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BE0529><colcolor=#fff> 동래왜성 [ruby(東, ruby=トン)][ruby(莱, ruby=ネ)][ruby(倭城, ruby=わじょう)] | Dongnae Japanese Fortress | |
형태 | 왜성 |
면적 | 불명 |
건설 | 1593년 (선조 26년) |
킷카와 히로이에 | |
폐성 | 불명 |
주소 | 부산광역시 동래구 |
1. 개요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 지역 거점으로 지어진 일본식 성.2. 역사
1592년 음력 4월 14일 동래성 전투에서 동래부사 송상현이 전사하고 성이 함락되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은 작원관을 통해 경상도를 파죽지세로 침공해 나간다. 모리 데루모토 휘하 3만여 명의 제7군은 경상도에 주둔하게 되는데, 모리(毛利) 가문의 가신이었던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가 1593년 동래성을 허물고 그 인근에 왜성을 쌓는다.이후 동래왜성이 위치했던 망월산(望月山) 일대는 증산(甑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일본식 성의 모습이 위로 켜켜이 쌓인 떡시루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한반도에 남아 있는 다른 왜성 소재지의 지명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1]
3. 현황
동래왜성의 경우 석축(石垣, いしがき)이 잘 보존되어 그 형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유명한 왜성들과는 달리 석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명확한 위치 및 구조를 알기 힘들어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나마 해자가 명확히 남아 있기는 하지만 다른 곳의 보존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아 조사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1979년 첫 정비사업 당시에 혼마루였던 동장대 부근에서 조선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이 위 사진의 임진왜란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세운 무기시마 성(麦島城) 소천수각에서 출토된 기와와 동일한 거푸집으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일 양국에서 발견된 해당 기와들에는 융경2년중추조(隆慶二年仲秋造), 만력12년(萬暦十二年) 등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제조 시기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쓰시마 시의 가네이시 성(金石城)에서도 동래부 지방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기와가 출토된 바 있어 임진왜란 당시에 한반도에서 기와를 반출하여 건축에 사용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4. 위치 및 구조
동래왜성의 위치. |
부산의 중심부 평야에 자리한 동래왜성은 북으로 기장왜성, 남으로 부산포왜성, 서로 구포왜성과 서로 연결되었으며 부산 지역의 주요 거점으로서 기능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조선인[2]들이 이 동래왜성을 거쳐 부산포왜성으로 송환되었고, 그곳으로부터 노예로 팔려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고화질 : https://blog.naver.com/yk020428/222418773977 |
정확한 위치는 다음과 같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산2-30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380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962
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 11-4 외(추정)
왜성의 중심부인 혼마루(本丸)는 현재 동래읍성 동장대가 위치한 망월산 꼭대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군관청(軍官廳)이 위치한 곳이 니노마루(二之丸)로 추정되며, 그 사이에 자잘한 곡륜군(曲輪群)[3]이 남아 있다.
이 구역은 현재 충렬사 관할로, 입산통제기간이 있어 확인해본 뒤 답사해야 한다. 우천 시 사고의 우려가 있어 출입이 통제되며, 동절기(11월 1일 ~ 5월 31일)에는 화재의 우려가 있어 출입이 통제되니 참고.
혼마루의 동북측 산자락에는 이랑형 해자(竪堀, たてぼり) 2개가 나란히 위치한다. 이곳은 충렬사 권역 내부가 아니라 철조망 바깥에 있으므로, 동래화목타운아파트에서 인생문으로 통하는 망월산 등산로를 이용해야 갈 수 있다. 바로 동쪽에 붙어 있는 동래화목타운아파트의 서측 콘크리트 옹벽에 의해 끊겨 있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여름에 가면 온갖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해자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산정의 성곽 말고도 망월산 산록(山麓) 역시 왜성의 권역 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진기업 부지 입구에 왜성의 성돌처럼 생긴 석재가 벽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이곳이 정말 왜성의 흔적인지는 불명.
5. 교통
- 도시철도
-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충렬사역 1번, 3번 출구
- 버스
||<-2><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0000,#dddddd><table bgcolor=#ffffff,#1f2023> 충렬사역(06195·06197) ||
일반 | [4] |
||<-2><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0000,#dddddd><table bgcolor=#ffffff,#1f2023> 충렬사입구 ||
마을 |
동래왜성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는 동장대와 군관청은 충렬사 관할이므로 일단 충렬사를 들어가야 볼 수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좌측에 호수[5]가 하나 있고, 그 호수 위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비석이 하나 나오고 그 너머에 작은 철창이 보인다. 그 철창을 열면 동장대로 통하는 길이 나온다.
한편, 해자 유적은 충렬사 관할 구역 외부에 있어 다른 루트로 가야 한다. 동래화목타운아파트 102동 앞에 망월산 등산로로 통하는 계단이 있다. 계단과 등산로를 오르다 보면 벤치가 있는 작은 쉼터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자잘한 곡륜군을 관찰할 수 있다. 끝까지 올라가면 동래읍성 성벽 바로 앞에서 인생문(북쪽) 방향으로 길이 꺾이는데 이 꺾어지는 부분에서 아파트 방향을 바라보면 길게 파인 이랑형 해자를 관찰할 수 있다. 동래화목타운아파트 103동 방향으로 나 있고 절벽에 의해 끊겨 있으며, 여름에는 무성한 잡초 때문에 관찰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주의.
6. 관련 문서
[1] 증산왜성(부산포왜성), 양산 증산리(물금왜성), 증성(송진포왜성) 등.[2] 특히 도공들이 많이 끌려갔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으로 부르기도 하는 이유이다.[3]
사진에서 보이다시피 곡륜의 굴곡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4] 아침 3회[5] 의중지(義重池)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사진에서 보이다시피 곡륜의 굴곡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4] 아침 3회[5] 의중지(義重池)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