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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2 14:26:51

간독

목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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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제작 공정4. 장단점5. 목독의 규격6. 유물 목록
6.1. 한국6.2. 중국6.3. 영국(고대 로마)
7.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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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독()은 아직 종이가 대중화되기 전에 사용한, 고대에 나무대나무 조각으로 만든 종이 이전의 기록매체이다. 주로 고대 동아시아권에서 사용한 방식이지만, 로마나 이집트 등 고대 중동, 서양 문화권에서도 쓰였던 흔적이 발견된다.

간독은 죽간(竹簡)과 목간[(木簡)=목독(木牘)]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죽간은 말 그대로 대나무(竹)를 세로로 쪼개서 만든 것이고, 목간은 나무를 쪼개서 만든 것으로서 다른 말로 목독(木牘)이라고 한다. 사용시기는 중국에서는 크게 잡으면 상나라 왕조 시기인 기원전 13세기에서 위진남북조 시기인 4세기까지 장장 1700여 년간 사용된 종이 이전의 기록매체이다. 후한 대 환관 채륜105년 포장용으로 쓰던 원시적인 종이 개량 및 대량생산에 성공하자 종이가 문자생활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간독은 차츰 그 자리를 종이에게 내주었고 6세기쯤에는 중국 본토에선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신라백제, 일본동아시아 주변국에서는 죽간이 아닌 목간을 7, 8세기까지도 사용했다. 10세기 초 후삼국시대에도 목간을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서에는 종이를 쓰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간단한 메모지 및 필체 연습용[1]으로 쓰이는 등 보조적 역할만 맡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고려시대까지는 물품 보낼 때 물품과 관련된 정보를 기록하는 꼬리표용으로 목간을 사용한 것이 확인된다.[2]

간독자료는 최근에 들어 발굴조사를 통한 출토사례가 증가함에 따라 역사학, 고고학계에서 더욱 중시되는 추세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등의 장기적인 학술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대형 성곽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시작되면서 목간의 출토사례가 확연히 증가하였다. 성곽에는 군사적 목적 및 장기주둔 등의 이유로 해자와 대규모 집수시설 등의 수리시설들이 필수적인데, 이러한 시설들이 운영되면서 자연스럽게 토양환경을 습윤하게 바꾸게 되고 그로 인하여 외부 산소와 차단이 이루어져서 유기질의 간독자료들이 보전이 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목간이 출토되는 유적들이 대체로 저수지, 집수시설, 해자 등의 습윤한 토양환경을 조성하였던 유적이다.[3]

삼국시대 당대 문헌이 종이는 사라지고 남아있는 것은 금석문 정도인데다가, 대표 역사서삼국사기삼국유사는 삼국 멸망 수백 년 후에나 저술되었다. 또한 그 사이에 삼국통일전쟁과 후삼국시대, 여요전쟁, 대몽항쟁 등 여러 전란으로 유기, 신집, 국사, 서기, 고기 같은 원사료들이 많이 사라졌다. 그래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편찬할 적에는 전란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원사료만으로 내용을 적어야 했기 때문에 내용이 부실해졌다. 그러나 목간은 당대에 제작되었기 때문에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없는 기록들도 있기 때문에 더더욱 중요하다.

후대에 정보를 전하기 위해 간추린 내용이 담긴 사서와 달리, 간독은 당대에 직접적으로 실용적 목적으로 사용한 물건인 만큼 행정제도 상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 많다. 간독에 기본적으로 기재된 내용에 대한 연구 외에도 역역동원체계나 문서전달체계 등 당시의 실질적인 행정제도적 측면의 내용도 엿 볼 수 있으며, 중국에서 출토되는 목간은 완전한 법령 문서나 실제 담당 업무 내용 등의 당시 사회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받아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 출토되는 목간들은 폐기정황 속에서 출토된 것이 많기에 비교적 막연한 내용이 기재된 목간도 많으나 그만큼 수량적으로 많이 출토되기 때문에 일부에 한해서 원래의 목간끼리 내용이 연결되는 것도 일부 존재하며, 주요한 키워드로나마 기존의 문자자료 연구에 더 풍부한 해석과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된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또한 더불어 역사학계와 고고학계가 모두 주목할 수 있는 성격을 갖고 있다보니 201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학제간 교류사업 등으로 간독자료들을 다루는 연구사업들도 부쩍 증가하여 활발히 연구되는 대상이기도 하다.

2. 역사

간독이 언제부터 쓰였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확답은 없으나, 상서(商書) 다사(多士) 편에 보면 '은나라 선조에게만 책(册)과 전(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시기엔 이미 문자가 발명되었고 이를 이용해서 점사의 과정 및 결과를 적은 갑골문이 대량으로 출토된 것을 감안하면 상대에 이미 간독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4] 하지만 상대의 기록은 갑골문을 제외한 발견이 아직 보고되지 않았으며, 사실상 죽간이 본격적으로 쓰이던 시기는 춘추시대로, 전성기는 전국시대(기원전 5세기경)부터 후한대(2세기) 사이로 보고 있다. 중국에서 지금까지 출토된 간독문서 대부분이 이 700여년 사이에 집중된다.

한반도에서는 좀 더 이후 시대까지 사용되었는데, 특이한 점으로 경상남도 함안군에 있는 성산산성에서 지금까지 한국에서 출토된 목간 유물 양의 대부분, 40%가량인 245점이 출토됐다는 것이다. 함안은 원래 가야 땅이었지만 목간은 신라에 막 편입된 법흥왕 재위기의 것들로, 고대 한국의 지방 지배체제와 조세체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거기에 써 있는 내용은 누가 세금을 얼마나 바쳤는가 꼬리표부터 공무원반성문까지 다양하다.####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는 젓갈을 담글 때 현대에 유통기한을 표시하는 것처럼 언제 담갔는지를 쓴 목간을 붙여 두기도 했다. 즉 현대인의 메모지, 포스트잇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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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중국서예사 上>/우오즈미 가즈아키 편저/ 시쿠라 아오이 그림/ 임경택 옮김/ 소와당/ 2009
목간(木簡)은 대나무가 나지 않는 서역 지방 등에서 죽간의 대용으로 목편을 사용한 것이다. 목간은 죽간에 비해 매우 짧다. 한나라 때의 목간은 스타인에 의해 돈황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그후 실크로드 탐험을 거듭하였던 헤딘은 중국 스웨덴 공동으로 서북과학조사단을 결성하여 감숙성 북서부의 액제납기(額濟納旗) 지방에서 1만점에 이르는 대발견을 하였다. 액제납기 지방을 옛날에 거연이라고 칭했던 까닭에 거연한간(居延漢簡)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중에는 전한의 연호를 기록한 것이 포함되어 있고, 거기에 예서 특유의 파책(波磔)기법을 사용한 것이 있어서 전한의 예서에 파책이 없다는 통설이 멋지게 뒤집어졌다.

참고로 목간의 경우, 나무로 만든 기록 매체 자체는 동아시아에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고대 로마에서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 제작 공정

대나무를 쪼개어 곧바로 사용을 하면 안의 습기 때문에 좀이 슬기 쉽고, 대나무의 푸른 빛 때문에 먹으로 쓴 글씨를 눈으로 보기 어렵다. 때문에 대나무 안의 수분을 일단 제거하는 일련의 처리과정을 한청(汗靑), 한간(汗簡), 혹은 살청(殺靑)이라고 불렀다. 한간과 살청은 지금도 일부 출판업계에서 각각 '원고를 작성하고 있음'과 '원고를 다 작성함'이란 뜻의 은어로 사용된다.

살청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쪼갠 대나무 조각을 불에 쬐어 안의 하얀 진액[5]을 빼서 푸른 빛을 없앤 후 말려서 두께는 2~3mm, 폭은 0.5~1cm 정도, 길이는 밑의 단락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책의 종류에 따라 맞추어 가공한 후 그 위에 기록할 편지나 문서, 책의 내용을 적었다. 보통 한 개 당 30~40개의 문자를 썼으며 50개를 쓸 경우도 있었다. 드물지만 50개 이상 쓸 경우도 있었는데 이럴 땐 가운데 붉은 먹으로 일직선을 그은 후 양쪽에 글자를 작게 썼다.

최종적으로 간독 문서를 만들 때는 무두질한 가죽끈(韋)[6]이나 삼으로 만든 마끈으로 위아래에, 길이가 긴 죽간은 중간에 한두 군데를 추가하여 적으면 10~30개, 많으면 40~50개의 죽간을 엮어 한 두루마리를 만든 후 제목을 썼다. 간독책의 특성상 둘둘 말아 보관하므로 한 두루마리의 맨 첫째 간독 및 맨 마지막 간독 뒷면, 즉 대나무 겉껍질 쪽 가운데에 제목을 쓰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간독에는 목탄이나 주사(朱砂)[7]나 칠액(漆液)으로 기록했다. 이전부터 사용한 목탄이나 주사같은 경우에는 목간에는 쓰였으나, 특성상 죽간에는 묻지 않았으므로 죽간에는 옻을 정제한 칠액으로 기록했다. 이런 칠액의 경우 특유의 점성때문에 처음은 두껍고 이후는 급격히 가늘어지는데 그 모양이 올챙이처럼 생겨서 과두문자(蝌蚪文字. 올챙이글자)라고 부른다.

4. 장단점

일단 중남부 중국 전역에 주변에 흔하게 자생하는 대나무를 사용하고[8] 만드는 데 세밀한 기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만큼 수공업으로도 대량생산이 가능해서 가격이 저렴했고, 종이나 비단과는 달리 두께가 있으므로 잘못 적으면 서도(書刀)로 긁어낸 후 다시 적으면 되므로 수정이 용이했다. 실제로 발굴된 목간 중에는 한문을 처음 배우는 아이들이 글씨 연습용으로 쓴 목간도 있다고 한다.[9]

하지만 역사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이 간독은 그 특성상 저장할 수 있는 용량에 비해 부피 및 무게가 너무 나간다는 것이 크나큰 결점이었다. 10만여 자에 달하는 장자를 간독에 적으면 수레 열 대 분량이었으며 남자라면 모름지기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읽어야 한다(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를 말한 명가의 사상가 혜시는 여행을 갈 때 지식을 자랑할 겸 항상 다섯 수레에 책을 실어서 보았는데, 이는 책이 많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부피 및 중량이 많이 나가는 것이 큰 원인이었다. 종이책 형태라면 다섯 수레에 가득 체우면 수백~수천권이 되겠지만 간독의 형태면 현시대 출판물 기준으로 소설책 한권 글자수가 10~20만 사이로 한 권이 될까말까한 정도.[10]

진시황 역시 중국 통일 후 매일 1형석(衡石) 분량의 공문서를 읽으며 근면성실하게 업무를 보았는데 1형석이 무게가 약 120kg이니 중량이 많이 나간다는 점을 감안하면 하루에 처리는 가능했으나 과중한 업무량임은 분명했고 간독이 경제적이기는 했으나 중량 때문에 문서작성 및 처리에 애로사항이 많아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기원전 6세기 경부터 비단이 문서 작성 및 캔버스지 역할을 하게 되는데, 묵가에 '비단과 죽간에 기록하다'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의외로 꽤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단의 장점은 가볍다는 것 외에도 베틀에 짜서 만든다는 특성상 폭과 길이를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었고 담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이 간독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이런 비단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눈이 튀어 나올 정도의 가격이었다. 한대 당시의 비단 한 필 가격이 80킬로짜리 가마니 9석이었으니 돈지랄도 이런 돈지랄이 없다.[11] 당연하게도 쓸 수 있는 계층은 극소수 귀족들에 불과했고 이런 점 때문에 간독을 대체하기는 불가능했다. 곧 종이가 개발되자마자 빠르게 종이가 비단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비단은 간독이 사라진 후에도 그 특유의 감촉 및 물감이 잘 묻는다는 이유로 문인이나 화가들에게는 선호하는 재료로 애용되었다.[12] 다른 옷감으로도 기록하기도 했지만 비단보다는 싸기는 해도 역시 책으로 만들기에는 가격이 만만치가 않았다.

5. 목독의 규격

현대인들은 보통 목독을 규격 없이 대충 잘라서 쓴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규격이 정해져 있었다. 그것도 대충대충이 아니라 아주 칼 같은 규격이었다. 물론 시대와 국가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중요한 문서일수록 쓰이는 길이가 길어진다는 기본적인 틀은 있었다. 여기서는 한대(전한+후한을 합쳐서)의 규격을 다루기로 한다. 한대에는 크게 '여섯 치', 여덟 치', '한 자', '한 자 한 치', '두 자', '두 자 네 치', '석 자' 짜리가 있었고 쓰이는 문서의 내용 및 종류에 따라서 각기 나누어 썼고 앞에서 열거한 순서대로 설명하도록 하겠다.

참고로 한대의 자(尺)는 23~24cm이고 치(寸)는 10분의 1, 즉 2.3~2.4cm이다.

6. 유물 목록

6.1. 한국

6.2. 중국

6.3. 영국(고대 로마)

7. 같이보기


[1] 따로 공정을 거쳐야 하는 종이와 달리 주변의 나무나 대나무에서 떼어오면 되었기 때문에 종이보다 구하기 쉽고 저렴했던데다, 종이와 달리 나무에 먹으로 쓴 글씨는 칼로 긁어서 지울 수 있기 때문에 연습에 더 적합했다.[2] 신안군 앞바다의 해저 유물이 일본으로 가는 길이었다는 것을 목간에 적힌 일본의 절과 승려 이름으로 알아냈다.[3] 간독자료 외에도 나무재질의 유물들이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유적들의 성격은 모두 동일하며, 광주 신창동 저습지 유적에서도 다량의 목제품이 출토된 바 있다.[4] 후한대 학자 허신의 저서인 설문해자에서 상형문자로 죽간을 엮은 모습과 죽간 뭉치를 책상에 쌓아올린 모습을 각각 책 책(册), 경전 전(典) 자가 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5] 죽력(竹瀝)이라고 한다. 한약재로도 쓰이고, 죽력고라는 술을 빚을 때에도 쓰인다.[6] 공자가 주역을 너무 많이 읽어서 죽간 책의 가죽끈이 세 번 끊어졌다고 하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이 여기서 유래한다.[7] 황화수은. 신경안정작용이 있어 한약으로도 쓰였으며(현재는 유독성때문에 쓰지 않는다), 현대에도 부적용으로 쓰이곤 한다.[8] 대나무가 자라지 않는 연나라, 조나라 같은 북중국이나, 남부지방에만 대나무 숲이 존재하는 한반도에선 대나무 대신 나무를 가공한 목간을 주로 사용했다. 목간의 재질은 보통 주로 백양목(白楊)이나 버드나무나 소나무를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나무의 색이 하얗고, 목질이 부드러워 먹을 잘 흡수했기 때문이다.[9] 여담이지만 삼국지에 나오는 한복화장실에서 이 서도로 자살했다. 서도는 죽간을 수정하기 위한 일종의 지우개였으니 한복은 지우개로 자살한 셈이다(...).[10] 만화 창천항로에선 조조유비에게 병법서를 읽어볼 것을 추천하면서 자신이 주석을 단 손자병법 죽간들을 보여주는데, 그 분량이 어마어마해서 유비가 질려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본 조조 왈 "여기서 한번 살아볼텐가? 한 1년 정도 꾸준히 읽다보면 다 읽을 수 있을테니".[11] 이는 서양의 양피지 또한 마찬가지이다. 말 그대로 양의 가죽을 이용해서 기록하는 것이므로 웬만한 책 한 권을 만드려면 양을 200마리 이상 도축해야 했다.[12] 현대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보편적인 것으로 서예용 부채비단이 있다.[13] 근데 이 사람이 흉노에 붙어버린 건 애초에 모국이 자기를 버렸기 때문이다. 항목 참조.[14] 내용도 오만하기 짝이 없어 "천지가 시작하는 곳, 일월이 있는 곳의 흉노 대선우, 한의 황제에게 묻는다. 별고 없으신지..."로 시작하는, 한 마디로 한제국을 업신여기는 내용이었다.[15] 한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구구표. 물론 광개토대왕 비석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곱하기 셈법 자체는 알고 있었겠지만 유물 발견 전에는 구구단이라는 개념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다.[16] 강도의 수취인 중에는 당시 무신정권 집권자였던 김준도 있었다. 목간에는 김영공(金令公)으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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