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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임체는 문루 및 성곽이 대부분이 소실되어 터만 남은 읍성, 볼드체는 대부분이 보존, 복원된 읍성 행정구역은 현재 대한민국 기준 산성 틀 바로가기 | }}}}}}}}} |
1. 개요
조선 전라도 광주목의 중심지였던 현 광주광역시 동구에 있었던 읍성이다. 극히 일부만이 남아서, 1994년에 광주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20호 '광주읍성 유허'로 지정되었다.2. 무진도독성
무진도독성(또는 무진도독고성)은 광주읍성의 전신이 되는 통일신라 시대의 토성이다. 이름처럼, 통일신라 무진주 도독의 치소가 있었다. 7세기 후반에 무진주가 설치된 후, 8세기 말~9세기 초에 건설되어 통일신라 말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최영주,2021]2.1. 기록
통일신라 기록에는 문무왕 또는 신문왕 재위기에 무진주를 설치해 도독을 파견했다고 하지만, 성에 관한 언급은 없다. 성에 관한 기록은 조선시대부터 나타난다. 세종실록지리지(1452),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여지도서(1765), 광주목지(1798), 대동지지(1866) 등에 언급되어 있다.무진도독 때의 옛 토성: 둘레가 2,560보이다.[세종실록지리지]
무진도독고성: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주위가 32,448척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무진도독고성: 주의 북쪽 5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주위가 32,448척이다. 지금은 없어졌다.[여지도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달리 ("현"이 "주"로 바뀌었고) "지금은 없어졌다(今廢)"는 내용이 추가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 때에는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있었으나, 200년이 지나는 동안 침식 등으로 인해 흔적이 아예 없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2.2. 위치, 규모
위치는 광주 원도심인 금남로·충장로 일대로 추정된다. 도독성에 관한 기록,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건물지·우물지·기와 조각 등 유물, 인근 사찰지(성거사지, 백천사지, 십신사지 등), 방리제에 따른 격자형 구획, 일제강점기 지적원도·지형도에 나타난 흔적 등을 근거로 한다.[임영진,2008][황인호,2014][최영주,2021]'무진도독성이 현의 북쪽 5리에 있다'는 기록[신증동국여지승람]을 근거로 무진고성이 무진도독성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9] 일단 무진고성은 토성이 아니라 석성이다. 또한 광주읍성을 기준으로 한 방위 개념(참조)을 생각하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같은 기록에서 무등산은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고 하고, 경양역(현 무등산자이&어울림)은 동쪽 8리에 있다고 한다. 무진도독성이 무진고성을 칭하는 것이라면, 동쪽이라고 기록하지 북쪽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같은 기록에서 십신사(十信寺, 현 임동오거리 근처)는 북쪽 5리에 있다고 한다. 당시 그 근처에 옛 토성이 남아있었다는 추정으로, 무진도독성이 북쪽 5리에 있다는 기록을 간단히 해석할 수 있다.
조선시대 기록을 고려했을 때, 무진도독성의 규모는 둘레가 6,771m로 추정된다.[임영진,2008] 한편 여말선초에 건설된 광주읍성은 2,500m 정도이다. 그 이유를 추정해 보면, 통일신라시대에는 중심지였으나, 고려시대에 중심지가 나주로 바뀌어 쇠락했기 때문에 축소되었을 수 있다.[최영주,2021] 그런데 여말선초에 건설된 나주읍성도 둘레가 3,700m로, 6,771m보다 크게 작다. 그렇다면 토성과 석성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토성보다 석성의 비용이 더 크기 때문에, 효율적인 방어를 위해 주거가 밀집돼있거나 관청 등 주요 시설이 있는 중심지만 둘러싼 결과일 수 있다.
2.3. 구조
[도도로키,2020] | [최영주,2021] |
배경 지도는 조선총독부 광주지형도(1917, 1:10000)이다. |
- 입지: 북서쪽이 열려 있고 나머지는 산과 언덕으로 둘러싸인 분지 안이다. 광주천을 따라 북서-남동 방향으로 형성되어 있다(완산주성(전주부성)과 비슷하다).
- 성벽: 기록에 따르면 토성이다. 무진주의 방리를 아우르는(동서로는 동계천과 광주천 사이, 남북으로는 남동에서 북동까지) 나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술했듯 적어도 조선시대까지 흔적이 남아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해자: 동계천과 광주천이 해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도도로키,2020]
- 방리 구획: 통일신라시대에는 방리제를 시행했는데, 이 당시 형성된 격자 구획은 지금도 광주 원도심에 남아 있다. 그러나 격자 구획 위에 경작지, 주거지, 관아, 장터, 종교시설 등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충장로: 1994년 광주일고 신축공사 전 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건물지가 발굴되었다. 이 건물의 장축 방향이 충장로와 평행한 것으로 보아 충장로가 적어도 이때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임영진,2008]
- 주작대로(?): 현 충장로와 금남로 사이에 폭이 좁은 구획이 있는데, 주작대로일 가능성이 있다.[도도로키,2020] 비슷하게 남원경(남원시), 사벌주(상주시)같은 도시의 방리구획에도 중앙에 폭이 좁은 구간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주작대로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경주에서 주작대로의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 지방도시에 주작대로가 있었을 가능성은 낮다. 그렇더라도 의도적으로 만든 구획일 가능성은 높다.[황인호,2014]
- 관청: 아시아문화전당 부지 발굴 당시 통일신라시대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이 일대에 관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최영주,2021]
3. 광주읍성
3.1. 역사
성을 언제 쌓았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여말선초에 왜구의 칩입을 막기 위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조정규,2013]조선시대 기록으로는 세종실록지리지(1452),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여지도서(1765), 대동지지(1866), 광주읍지(1899) 등이 있다.
읍 석성: 둘레가 972보이다.[세종실록지리지]
읍성: 돌로 쌓았다. 주위가 8,253척이고, 높이가 9척이다. 안에 우물 백 개가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읍성: 돌로 쌓았다. 주위가 8,253척이고, 높이가 9척이다. 안에 우물 백 개가 있으며, 연못은 없다.[여지도서]
일제강점기, 1910년 읍성 철거령이 내려진 후 인위적으로 철거되기 시작한다. 시가지 확장과 함께 1920년대까지 서서히 철거되었고 그 자리는 대지와 도로가 되었다.[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1992년 옛 전남도청(現국립아시아문화전당)주차장 부지정리 사업 도중 성벽과 토축이 발견되었고, 1994년 4월 13일 광주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 20호로 지정되었다. 2006년~2007년에도 발굴 조사가 이어졌다. 문화전당 건설 중인 2014년 성벽 유허를 복원했다. 문화정보원 위쪽, 동구청 버스정류장 근처에 있다.
2001년 광주광역시 동구청은 광주읍성 및 성문 유허 복원사업의 기초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남문 진남문에 대한 문헌 및 현지조사를 전남대학교에 의뢰했고 진남문과 양쪽 약 30m 성곽을 복원하기 위해 예산(문화재청 지원40억원, 시·구비 30억원)을 마련하려고 했으나 대선 공약으로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 건립이 거론되며 흐지부지되었다. 2011년에는 예산 622억을 들여 4대문 및 체성을 복원한다고 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광주역사민속박물관에 복원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3.2. 구조, 건축
19세기 후반 광주읍성 추정. 세부는 관아 문단 지도 참조. |
1907년(?) 광주 전경. 광주공원 서오층석탑 쪽 언덕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앞쪽 다리는 1907년 건설된 광주교, 뒤쪽 산은 장원봉이다.[26] | 1900년대. 광주공원에서 바라본 광주읍성과 무등산. 앞쪽은 작은 장이 열리던 모래톱. 오른쪽은 노지다리. |
3.2.1. 성벽
- 성벽: 둘레는 약 2,500m, 높이는 약 2.8m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꽤 큰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28] 법정동 구획으로 흔적이 남아 있다. 충장로3가-금남로3가-궁동-대의동-광산동-황금동이 둘러싸는 영역이다.
- 해자: 성벽을 둘러싸는 해자가 있었다. 광주천 조탄보를 통해 물을 끌어왔다.
1900년대 공북문(충파 앞) |
- 공북문(拱北門, 북문): 중층 문루 형태인 개거식 성문이었다(다른 성문도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충장로3가 충파(충장치안센터) 앞에 있었다. 그 자리에 광주폴리 99칸이 설치되어 있다. 한양으로 연결되는 관문이기 때문에 가장 위상이 높은 정문으로 인식되었다.[전경숙,황영산,2015]
- 서원문(瑞元門, 동문): 대의동, 제봉로와 제봉로140번길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광주폴리 서원문 제등이 근처에 있다.
- 진남문(鎭南門, 남문): 문화전당 부지 안, 문화전당역 1번 출구 근처에 있었다.
- 광리문(光利門, 서문): 황금동, 광주폴리 기억의 현재화가 성문이 있던 자리를 표시하고 있다.
3.2.2. 성내
3.2.2.1. 도로
격자형 도로망이 있었다. 무진주 때 만들어진 방리구획을 그대로 이어서 광주읍성이 그 위에 축성되어 나타난 특징으로 보인다. 도로망의 중심은 충장로우체국 사거리였다. 4대 문에서 이어지는 길이 충장로우체국 앞에서 만났다.3.2.2.2. 객사
1910년대 광산관. (오른쪽) 충장로 쪽에서 본 광산관 동익헌. |
- 광산관(光山館): 객사. 광산은 광주의 별칭이다.[30]
- 1872년 지방지도에는 객사가 동북사분면(동문과 북문 사이)에 있는 것으로 그려졌지만 오류이다. 실제로는 서남사분면에 있었다.[31] 여지도서·지승·호남읍지 지도에는 1872년 지도와 달리 서남사분면에 객사가 그려져 있다. 1917년 광주지형도에 군청(郡廳)이라고 표시돼 있는 건물을 통해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충장로1가 25-1(구 무등극장) 일대이다.
- 1909년 객사 제도가 폐지된 후 회의실, 군청, 교실 등 여러 용도로 이용되었다. 동익헌은 개조 후 광주군청이 들어섰다.[조광철,2010]
- 1922년 광주군청이 다른 곳[33][김경수,2021(1)]으로 이전하면서 철거되었으며 부지는 민간에 매각되었다.[조광철,2015]
1900년대 황화루 | 1956년 광주형무소와 황화루(오른쪽).[36] |
- 황화루(皇華樓): 중층 누각으로, 광산관 정문이었다.
- 1910년대에 동명동 형무소 앞쪽으로 옮겨져 간수 양성소로 개조됐다. 1971년 교도소가 문흥동으로 이전한 뒤 헐렸다.[조광철,2011(1)][김경수,2021(2)]
- 객사 구역에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여느 객사처럼 중삼문·내삼문이 있었을 것이다. 황화루 사진 왼쪽에 중삼문 또는 내삼문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보인다.
3.2.2.3. 관아
조선총독부 광주지형도(1917, 1:10000)를 바탕으로 추정한 관청 배치 |
- 현 구도청광장 일대(금남로1가)가 관청 구역으로, 광주목(광주군) 관아가 있었다. 1896년에는 이곳에 전라남도 관찰부가 설치되었다. 이후 여러 건물이 증·개축되어 규모가 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제국 시기까지 주요 관청 건물들은 금남로1가에 있었으며, 맞은편인 광산동에는 부속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대 후반, 경무부·헌병대 정문으로 사용된 선화당 삼문. 문 너머로 보이는 건물은 물산진열장으로 증축된 부분이며 그 뒤에 선화당이 있었다. | 1900년대 광주읍성 관청가. 문화전당역 3번 출구 옆에서 동명동 방향을 바라본 풍경이다. |
- 하모당(何暮堂)·서석헌(瑞石軒), 선화당(宣化堂): 동헌. 광주목사의 사무실이었다. 서석헌은 하모당의 별칭이다. 1896년 전남관찰부가 설치되고 관찰사 집무실로 바뀌면서 선화당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 1910년 관찰부가 도청으로 바뀌며 선화당 맞은편 기존 재무감독부 건물로 이전됐고(구전남도청 위치), 선화당 건물은 전남지역 특산품을 전시하는 물산진열장으로 이용되었다. 1920년대에 헐렸고 일본식 체육관인 무덕전이 건설되었다.
- 1917년 지도를 참조하면, 민주의종각 남쪽, 상무관 서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46년 전남도청 일대. 사진 위가 남쪽이다. 왼쪽 아래 관아 건물로 추정되는 한옥 두 채가 있다. 오른쪽 사진과 주석 참조. | 1966년 전남도청 일대.[자세히] |
- 내아: 광주목사의 관사.
- 신향각 또는 문향각: 내아 뒤쪽에 있었던 정자.
- 제금루(製錦樓): 동헌의 정문인 중층 문루이다. 1848년 처음 지어졌다.
- 기록에 따르면 1877년에 관아에서 화재가 일어나 소빈헌과 월소루가 불에 탔다. 이때 제금루도 화재로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41] 그런데 소빈헌과 제금루가 가까운 곳에 있어서 화재가 번진 것일 수 있다. 1917년 지도를 참조하면, 소빈헌은 구도청광장 분수대, 제금루는 소빈헌 남쪽, 문화전당역 4번 출구 북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소빈헌(笑嚬軒): 하모당 서쪽에 있었다. 소빈헌의 누마루는 따로 월소루(月小樓)라고 불렀다.[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 육화당: 선화당 근처에 있었다. 아전들의 사무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일제강점기에 경무부·헌병대로 사용되었다.[조광철,2011(2)]
- 1917년 지도에 경무부·헌병대라고 표기되어 있는 건물 위치를 참조하면, 구도청광장 시계탑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10년대, 서기청 건물을 빌려 개원한 자혜의원. |
- 서기청: 관아의 부속 건물. 1910년에 자혜의원(전남대병원의 전신)이 설립되었다.[김경수,2021(3)]
- 구도청 별관 서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이외 여러 관아 건물이 있었다.
3.2.2.4. 기타
- 주둔지: 대한제국 시기에는 광주진위대가 주둔했다. 1907년 군대 해산 후에는 일본군, 1910년대에는 헌병경찰이 주둔했다.
- 희경루(喜慶樓) 또는 관덕정(觀德亭): 현 충장로우체국(구 광주우체국)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23년에 광주향교 북쪽에 중건되었다.
- 누상고·누하고: 황금동 63번지에 있었다. 2층 건물로, 1층을 누하고, 2층을 누상고라고 불렀다. 호적·군적 등을 보관하는 문서보관소였다.
- 읍창: 충장로3가 24번지에 있었다.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였다.
- 감옥: 황금동 34번지 일원(1912년 기준 광주면 서문통 9번지)[김경수,2021(2)]에 있었다.
3.2.3. 성저
1910년대 공북루 | 1901년 공북루에서 공북문으로 이어지는 풍경(충장로5가) |
- 공북루(拱北樓) 또는 절양루: 충장로5가, 독립로와 충장로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북쪽에서 공북문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어 랜드마크 역할을 했다. 누문동 이름의 유래이다.
- 향교
- 장터[조광철,2017]
- 큰 장: 현 광주대교-광주교 일대의 모래사장에서 열렸다. 또는 공북루 근처에서 열리기도 했다. 말 그대로 큰 장이었다. 1910년대 기준 큰 장의 거래 금액은 작은 장의 10배였다.[47][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 작은 장: 현 부동교 근처 모래사장에서 열렸다.
1910년대 큰 장. 오른쪽 언덕이 현 광주공원이다. 왼쪽 멀리 보이는 산은 제석산 치마봉이다. |
3.3. 광주읍성과 방위
조선시대에, 북문 밖 도로는 북서쪽을 향하고 있지만 결국 북쪽에 있는 한양으로 이어지기에 그 방향을 북쪽으로 취급했다. 북문을 기준으로 하여 동·서·남문 방향도 정해졌다. 현재 그 흔적이 도로명 등에 남아있다.[조광철,2016][최영주,2021] 최영주. (2021). 삼국·통일신라시기 광주 중심지 연구. 역사학연구, 83, pp. 35-72.[세종실록지리지]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전라도/장흥도호부/무진군[신증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35권, 전라도/광산현[여지도서] 여지도서, 전라도/광주[임영진,2008] 임영진. (2008). 統一新羅武珍都督城의 位置와 規模. 지방사와 지방문화, 11(2), pp. 243-266.[황인호,2014] 황인호. (2014). 新羅 9州5小京의 都市構造 硏究. 중앙고고연구, 15, pp. 105-146.[최영주,2021] [신증동국여지승람] [9] 근처에 있는 '도독골'이라는 지명을 근거로 들기도 하는데, 도독골·도둑골·두둑골 류 지명은 전국에 흔하다. 각각의 유래 또한, 장군(도독)이 머물만한 지형이라 해서 도독골, 진린 도독이 진을 쳤던 곳이라서 도독골, 도둑이 숨기 좋은 으슥한 곳이라서 도둑골, 도둑이 많아서 도둑골, 지형이 두둑한 형상이라서 두둑골 등 다종다양하기 때문에 무진도독성 비정의 증거가 되기 어렵다.[임영진,2008] [최영주,2021] [도도로키,2020] 도도로키 히로시. (2020). 지적원도를 활용한 신라 무진주(무주) 경관 복원. 한국고지도연구, 12(1), pp. 5-24.[최영주,2021] [도도로키,2020] [임영진,2008] [도도로키,2020] [황인호,2014] [최영주,2021] [조정규,2013] 조정규. (2013). 일제강점기 光州邑城內의 경관변화. 남도문화연구, 24, pp. 237-262.[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광주역사민속박물관. (2020). 1896년 광주 여행기 (pp. 172-233).[조정규,2013] [전경숙,황영산,2015] 전경숙, 황영산. (2015). 광주읍성 공간의 형성과 해체 그리고 재현. 한국도시지리학회지, 18(1), pp. 1-11.[26] 인터넷이나 관련 서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진들은 좌우가 뒤집혀 있다. ### 링크 속 사진이 실제라면, 광주교의 상류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광주교의 상류 쪽에서 바라볼 때 절대 뒤쪽으로 장원봉이 보일 수 없다. 링크 속 사진을 좌우반전해야 실제 경관이 나온다.[신증동국여지승람] [28] 동래읍성의 절반정도, 대구읍성과 비슷한 정도였다.[전경숙,황영산,2015] [30] 광산구 이름을 여기에서 따왔다.[31] 이 지도는 오류가 은근히 많은데, 양림(陽林)·방림(芳林)이 광주천 동쪽에 그려져 있는가 하면 풍영정(風詠亭)이 영산강 동쪽에 그려져 있기도 하다.[조광철,2010] 조광철. (2010.11.01). [광주갈피갈피]나라의 운명과 행보를 같이한 객사. 광주드림.[33] 현 하늘마당 캐노피 위치이다. 한편 광주면(읍)사무소가 1920년대부터 현 구시청사거리에 있었다. 1935년 도농분리정책으로 광주군이 광주부와 광산군으로 쪼개지는데, 이때 광주군청이 광산군청이 되고 광주읍사무소가 광주부청이 된다. 광주부청은 광복 후 그대로 광주시청이 되었으며 '구시청사거리'의 유래가 된다. 광산군청은 1949년 송정동으로 이전했다.[김경수,2021(1)] 김경수. (2021.11.18). [김경수의 광주땅 최초 이야기](29)행정기관. 광주매일신문.[조광철,2015] 조광철. (2015.1). 근대교육 태동지에서 관공서 등으로. 광주드림.[36] 황화루의 위치는 동명동 200-26, 사진 촬영 위치는 동명동 200-183으로 추정된다.[조광철,2011(1)] 조광철. (2011.11). 황화루, 귀빈 접대 객사의 정문. 광주드림.[김경수,2021(2)] 김경수. (2021.08.12). [김경수의 광주땅 '최초'이야기](15)교도소. 광주드림.[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자세히]
(보라색은 1917년 광주지형도에 그려진 건물의 형태이다. 연두색은 1966년 항공사진에서 지붕의 모양을 표시한 것이다.) 가운데 보이는 무덕전은 상술했듯 선화당 일곽에 지어진 일본식 체육관이며, 1968년 금남로 확장으로 철거됐다. 무덕전 오른쪽 위 2개 건물은 1917년 광주지형도에 그려진 것과 위치와 모양이 유사하므로, 적어도 구한말 때부터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ㄷ자형 건물은 나주·김제읍성 등의 내아와 형태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내아 건물일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다면 그 뒤쪽은 부속 정자인 신향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건물들은 1969년 바로 옆에 상무관이 건설된 후에도 남아 있다가 1990년대 들어 다른 건물 건설로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1980년의 모습은 60-26번 사진, 23-09번 사진 참조.[41] 소빈헌과 월소루는 2년 뒤에, 제금루는 1896년 전에 복구됐다.[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조광철,2011(2)] 조광철. (2011.11). 선화당·하모당·내아·육화당 등 길 양편으로 관아가 즐비. 광주드림.[김경수,2021(3)] 김경수. (2021.07.01). [김경수의 우리땅 최초 이야기](10)병·의원. 광주드림.[김경수,2021(2)] [조광철,2017] 조광철. (2017.12). 광주의 큰 장과 작은 장 광주드림.[47] 한편 인근의 나주 남평장, 남원 남장이 광주 큰 장과 비슷한 규모였다. 전라도에서 가장 거래 금액이 컸던 전주장은 광주 큰 장의 2배였다. (1910년대 기준.)[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조광철,2016] 조광철. (2016.10). 남광주역은 광주의 남쪽이 아니다 광주드림.
(보라색은 1917년 광주지형도에 그려진 건물의 형태이다. 연두색은 1966년 항공사진에서 지붕의 모양을 표시한 것이다.) 가운데 보이는 무덕전은 상술했듯 선화당 일곽에 지어진 일본식 체육관이며, 1968년 금남로 확장으로 철거됐다. 무덕전 오른쪽 위 2개 건물은 1917년 광주지형도에 그려진 것과 위치와 모양이 유사하므로, 적어도 구한말 때부터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ㄷ자형 건물은 나주·김제읍성 등의 내아와 형태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내아 건물일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다면 그 뒤쪽은 부속 정자인 신향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건물들은 1969년 바로 옆에 상무관이 건설된 후에도 남아 있다가 1990년대 들어 다른 건물 건설로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1980년의 모습은 60-26번 사진, 23-09번 사진 참조.[41] 소빈헌과 월소루는 2년 뒤에, 제금루는 1896년 전에 복구됐다.[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조광철,2011(2)] 조광철. (2011.11). 선화당·하모당·내아·육화당 등 길 양편으로 관아가 즐비. 광주드림.[김경수,2021(3)] 김경수. (2021.07.01). [김경수의 우리땅 최초 이야기](10)병·의원. 광주드림.[김경수,2021(2)] [조광철,2017] 조광철. (2017.12). 광주의 큰 장과 작은 장 광주드림.[47] 한편 인근의 나주 남평장, 남원 남장이 광주 큰 장과 비슷한 규모였다. 전라도에서 가장 거래 금액이 컸던 전주장은 광주 큰 장의 2배였다. (1910년대 기준.)[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조광철,2016] 조광철. (2016.10). 남광주역은 광주의 남쪽이 아니다 광주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