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어진/조선~대한제국
1. 국왕 어진
1.1. 조선 태조1.2. 조선 정종1.3. 조선 태종1.4. 조선 세종1.5. 조선 문종1.6. 조선 단종1.7. 조선 세조1.8. 조선 예종1.9. 조선 덕종(의경세자)1.10. 조선 성종1.11. 연산군1.12. 조선 중종1.13. 조선 인종1.14. 조선 명종1.15. 조선 선조1.16. 광해군1.17. 조선 원종(정원군)1.18. 조선 인조1.19. 조선 효종1.20. 조선 현종1.21. 조선 숙종1.22. 조선 경종1.23. 조선 영조1.24. 조선 장조(사도세자)1.25. 조선 정조1.26. 조선 순조1.27. 조선 문조(익종, 효명세자)1.28. 조선 헌종1.29. 조선 철종1.30. 대한제국 고종1.31. 대한제국 순종
2. 왕후3. 기타 왕족의 그림3.1. 경신공주3.2. 완산부원군3.3. 익안대군3.4. 효령대군3.5. 안평대군3.6. 이원익3.7. 금산군 이성윤3.8. 연령군3.9. 흥선대원군 이하응3.10. 흥친왕 이재면3.11. 영선군 이준용
4. 외척의 초상화5. 신원을 알 수 없는 초상화1. 국왕 어진
1.1. 조선 태조
자세한 내용은 조선태조어진 문서 참고하십시오.1.2. 조선 정종
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데 도움을 준 공신(정사공신)의 초상화를 그릴 때 어진이 같이 제작되었다.중종 35년 10월 10일 기록에서는 화장사에서 가져온 정종의 어진을 선원전에 봉안하고 보니 이전에 있었던 어진과 용모가 달라 해당 어진의 진위여부를 조사하는 일이 있었다.[1] 이 때 이전에 있었던 정종의 어진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중종실록 35년(1540년) 10월 12일자를 보면 정종의 어진이 네 점 있었는데, '용모가 긴 듯하고 수염이 많고 왼쪽 뺨에는 모두 황지(黃痣, 누런 사마귀)가 있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1.3. 조선 태종
태종의 어진은 1402년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데 도움을 준 공신(좌명공신)의 초상화를 그릴 때 같이 제작되었다. 살아있을 당시 태종은 '털끝 하나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논지로 자신의 어진을 없애라고 지시하였지만, 아들인 세종이 차마 그럴 수 없어 보존해두었다고 한다. 이후 세종 때 태조, 태종, 세종, 소헌왕후의 어진을 한꺼번에 새로 그려 선원전에 봉안하였다.선조실록 27년(1594년) 9월 5일자에 보면 어진이 다 삭아서 조각조각 떨어져 그림이 하나도 완전한 것이 없다는 이유로 명종의 어진과 함께 서울 안에 봉안해 두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4. 조선 세종
세종실록 16년(1434년) 4월 15일자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선현(先賢)이 유상(遺像)에 대하여 의논하기를, '어쩌다가 조금이라도 잘못하게 되면 진(眞)이 아니니,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이 오리려 나을 것이다.' 하였으나, 이제 내가 문소전(文昭殿)에 위판(位版)을 배설(排設)하여 선령(先靈)을 봉안(奉安)하고, 그 옛날의 문소전에 봉안하였던 태조(太祖)의 쉬용(晬容)-을 평양(平壤)으로 옮기고자 하여 경 등에게 의논을 하매, 모두 말하기를, '오직 한 벌뿐인 쉬용을 만일 먼 곳에 봉안(奉安)하게 되면 잃어 버리거나 훼손할까 두렵습니다. 만일 잃거나 훼손되면 후신(後臣)들이 어찌 성안(成顔)을 알겠습니까.' 하므로, 내 그 말을 듣고 비로소 깨달았노라. 과연 이 화상(像)이 아니면 후손들이 무엇에 의거하여 선왕의 얼굴을 뵙겠는가. 또 역대(歷代) 제왕(帝王)이 상(像)을 그려서 자손에게 남겨 준 이가 있으니, 나도 또한 진용(眞容)을 그리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화상은 모름지기 나이 젊어서 그려야 하노라."
하니, 모두가 아뢰기를,
"공자와 회암(晦庵)도 모두 유상(遺像)이 있사오니 성상의 하교가 진실로 지당하시옵니다."
하였다.
세종실록 64권, 16년 4월 15일
요약하자면 세종은 조금이라도 다르게 그리면 초상화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그릴 생각이 없었으나, 신하들이 어진이 없으면 후대의 사람들이 선왕의 얼굴을 어떻게 알겠냐는 말에 생각이 바뀌어 그리기로 했다, 그리고 기왕 그릴 거면 젊을 때 그리는 게 낫다고 말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이 기록 직후에는 어진 제작 관련된 기록이 없어 이 직후에 그림을 그렸는지는 의문.하니, 모두가 아뢰기를,
"공자와 회암(晦庵)도 모두 유상(遺像)이 있사오니 성상의 하교가 진실로 지당하시옵니다."
하였다.
세종실록 64권, 16년 4월 15일
확실한 기록은 1443년 태조와 태종, 소헌왕후의 어진을 한꺼번에 그렸다는 기록뿐이다.
세종 대왕의 영정을 강화(江華)에서 모셔다 묘사(廟社) 한 곳에 봉안하였는데,
상이 왕세자 및 뭇 신하를 거느리고 나가 지영(祗迎)하고 사배례를 행하였다.
선조실록 36권, 26년 3월 16일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임진왜란 때까진 남아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병자호란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상이 왕세자 및 뭇 신하를 거느리고 나가 지영(祗迎)하고 사배례를 행하였다.
선조실록 36권, 26년 3월 16일
1.5. 조선 문종
문종 당대에는 어진 제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나, 인조실록에 문종의 어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조실록 13년 5월 14일자를 보면 문종의 어진을 확인했다는 기록이 한 번 나온다. 그러나 그 외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1.6. 조선 단종
강원도 영월군 영모전에 봉안돼있던 단종 승마 영정 | 복원한 승마 영정 |
강원도 영월에서는 단종을 태백신으로 여겨 지금도 추모행사를 벌이고 있는데, 이 근방의 사찰 들이 그 추모제를 열고 있다. 원래 그 전에는 용포를 입으며 단상에 앉은 모습의 단종 영정, 또는 나무인형으로 영모전에 봉안 되어 있었으나, 세월이 흘러 훼손이 심각해졌고, 1927년 영월 군수 이규진이라는 사람이 목상은 불태우고, 불교 탱화기법으로 다시 제작해 만든 민화 형태의 영정이다. 단종을 끝까지 모셨던 충신 추익한이 백마를 탄 단종에게 머루와 달래를 바치는 모습이다.
이 영정은 6.25 전쟁때 영모전[2] 이 폭격을 맞으며 소실이 되었고, 운보 김기창 화백에게 복원을 의뢰하여 다시 만들었다. 지금은 여러곳에서 단종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많아 여러가지 버전이 있다. (3~4개 버전이 있는듯하다.) 현재는 다시 세운 영모전에 붉은 용포 모습의 승마 영정이 봉안 되어있으며 이 영정을 표준삼아 추모제를 연다고 한다.
단종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100호 권오창 화백 작 | 단종 김호종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가 그린 어진 |
1.7. 조선 세조
자세한 내용은 세조(조선)/어진 문서 참고하십시오.1.8. 조선 예종
성종 3년 5월 25일 소헌왕후, 세조, 의경세자의 어진과 함께 제작되었다.1.9. 조선 덕종(의경세자)
성종 3년 5월 25일 소헌왕후, 세조, 예종의 어진과 함께 제작되었다. 이때의 덕종 어진은 추사본으로, 덕종 사후 13년만에 그려진 것이다. 참고로 의경세자는 성종의 아버지인데, 성종이 태어난 지 두 달만에 죽어서 성종은 아버지의 얼굴을 이때 처음 봤다고 한다. 성종은 '내가 화공(畫工)으로 인하여 부왕(父王)의 진면(眞面)을 볼 수 있게 되었다.'며 울었다고 전해진다.[3]1.10. 조선 성종
성종의 어진은 연산 1년 1월 1일에 반영정을 제작하라 명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1.11. 연산군
어진 제작 기록이 없다.1.12. 조선 중종
김안국이 중종 생전에 어진 도사를 권하였지만 중종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중종 사후에 추사되었다. 인종실록 1월 18일자를 보면 두성령 이암 등 당대 유명 화가들을 같이 제작에 참여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말을 탄 영정과 전신이 나온 좌상 두 점이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결과물이 그리 좋지는 않았었는지, 어진이 중종과 닮지 않아 봉안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후 명종 때에도 중종과 닮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온 것을 보면 생각만큼 결과물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임진왜란 시기 선정릉 도굴사건으로 중종의 정릉에 성명불명의 유골이 발견되자 조정에서는 출처불명의 유골이 중종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조정은 생전에 중종을 봤던 사람들을 수소문해 몽타주를 작성했다. 기록에 의하면 중종은 키가 큰 편이였고 얼굴이 좀 얽었으며 보통의 체격이었는데 정릉의 시신은 풍채가 장대하고 키가 포백척으로(150정도)으로 작고, 체격도 다른 편이였다고 한다.
1.13. 조선 인종
본인의 뜻에 따라 생전이나 사후에도 어진이 제작되지 않았다.1.14. 조선 명종
선조 27년 9월 5일에 진양(眞樣)이 희미하며 조각이 떨어져 고찰할 만한 표적이 없다는 이유로 태종의 어진과 함께 서울 안에 봉안해 두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15. 조선 선조
선조의 어진은 기록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조실록 25년 7월 2일자를 보면 (중국에서) '데리고 왔던 화사(畫師)가 어용(御容)을 몰래 그려 가지고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어진이 아래의 어진과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윤탁연이 소장한 선조 어진 |
윤탁연(1538 ~ 1594)이 소장한 선조의 어진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한 점 전해진다. 임진왜란 직후에 그려진 것으로 전립(戰笠)과 융복을 입은 그림이다. 곤룡포가 아닌 것으로 보아 몽진 와중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윤탁연이 직접 그린 것은 아니고, 선조는 평생 어진 그리기를 싫어했다는데 전란의 혼란 와중에 누군가 몰래 선조의 초상화를 그린 것을 발견, 이를 입수하여 비밀리에 보관해 왔다. 윤탁연은 직후 전란의 초기에 사망했다.[4] 그가 보존한 어진은 후손들에 의해 전해져 왔으며 1974년 윤탁연의 후손 가문을 발견한 이은상에 의해 발견되었다. 윤탁연의 후손들도 선조의 초상화가 전한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가, 이은상의 방문으로 실체를 확인하게 되었다.
하지만 감정사들은 전복 차림이 측면의 좌세이고 좋은 필치가 못 되며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점을 들어 이 그림을 선조의 어진으로 확정짓지는 않고 있다. 흉배에 용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선조가 아닐지라도 특정 국왕의 모습을 그린 어진일 가능성은 높지만, 딱히 이 그림에 관한 기록이나 자료가 전무한 편이라 좀 더 전문 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하다. 경우에 따라 밑에 나오는 원종의 어진과 굉장히 닮아서 진짜 선조의 어진이 아닐까 하고 추정만 가능하다. 선조의 어진이 맞다면 광해군과 덕흥대원군의 얼굴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설령 선조가 아니라 해도 다른 조선 역대 왕 중 한 명일 가능성은 매우 높은데, 우선 갓 위에 옥로 장식이나 귀를 뚫은 걸 보아 확실히 조선의 고위층 중 한 명을 묘사하고 있으며, 가슴의 흉배엔 용이 그려져 있는데, 상식적으로 조선에서 흉배에 용을 그려넣을 수 있는 남성은 왕과 세제, 세자, 세손 밖에 없기 때문. (왕 이외의 왕족 중에서 대원군은 거북, 기린 부원군은 두루미, 왕자와 대군은 백택을 흉배에 그려넣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왕이라면 흉배가 원형이어야 하는데 이 그림의 주인공은 신하들이 하는 사각형 흉배를 하고 있는 점이 또 문제다.
이베이에 올라온 선조 추정 어진 모사본 |
원본은 아니고 누군가 20세기경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선조 어진이 . 현재는 판매된 상태. 이 어진은 선조라고 명시되어 있으나, 이 역시 당대에 그려진 실제 어진을 보고 모사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이 어진 역시 원종의 어진과 닮았으니 진짜 선조 어진이 아닐까 하고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원종 어진을 보고 그린 상상화로 추정할 수도 있겠으나, 원종 어진의 주인공이 원종으로 판명된 것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므로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1.16. 광해군
어진 제작 기록이 없다.1.17. 조선 원종(정원군)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의주까지 호송하는데 공이 있는 호성공신이 된 바 있기 때문에 공신상이 같이 그려졌다. 또 광해군 때 임해군의 역모를 제보한 공으로 익사공신에도 오른 바 있어 이 때도 공신상이 그려졌다.우측 부분이 소실된 정원군(원종) 어진 | 좌측 부분이 소실된 원종 어진.[5] |
원종(정원군)의 어진으로 추정되는 어진이 공개되었다. 부산 용두산 대화재 때 살아남은 신원 미상의 어진 4점 중 하나다. 신원 미상의 어진 2점은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불에 타 들어갔기 때문에 오른쪽 윗 부분에 써있는 문구가 타버려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선원전 어진 목록에 원종의 어진이 머리에 쓴 사모와 단령을 입은 차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 어진 양식이 17세기 초상화 양식인 점으로 보아 원종의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되었다. 그리고 2015년 이 어진이 원종(정원군)의 것으로 최종 판명되었다.기사
위의 선조 어진과 함께 인조나 덕흥대원군의 얼굴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그리고 표제만 남은 채 얼굴 부분이 모두 타버린 원종 어진이 한 점 더 존재해서 1870년대에 이모된 형식으로 복원을 진행하였다. 현재 본 어진의 복원본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기사
완전 복원된 정원군(원종) 어진 |
2016년 9월, 원종의 어진이 완전 복원됐다. 복원 과정이 궁금하다면 이 링크를 참고하자.
선원보감에 실린 원종 초상화 |
선원보감의 초상화는 같은 그림으로 보이며 실제 어진과 비교하면 복식은 비슷하지만, 용모는 대충 그렸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엉망이다.
1.18. 조선 인조
어진 제작 기록이 없다.1.19. 조선 효종
어진 제작 기록이 없다.1.20. 조선 현종
어진 제작 기록이 없다.1.21. 조선 숙종
숙종 어진 (추정) | 열성어진에 실린 숙종 초상화 |
일제강점기 당시 2종류의 어진이 원본+이모본으로 전해져 오고 있었으나, 부산 용두산 대화재때 소실되었다. 현재 위의 왼쪽 그림에서 보듯 숙종 어진으로 추정되는 물건이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있는데, 이것이 숙종 어진이 맞다고 해도 얼굴을 포함한 2/3 부분이 타버려 사실상 복원은 불가능하다.
성균관대학교 조선미 교수에 의하면 숙종 어진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용포를 입은 것으로 보아 곤복본 어진이다. 2) 바닥에 용문이 깔려 있는데, 승정원일기 숙종 39년 4월 13일을 보면 이전에는 바닥에 채전[6]을 용문석으로 바꾸자는 기록이 있으므로 적어도 숙종 이후의 어진이다. 3) 용문석의 크기와 문양이 순조 어진에서 철종 어진을 보면 후대로 올수록 작고 정교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용문석의 양식으로 보아 적어도 순조 이전의 어진이다. 4) 정조의 경우 1934년 편찬된 선원전영정수개등록을 보면 이미 이때 익선관본 어진이 없었으므로 아니다. 5) 결국 숙종 아니면 영조인데, 곤룡포의 표현 기법이 18세기 초반에 잠깐 등장했던 기법과 유사하다. (남구만 초상, 김석주 초상 등) 결론적으로 18세기 초에 그려진 숙종의 어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선원보감에는 숙종의 초상화가 실려있지 않아 숙종의 얼굴을 알 길이 완전히 없어졌나 싶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출판된 '열성어진'(列聖御眞)에는 숙종의 모습이 남아있어서 숙종의 대략적인 모습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는 조선조 왕들의 간략화된 어진을 실어놨는데, 태조, 숙종, 영조의 어진의 간략본도 있다. 다만 열성어진에 실린 어진들 자체가 워낙 실제 어진과 동떨어진 그림 수준이기에, 신뢰도는 많이 떨어진다.
1.22. 조선 경종
어진 제작 기록이 없다.1.23. 조선 영조
연잉군 시절 영조 | 조선 영조의 어진[7] |
홍룡포를 입은 영조의 어진은 51세때의 모습으로 1900년(대한제국 광무 4년)에 경운궁 선원전에 불이나 태조, 숙종, 정조, 순조, 문조, 헌종의 어진이 사라지자 고종이 이들 어진을 모사하도록 지시했을 때 같이 제작된 어진으로 조석진(趙錫晉), 채용신 등이 원본을 보면서 그린 이모본(移模本)이다.
전신이 아니고 상반신만 있는 이유는 이 어진의 원본이 진전(眞殿)에 걸렸던 어진이 아니라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 육상궁에 걸렸던 초상화였기 때문이다. 즉 원래 상반신만 있는 그림을 보고 그린 것이라 상반신만 있는 것이다. 이 어진의 원본인 육상궁에 있던 영조의 초상화는 영조의 다른 어진들과 함께 부산 용두산 대화재때 소실됐는데 이 이모본만 유일하게 전혀 훼손되지 않고 살아남았다.[8] 현재 대한민국 보물 제932호이다.
MBC에서 방영했던 사극 '이산'에서 이순재가 영조 역으로 출연했는데, 실제로 위의 어진과 외모가 상당히 닮았다.
전주 어진박물관에서 복원한 영조 전신어진 |
전주 어진박물관에서 위 어진을 바탕으로 한 전신 어진을 만들었다.
열성어진의 영조의 초상 |
열성어진에 실린 영조[9]의 초상은 위의 어진과 매우 다르게 그려졌다. 연잉군 어진이나 고종 때 이모된 어진과는 전혀 다르다. 그나마 눈매가 치켜올라간 것이나 비슷한 정도이다.
다만 영조는 어진 화사를 자주 했었고, 일제강점기까지도 어진이 6축이나 남아 있었으므로 현재 남아있는 2축 외에 다른 어진을 보고 그렸을 확률도 있다. 수염으로 미루어 볼 때 연잉군 시절과 51세때의 어진의 중간에 그려진 어진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다.
2024년 1월경 한 경매 사이트에서 1898년에 그려졌다는 영조 어진이 올라오고 팔린 바가 있었다고 한다. 초상화 속 인물의 생김새가 영조와 유사하긴 하나 진짜 영조의 어진인지는 불명확한 상황. #
1.24. 조선 장조(사도세자)
일성록 정조 20년 1월 24일 기록을 보면 사도세자의 초상화가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1760년 온천에 행차할 때 군복을 입었었는데 이때 그린 영정의 초본과 모사본이 의주에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 자신이 원행을 갈 때는 반드시 군복을 입는데, 이는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함이라고 덧붙였다.)이후 경모궁에 면복본 하나, 현륭원에 군복본 하나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둘 다 전해지지 않는다.
사도세자의 초상화 |
당대에 그려진 초상화가 아니다. 다만 사당에 모셔진 신격화시킨 초상화인 것으로 추정한다.
1.25. 조선 정조
자세한 내용은 정조 어진 문서 참고하십시오.1.26. 조선 순조
순조 어진 |
확대모습 |
그동안 대중들에게 순조의 어진은 원유관본만 알려졌지만 2016년에 국립고궁박물관이 수장고를 잠시 공개할 때 작게 사진으로나마 나왔었다. 다만 순조 추정 어진이라 학계의 연구 결과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는 것이라 참고만 하는 것이 좋을듯 하다. 그렇지만 순조의 어진일 가능성이 매우 높긴 하다. 어진의 용안 중 입술만 남은 상태이며 용보는 정면상이다.
선원보감에 실린 순조 초상화 |
1.27. 조선 문조(익종, 효명세자)
문조 어진 |
확대모습 |
선원보감에 실린 효명세자 초상화 |
선원보감에 실린 효명세자의 초상화가 20대 초반에 죽은 세자의 모습 치고는 너무 나이가 들어 보이게 묘사되었다. 그나마 눈썹 각도가 남은 부분과 거의 같긴 한다.
1.28. 조선 헌종
위키백과가 추정한 헌종 어진 |
선원보감에 실린 헌종 초상화 |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매우 미남이었다고 한다. 잘생긴 외모 때문인지 궁녀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궁녀들과 놀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나이로 요절해버린 데다 어진마저 남아 있지 않기에 미남이었다는 헌종의 얼굴은 선원보감에 남은 간략한 초상화로 추측해 볼 수 밖에 없다.[10] 하지만 아버지인 효명세자처럼 20대에 요절한 왕치고는 너무 나이가 들어 보인다.
별개로 맨 위의 어진을 위키백과에서는 신원 미상의 어진을 헌종의 어진으로 소개했는데, 익선관이 조선 후기의 긴 모양인 것과 어린 외모로 묘사한 것을 보면 그럴 듯 해보이지만 어진의 용보가 조선 전기의 형태와 유사한 점을 고려하면 정확히 헌종의 어진인지는 알 수 없다.
성균관대학교의 조선미 교수에 의하면 이 어진은 순종의 1902년 익선관본으로 추정하는데, 바닥에 깔린 돗자리의 형태가 흥선대원군 초상에 있는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고, 돗자리의 높이가 낮은 걸로 보아 조선 말기의 양식인데, 조선 말기라면 황태자 신분인 순종의 그림이 아닐까 한 추정이다.[11]
다만 순종의 경우 쌍꺼풀이 상당히 뚜렷한데 반해 이 어진에서는 쌍꺼풀이 뚜렷하지 않아 순종의 어진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추정 어진에 남은 귀의 모양, 크기가 순종 어진이 아니라 선원보감 헌종 어진과 유사한 것을 보면 순종보다는 헌종의 어진일 가능성이 더 높다.
1.29. 조선 철종
조선 철종의 어진 | 복원본 |
2013년 재복원한 철종 어진 |
결국은 2013년에 전주 어진 박물관에서 철종 어진을 재복원을 하였다
조선 25대 임금 철종의 구군복 어진 |
면복본 | 원유관본 |
선원보감에 실린 철종 초상화 |
정원군, 영조와 함께 선원보감에 실린 초상화와 실제 어진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경우이기도 한데 정말 많이 다르게 생겼다. 다만 코 모양이나 수염은 간략한 묘사나마 모양이 어느 정도 잡혀있으므로 여타 어진 복원 시 참고해 볼만 할 듯하다.
1.30. 대한제국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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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종 어진 |
고종의 어진은 1872년 군복대소본, 익선관본, 복건본, 면복본등 모두 5본이 도사했는데 그 중 2본은 전해지지 않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1910년 채용신이 그린 고종 어진의 모사본 및 오른쪽 부분이 불탄 1872년에 제작된 20세의 고종 추정 어진뿐이다. 또한 위 사진 오른쪽 아래에 있는 통천관 강사포본의 경우는 배경에 휘장을 치는 등 일본식 화법이 가미되어 있는게 특징이다. 역대 제왕 중 유일하게 외국인이 그린 어진이 있다. 휘베르트 보스(Hubert Vos, 1855~1935)라는 네덜란드 화가가 그린 것.# 물론 고종의 경우는 비교적 최근의 왕이고 개인적으로도 사진 찍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사진 자료가 풍부하다.
1.31. 대한제국 순종
대한제국 순종 어진[13] | 순종 어진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렸다. |
순종 어진(1916년 作) 당시 사진 | 이당 김은호 화백의 순종 어진 화사 |
절반 소실된 어진(1928년 作) | 2014년 복원한 황룡포본 순종 어진# |
그림의 표제가 적혀있던 오른쪽 부분이 탔지만, 순종 생전에 촬영했던 제국 군복 사진을 토대로 김은호 화백이 그렸던 어진과 같고, 고종과 더불어 유일한 황룡포를 입은 모습인 점으로 알 수 있었다.
현 공개된 순종 어진은 김은호 화백이 1928년 서울 영희전에서 제작 한 것이고, 위의 흑백 사진에 순종 어진 홍룡포본은 이왕직의 요청으로 1916년 제작되었다.
2. 왕후
조선 초기만 해도 왕후의 초상화 역시 그렸다는 기록이 확인되지만, 임진왜란 이후로 초상에 대한 기록이나 제작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내려오지 않는다. 숙종실록 21년 7월 27일을 보면 왕후의 초상화를 그리자고 숙종이 제안하였으나 승정원에서 ' 종신(宗臣)도 아니고 척신(戚臣)도 아니면서 그림 그리는 일을 집행하여 지극히 엄숙하고 지극히 경건(敬虔)한 곳에 가깝게 하는 것은 한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그 예(禮)가 아님'을 주장하며 반대된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는 남녀칠세부동석 등의 이유로 왕후의 초상화가 그려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2.1. 신의왕후
신의왕후는 고려시대 사망하였지만 조선이 건국된 이후 추사되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다수 있다.2.2. 신덕왕후
1398년 신덕왕후의 어진이 봉안된 기록이 있다.2.3. 정안왕후
세종실록 2년 5월 11일자에 어진을 제사한 기록과 중종실록에 정안왕후의 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2.4. 원경왕후
생전에는 제작되지 못했으나 아들 세종이 주장하여 초상화가 추사되었다.2.5. 소헌왕후
생전인 1443년 초상화가 제작되었으며, 이후 모사 기록과 이안 기록이 있다.2.6. 명성황후
2000년 권오창 화백이 그린 명성황후 어진으로 운현궁에 있다. 이승만의 독립정신에 실린 사진을 바탕으로 하여 그렸다.
3. 기타 왕족의 그림
3.1. 경신공주
3.2. 완산부원군
3.3. 익안대군
익안대군 |
전주 이씨 문중에서 소유하고 있었으나, 2000년 1월 도난을 당했다가 그 해 4월 회수에 성공하여 보관하던 중 2009년 재도난을 당하여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진범은 잡혔지만 해외에 반출을 해버려 안타깝지만 돌아오기가 어려울 듯 하였는데...
문화재청의 끈질긴 노력으로 2018년 다시 회수에 성공했다!기사
3.4. 효령대군
효령대군 |
윗형인 양녕대군, 효령대군, 동생 세종대왕 3형제의 얼굴이 무척 닮아서 양녕대군이 비행을 일삼을 때 자신을 효령이라고 사칭했다는 기록도 있고, 3형제의 동생인 성녕대군이 죽자 아버지 태종이 "성녕은 내 아들들 중 유일하게 얼굴이 다른 아이였다"고 회상하는 기록이 있어 이 그림은 태종과 세종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초상화이기도 하다.
3.5. 안평대군
신숙주의 비해당진찬 안평대군초상(보한재집 권 16)을 보면 안평대군의 초상화를 안견이 그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초상화가 전해져 내려오지는 않는다.3.6. 이원익
이원익 |
태종 이방원의 5대손으로 왕실 방계로는 비교적 가까운 편이다.
3.7. 금산군 이성윤
이미지 링크성종의 9번째 서자 익양군 이회(益陽君 李懷)의 증손자 금산군 이성윤(錦山君 李誠胤 1570∼1620)의 초상화이다. 익양군 이회의 아들이자 청원도정 이간의 아들로, 촌수로는 성종의 현손이다. 광해군과 8촌 형제 간이 된다.
그는 성종의 현손으로, 종친 작위가 부여되는 비교적 가까운 방계 왕족이었다.
3.8. 연령군
아버지 숙종이 8개월 동안 병상에 있을 때 곁에서 간호해준 영조와 연령군의 초상을 제작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초상화가 전해 내려오지는 않는다.3.9. 흥선대원군 이하응
와룡관학창의본, 복건심의본, 금관조복본, 흑건청포본, 흑단령포본 보물 제 1499호 이하응 초상 |
5점의 초상 모두 복식이 다르며 의관과 기물이 매우 화려하고 성대할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 이한철[14]이 그려 수준 높은 묘사력과 화격을 보여주는 최상급의 걸작들이다. 더구나 뛰어난 필력을 자랑했던 이하응의 친필 표제(表題)와 영정함 안에 써넣은 별폭의 홍지표제(紅紙表題), 궁중 표구장의 족자표장(簇子表粧), 유소(流蘇), 영정보, 향낭, 영정함, 영정함보 등이 고스란히 전하고 있어 조선 말기 왕실의 아름답고 격조 있는 초상화 문화를 종합적으로 엿볼 수 있다. 5점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미지 링크
권오창 화백이 복원한 대원군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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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초상화 초안, 작자미상
3.10. 흥친왕 이재면
완흥군으로도 불리며 흥선대원군의 맏아들이자 고종의 친형이다.
화가는 철종, 흥선대원군 등을 그렸던 이한철의 작품이다.
부산 용두산 대화재에서 건져낸 공신화첩에서도 흥친왕의 초상화가 전해지며 이한철의 작품과 비교해보면 화풍과 조금 다르다.
3.11. 영선군 이준용
흥선대원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조카이며 흥친왕의 아들, 순종의 사촌형이 된다.
4. 외척의 초상화
4.1. 신풍부원군 장유
장유의 초상화 |
효종의 장인이자 인선왕후의 아버지, 현종의 외할아버지이다.
4.2. 청풍부원군 김우명
김우명의 초상화 |
현종의 장인이자 명성왕후[15]의 아버지, 숙종의 외할아버지이다.
4.3. 영풍부원군 홍봉한
홍봉한의 초상화 |
4.4. 영안부원군 김조순
젊은 시절의 김조순 초상 | 노년의 김조순 초상 |
순조의 장인이자 순원왕후의 아버지, 효명세자의 외할아버지이다. 효명세자는 헌종의 아버지이므로 외증조할아버지인 셈.
참고로 가계를 거슬러 보면 김조순의 할머니 한산 이씨가 혜경궁 홍씨(정조의 어머니)의 이모이므로, 혜경궁 홍씨의 5촌 조카이자 정조의 6촌이기도 하다.
4.5. 풍은부원군 조만영
조만영의 초상화 |
효명세자의 장인이자 신정왕후 조씨의 아버지, 헌종의 외할아버지이다. 참고로 아래의 신정왕후로 추정되는 초상화와 눈매가 많이 닮았다.
5. 신원을 알 수 없는 초상화
5.1. 신정왕후(추정)
전(傳) 신정왕후 초상화 |
[1] 결국 중종은 화장사에서 가져온 어진이 가짜라 판단해 해당 어진을 다시 화장사에 돌려 놓으라 지시했다.[2] 단종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강원도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어있다.[3] 명종실록 3년 10월 10일[4] 또다른 얘기로는, 피난 직후 선조가 분조를 맡게된 임해군한테 자신을 그린 어진을 주면서 아비를 잊지 말라고 당부를 했는데, 임해군은 행패를 부리다가 왜적과 손잡은 국경인 일당에 붙잡혔고 이 어진은 임해군을 호종했던 윤탁연이 가까스로 챙겨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5] 1872년 모사된 초상화이다.[6] 중국에서 유래한, 기하학적 문양이 반복된 바닥에 까는 것[7] 1900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모본 영조 어진이 있고https://blog.naver.com/mygrandeurxg/221249252074,일본에 한골동품가게에 영조어진 이모본이 있었다https://m.youtube.com/watch?v=KKoZ3P-ZWAg[8] 왼쪽 끄트머리가 살짝 불에 타긴 했다.[9] 영종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영조의 원래 묘호는 영종이었다. 후대에 영조로 바뀐 것. 정조 역시 원래 묘호는 정종이었으나 후대에 정조로 바뀌었다.[10] 그래도 이마 쪽을 자세히 보면 남아있는 왼쪽 눈을 볼 수 있다.[11] 또한 용보의 모양도 이전의 원형이 아닌 고종, 순종의 어진에서 볼수 있는 물결 외곽 모양의 용보이다.[12] 임천 백씨로 현종, 숙종 때 어의였던 백광현의 종잉손자이자, 백광현의 형 백광찬의 직계후손(잉손)이다.[13]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14] 고종 어진 외에도 흥친왕 이재면의 초상도 그렸다.[15] 현종의 중궁으로 명성황후와 다르다[16] 서형이 한 명 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3남.