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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1 14:32:02

부산 복천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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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273호
<colbgcolor=#315288><colcolor=#fff> 부산 복천동 고분군
釜山 福泉洞 古墳群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일원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고분군
면적 46,179㎡
지정연도 1981년 6월 9일
제작시기 가야시대
위치

1. 개요2. 역사3. 특징4. 논란5. 외부 링크6. 사적 제273호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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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db.kookje.co.kr/L20130719.22030184813i1.jpg
<colbgcolor=#315288><colcolor=#fff> ▲ 복천동 고분군 전경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에 위치한 가야-신라 시대의 무덤군. 대한민국의 사적 제273호이다.

여러 시대의 2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무덤이 있었고 이곳에서 가야토기, 무기, 갑옷, 금동관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부산의 또다른 대규모 고대 고분군으로 부산 연산동 고분군이 있는데 복천동보다 좀 더 뒷 시대 고분군이다. 복천동에 고분을 만든 고대 부산의 정치세력이 연산동으로 이동했다는 설도 있다. 복천박물관에서는 그것을 정설로 안내하고 있다.

이 고분군은 조선시대 부산의 중심이던 동래읍성 안쪽으로 인근에 동래읍성역사관, 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 부산3.1독립운동기념탑 등이 있다.

2. 역사

고분이 발굴되기 전까지는 이 자리에 6.25 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민이 몰려들면서 형성된 무허가 판자촌이 들어서 있었다. 1969년 9월, 주택 개발을 위해 이 판자촌의 꼭대기에 있는 집들을 철거하던 도중 굴삭기가 현재의 고분이 있던 곳의 일부를 건드렸는데, 고분의 벽이 무너져 내리며 생긴 구멍으로 수십여 개의 유물로 추정되는 것들이 쏟아져 나왔고 공사를 감독하던 새마을 지도자가 이를 의아하게 여겨 동래구청에 신고하면서 고분의 존재가 밝혀지게 된다. 문화공보부는 즉각 발굴 지시를 내렸고,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의 주관으로 발굴 작업이 착수되었다.

제대로 된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라 대충 지은 판자집이었기 때문에 땅을 깊게 파지 않았고 무덤들도 대부분 지하 깊숙히 조성되어서 피난민들이 수십년간 살았지만 땅 아래 유적이 파괴되는걸 면할 수 있었다. 오히려 판자촌이 생겨서 도굴꾼의 접근을 막아주어 유적 보호에 공헌한 셈이 되었다.

하지만 판자촌 철거 장면을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이 유물들을 멋대로 가져가는 바람에 현장에 온 구청 공무원이 그것을 일일이 도로 회수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발굴된 항아리 안에 가득 찬 물을 마시는 사람은 무병장수한다는 헛소문이 인부들 사이에서 돌아 이들이 그 물을 몽땅 마셔버리는 일도 있었다. #

이렇게 판자촌의 꼭대기 동네는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으나 아랫마을은 1990년대까지도 여전히 판잣집들이 들어서 있었다가 90년대 중반의 유적지 정화 사업으로 남은 집들도 차례차례 철거되며 현재의 모습이 갖추어지게 된다.

3. 특징

부산 지역 최대의 가야~신라 고분군이다.

초기 신라(사로국)의 세력권이 주로 분포한 낙동강 동쪽이면서도 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시금관가야와 가까운 절묘한 위치 덕분에 시기별로 가야의 전성기에는 가야의 영향력이, 신라의 전성기로 갈수록 신라색이 강해지는 중간적 지역으로서의 특징이 두드러져 시대별 형식 변천과 고대 한반도의 정세 등 많은 정보를 함축하고 있다. 기준은 4세기쯤으로, 4세기까지 가야 계통 목곽묘가 조영되다 5세기이후 중심묘제도 대형 수혈식석곽묘로 바뀌고 가야토기 대신 신라토기가 주로 부장된다. 이 때부터는 부산 일대를 신라 영역으로 판단한다.

여러 시대의 무덤들이 중첩돼 있어 덧널무덤, 돌방무덤, 널무덤 등 다양한 형식의 고대 고분이 존재한다.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이 다수 조사되었다. 위 사진의 고분 위에 보이는 커다란 네모는 무덤이 있던 자리를 표시해놓은 것이다. 봉분이 크게 솟아있지 않아 일반인이 보기에 어디가 무덤인지 구분이 어렵기 때문. 그리고 지금도 많은 무덤들을 발굴하지 않고 후세를 위해 보존처리되어있다. 즉 저 네모 표시는 향후 유적지를 보존하기에 더 나은 발굴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발굴을 미루겠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알쓸신잡에서 김진애가 찾았던 적 있다. 다만 발굴완료 후 덮어둔 표식이기도 하다. 일단 해당지역 마지막 발굴은 2006년이었다.

복천박물관이 고분군 옆에 있다. 부산지역의 시립박물관들 중 부산박물관 다음으로 규모가 크며, 꼭 해당 고분 관련 전시만 하는 게 아니라 고대사 전반적인 전시와 정기적으로 특별전을 연다.

4. 논란

이러한 중요도에도 불구하고, 고분군 근처에 26층 5,000세대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해당 사업은 20년간 답보 상태에 있다가, 2016년의 문화재청에 이어서 2018년 부산시문화재위원회에서 조건부 허가되었다. 하지만 문화재위원회 심의에서 회의록 조작 의혹이 제기돼, 경찰 고발 및 감사원 감사 청구가 이뤄져 중단되고 있는 상황이다. 부산시의 입장은 “심의 중단은 시 재량권 밖. 예정대로 심의 예정”이라는 입장이어서 아파트 개발에 대한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결국 SK아파트가 바로 부근에 조성되면서,부산시와 시의회는 복천동 고분군을 ‘가야고분군‘내에서 누락시키는 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세계유산이 될 수도 있었던 유적이 동네 주민들의 이해관계로 그 기회를 잃은 것이다.2020년 부산일보 기사 2022년 부산일보 기사

5. 외부 링크

6. 사적 제273호

부산 복천동 일대의 구릉 위에 있는 가야 때 무덤들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40여 기의 무덤이 확인되었으나, 대부분의 무덤은 아직도 땅 밑에 남아있다.

무덤의 형태는 땅을 파서 넓은 방을 만들고 나무관을 넣은 덧널무덤(토광목곽묘), 땅속에 네모난 돌로 벽을 쌓고 천장을 덮어 만든 구덩이식 돌방무덤(수혈식석실묘), 땅속에 시체를 바로 묻는 널무덤을 비롯해 여러 가지 형식의 무덤들이 있다. 이 무덤들에는 도굴되지 않은 큰 무덤이 많아 2000점 이상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굽다리접시(고배), 목항아리(장경호), 토제등잔을 비롯한 토기류는 4∼5세기 낙동강 하류지역의 특징적인 토기들이다. 철제 갑옷·투구류도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특히 4호 무덤에서 나온 단갑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갑옷이다. 11호에서 출토된 괘갑은 부속장식까지 완전하게 갖춘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이런 완제품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되는 것이다. 10호 무덤에서 발견된 말갖춤(마구)는 완전히 갖추어진 실전용으로 처음 발견되었다. 이러한 갑옷·투구류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것과 같다.

복천동 무덤에서 보이는 새로운 무덤양식은 무덤의 변천과 흐름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동래복천동고분군 → 부산 복천동 고분군)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7.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