 파일:大内義興.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등장 시기가 센고쿠 시대 기준으론 너무 앞 시대라서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출현은 뜸하다. 그나마 1534년 이전의 시나리오가 있는 창천록 PK와 천도 (콘솔판 PK 한정)에서만 등장. 창천록에서는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아마고 츠네히사에 비해 지략이 약간 낮은 대신 통솔과 정치가 더 높은데, 그나마 그 지력도 심하게 딸리는 게 아니라 버금가는 편이라 지력과 정치빨로 눌러서 츠네히사가 쪽도 못 쓴다(창천록의 시스템 상, 정략 부분은 지력과 정치 능력치가 함께 적용되기 때문). 천도에선 능력치 총합 20위로 아마고 츠네히사와 순위가 같다.

1997년 방영된 NHK 대하드라마 모리 모토나리에서 호소카와 토시유키가 오우치 요시오키 역을 맡았는데 천하인이 되려는 야심을 가진 인물이자 아마고 츠네히사의 라이벌로 표현되며 아마고를 견제하기 위해 모리 모토나리를 오우치 휘하에 두려는 행보를 보이며 아들 오우치 요시타카가 문약한 점에 대해 근심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명군이 되어보세! 1부에서 등장.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내세워 조선의 협력을 얻어내고 쇼니 가문 토벌전에도 참전해 공을 세우지만 조선의 영향력이 열도에 확장되는 것을 우려해 조선이 설치한 화약고를 폭파시키는 등의 사보타주를 벌이는 모습을 보인다.

짐승조선에서는 후계자 신분으로 처음 등장했으며 의도친 않았지만 우에스기 가문에 에뮤를 팔 것을 제안하면서 장차 벌어질 일본판 에뮤 전쟁의 단초를 제공했다... 그래도 오우치 영치 내부의 에뮤들은 조선이 준 매뉴얼대로 철저히 관리해 문제가 없었다는게 다행. 다만 영지민들이 고기를 얻기 위해 밀수해 온 거묘들이 급격히 불어나면서 토끼 전쟁을 치러야 했다. 다행히 조선에서 거묘의 천적이면서 인간에게 직접적인 해는 끼치지 않는 스라소니와 족제비를 지원하며 위기를 넘기고 간토 평야에서 세를 벌릴 에뮤 군단에 대비하기 위한 장성을 쌓기 위해 자금과 장비를 빌리는 조건으로 이와미 은광의 경영권을 넘긴다.
[1] 오닌의 난 때 서군의 중심축을 담당하던 다이묘였다.[2] 아마고를 견제하기 위해 모리 모토나리와 동맹을 맺고 영지를 주는 등 모리 모토나리의 성장을 도와주었다.[3] 민간 기준으로 학계에서는 천하인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