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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 1858년 8월 15일 |
함경도 경원도호부 (現 함경북도 경원군) | |
부모 | 아버지 최홍백(崔弘百) 어머니 |
본관 | 전주 최씨[주장] |
사망 | 1920년 4월 7일 (향년 61세) |
[[극동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소왕령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108번 [3] |
상훈 |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獨立章)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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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의 시베리아 지역에서 활동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러시아식 이름은 표트르 세묘노비치 초이(Пётр Семёнович Цой)이며, 이명은 최재형(崔在衡), 최도헌(崔都憲), 별명으론 최 페티카(Петька), 최 비지깨가 있다.[4]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망국 전후 연해주 독립운동은 그를 빼놓고서는 기록할 수 없다. 그 정도로 러시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중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던 주역이다. 사학계에서는 연구가 부족한 과거에 그리 조명받지 못했으며,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주목받게 되었다.
2. 생애
1858년 8월 15일 함경도 경원도호부(현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가난한 소작농 아버지 최홍백(崔弘百)[5]과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당시 천하게 여겼던 기생인지라 노비의 아들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집안 자체는 그저 가난한 농민 집안이었다. 9살 되던 1867년 고향 경원도호부를 비롯한 두만강 부근 6진 지방에 큰 흉년 및 기근이 닥치자 가을 아버지, 형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청나라 길림장군 혼춘부도통함협령(琿春副都統銜協領)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 지신허(地新墟)[6]에 정착했다.11살 되던 1869년, 형수의 차별 대우와 자신에 대한 증오 등을 이유로 2명의 친구들과 함께 가출했다. 그러나 2명의 친구들은 두려움으로 도중에 포기했고, 그는 혼자 정처 없이 무작정 걷다가 정신을 잃고 해변가에 쓰러졌다. 이때 그를 발견한 러시아 상선 선원들의 구조로 러시아 상선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상선 선장으로부터 선원으로서 심부름하며 일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고, 선장 내외가 대부·대모가 되어 러시아 정교회식의 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의 러시아식 이름과 부칭인 '표트르 세묘노비치'는 당시 그를 도와 준 선장의 이름을 따른 것이었다.
그는 러시아 상선 선장의 도움으로 러시아에서 교육받은 최초의 조선인이기도 했다. 하급 선원, 무기 공장 노동자 등 각고의 노력 끝에 1900년대 초 러일전쟁으로 인한 특수로 군수 산업 분야에서 큰 돈을 벌어 마흔 살이 되기도 전에 연해주 굴지의 거부가 되었다.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성실하고 유능해 많은 러시아인이 그에게 통역, 도로·막사 공사 하청, 식료품 등 군납을 맡겼다.
그는 자신의 재산과 능력과 기회를 공동체에 바치면서 한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내륙의 한인에겐 소, 돼지, 닭 등을 길러 군납 가능하게끔 했고 슬라뱐카 등 해안가 한인에게는 연어를 잡아 살과 알을 납품하도록 했다. 마을에는 학교와 공원을 세웠다. 그런 최재형을 러시아 정부는 도헌, 즉 지방정부 시장으로 추천했고 연추 읍민들은 적극 환영했다. 1907년 연해주로 건너온 안중근이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회고했을 정도다.
동포의 권익뿐만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위해 그는 무장 투쟁의 정신상 지주이자 자금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08년에 국외 최대 독립운동단체인 동의회를 세우고 총장으로 취임했다. 동의회는 최재형이 내놓은 13,000루블, 이위종의 부친(前 러시아 공사 이범진)이 전해온 10,000루블, 최재형과 안중근이 모금한 6,000루블을 기금으로, 6월 총대장 이범윤에 안중근을 참모 중장으로 한 연추 의병을 창설했다. 연추 의병은 7월부터 국내의 홍범도부대 등과 연합작전을 펼쳐 접경 지역의 일본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9월 안중근의 실수로 영산 전투에서 대패했다.
영산 전투에서의 대패 이후 그는 재정난 탓에 폐간되었던 〈大東共報(대동공보)〉를 인수해 재발행해 격렬한 논조로써 일본제국을 비판하고 한인에게 독립 의식을 고취하였다. 안중근도 여기에서 근무하면서 때를 기다리도록 했다. 1909년 10월, 안중근과의 이토 히로부미 살해 거사도 최재형의 후원으로 성사됐다. 이것을 두고 안중근이 자신의 상관이자 조선 8도 독립운동을 총괄한다고 주장한 김두성이 최재형이라고 보기도 한다.
한국 강제 병합 이후 러시아는 항일 운동을 더욱 강하게 탄압했고 〈대동공보〉도 폐지되었다. 당시 연해주는 망명한 독립 지사의 집결지였는데 그는 점진적인 온건 투쟁 노선으로 변화를 꾀하며 1911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최대 한인 단체인 권업회를 꾸리게 된다. 최재형은 권업회의 발기회 회장을 맡았고, 발기회 부회장으로는 홍범도가 참가한다. 12월 권업회 정식 출범 때 최재형이 사실상의 초대 회장이 된다. 물론 권업회 의장으로는 당시 역시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이상설이 추대된다. 이 권업회는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를 출범하며 국외에서 가장 먼저 정부 조직을 꾸린 단체가 된다. 하지만 1914년 6월 제1차 세계 대전을 치르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일본의 동맹국이 되면서 결국 권업회는 해산되고 만다. 지속적으로 일본의 요구로 인해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고 결국 1916년 7월 그는 러시아 당국에게 체포되어 우수리스크로 압송되었지만 다만 그는 다행히 우수리크스에서 영향력이 강했던 그의 첫째 사위의 덕을 보며 석방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러시아 국내의 상황이 바뀌게 되자 그는 일본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게 되면서 자동적으로 적군 편에 서게 된다. 이후 역사를 보면 알다시피 연해주 일대는 일본군이 중심이 된 백군과 적군의 치열한 전쟁터가 되기 때문에 그 역시 자주 거처를 옮겨야 할 정도로 불안정한 생활을 지속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1918년 6월 제2회 특별 전로한족대표회의에서 이동휘와 함께 명예회장으로 선출된다. 여기서 조직된 전로한족중앙총회가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되면서 최재형은 여기서 외교부장으로 선출된다. 4월 상하이에서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그를 재무총장으로 추대하기도 한다. 이렇게 그는 3.1운동을 계기로 활발해지는 독립운동사에서 중심 인물로 자리잡는가 했지만 결국 그의 활약은 여기까지였다.
연해주 일대에서 적극적으로 러시아 내전에 참가 중이던 일본군은 1920년 우수리스크를 급습해 연해주 4월 참변을 일으키면서 그를 제일 먼저 즉결 처형했다. 향년 61세. 그는 충분히 피신이 가능했으나 피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사라지면 가족이 고통당할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왕바실재 산기슭에서 동지 김이직과 엄주필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우수리스크에 위치한 그의 옛 집이 독립운동기념관으로 지정되었다.#
가족은 두번째 아내 옐레나 외에도 자녀로 4남(표트르[7], 파벨(1900년생), 발렌틴(1908년생), 비켄티(1914년생)) 7녀(베라[8], 나데즈다(1888년생), 류보피(1898년생), 소피야(1902년생), 올가(1905년생), 류드밀라(1910년생), 옐리자베타(1912년생))가 있었다. 손자(1986년생)는 류형준이다. 가족들은 다른 한인들과 함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뿔뿔이 흩어졌으며 그 중 최초의 한인 출신 러시아 해군 장교였던 둘째 아들 파벨(또 다른 이름은 최성학), 딸 류보피는 1930년대의 스탈린의 대숙청에 휘말려 총살당하고 자식들 중 일부는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기도 하며 사위들 중 4명(기록이나 증언에 따라 6명)도 총살당하는 등 크게 고생했다. 그의 자식 중 살아남은 건 발렌틴, 올가, 옐리자베타, 류드밀라, 소피야, 류형준 뿐이었다고 한다.
3. 대중매체에서
- 1959년작 영화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에선 배우 이일선이 맡았다.
- 1996년작 SBS 3.1절 특집드라마 <안중근>에선 배우 이대로가 맡았다.
- 인디게임 제작사 "자라나는 씨앗"에서 제작한 게임 "MazM: 페치카"는 최재형과 그 남자의 비서 '페차'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텔링 게임이다.
- 네이버 웹툰 <고래별(나윤희 작가 / 금요일 웹툰)>의 62화에서도 언급이 되었다.
- 2009년작 뮤지컬 영웅에서는 배우 박해수가 맡았으나, 2010년 이후 장기용으로 변경됐다.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안중근의 조력자로 등장한다.
- 2022년작 영웅(영화)에서도 배우 장기용[9]이 뮤지컬에 이어 최재형 역으로 출연한다. 뮤지컬과 같이 영화에서도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안중근의 조력자로 등장한다.
- 2024년작 영화 하얼빈에선 배우 유재명이 연기했다.
4. 묘지 멸실 및 재안장 문제
1970년 11월 17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108번에 가묘로 모셨고 후손은 최규흠이란 사람이 등록되어 있었는데, 1991년 소련이 해체되어 진짜 후손인 최 엘리자벳따와 손자 최 발렌틴이 1995년 한국을 방문했고 2004년에야 진짜 후손인 최 엘리자베따에게 후손자격이 주어져 1년 동안 보상금을 받다가 2005년에 사망했고 손자 최 발렌틴에게 2020년까지 이어졌다. 한편 2006년에 최 발렌틴이 한국을 방문해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최재형 묘를 참배했다. 그런데 2009년에 와 보니 후손에게 연락도 없이 애국지사 묘역 108호의 최재형 묘가 멸실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2010년 러시아어로 최재형을 다룬 책을 내면서 2006년 참배한 사진과 2009년 멸실된 묘 사진을 책에 실었고 현충원에서 안내해 준 안내서도 실어 놓았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은 서훈도 저평가되어 있는데 묘지를 가지고 가짜후손을 세웠다가 30여년이 지나서 진짜 후손이 나타나자 후손을 바꾸고 진짜 후손에게 연락도 없이 묘를 멸실시켜 버렸다.2022년 최재형기념사업회에서는 제3회 최재형 상을 수상했고 4월 11일부터 4월 22일까지 용산구청 아트홀에서 최재형항일독립운동 특별전이 열렸다. 이 전시회에서는 최초공개사진도 선보였는데 1937년 5월에 찍은 연추의 최재형 집 사진이다. 이 사진은 막내딸 최 엘리자베타가 생전에 가지고 있던 것을 카자흐스탄 독립운동가 후손협회 자손재단 회장을 맡고 있는 최재형의 외증손녀인 박 따띠야나가 2019년 최재형 기념사업회 문영숙 이사장을 만나 전한 사진을 복원하여 선보였다 .2022년 77회 광복절에 카자흐스탄에 사는 최재형의 둘째딸의 후손인 박따티야나와 한보리스가 후손으로 초청되어 최재형 묘가 멸실된 터를 찾아 초콜렛을 놓고 성묘를 했다. 이 날 sbs 임상범 기자가 동행취재를 했고 방송으로 보도되었다. 영상은 유투브 비디오머그에 현충원에서 사라진 108번 묘지 직접 가봄이란 채널에 올라와 있다.
2022년 추석에는 최재형기념사업회 문영숙 이사장이 최재형 5대손 최 일리야를 데리고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최재형 묘 복원 서명운동을 벌였고 멸실된 묘터에서 일리야가 성묘를 하였다. 이 기사는 중앙일보에서 9월 13일 '어느 날 통째 사라진 조부 묘. 독립영웅 후손 울린 기구한 사연'이란 제하의 기사로 보도되었다.
2023년 1월 17일 국무회의에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대한 법률 개정안이 의결됨에 따라 시신이 없더라도 위패 및 영정의 형태로 봉안이 가능하도록 개정되었다. 이에 최재형의 묘도 복원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렇게 2023년 8월 14일에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108번 자리에 부인 최 엘레나 페드로브나 여사와 함께 순국 103년 만에 합장되었다.[10]
5. 기타
그의 일대기에 관해 더욱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대륙의 영혼 최재형', '독립운동가 최재형', '잊혀진 독립운동가 최재형' ,페치카, 조선공산당 평전 등 여러권의 책이 나와 있다.JTBC 차이나는 클라스 제73회(2018.08.15)에서 그의 이야기가 주제로 나왔다.
MBC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2019.11.17)에서도 러시아 연해주를 가서 최재형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추정되는 곳(우수리스크 감옥 뒷편)을 찾아갔다. 4명의 손자 중 하나인 발렌틴 최[11]가 허허벌판에서 제사했다는 점을 일러주면서 최재형을 추모했다. 손자 발렌틴 최는 독일에서 스키 타다가 사고로 치료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 소속 역사학자들이 진행하는 팟캐스트인 만인만색 역사공작단이 327~330화까지 연해주 무장투쟁을 다루면서 실제 기록에 의거해 최재형의 일생을 자세히 조명했다.
인디게임 제작사 "자라나는 씨앗"에서 제작한 게임 "MazM: 페치카"는 최재형과 그 남자의 비서 '페차'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텔링 게임이다.
네이버 웹툰 고래별(나윤희 작가 / 금요일 웹툰)의 62화에서도 언급되었다.
101주년 삼일절 기념식에 최재형의 장남의 손자인 일리야 최가 방송에 나와 독립선언문을 러시아어로 통역했다.
최재형기념사업회에서 최재형상을 수여하고 있다.
2021년 4월 3일에 연해주에서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순국 100주년을 추모하는 공연이 열렸다.#
2023년 출간된 설민석의 한국사 대모험 제27권이 최재형의 일생을 다뤘다.
[1] 前 감사원장과 한자까지 똑같다.[주장] 전주 최씨 문중에서는 문열공파(文烈公派) 32世孫, 경절공파(敬節公派) 22代孫. '在○(재)' 항렬로 간주하고 있다. 다만 오래 전에 한국을 떠난 탓에 이름이 적혀 있는 족보가 실제로 남아있지 않기에 근거가 없다.[3] 103년만에 부인과 합장(안장), 2023년 8월 14일[4] 러시아어 이름인 표트르의 애칭이 '페티카, 페치카'다. 다만 '페티카'란 단어가 한인들에겐 생소하고 부르기 힘들었기 때문에 유사한 '비지깨'로 부른 것이다. 관련 글 1, 관련 글 2. 최재형이 연해주 한인들에게 한겨울 페치카 같은 믿음직한 분이어서 페치카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5] 전주최씨 평도공이란 주장이 있지만 근거가 없으며, 최재형과 그의 아버지가 오래 전에 한국을 떠난 탓에 이름이 적혀 있는 족보가 실제로 남아있지 않아서 국가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2023년 들어 전주 최씨 종중에서는 최재형을 전주 최씨로 간주하고 있다.[6] 현재의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 하산에 위치. 1863년 겨울 함경도 무산도호부(현 함경북도 무산군) 출신의 최운보(崔運寶)와 경흥도호부(현 함경북도 경흥군) 출신의 양응범(梁應範)이 13호의 조선인을 이끌고 개척한 조선인 마을이다.[7] 1883년생. 한국 이름은 최운학. 1919년에 서시베리아 전투에서 사망.[8] 1885년생. 중국으로 이주했다고 알려져 있다.[9] 1976년 KBS 공채 3기 탤런트이며 용의 눈물, 태조 왕건, 대조영 등 사극에 출연하였다.[10] 유골을 찾지 못해서 순국 추정 장소인 우수리스크에 있는 흙 3kg을 한국으로 봉환했으며, 키르기스스탄 공동묘지에 묻혀 있던 부인 최 엘레나 페드로브나 여사의 유골도 한국으로로 봉환되었다.[11] 최재형의 셋째 아들 발렌틴 소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