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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02:02:47

읍성

1. 개요2. 상세3. 도시와 읍성의 차이점4. 읍성 목록
4.1. 군사분계선 이남
4.1.1. ㄱ4.1.2. ㄴ4.1.3. ㄷ4.1.4. ㅁ4.1.5. ㅂ4.1.6. ㅅ4.1.7. ㅇ4.1.8. ㅈ4.1.9. ㅊ4.1.10. ㅌ4.1.11. ㅍ4.1.12. ㅎ
4.2. 군사분계선 이북
4.2.1. ㄱ4.2.2. ㄷ4.2.3. ㄹ4.2.4. ㅁ4.2.5. ㅂ4.2.6. ㅅ4.2.7. ㅇ4.2.8. ㅈ4.2.9. ㅊ4.2.10. ㅍ4.2.11. ㅎ
4.3. 나무위키에 등재된 읍성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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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읍성(邑城)은 고을의 주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관부(官府, 관청)와 민거(民居, 시가지)를 둘러서 쌓은 성곽이다.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한다.

2. 상세


산성(山城)과 함께 한국 성곽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지역의 중심이 되는 중앙 고을에 위치하여 내부에는 관아와 병영을 비롯한 지방 관아와 향교, 장터 등이 있어 행정, 군사, 교육, 상업 중심지였다.

읍성은 대규모 전란에는 방어 능력이 다소 떨어져 가까운 곳에 산성을 추가로 건설해 두는 게 일반적이었다.[1] 읍성들은 멀게는 삼국시대부터 지어지기 시작해서 여러 왕조를 거쳐 보수하거나 신축되어 조선 시대에는 대부분, 중에 북방에 위치해 여진족을 방어해야 하거나 해안에 접해 왜구를 방어해야 하는 고을에 있었고, 내륙 지역의 군현에는 읍성이 없어# 전국적으로 300여 개의 읍성이 있었다.

다만 읍성이라는 용어는 조선 때부터 등장한다. 구조적으로는 한양도성도 읍성과 유사하나, 왕의 치소가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도성(都城)이라고 구분지어 부른다. 일제강점기 동안 읍성철거령에 의해 대부분의 성이 철거됐으나, 경주읍성, 영천읍성[2] 등 일부 성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해미읍성, 고창읍성, 낙안읍성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지방자치제의 전면 시행 이후 지자체마다 지역의 관광자원 개발과 지역 정체성 확보를 위해 읍성을 복원하는 사업이 이뤄지고 있고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려 최종 등재시키려 노력 중이다.

3. 도시와 읍성의 차이점

전근대까지 서양에서 기원한 도시와 읍성의 차이점은 확실히 명확한 편이다. 우선 형성 과정부터가 약간은 차이가 났다. 도시의 경우 두가지 경우로 나눠졌다. 하나는 고대 로마 시대때부터 계획적으로 설계되거나 아니면 자연적으로 마을의 인구수가 증가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읍성의 경우 그나마 전자와 같은 예이지만 기능 면에서 크게 차이가 났다.

우선 도시의 경우 주로 상·공업이 발달하거나 아니면 해당 기능이 우선적이었던 반면에 읍성의 경우 본래 행정적인 기능만 고려된 채로 조성된 것들이 대부분으로 조선 중·후기가 되면서 상업이 발달하면서 추가적으로 상업적 기능이 추가된 것에 불과하지만 상평통보 항목을 참고하면 동시기 화폐 사용이 보편화된 서양과는 달리 화폐의 보편화율이 25%에 미치지 못했다.

광장의 유무에도 차이가 있었다. 광장은 멕시코 만류와 지중해의 영향을 크게 받는 유럽의 기후적 특성과 함께 전근대까지 건폐율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의 특징으로 인한 심리적 압박감 등으로 인해 생긴 산물로 고대 그리스 때부터 아고라라는 이름으로 광장이 존재했으며, 옛부터 정치·학문적 토론의 장이자 재래시장과 같은 경제적 활동의 중심지였다. 중세에 들어서는 그저 경제적 기능이나 아니면 참수된 죄인의 목을 효수하거나 화형장으로서의 기능만 남아 있었지만 대신 도시의 지배층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공간으로서 성당교회와 그리고 시청이나 마을회관, 길드홀과 같은 공공 건물들이 광장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다만 조선의 읍성을 비롯한 동양권의 경우 이러한 광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서양과는 정반대의 경우로서 서양과 달리 뚜렷한 사계절 및 고온다습한 여름을 가진 기후적 특징과 함께[3] 한국 한정으로 낮은 인구 밀도가 주요인이었고,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상업보다는 농업을 중시되었으며, 상류층을 제외하면 정치적 활동이 제한적이었다. 또한 밑에 후술되어 있지만 다층의 여러 개의 건물들이 벽을 맞대어서 폐쇄적인 유럽의 도시와 달리 조선의 읍성 내의 건물들은 관청과 같은 공공건물이나 주택가 전부가 대개 조선 중기 때까지는 중·상류층 한정으로 2층 가옥이 있으나 조선 후기 온돌의 보편화로 대개 단층에 낮은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또한 마당의 규모가 건물에 비해 상당히 커 개방감이 있어 사실상 광장의 역할을 했으며, 무엇보다 경재적 기능은 위에서 상술하다시피 조선 중기 때부터 점차 사상(私商)이 점차 생기기 시작했고, 대개 객사 내의 마당이나 주막 주변에서 5일장이 열렸다.[4]

위치에서도 차이가 있다. 둘 다 강을 끼고 있는 것은 동일했지만 서양의 경우 몇몇 도시를 제외하면 대체로 평야에 도시가 조성되는 것이 보편적이었고, 몇몇 도시의 경우 아예 강이 없거나 언덕 위에 조성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읍성의 경우 주로 한반도의 지형상 산지가 많았기에 지척에 산이 있는 경우가 많았고, 풍수지리배산임수에 입각한 위치 선정으로 인해 대체로 북쪽으로 산이 남쪽으로 강이 끼고 있으며, 심지어 대구읍성처럼 분지 지형에 읍성이 자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야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기 때문이다.[주의1] 반면 유럽의 경우 국가·지형별로 도시의 위치가 제각각이었다. 우선 유럽은 상기했듯 기후적으로 난류의 영향을 받기에 위치가 어떻게 되든 계절에 따른 불편함을 느끼는 일이 거의 없었다. 또한 절대 다수의 나라들이 기독교 문명에 편입되었기에 땅의 위치를 따지는 것도 미신으로 배척했다. 그래서 배산임수의 지형임에도 알프스 산맥 이북의 도시들처럼 남쪽으로 산이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 로마와 부다페스트처럼 언덕 위에 도시가 조성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근접한 하천의 경우에도 차이가 있는데 서구권의 하천의 경우 대체로 강의 중·하류 지역이 여러 척의 나룻배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넓으며 무엇보다 초기엔 강과 접하고 있다가 도시가 확장되면서 도시의 영역이 강의 반대편까지 확장되었고, 이때문에 수운에서도 나룻배가 도시 안에 정박할 수 있어 도시 내의 나루터의 기능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전쟁이 빈번했던 유럽 지역의 정치적 요인으로 여러 기능이 분산된 것보다는 한 곳으로 집약되는 현상이다. 중세 중기 파리 복원도 16세기 메시나 17세기 쾰른 이는 일본의 도시들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유럽처럼 강의 중하류 지역에 도시가 형성되었다. 대표적인 예시가 다름아닌 에도이다.

반면 읍성의 경우 대개 여름철 폭우로 인해 하천의 범람을 우려해 대개 강가와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편으로 나루터나 포구의 위치가 읍성과 멀리 떨어진 편인데다가 읍성 내에 하천이 있더라도 대개 실개천인 경우가 허다했고, 수문으로 인해 막혀 있었다. 이는 해안에 위치한 현대의 항구에 해당되는 포구 또한 마찬가지로 포구와 읍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었다.[6] 강가형읍성형1읍성형2해안형

또한 도시 주거에서도 상대적으로 차이가 났다. 전근대 이전까지의 서양의 도시의 주거들은 대체로 비좁은 방어벽의 넓이로 인해 건축 부지가 상대적으로 넓지 않는 대신 토지 이용률을 높이기 위해 다층과 비좁은 도시 내의 면적과 동양과 다른 해앙성 기후 등으로 덕에 건폐율이 높은 합벽(combined wall) 구조가 기본이었다.[7] 고대 로마에서 아파트의 시초인 인술라와 귀족들의 저택인 도무스가 있었고, 중·근세의 서·남유럽에선 주로 폭이 좁은 세장형 주택들이 보편적이었고, 파리의 경우 14세기 중반부터 상류층을 위한 도시 환경에 맞는 다양한 구조의 저택이 지어지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또한 도무스를 본뜬 사각형의 중정이 있는 저택인 팔라초를 짓기 시작했다.이탈리아 피렌체의 서민주거지역의 형성과 주거형식의 변화이탈리아, 르네상스건축의 특징 팔라초의 발전르네상스 시대의 팔라초(palazzo)의 공간 구성 특성에 관한 연구르네상스 이후 파리 주거의 변화위키피디아 호텔[8]

하지만 읍성의 경우 대체로 단층 건물이 주류로 가사규제 등으로 인해 계층별로 차이가 있지만 건축부지가 건물 면적에 비해 넓은 것이 특징으로 근·현대 이전의 서구의 도시 주거와 달리 담장으로만 구별이 되어 건폐율이 낮은 것이 특징으로 대체로 읍성 밖의 주거 건축과 대동소이했다. 이는 겨울이 건조한 특성상 화재가 옆집으로 번지는 것을 막는 효과를 노린 것도 있다.[9]

그나마 조선 중기까지 2층 건물이 있었지만 대개 가난한 평민들은 단층 가옥이 보통이었고, 무엇보다 보통 무더운 여름철에만 2층에 거했으며, 가사규제령 등으로 인해 시대가 흐르면서 2층의 높이가 낮아지기 시작해 나중에 일종의 수납 공간인 다락으로만 남게 되었고, 경신대기근을 동반한 소빙하기의 영향으로 인해 온돌이 전 계층으로 보편화됨에 따라 조선 후기의 가옥들은 거의 단층으로 전환되었다.고려시대 상류층의 주거 공간[10]#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합벽구조는 화재에 취약하고 단열성이 떨어진다 하여 아예 법으로 금하고 있다.

무엇보다 17세기 이후부터 도성인 한성부를 제외한 사회적으로 최상위층이었던 사족 집단들은 동일한 가문 구성원들과 함께 읍성 밖에서 집성촌을 형성했고 향리직을 세습하는 지방의 중인층 이하의 계층들만 읍성에서 살았다. 또한 중인을 비롯한 일반 양인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했었더라도 조선초 세종 시기에 반포된 가사규제령으로 인해 정해진 규격·구조·장식을 갖춘 집만 지을 수 있었다. 그나마 사회·문화적으로 문란해진 조선말에 들어서야 읍성 내에 대형 저택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때문에 인구밀도와 도시화율에서도 크게 차이가 보이는데, 일례로 중세 당시의 도시들은 대체로 동양과 비교하면 도시 내의 면적이 비좁은 대신 인구 밀도가 높아 대도시는 3㎥(300만㎥)~6㎦(600만㎥), 중소도시 0.2㎦(20만㎥) 이내, 주거지역 한구당 1인당 13.5~20㎡, 비주거지역은 평균 210㎡였다. 인구 수는 적게는 천 명 수준이었지만 파리 같은 대도시의 경우 약 10만 명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근세로 넘어가면서 인구 수가 크게 증가해 1600년대 220,000명이 되었고, 동시기의 런던 또한 이에 근접한 인구수를 자랑했으며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였던 베네치아 또한 이에 못 미치긴 했지만 인구수가 140,000명이었고, 19세기로 진입하면서 대도시의 인구수는 100만 명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그 외의 지방 도시의 경우에도 중·근세를 거쳐 보통 도시 인구수가 수만 명이 보통으로 당대 기준으로 중남미와 중동 쪽을 포함하면 그나마 도시화율이 높은 편이었다. 더욱이 중세를 기점으로 도시와 농촌이 행정적·정서적으로 분리되었기에 비교적 도시와 농촌의 인구를 분리해서 조사하기 쉬웠다.

반면 읍성의 경우 내부 면적이 넉넉했지만 반대로 인구 밀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읍성의 면적은 적게는 60,000㎥에서 크게는 150,000㎥로 읍성 중 가장 작은 곳이 2만㎥인 진해읍성이며, 가장 넓은 곳이 내성 한정으로 8.5㎦인 개성, 북성+내성 기준으로 4.3㎦인 평양, 1.29㎦인 수원 화성 등이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읍성 내에 살던 인구수를 자세히 아는 것은 불가능 한데, 이는 조선의 인구 조사가 국가가 직접적으로 조사하는 것이 아닌 해당 고을의 주민들이 알아서 신고하는 구조였기에 세금을 피하려고 호구 조사에 일부러 응하지 않은 사람들이 매우 많았고, 실제로 조선 조정의 영향 하의 동원 가능한 인구 수는 세종 시기에는 열의 한둘 정도라고 세종지리지에서 스스로 인정한 바가 있었다.

더욱이 서구권과 달리 도시와 농촌이 행정적으로 분리되지 않던 조선은 인구수를 연구하려는 학자들 입장에서 제대로 확인하는 것이 힘들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읍성에 살던 인구수는 추정에만 근거할 수 밖에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농촌부의 인구수를 합한다고 해도 당대의 유럽의 도시와 비교할 때 도시화율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도시화율이 극단적으로 차이가 난 것에 대해서 상술한 내용에서 나온 것과 함께 조선의 읍성과 영국의 버로우/독일의 부르크와 비교하면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도시 발달에 따라 방어 시설로의 기능이 무력화되었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초장에 도시의 부속물인 버로우/부르크와 달리 읍성은 본래 요새로써 고안되었으나 버로우/부르크같이 도시의 부속물이 되어버린 경우다. 이는 조선 시대의 읍들이 생긴 원인이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이고 시장이 들어서서가 아니라 행정거점에 가까웠고, 방어체계도 피난처 겸 지역방어로서 산성에 의지하였던 탓이다.

유럽의 도시와 달리 조선의 읍성은 공납을 비롯한 제도들을 바탕으로 유사 계획경제를 굴린 속칭 유교 원시 공산주의식 통치 하에서는 자유롭게 경영을 하는 상·공업자들이 기원인 시민 세력의 등장이 극단적으로 억압되었으므로, 당연히 읍의 도시화율도 높지 않았고, 사는 사람이 좀 있다 해도 목숨을 위협 받는 것을 각오해서라도 그곳에 남을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오히려 토지와 노동력의 가치가 높으므로 향촌에서 토지를 경영하는 것이 이익이었다. 결국 남아있을 이유가 각 읍성마다 고을의 치소가 있기에 고을의 행정 실질적 서무를 봐야 하는 향리와 같은 중인들이나 공노비가 아닌 이상 마땅치 않으니 읍성의 기능 상실은 필연이었다. 게다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하도 오랫 동안 전란이 있다보니 주요 인구 밀집지가 아닌 나머지 지역들은 인구가 좀 많다 싶어도 죄다 산에 틀어박혀 중세 성관에 옹기종기 주민들이 모여 사는 것 같이 살고 있었다.

4. 읍성 목록

철거된 읍성도 포함하는 목록이다.

4.1. 군사분계선 이남

4.1.1.

4.1.2.

4.1.3.

4.1.4.

4.1.5.

4.1.6.

4.1.7.

4.1.8.

4.1.9.

4.1.10.

4.1.11.

4.1.12.

4.2. 군사분계선 이북

4.2.1.

4.2.2.

4.2.3.

4.2.4.

4.2.5.

4.2.6.

4.2.7.

4.2.8.

4.2.9.

4.2.10.

4.2.11.

4.3. 나무위키에 등재된 읍성 목록


[1] 고구려 국내성환도성, 평양성대성산성, 백제 한성, 부여성, 신라 서라벌명활산성, 조선 한양과 남한산성 등 역대 왕조의 수도들도 평지에는 도성, 주변 산에는 산성을 지어 2~3성의 방어체계를 가지고 있다.[2] 서측 성벽 일부가 그 위에 지어진 낡은 주택들의 축대로 쓰이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남은 남측 성벽 역시 일대 건물들의 축대로 쓰이고 있다. 동측 성벽은 아예 남아 있지 않으나, 그 터에 시멘트로 축대를 세우고 그 위에 교회를 지은 덕분에 성벽의 흔적이 조금 보인다. 북서측은 시에서 시립체육관을 지으며 땅을 팔 때 성벽 구간만 거의 파지 않은 덕분에, 노출된 암반들로 그 위치를 가늠할수 있다.[3] 비교적 해양성 기후의 특징이 강한 일본조차 광장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4] 여담이지만 많은 수의 인구가 밀집되어 있던 수도인 한성의 경우 아예 불법 건축물이라 할 수 있는 가가(假家)를 만들어 거기서 상업 활동을 이루어졌는데, 지나치게 많아졌던 탓에 한성부 내의 도로가 극악으로 좁혀지면서 1896년 도시개조사업을 하기 전까지 대로가 아닌 이상 여러 사람이 함께 다니기 힘들 정도였다.[주의1] 보편적 인식이 그렇지 실제로 새벽에 발생하는 기온 역전 현상으로 대기가 순환하지 않기 때문에, 공기가 좋은 곳이 아니라면 아침에 운동을 하면 좋지 않다. 사방에서 바람이 산을 타고 푄 현상을 일으키는 탓에 여름이 되면 매우 덥다. 물론 철원군의 예처럼 겨울이 되면 매우 춥다. 춘천시처럼 여름엔 엄청나게 덥고 겨울엔 엄청나게 춥다. 특히 대구의 경우 구름이 산을 통과하지 못하고 빗겨가거나 분지 지형 특성상 대류가 어려워 구름이 발생하기 어렵기 때문에 강수량도 상대적으로 적을뿐더러 대프리카라는 별명답게 춘천시처럼 여름에 엄청나게 덥기로 유명하다.[6] 부산을 예로 들자면 원래 조선시대에 동래구가 중심지였으며 부산이란 지명은 본래 진성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후 부산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지금과 같은 지명의 위치가 역전된 것이다.[7] 이는 일본의 성 아래 마을의 마찌야(町家)와 중국의 사합원倒座房, 묘족의 마을 가옥, 등 전통 주거가 남아 있는 구도심 역시 대체로 합벽으로 되어 있다.[8] 영어, 불어 주의[9] 실제로 유럽이나 일본의 대도시에서 대형화재가 생기면 도시 전체로 번져 말 그대로 '대화재'(Great Fire)가 되는 경우가 빈번했는데, 조선에는 그런 게 거의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유럽과 일본의 경우 방화 및 화재에 대해 무대책인 것은 아니었다. 화재 예방 및 방화범에 대한 처벌에 대한 법률 제정과 각종 소방 장비 그리고 점차 목조 건물에서 벽돌 건물을 세우면서 도시 내의 화재를 예방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링크[10] 링크에 고려시대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사실 넓게 보면 조선 중기까지 포함된다.[고성]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소재[거제] 경상남도 거제시소재 고현성이라고도 한다.[사천] 경상남도 사천시 소재[광양] 전라남도 광양시 소재[당진] 충청남도 당진시 소재[대구] 대구광역시 소재[제주] 제주특별자치도 소재[예산] 충청남도 예산군 소재[예산] [부산] [당진] 충청남도 당진군 소재[무안] 전라남도 무안군 소재[고창] 전라북도 고창군 소재[밀양] 경상남도 밀양시 소재[보령] [보성] [부안] [서천] 충청남도 서천군 소재[사천] 경상남도 사천시 소재[서천] [합천] 경상남도 합천군 소재[서산] 충청남도 서산시 소재[삼척]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소재[구미] 경상북도 구미시 소재[성주] 경상북도 성주군 소재[화성] 경기도 화성시 소재[수원]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소재[순천] 전라남도 순천시 소재[안동] 경상북도 안동시 소재[안산] 경기도 안산시 소재[안성] 경기도 안성시 소재[양산] 경상남도 양산시 소재[양양]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소재[울산] 울산광역시 울주군 소재[포항] 경상북도 포항시 소재[영광] 전라남도 영광군 소재[창녕] 경상남도 창녕군 소재[영암] 전라남도 영암군 소재[영천] 경상북도 영천시 소재[영주] 경상북도 영주시 소재. 구한말까지 위의 영천과 한자가 다른 영천이었다.[군산]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옥구읍 소재[창원] 경상남도 창원시 소재[의령] 경상남도 의령군 소재[군산]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임피면 소재[포항] 경상북도 포항시 장기면 소재[장흥] [전주] 전라북도 전주시 소재[제주] [제주] [진도] 전라남도 진도군 소재[진주] 경상남도 진주시 소재[주의2] 읍성으로 분류되나 사실 병영성으로 진주 목사의 치소인 동헌과 객사는 진주성 밖 대사지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장성]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 소재. 임진왜란으로 인해 지역기반마저 무너져 장성도호부에 병합되었다.[창원]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진동면 소재[창원] 경상남도 창원시 소재[철원]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소재[청도] 경상북도 청도군 소재[청주] 충청북도 청주시 소재[충주] 충청북도 충주시 소재[포항] 경상북도 포항시 청하면 소재[함안]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소재[태안] 충청남도 태안군 소재[영주] 경상북도 영주시 소재[하동]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소재[서천] [함양] 경상남도 함양군 소재[함평]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읍내리 소재[해남] 전라남도 해남군 소재[서산] 충청남도 서산시 소재[홍성] [화천]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 소재[고흥] 전라남도 고흥군 소재[포항]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읍 소재[84] 평안남도[85] 함경북도[86] 함경북도[87] 함경북도[88] 함경북도[89] 강원도[90] 함경남도[91] 함경북도[92] 함경북도[93] 평안북도[94] 함경북도[95] 함경남도[96] 양강도[97] 함경북도 김책시 소재. 본래 성진진성이었으나 성진군 설치로 개칭됨.[98] 평안북도[99] 함경북도[100] 강원도[101] 자강도[102] 강원도[103] 평양시[104] 황해남도[105] 황해북도[106] 함경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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