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22:26:09

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10px"<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cd313a><table bgcolor=#cd313a> 파일:안중근 의사 손도장 수정.png안중근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color=#0047a0,#00d8ff> 저서 <colbgcolor=#fff,#1f2023>동양평화론 · 유묵
가족 안명근 · 안공근 · 안준생 · 안춘생 · 안봉근 · 안진생
사건사고 동학 농민 혁명 · 하얼빈 의거
인물 김구 · 최재형 · 김두성 · 우덕순 · 유동하 · 조도선 · 이토 히로부미 · 지바 도시치
시설 안중근 의사 기념관 · 안중근공원 · 해동사 · 효창공원
창작물 의사 안중근(1946) ·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 의사 안중근(1972) · 도마 안중근 · 영웅(뮤지컬) · 영웅(영화) · 하얼빈설국의 태양
기타 공식 칭호 논란 · 동의단지회 · 안중근함 }}}}}}}}}

1.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파일:external/pic1.dbw.cn/73596_497139.jpg
파일:external/3.bp.blogspot.com/DSC_2578.jpg

공식 홈페이지

1.1. 개요

서울특별시 중구 남산공원에 있는 역사기념관. 사단법인 안중근의사숭모회가 관리/운영한다. 1970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 60주년을 기념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와 국민의 모금으로 설립되었다. 2010년 10월 26일 이전에 있었던 한옥모습의 구관(舊館)을 철거하고 현재의 자리에 신관을 설립하여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1주년을 기념하여 개장했다.

본래 일제강점기일제가 남산 한양공원 자리에 세운 조선신궁(朝鮮神宮) 부지의 일부이다. 일제의 강요로 한국인들이 제 뜻과 상관없이 신사참배를 했던 굴욕적인 장소이기도 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조선신궁 건물들 중 중요한 것을 자기네들 손으로 철거했다. 또한 이승만 정권 시절 조선신궁의 터에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을 짓기로 하고 조선신궁의 남은 건물들을 철거하고 땅을 다졌으나, 4.19 혁명으로 하야하는 파란을 거치면서 국회의사당 건립계획도 취소되었다. 그렇게 남은 빈 터의 일부에 일제의 잔재와 굴욕을 씻어낸다는 뜻으로 지금의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설립했다.

파일:external/www.danji12.com/2010071822043127.jpg
파일:Screenshot_20240707_221652_Gallery.jpg
이전까지는 박조건축 형태의 단층 전시관이었다. 전시관의 노후와 전시물 포화 등으로 신관 건립안이 추진되었다. 구관이 철거되고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1주년을 기념하는 2010년 10월 26일 지금의 자리에 신관을 개장하여 일반에 공개했다. 새로 지어진 기념관은 이전 한옥형태의 단층건물과는 달리 3층 짜리로 된 유비쿼터스 형태로 리모델링된 건물이다. 4개로 구성된 네모형이고 앞면에 '安重根' 이라는 인명이 새겨졌다. 반투명한 간유리라 그런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1]

파일:external/pimage.design.co.kr/1292042996153.jpg

2010년 서울특별시로부터 건축상 공공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럼에도 개관식에 건축가가 초청받지 못해 이슈가 된다. 건축계에서는 건축가의 사회대우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건축가는 부부 건축가인 김선현·임영환 씨(디림건축)

전시관 안에는 안중근 의사의 동상과 안 의사와 동지들이 단지동맹(斷指同盟)을 통해 혈서(血書)로 직접 써낸 '大韓獨立' 이라 쓰여진 대형 태극기가 걸려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업적과 유품들, 그리고 안 의사의 어록 및 명언 등을 전시하고 있다.

파일:안중근동상-한국일보.jpg

전시관 앞에는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있다. 이 또한 2010년 신관 개장에 맞추어 기존 김경승 조각가(1915~1992) 작품[2] 대신 새로 만들었다. 저격 이후 태극기를 흔들던 모습이다. 트레이드마크인 왼손의 단지를 수줍게 뻗고 있다. 나름대로 완성도가 높다. 맞은 편에는 서울교육정보연구원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안 의사가 생전에 했던 어록, 휘호 등이 새겨진 석상들이 있다. 남산공원과 연결되어 있고 2010년을 전후하여 근처까지 서울성벽이 보수되면서 주변을 따라 걷다보면 아름다운 풍광이 가득하다. 근처 동네에 주한미군 및 그 가족이 다수 거주하고, 또한 최근 중국인들을 비롯하여 많은 외국인들이 남산을 찾아오고 있어서 동상 근처에 다수의 외국인들이 앉아서 휴식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유료입장이었으나 현재는 무료입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방명록을 보면 일본인들이 특히 많이 찾아오는 듯 하며 의외로 '좋은 역사 공부가 되었다'와 같은 반응이 많다. [3]

1.2. 역대 관장

2.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4011908190001300_P2.jpg
파일:안중근 의사 기념관 국가보훈처.jpg
2014년 1월에 중국 정부[6]에 의해 설립된 기념관이다.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哈尔滨安重根义士纪念馆,Ahn Joong-Keun Memorial Hall)은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하얼빈역 역사에 있는 기념관이다. 외교적 민감성 때문에 극비리에 추진되다가 2014년 1월 19일 하얼빈역에 전격 개관했다.관련 기사 현지주소는 黑龙江省 哈尔滨市 南岗区 铁路街(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난강구 철로가) 소재이다.

2013년 6월, 한중 정상회담[7]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에게 하얼빈역에 의거 현장 표지석을 설치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시진핑 주석의 승낙에 따라 표시석이 세워질 예정이었는데, 일본 측에서 안중근에 대한 폄하와 더불어 중국 측이 일본의 마루타 실험 관련기록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까지 일본 측이 비아냥거리는 적반하장을 일으켰다. 이에 중국은 표지석 정도가 아니라 기념관을 짓는 것으로 일본의 도발에 응답했다. 특히 시진핑이 일본을 크게 도발할 목적으로 이를 헤이룽장성에 직접 지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게다가 기념관 내부의 설명판을 중국어 설명판만이 아닌, 한국어로도 만들어 놓았다[8].

이처럼 중국은 안중근의 이미지를 반일의 아이콘으로 변질시켜서 국제정치적 목적으로 일본을 도발하는데에 사용하였다. 한국정부의 요청의 연장선상인 만큼 이 것은 한국에 협조적으로 움직여 한국에 반일 친중의 분위기를 만들려는 중국 공산당의 국제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기념관은 귀빈용 대합실 일부를 개조하여 마련되었다. 주로 하얼빈시 조선민족예술관의 전시물을 옮겨왔다. 당연히 한국 정부는 환영의 뜻을 표했고, 뻔뻔하게도 일본 정부는 유감을 표명했으나, 중국은 '안중근 의사는 저명한 항일의사로 중국 인민의 존경을 받는다'라고 일축. 일본의 망언이 중국에서 안중근 의사의 인지도만 높여 준 셈인데, 이후에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여전히 안중근 의사는 자기네 나라 초대 총리를 죽여 사형 판결을 받은 범죄자라는 식의 망언을 끊임없이 늘어놓고 있다.

대북 문제와 동북공정 등 한중 간의 외교적 갈등도 적지 않지만, 항일투쟁역사에 대한 인식만큼은 같이하고 있음이 확인된 셈. 일본의 역사 왜곡과 우경화에 한중 양국이 공조하여 일본을 압박하려는 외교적 포석이라고 볼 수도 있다.

2015년 10월 기준 입장객 수가 20만명을 돌파했으나, 2017년 사드문제 당시 하얼빈역 보수공사로 2019년 3월 30일 재개관 때까지 조선민족예술관 건물로 임시 이전했다. 이 배경엔 중일관계 회복을 위해 중국이 일본 눈치를[9] 보는 거 아니냐는 분석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2년만에 더 크게 지어놨기 때문에 그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언론의 주장은 복구 안 시키는거 아니냐는 거였는데, 더 크게 신축해서 복구해 놓았다. 2020년대인 지금도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파일:안중근 의사 기념관 2019.jpg
파일: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 동상.jpg
파일: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 내부.jpg

새로 지어 2019년 3월에 재개관한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 내부에 안중근 의사 동상을 새로 만들고, 이전에 입구에 있던 9시 30분 시계 위치를 바꿔 내부 동상 위에 설치해놓았다. 내부 설명판들이 한국어로도 적혀 있는 걸 볼 수 있으며, 입구에도 한글과 한자가 병기되어 있다. 동북지역에 여행간 한국인들은 한번씩 가보는 명소이며, 조선족 학교들에서는 견학으로 가고 있다. 조선족 학교가 아니더라도 하얼빈 내 학교 학생들 역시 현장학습을 가기도 한다.

파일:하얼빈 안중근격폐이등박문사건발생지.jpg

하얼빈역 플랫폼에 있는 현판과 기념 표지석. 원래 한국정부는 저 동그라미쳐진 기념 표지석만 요구한 것이었고 중국도 저것만 만들어주고 끝내려 했는데, 일본의 도발로 저 현판[10]까지 따로 만들어 준 것이다. 현판의 한국식 독음은 "안중근격폐이등박문사건발생지"(번역하면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쏜 사건 발생지)이다. 왼쪽(기차 승강장에서 먼 자리)에 있는 동그라미가 안중근 의사가 쏜 지점이고, 오른쪽(기차승강장에 가까운 자리)[11]에 있는 동그라미가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장소이다.

파일:안중근 의사 증손자 안도영.jpg

표지석과 현판 설치 기념으로 하얼빈역에 방문한 안중근 의사의 증손자 안도영. 위쪽 사진과 반대방향에서 찍은 것이다. 상술된 내용대로 그가 서 있는 표지석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쏜 격발 장소이다. 뒤에 보이는 건물은 신축 전 2014년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으로, 저쪽이 기념관 후문이었으며, 1909년 당시의 하얼빈역 입구 자리이다. 사실 재건축하기 전에 원래 있던 안중근 기념관이 사건 당시의 하얼빈역 입구 구조물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지금은 다른 자리에 지어놔서 없다.

참고로 중국 하얼빈에는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간직한 731부대 죄증진열관(현재[중국어 번역]侵华日军第七三一部队罪证陈列馆중국침략일본군731부대 죄증진열관)등이 소재하고 있다.[12][13]

KBS 2TV의 예능 1박 2일에서 이 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1] 다만 건축가가 밝히기로는 남산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유리로 했다고 말했으니 의도 했다고 볼수도 있다.[2] 1959년 청동으로 제작돼 숭의여고 교정에 세워진 걸 1967년 현 위치로 이전했으나, 복장 및 얼굴 부분의 고증 문제로 1973년에 그 동상을 광주 상무대로 옮기고 새로 만들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과거사 청산 열풍이 불면서 김경승의 친일행적 논란이 퍼진 데다, 동상 노후화 때문에 아예 새로 만들어 교체했다.[3] 2019년 유튜버 건들건들팀이 안중근 의사의 M1900 권총을 미국에서 실총을 구해 기증할 의사를 밝혔다.[4] 前 인천대학교 총장, 독립운동가 김우전의 사위.[5]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前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 안중근 의사를 존경해온 아버지를 따라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고 숭모 작업에 적극 참여했다.[6] 명목적으로는 헤이룽장성 서기가 헤이룽장성 지방 정부의 자금으로 설립 지시를 해서 헤이룽장성이 만든 것이지만, 실제로는 시진핑이 헤이룽장성에 무조건 만들라고 직접 지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후술될 당시 중국의 반일정책 및 외교갈등 때문.[7] 2012년 이명박 정부 시절 독도 방문 등으로 한일관계가 나쁜 상태에서 정권이 바뀌자, 이를 이어받은 박근혜 정부는 놀랍게도 반일친중 외교정책을 지향해서 한미 정상회담 직후 한달만에 한중 정상회담을 했으며, 2013년에 한일정상회담 자체를 하지 않았다. 2016년 사드 배치 결정 사태 이전까지 박근혜 정부 3년간은 중국 시진핑 체제도 반일친한 성향을 보였을 정도였다. 의외로 2013~2015년까지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에 "한국은 형제, 일본은 원수" 같은 글들이 넘쳐났었다. 친북한 반남한 성향으로 알려진 중국 고위층들이 남북한을 가리지 않고 긍정적 태도를 보여, 북한만이 아니라 남한에 대해서도 친화적인 태도를 보이던 특별했던 시절이다. 하지만 2016년 사드사태와 2017년 미국 트럼프정권 등장부터 한국과의 사이는 나빠졌다. 당시 트럼프 정권이 남북미 정상회담 등 사상 초유의 대북관계를 주도했었기 때문에 중국의 남북문제 영향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2022년 친일반중 외교를 지향한 윤석열 정권 등장(심지어 정부측이 신문방송 언론에게 그동안 수십년간 써온 "한중일 관계"라는 어휘를 "한일중 관계"로 바꿔서 쓰라고 요구했다.)부터 최악으로 치달아 박근혜 정권의 외교와 정반대의 상황이 되었다.[8] 정확히는 중국의 소수민족 언어(조선족)로 지정된 "조선어"로 적은 것인데, 입말의 억양이 아닌 한글 문자표기는 실질적 차이가 없으므로 한국인들도 가면 다 읽을 수 있다.[9] 대륙 이미지 때문에 흔히 일본이 중국 눈치를 많이 본다고들 하기도 하는데 사실 일본은 중국에 끼치는 영향력이 그저 그런 수준의 섬나라가 결코 아니다. 경제대국으로서 과거부터 중국에 대한 경제교류나 무역에 상당한 비중이 있기 때문에 중국도 일본과의 관계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중국이 이처럼 과거사 문제를 들추어 일본을 상대로 세게 나가는건 우리나라처럼 국민정서나 여론의 눈치를 보고 강경하게 대처하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 공산당 일당 독재에 가깝다곤 해도 국민들의 정서를 일방적으로 무시하면서까지 독재할만한 형편은 아니기 때문.[10] 양면 현판이다. 기차타는 장소까지 가서 돌아봐도 똑같은 글자가 보인다.[11]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아침에 기차에서 내려서 미리 대기하던 일본인 환영단들의 환영을 받고 있었고, 안중근 의사는 기차가 도착하던 시간에 일본인 환영단에 접근하여 섞여서 구경하는 척하며 노리고 있다가 갑자기 뛰어나와서 쏜 것이므로, 당연히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 내리는 쪽에 가까울 수 밖에 없다. 저 철도는 10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기차가 다닌다. 참고로 기차가 오기 전까지 안중근 의사는 작전을 생각하며 환영단 뒤쪽이자 역사 입구 옆쪽에 있던 하얼빈 역사내 다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철도는 그대로지만, 하얼빈역 내부는 100여년간 여러 차례의 공사를 했기에 그 다방 자리는 남아있지 않고 입구도 다른 곳에 있다.[12] 侵华日军第七三一部队罪证陈列馆 https://www.google.com/maps/place/%E4%BE%B5%E5%8D%8E%E6%97%A5%E5%86%9B%E7%AC%AC%E4%B8%83%E4%B8%89%E4%B8%80%E9%83%A8%E9%98%9F%E7%BD%AA%E8%AF%81%E9%99%88%E5%88%97%E9%A6%86/@45.6100649,126.6320871,16z/data=!4m10!1m2!2m1!1z5L615Y2O5pel5Yab56ysNzMx6Ziy55ar57uZ5rC06YOo6Zif!3m6!1s0x5e447086d5537539:0xc7a5225f79b546e7!8m2!3d45.607356!4d126.637127!15sCiTkvrXljY7ml6XlhpvnrKw3MzHpmLLnlqvnu5nmsLTpg6jpmJ9aLSIr5L61IOWNjiDml6Xlhpsg56ysIDczMSDpmLLnlqsg57uZ5rC0IOmDqOmYn5IBBnRyYXZlbJoBJENoZERTVWhOTUc5blMwVkpRMEZuU1VOemQwbEljMjVuUlJBQuABAA!16s%2Fg%2F11f38wnrw1[13] Site Of Unit 731 Of Japanese Army That Invaded China The Second Protective Reg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