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자키 전투 일본어: 山崎の戦い | ||
날짜 | ||
1582년 7월 2일 | ||
장소 | ||
야마자키 山崎(셋쓰국(摂津国)과 야마시로국(山城国)의 경계) (현재의 오사카부 미시마 군 시마모토 정, 교토 부 오토쿠니 군 야마자키 정) | ||
이유 | ||
혼노지의 변 이후, 하시바와 아케치의 대립 | ||
교전세력 | 하시바군 | 아케치군 |
지휘관 | 하시바 히데요시 하시바 히데나가 구로다 요시타카 오다 노부타카 이케다 츠네오키 니와 나가히데 다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키요히데 | 아케치 미츠히데† 사이토 토시미츠† 이세 사다오키† 마쓰다 마사치카† 나비카 야스이에 아쓰지 사다유키† 아쓰지 사다히로† 미조 시게모토 오카와 사게타다 스와 모리나오 미마키 카네아키 |
병력 | 20,000 ~ 40,000명 | 10,000 ~ 16,000명 |
사상자 및 손실 | 3,300명 | 3,000명 |
결과 | ||
하시바군의 승리 | ||
영향 | ||
아케치 미츠히데의 사망 하시바 히데요시의 패권 도전 현실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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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혼노지의 변 이후, 오다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급보를 들은 하시바 히데요시가 주고쿠 대반전으로 회군하여, 셋쓰국과 야마시로국 경계에 있던 야마자키에서 오다를 죽인 아케치 미츠히데군과 격돌한 전투.2. 전투가 벌어지기까지
1582년 음력 6월 2일(양력 6월 21일),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을 때 오다 군 중진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시바타 가츠이에: 엣추국(越中国) 우오즈성(魚津城)에서 우에스기군과 교전 중(우오즈성 전투)
- 니와 나가히데: 오사카에서 오다 노부타카를 보좌하며 시코쿠 정벌 대기중
- 타키가와 카즈마스: 고즈케국(上野国) 마에바시성(前橋城)에서 호조 세력(후호조씨)을 견제
- 하시바 히데요시: 빗추(備中国) 다카마쓰성(高松城)에서 모리군과 교전 중
-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사카에서 시코쿠 정벌 대기군을 시찰하다가 본거지로 귀환 중
하시바 히데요시는 주코쿠의 모리 군을 공격하여 차례로 성을 함락시키며 전황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나 빗추 다카마쓰 성에서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음력 6월 3일(양력 6월 22일), 히데요시는 혼노지의 변의 정보를 입수하게 되어 다카마쓰성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조건으로 모리 군과 정전 협전을 맺는다.[1][2] 4일, 히데요시는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확인하자마자 회군을 준비하여 6일에 누마성(沼城), 7일에 히메지성[3], 11일에는 아마가사키에 도달한다. 약 열흘간 오카야마에서 야마자키까지 대략 230km를 행군하여 이것을 "주고쿠 대반전(中国大返し)"라 부르기도 한다.[4]
히데요시는 교토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는 오사카 방면의 민심을 걱정하였으나, 아케치 미츠히데는 오사카에 대한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수월하게 오사카까지 진군할 수 있었다. 노부나가 사망 이후 탈영병이 속출하여 행동을 취할 수 없었던 오다 노부타카[5]와 니와 나가히데군과 합류하여, 12일, 회의를 통하여 명목상 총사령관으로 오다 노부타카를 추대하고 자신이 실질적인 총사령관이 되어 야마자키 전투에 임한다.
한편, 아케치 미츠히데는 다케다 모토아키(武田元明)와 교고쿠 다카쓰구(京極高次)를 오미국(近江国)에 파견하여 교토 동쪽 근방의 방비를 서둘렀다. 미츠히데는 오다 가문에서 가장 큰 세력을 차지하던 시바타 가쓰이에를 두려워하여 이에 대비하려고 하였다. 또한 평소 친했던 호소카와 후지타카[6]와 쓰쓰이 준케이에게 재차 서신을 보냈으나 둘 다 끝까지 눈치만 보다가 오지 않았다. 교토의 민심을 사기 위해 돈을 뿌리고 "노부나가는 은의 주왕과 같은 자이므로 쳤다"라고 프로파간다 공작을 하는 등의 행위를 했지만 민심은 대세를 파악하고 교토의 삼척동자조차도 미츠히데를 두고 "흥, 곧 질 놈이 주의 무왕이라니..." 하고 비웃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미츠히데는 병력을 야마자키의 서쪽에 포진시켰는데, 그 의도는 무력시위를 통해 쓰쓰이 준케이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는 설이 있다. 10일, 미츠히데는 히데요시의 진군 소식을 듣고 서둘러 요도성(淀城) · 쇼류지성(勝竜寺城) 개축에 착수하고 오토코야마(男山)에 포진해 있던 병력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미츠히데는 예상치 못한 속도로 진군한 히데요시군에 충분한 대응을 하지 못한 채 2~3배 되는 병력 차이로 결전에 임하게 된다.
3. 전투 경과
양군은 음력 6월 12일경(양력 환산 7월 1일)부터 엔묘지 강(円明寺川, 현 고이즈미 강)을 사이에두고 대진한다. 하시바 군은 전날 야마자키 마을을 점거하고 최전선에 진을 개진하여 이케다 츠네오키를 우익에 구로다 요시타카, 도요토미 히데나가(당시 하시바 히데나가), 가미코다 마사하루(神子田正治) 분대를 텐노산(天王山) 자락의 서국 가도를 따라 포진하고 히데요시 본진은 또한 후방에 배치되었다.
이에 대해 아케치 군은 미츠히데의 본진이 전면에, 사이토 토시미츠, 아츠지 사다유키(阿閉貞征) 등이 동서에 걸쳐 방어선을 치는 것처럼 포진하고 요격 태세를 취했다. 당시 야마자키에는 습지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대군이 통과 할 수있는 것은 텐노산과 늪 사이의 좁은 공간에 한정되어, 아케치 군이 그 출구에 마치 뚜껑을 덮은 형태가 되었다.
국지적인 전투가 간헐적으로 벌어지면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다음 날 13일까지 대치는 계속된다. 이날 오후 4시 무렵, 하시바 군의 일부가 텐노산의 산자락을 가로 질러 높은 고도를 선점하려고 진군하였다가 그 오른쪽에 대진하여 있던 이세 사다오키(伊勢貞興)가 이를 공격, 이에 호응하여 전쟁이 개시되었다. 이세 부대에게 맹공을 받은 하시바 군의 분대는 궁지에 몰려있었지만, 히데요시 본진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분투하였다.
텐노산 기슭에 포진해 있던 구로다 요시타카 · 도요토미 히데나가 · 가미코다 마사하루의 부대는 미츠히데 군에 진격하여 이세 사다오키 군을 압박하였다. 이에 미츠히데 군의 나머지 부대도 이를 저지하고자 진격, 일진일퇴의 공방이 이어졌다.
전황에 결정적으로 변화가 온 계기는 한 시간 후, 북상한 이케다 모토스케(池田元助)와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가 은밀히 엔묘지 강을 건너, 미츠히데 군의 좌익을 기습. 하시바 군이 미츠히데 본대의 측면을 찌르는듯한 형태가 되어, 일대 혼란이 발생했다. 이에 미츠히데 군은 좌익부터 순차적으로 붕괴, 또한 텐노산의 하시바 부대를 공격하던 우익의 이세 사다오키 부대 또한 크게 동요되어 패주하고 후방에 대기하던 아케치 군 본대(예비대)도 이에 휩쓸리며 전투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완패로 끝나게 된다. 미츠히데 군 이탈자들은 삼면에서 포위 공격을 받아, 크게 사망자 수가 늘었다.
전투에서 패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미츠히데는 4~5천으로 추정되는 병력(태합기太閤記에 따르면 5천)을 전투에 투입하지 않고 있었는데, 행군순서대로 전투에 가입, 결과적으로 축차투입에 가까운 형태로 전투를 전개한 하시바 군에 비해 전투 개시 이전에 포진을 완료한 상태로 전투에 돌입한 아케치 군이 예비대를 투입하지 않고 패전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어떤 설에서는 전투 개시 시간이 늦고(구력 6월, 현재 달력으로 7월 초이지만 당시 비가 왔다는 기록도 있다) 초기에는 조우전 내지 국지전으로 전투가 시작되어 13일의 전투는 국지전으로 끝날 것으로 보고 투입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하기도 한다.
다른 설에서는 히데요시 이외에 다른 적들이 많은 아케치 미츠히데가 전력을 아끼려다 투입 시기를 놓쳤다는 설도 있다. 미츠히데가 다른 다이묘의 행동을 어느 정도까지 파악하고 있었는 지는 의문이지만, 6월 13일 기준으로 시바타 가쓰이에는 6월 6일 우에스기 카게카츠와의 전투를 중단, 본거지 기타노쇼로 귀환하여 출동 준비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6월 8일 미카와에 도착, 6월 12일 출진 명령(나중에 14일로 연기)을 내린 상태이며,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츠는 이미 아즈치 성 부근까지 출진하였다가 병력을 더 모으기 위해 본거지로 귀환한 상황이었다.
이미 호소카와 유사이, 쓰쓰이 준케이의 합류 거부로 인해 우군을 늘리지 못한 아케치 미츠히데로서는 하시바 히데요시를 단순히 저지해서는 승산이 없고, 히데요시를 완파하고 다른 적을 다시 격파하는 내선작전, 각개격파를 이루지 못하면 승산이 없었다. 이에 따라 미츠히데는 최후까지 히데요시 군을 섬멸하기 위한 기회를 노리고자 예비대를 온존했고, 결국 그 기회는 오지 않고 예비대를 투입하지 못한 채 패배했다는 설이다.
4. 전후 경과
다음 날 하시바 군은 쇼류지성(勝竜寺城)에 입성하여 태세를 갖추고, 오미국 교통로 차단과 미츠히데 수색에 집중한다. 14일에는 아케치 미츠히데를 돕기위해 달려온 아케치 히데미츠(사마노스케) 군을 격파하였다. 히데미츠는 성의 재보와 부하들을 내보내고 자결하였다. 교토에 입성한 하시바 히데요시는 16일에 미츠히데 잔존 세력을 공격, 항복과 도주가 이어지면서 오미국을 평정하게 된다.미츠히데는 후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성을 버리고 도망쳤으나 병사들은 미츠히데를 따르지 않고 성에 남아서 투항했다. 도망치던 미츠히데는 낙오병 사냥에 나선 농민의 죽창에 찔려 죽었으며 그 목은 히데요시에게 보내져 죽음이 확인되었다.
전국시대의 농민은 그냥 평범하게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아니라 마을(村, 무라) 단위로 최하급 보병인 아시가루로 참전했던 자들이기 때문에 전투에서 패한 상대편 무사들의 무구나 소지품을 빼앗아 나중에 쓰려고 챙기거나 팔아서 부수입을 얻기 위해 낙오병사들을 적극적으로 사냥했고, 다이묘들도 적 지휘관급 인사를 생포하거나 죽였을 경우 마을단위로 세금을 몇 년간 면제해주어 낙오병사 사냥을 권장했다.
따라서 전국시대 때 전투에서 패퇴한 쪽은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의 속담인 '낙오무사는 억새꽃에도 겁을 먹는다'(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말이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전투에서 질 경우, 가장 큰 목표가 목숨을 부지해서 영지로 돌아가는데 있다고 할 정도.
한편 야마자키 전투를 승리하고 기선을 제압한 히데요시는 1582년 음력 6월 27일 키요스성에서 키요스 회의를 개최, 오다 가문의 후계자 문제 및 영지 재분배를 논의하여 전국 지배권 확립을 위한 움직임을 시작한다.
5. 여담
- 통일된 일본 천하의 지배자가 결정된 싸움이기에 일본에선 관용어가 되었는데, 주로 무언가 굉장히 중요한 것을 가름짓는,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한판승부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대표적으로 일본프로야구에서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시합을 일컫는 말로 자주 쓰였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의 도입으로 리그우승의 가치가 조금 줄어들어서 야구에서는 사용빈도가 줄어들었다. 또한 2차대전 때도 필리핀 탈환전에서 일본은 필리핀 전투가 '일본의 텐노잔' 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1945년 3월 필리핀 마닐라를 잃게 되자 이번엔 오키나와 전투가 '일본의 텐노잔'이라고 하였다. 용법은 "여기가 텐노잔이다!" 라고 '이것' 이 아닌 '여기' 로 장소를 일컫는 지시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이 포인트. 21세기 현재는 역사에서 온 관용표현이라는 점과 2차대전에서 쓰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정말 오래된 관용구이기 때문에 사용빈도는 많이 줄었다. 주로 옛스러운 분위기를 일부러 낼 때 쓰는 표현.
- 미츠히데 군이 전쟁에 패한 가장 큰 이유는, 병력의 차이였다. 아케치 미츠히데는 기반을 정비할 시간이 매우 급박했다. 민심은 미츠히데를 배신자라고 낙인찍고 있었고, 평소 미츠히데와 친분 있던 다이묘들은 재빨리 통수를 쳐버렸다. 또한, 시바타 가쓰이에에 대항하고자 군을 교토 동쪽으로 빼낸 것도 패전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미츠히데는 오다가의 주요 부장 중 가장 빨리 전선을 정리하고 자신을 치러 올 수 있는 것이 가쓰이에라고 생각했었으나 오히려 하시바 히데요시가 더 빨리 돌아왔기 때문에 이렇게 어정쩡한 부대 배치를 했다는 설이 있다.
- 하시바 히데요시의 군대는 주고쿠 정벌을 통하여 오다 가문에서 정예화된 군사력이었으며, 민심은 히데요시에게 굉장히 유리했다. 또한, 놀라운 속도로 회군한 "주고쿠 대반전"은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신경쓰던 아케치 미츠히데를 완전히 엿먹일 수 있었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정복자의 역사적 전투 미션 중 교토 전투는 바로 이 야마자키 전투를 모티브로 하였다. 하지만 실제 야마자키 전투와는 전투 양상이 매우 다르다.
- 혼노지의 변에서부터 하시바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기까지의 기간은 극적 요소가 크기에 일본 사극에서 자주 다루는 소재인데 정작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주동자 아케치 미츠히데가 몰락하는 결과를 이뤄낸 중요한 전투인 야마자키 전투는 사극마다 해설로 넘어가거나 양측이 대치하는 장면만 보여주고 전투씬 하나 없이 바로 미츠히데의 최후 장면만 보여주는 식으로 간단히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거의 혼노지의 변이 후일담이라는 식. 차라리 기요스 회의 이후 시바타 가츠이에와의 시즈가타케 전투가 조금 더 많이 조명된다.[7]
[1] 너무 빠르게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유력한 것은 아케치 미츠히데가 모리 군에 밀서를 보내서 히데요시를 협공하려고 했다가 하루 만에 밀서가 히데요시에게 발각되었다는 설로 태합기(太閤記)에 실려있다.[2] 너무 빠른 정전 협정에 음모론이 존재할 정도다. 자세한 사항은 혼노지의 변 참조.[3] 누마성에서 히메지성까지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30시간 만에 70km를 주파했다고 전해진다.[4] 히데요시가 회군할 때에 농민들이 길목에 나와 "드디어 우리와 같은 출신인 히데요시의 천하가 열린다!"며, 주먹밥을 하시바 군에게 건넸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에도시대 군담기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 사실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히데요시가 미리 사자를 길목의 마을들에 보내 돈을 주고 주먹밥을 준비해달라고 계약했을 가능성이 높다.[5] 노부나가의 삼남[6] 아들인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아케치의 딸인 가라샤와 결혼해 사돈지간이기도 했다.[7] 심지어 미츠히데가 주인공인 "기린이 온다"에서도 연출이 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