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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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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웅천읍성(熊川邑成)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소재한 성내동의 읍성이다. 성벽 일부만 남아있던 것을 2011년 읍성 복원사업으로 동문 일원과 해자, 남쪽 성벽 일부를 복원하였다.2. 역사
웅천읍성 객사(1962년 당시 웅천국민학교 교무실) |
1407년(태종 7) 개항한 제포(또는 내이포)에 불법으로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가 늘면서 고을을 보호하기 위해서 1434년(세종 16) 웅천읍성을 쌓기 시작했다.[1]
1451년(문종 원년)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동·서·북에 수로를 만들어 성 일부를 확장하였다.
1453년(단종 원년)[2] 성이 좁아 가을에 증축하고 해자를 파라고 하다.
1510년(중종 5)에는 삼포왜란이 일어나 일시 함락되어 동문인 견룡문이 소실되기도 했고, 임진왜란 때에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오랫동안 남해안을 방어하는 거점으로 사용되었으나 1895년(고종 32)부터 읍성으로서 기능을 상실한 걸로 보고 있다.
1906년(고종 44)에 주기효에 의해 웅천 개통학교[3]가 개설되고, 1909년(순종 3) 현재 웅천우체국의 전신인 마천우편소가 세워지는 등의 과정을 거쳐 성내 건물들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성벽도 많이 훼손되었다.
1968년 11월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읍성내 건물이였던 객사[4]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웅천국민학교(現 웅천초등학교)[5]가 생겼다.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 도지정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2011년, 일제강점기 이후 일부 성벽만 간신히 남아있던 웅천읍성의 복원을 결정했다. 이후 동쪽 성벽과 동문인 견용문 일원 그리고 남쪽 성벽 일부를 복원했다.
3. 여담
웅천읍성 객사 천장에 존재하던 여의주를 문 쌍룡조각 |
웅천읍성 존재하던 복원조감도 팻말 |
웅천고등학교 본관 계단에 있는 복원조감도와 설명 |
2022년부터 이 웅천읍성을 기리는 축제인 웅천읍성축제가 진행되고 있다. 2023년 제2회 웅천읍성축제에서 인근에 위치한 웅천고등학교에서 사람을 뽑아 하마비, 조선수군, 도공행렬을 했다. 2024년 10월 열릴 예정인 제3회 웅천읍성축제는 무려 축성 590년을 맞이하는 축제다.
웅천읍성에는 4개의 대문이 존재했었는데 각각 동문은 견룡문(見龍門), 서문은 수호문(睡虎門), 남문은 진남루(鎭南樓), 북문은 공신문(拱宸門)이라 불렸다.현재 남아있는 곳은 2011년 복원된 견룡문(見龍門)과 서벽·남벽은 일부만 있고, 도로 개설로 인해 북벽은 흔적도 없는 상태이다.
웅천동 주변 지명은 웅천읍성의 방향에 따라 정해진 것이 있다. 우선 웅천읍성 남문과 북문 방향이라 그 말그대로 지명이 된 남문동과 북부동, 웅천에는 동천(東川)이라는 수량이 적은 하천이 있는데 이 또한 웅천읍성 동쪽에 흐르는 하천이라 하여 동천(東川)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바로 맞은 편에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위치해 있다.
성벽에 있는 명문석을 통해 당시 웅천읍성을 쌓기 위해 진주, 창녕, 청도, 합천 등 경상도 전역의 백성들이 동원하여 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輿地圖書),웅천지(熊川誌) 등의 기록에 의하면 성안의 시설물로 객사[7](現 곰내유치원 자리), 동헌, 장적고, 향사당, 인리청, 군관청, 장관청, 훈도청, 지인방, 사령방, 관노방이 있었다고 한다.
웅천읍성에서 도보로 걸어가면 거진 10 여분 거리인 남문동에 웅천왜성이 있다.
[1] 세종실록 65권, 세종 16년 8월 5일 기유 4번째기사[2] 단종실록 5권, 단종 1년 1월 7일 을축 4번째기사[3] 현 웅천초등학교(경남)[4] 그 당시 웅천국민학교 교무실로 쓰였다고 하지만 더이상 유지•보수가 어렵다고 판단 이를 해체 한 것이다.[5] 웅천초등학교는 남문동으로 이전하고 현재는 그 자리에 곰내유치원이 자리잡고 있다.[6] 단편적으로 보아도 읍성 전체를 복원한다는 것은 굉장히 자금도 많이 들뿐만 아니라 그 일대의 땅을 사야하니 주민들과의 협상이 아마 결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7] 위의 흑백 사진을 참고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