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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30 21:36:50

남해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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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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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 : 멸실   ‡ : 멸실 위기   ¶ : 왜성으로 구전 / 개축 기록 불확실   § : 일본 측 자료에만 수록 / 상세 확인 불가}}}
<colbgcolor=#01454F><colcolor=#fff> 남해왜성
[ruby(南海, ruby=ナメ)][ruby(倭城, ruby=わじょう)] | Namhae Japanese Fortress
파일:69881wkgeqqchfh.jpg
이칭 선소리왜성(船所里倭城)
남해대왜채(南海大倭寨)
남해적소(南海賊巢)
천남대(天南臺)
형태 제곽식 산성[주곽부]
연곽식 산성[외곽부]
면적 불명
건설 1597년 (선조 30년)
소 요시토시
폐성 1598년 (선조 31년)
주소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159
1. 개요2. 위치 및 구조
2.1. 장량상동정마애비
3. 현황4. 교통5. 여담6. 외부 링크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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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조선왕조실록 보기 · 닫기 ]
> 상이 김식(金軾)의 서계를 대신들에게 내보이면서 이르기를, "주사(舟師)가 전군이 대패하였으니 이제는 어찌 할 도리가 없다. 대신이 도독과 안찰(按察)의 아문에 가서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 하고, (...) 성룡이 아뢰기를, "한산을 잃는다면 남해는 요충지대인데 지금 이곳도 필시 적의 점거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도 남해를 근심하고 있는가?" 하자, 성룡이 아뢰기를, "어찌 남해만 근심이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어찌 사람의 지혜만 잘못이겠는가. 천명이니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신들이 분포(分布)하여 거행하는 이외에 먼저 해신(該臣)과 경리(經理) · 무신(撫臣)이 함께 남해에 주둔하고 있는 왜추(倭酋)에 대해 소재에서 성루를 수리하고 산채를 축조하는 한편 유격병(遊擊兵)을 날마다 진격시켜 핍박함으로써 그들의 소굴을 분탕질하여 인심을 수습하게 해야 합니다.
조선왕조실록1598년 2월 19일
그리고 왜선(倭船)을 보건대 체제(體制)가 매우 협소하여 겨우 10여 명이 탈 정도였습니다. 울산의 포위를 푼 뒤로는 남해 지방의 왜적들은 성을 쌓아 굳게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전선(戰船)만을 수리하고 거둬들인 군량을 모두 배에 싣고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1598년 2월 23일
적의 잔여 수효에 대해서는, 이 왜적은 왕래가 일정하지 않아 아침 저녁으로 형세가 다릅니다. 각처의 변신(邊臣)들이 보내는 치보(馳報)는 도망쳐서 돌아 온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서 얻은 것이 많아서 앞뒤가 같지 않으므로 정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우선 각처의 초보(哨報)에 의거하면, (...) 곤양군에 약 3백여 명이 있고 남해현에 약 1천여 명이 있으니평의지(平義智) · 평조신(平調信)[1] 등이 거느리는 것이고, (...) 그러나 곳곳에 성을 쌓고 양식을 축적하면서 형편을 연락하여 도무지 본토로 돌아갈 뜻이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1598년 9월 28일
금월 19일 사천 · 남해 · 고성에 있던 왜적의 배 3백여 척이 합세하여 노량도(露梁島)에 도착하자,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나아가 맞이해 싸우고 중국 군사도 합세하여 진격하니,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왜선(倭船) 2백여 척이 부서져 죽고 부상당한 자가 수천여 명입니다. (...)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흥양현감(興陽縣監) 고득장(高得蔣) 등 10여 명이 탄환을 맞아 죽었습니다. 남은 적선(賊船) 1백여 척은 남해로 도망쳤고 소굴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왜선(倭船)이 대패하는 것을 보고는 소굴을 버리고 왜교(倭橋)로 도망쳤으며, 남해의 강언덕에 옮겨 쌓아놓았던 식량도 모두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소서행장(小西行長)도 왜선이 대패하는 것을 바라보고 먼 바다로 도망쳐 갔습니다.
조선왕조실록1598년 11월 27일
적추 소서행장이, 주사가 노량 앞바다에서 격전할 때를 틈타 종적을 감추고 도망치기에 깃발을 돌려 추격하였으나 이미 대양으로 멀리 떠나 잡지 못하였으니 매우 한스럽습니다. 병사를 정돈하고 남해로 진격하여 21일 4경에 적의 소굴에 이르니 적의 배는 텅 비어있고 성 위에만 불빛이 있었는데, 잠시 후에 곧 꺼졌습니다. 새벽녘에 적의 소굴에 올라가 보니 적들이 밤사이에 뒷산으로 도망쳤는데 말똥이 아직 따스한 것으로 보아 조금 전에 떠났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쌀·기장·콩·조 등의 곡식을 물가에 운반해 놓고 싣고 가지 못한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대략 몇 만 석쯤 되었고, 크고 작은 총포 및 화약 등의 무기와 일용품까지도 없는 것이 없었으며, 소와 말 등 가축들도 많았습니다. 우선 잠시 안정을 되찾은 뒤에 군사를 풀어 산속에 들여보내 한 명의 적도 남김없이 잡아 전공을 크게 빛내야 하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1598년 12월 2일

임진왜란 때 잠시 화친 기류가 흘러 차츰 철수하던 일본군은, 1597년 협상이 결렬되자 다시 조선에 진출에 주둔하면서 새로이 전선을 구축했다. 이것이 정유재란으로,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대패하여 견내량이 뚫려버리자 최전선을 대폭 전진시켜 남해안의 제해권을 가져가기 직전에 이른다. 이때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경상우도 남해도에 축성한 제곽식 산성으로, 일본 수군의 거점으로 기능했다. 비교적 후방의 요새였고, 사천왜성순천왜성을 지원, 연계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편은 아니지만 노량해전 이후 일본군이 철수하자 조명연합군이 남해도에 진입해 벌인 남해왜성 소탕전으로 알려져 있다.

2. 위치 및 구조

파일:그림5324.png
남해왜성 위치관계도
파일:img13243567879.jpg
『정왜기공도병』에 묘사된 남해왜성
파일:스크린샷 2025-01-26 091227.png
『조선일본도설』 「제로왜추수채전도(諸路倭酋水寨全圖)」에 묘사된 남해왜성
파일:KYKH006_0000_0003(4).jpg
『1872년 지방지도』 「남해지도」에 묘사된 남해왜성
파일:스크린샷 2025-01-26 083542.png
남해왜성 항공사진 (1948)
파일:스크린샷 2025-01-26 083848.png
남해왜성 항공사진 (1989)
파일:스크린샷 2025-01-26 084129.png
남해왜성 위성사진 (2023)
파일:image_5894615441541383385567.jpg
남해왜성 실측도 #
남해도의 동안(東岸), 남해현 치소의 외항으로 기능했던 선소리 포구에 위치한다. 입지의 특성상 당시 조명연합군이 주둔하고 있던 고금도 및 여수 방면에서는 조망할 수 없었으며 반대편으로 돌아와도 창선도 사이에 있는 지족해협이나 북측의 노량을 지나야지만 도달할 수 있어 접근이 어려웠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사천만을 끼고 사천왜성과 연계, 노량을 지나 순천왜성을 지원할 수 있어 일본 수군이 주로 주둔했다고 전한다.

선소항을 감싸는 남북의 구릉지에 유적이 남아있고 그 사이의 선소리 마을에도 일본군의 막사가 들어섰을 것으로 추정한다. 주곽부는 북측의 해발고도 40m의 구릉 상부를 삭평해 만들었는데, 여러 곳에 굴곡이 져 있는 다각형의 제1곽을 넓게 조성하고 그 서측의 돌출부에 2단으로 된 천수 기단을 만들었다. 제1곽의 서북측에는 작은 부곽이, 동북측에는 출입구가 딸려 있으며 북측 경사면에 여러 줄의 이랑형 해자(畝状竪堀)를 팠다. 출입구를 나와 제1곽의 동측의 작은 부곽을 지나면 남측에 마스가타 고구치(桝形虎口)인 주출입구가 나오고, 그 바깥으로 현재 농경지로 사용하고 있는 여러 단의 계단형 부곽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높은 석축(高石垣)을 쌓아올린 중심부와는 달리 낮직한 석축과 토축이 주를 이룬다. 주곽부의 서남부를 향해 뻗은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와 수직 토루(竪土塁)가 1곳씩 남아있다.

맞은편인 남측의 해발고도 약 20m의 구릉에는 외곽부가 위치했다. 구릉 한가운데와 동측에 중심부의 석축이 일부 잔존했고 서측 끝에 몇 개의 부곽이 눈에 띄게 남아있었다. 후술하겠지만 이 부분은 현재 멸실되어 찾아볼 수 없는 상태다. 이외에도 두 구릉을 사이를 이어 틀어막은 외곽선 석축이 일부 남아있었지만 이마저도 2019년 주택을 신축하면서 멸실되었다. 주곽부의 서북측 바깥으로 떨어진 곳에 솟아오른 조그마한 지형이 있는데, 이곳을 외곽선 토루의 일부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2.1. 장량상동정마애비

파일:정부상징.svg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제27호
<colbgcolor=#315288> 남해 장량상 동정마애비
南海張良相東征磨崖碑 | Jeonggongdan Alter
파일:search.pstatic123456789021345.jpg
소재지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169-9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 1기
지정연도 1972년 2월 12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소유자 이준호 외
링크 공식 홈페이지

파일:search.pstatic76564321.jpg
마애비 탁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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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641382.jpg
마애비 현황
[ 비문 내용 보기 · 닫기 ]
> 萬曆二十六年季秋國家復有事于東夷維時朝鮮受倭患至是之七年矣我
師救之後未報捷天子赫然震怒乃命中丞萬公往視師經理與總督大司馬
刑公都督陣公以下文武將臣十餘人兵會於朝鮮先後濟鴨綠江數道竝進
惟公將志鷹揚英風虎視曁于群公罔不協乃心力竭厥忠慕將輘樂浪喩鷄
林耀師於釜山封鯨觬而返太使氏區大相相以爲從古帝王出師將咸有言
以壯軍容宣國威伸同仇之誼軫於役之勞矧夫以天王之師征誅夷狄芟除
暴亂算出萬全巳在必克順治威嚴于慈爲盛宜昭示遠服永詔來 於是作
詩二章雖之孔 碩之雅庶揚有威之爾
其詞曰
皇赫怒兮完夷亂
壯士奮兮不遑寔
橫長戟兮箙勁箭
組甲耀兮星辰煥
蹴溟渤兮波濤晏
倚長劍兮扶桑岸
四極展兮鰲足斷
皇靈震兮窮海外
征不庭兮靜殊類
甲旅悅兮從公邁
封鯨觬兮戢鱗介
加目出兮極地界
標窮碣兮際荒裔
異域來兮嘉王會
만력 26년(1598) 가을에 국가에는 다시 동이의 사변(事變)이 있었는데 이때 조선은 왜구의 환란을 당한 지 7년이 되었다. 명군이 군사를 이끌어 구원한 뒤 승첩보를 올리지 않아 천자께서 크게 진노하시므로, 이에 중승 만공(中丞萬公)에게 가서 군사를 살펴보도록 명하시고, 경리(經理) 겸 총독(總督) 대사마(大司馬) 형공(刑公), 도독(都督) 진공(陣公) 이하 문무(文武) 장신(將臣) 10여 명이 병사들을 이끌고 앞을 다투어 압록강을 넘어 몇 갈래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생각하건데, 공들의 장대한 지략은 매가 날아오르는 듯하고 아름다운 풍속은 범이 노려보는 듯하니, 여러 공들과 함께 그물처럼 도왔다. 이에 심력을 기울이고 그 충성을 다해 낙랑[2]을 거쳐 계림[3]을 지나 부산(釜山)에서 빛나는 군사력을 떨쳐 암수 고래와 같이 날뛰는 왜적을 봉쇄하여 격퇴했다. 태사씨(太史氏) 구대상(區大相)[4]은, 예로부터 제왕이 군사를 내면 모두 씩씩한 군대의 위용으로써 국위를 떨치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그 역의 수고로움을 마음 아파한다고 했는데, 하물며 천왕의 군대를 이끌고 이적을 정벌하고 폭동을 제거하여 모든 일은 반드시 싸워 이겨 순리로 다스리는 위엄이 이처럼 성하여, 멀리서 복종하고 영원토록 입조하여 옴을 마땅히 밝혀 보였다. 이에 시 2편을 지으니, 비록 공자의 말씀과 같이 단아한 맛은 없어도 위엄을 선양하기에는 충분하다. 그 사(詞)에 말하였다.

천자께서 노하시어 오랑캐의 난을 평정하였도다.
장사들이 분발하여 쉴 겨를조차 없었도다.
긴창 휘두르며 센 화살을 쏘았도다.
갑옷이 찬란하고 별과 달도 빛나도다.
큰 바다를 박차니 파도도 숨을 죽이고
장검을 휘두르니 천하가 모두 선경이로다.
천제의 신하들이 사냥을 나가니 모든 금수들이 굴복하도다.

황령이 떨치심이요, 천하가 굽어들도다.
불의를 치니 모든 악의 무리가 조용해지도다.
갑옷을 떨쳐입고 나서니 모든 무리가 굴복하여 따르도다.
큰 고래를 봉쇄하니 작은 고기들이 맥을 추기지 못하더라.
눈을 크게 뜨니 온 천하에 영향이 미치도다.
이 위대한 공적을 큰 비에 새겨 기리 후세에 남겨 두리니.
먼 나라에 이르시는 고마운 어른으로 받들어 모시리라.
선소마을 선착장의 오른쪽 해변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중국 명나라 장수인 장량상이 동쪽을 정벌하고 바위에 글을 새겼다 하여 ‘장량상동정마애비’라 이름붙인 것이다.

비의 형태는 커다란 자연석의 윗면을 직사각형으로 평평하게 갈아 글을 새겼다. 직사각형의 테 주변에는 덩굴무늬를 아름답고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비문은 이여송과 진린이 원군으로 조선의 남해에 와서 왜군을 무찔렀다는 내용으로, 명나라 군인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전승기념비적 성격을 띠고 있다. 역사적 자료에는 선소마을에서 명의 수군과 왜군이 싸웠다는 기록이 없어 비문의 내용이 의심스럽지만, 노량해전 직후나 그 이듬해인 선조 32년(1599)에 이 글을 새겨 놓은 것으로 추측된다.

남해지방과 관계있는 비는 아니지만, 역사에서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명나라 장수의 마애비라는 점에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명나라 이여송과 진린이 왜군을 무찔렀다는 전승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어 일제 시대 당시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파괴대상 왜구격파 기념비’목록에 이 비가 포함되었었다 한다.
남해왜성의 동측 절벽에 있는 큰 바위에 새겨 놓은 비문이다. '장량상 동정'이라고 함은 중국 명나라 장수인 장량상이 동쪽을 정벌했다는 뜻이며, '동정시비(東征詩碑)'라고도 하는데 이는 비문 중에 '東征詩'라는 글자가 제일 첫 줄에 나오기 때문이다. 비의 형태는 커다란 자연석의 윗면을 깊이 5㎝, 가로 1.31m, 세로 2.53m의 장방형으로 평평하게 갈아 글을 새겼는데, 직사각형의 테 주변에는 당초문을 정교하게 조각했다. 비문은 이여송진린이 원군으로 조선의 남해에 와서 왜군을 무찔렀다는 내용으로, 명나라 군인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전승기념비의 성격을 띠고 있다. 정작 사료에는 선소리에서 명 수군과 일본 수군 사이에 접전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어 비문의 내용이 의심스럽지만, 남해왜성 소탕전 이후, 혹은 그 이듬해인 1599년에 이 글을 새겨 놓은 것으로 추측된다.

3. 현황

파일:15850048812_41e7884d1c_o(1).jpg
낮게 남아있는 남해왜성의 석축
파일:15848685351_6db0cb6cb6_o.jpg
파일:15824847396_68c7374ecd_o.jpg
파일:15850644875_ea6041ac1a_o.jpg
파일:15663320350_130b85fe15_o.jpg
농경지의 일부로 쓰고 있는 남측 부곽의 석축
파일:15228407014_fc954c83d4_o.jpg
파일:15663324140_e01fa4ec63_o.jpg
천수 기단의 모습
파일:15664616639_59ddfbc502_o.jpg
제1곽 남측 출입구의 모서리

4. 교통

남해도라는 지리적인 특성상 대중교통으로 접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선소마을 쪽으로는 버스가 다니지 않아서, 남해왜성을 방문하고 싶다면 자차를 필수로 가져가야 한다. 선소마을 입구에서 좌측으로 보이는 작은 구릉지로 올라가다 보면 농경지 사이로 왜성의 석축이 보인다.

5. 여담

파일:스크린샷 2025-01-28 105154.png
국립진주박물관에서 2017년 실측 조사 당시 촬영한 외곽부(구릉 서측)의 석축 유구
파일:50236_55260_116.jpg
캠핑장 공사 직후의 상태
파일:50236_55261_125.jpg
멸실된 유구의 분포도

6. 외부 링크

7. 관련 문서


[1]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2] 평양을 일컫는다.[3] 경주를 일컫는다.[4] 명나라의 문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